이안 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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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n Gillan'''
영국의 보컬리스트. 1945년 8월 19일~
1. 개요
2. 생애
3. 관련 항목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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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록 시대 최고의 록 보컬리스트 중 한명'''
딥 퍼플하면 데이비드 커버데일보다 먼저 떠오르는 보컬리스트.
1969년 딥 퍼플의 리치 블랙모어레드 제플린로버트 플랜트의 노래를 듣고 딥 퍼플에서도 그 처럼 강렬하게 외쳐대는(screaming) 보컬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이가 바로 이안 길런이었다. 외모도 선이 굵은 상남자 스타일의 미남으로, 남성적 매력이 물씬 풍기는 스트레이트한 강력 성대를 가지고 있었다.
진성으로 '''0옥타브 레(D2)'''에서 '''3옥타브 시(B5)'''이라는 무지막지한 음역대[1]와 야성미 넘치는 음색, 다채로운 테크닉으로 무장한 강렬한 개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보컬리스트다. 지금까지도 하드록 헤비메탈 보컬의 교과서로 불리우며, 그 특유의 미칠듯한 고음의 샤우팅과 무지막지한 파워를 가진 일명 "스크리밍 창법"은 이후 아이언 메이든브루스 디킨슨을 비롯한 여러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들의 창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팔세토 테크닉, 스크래치 뿐만 아니라 때로는 오페라틱 창법을 구사하기도 하며[2] 이것은 1970년 딥 퍼플 가입과 동시에 녹음된 Jesus Christ Superstar 초판 레코딩에 예수역으로, 또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 앨범에서 들을수 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열렸던 루치아노 파바로티 와의 협연에서만 해도 여전히 그 능숙함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전성기였던 1970년대 초반에는 음역대와 테크닉을 모두 갖춘 걸출한 보컬리스트였다.
딥 퍼플 탈퇴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밴드를 결성했었고 한때는 블랙 사바스에 가입하기도 했고 1984년 딥 퍼플 재결성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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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나 강렬했던 딥 퍼플 시절의 음악에 비해 그 후의 활동은 그 명성에 못 미친다는 것이 아쉬운 면이다. 전성기 시절 그보다 한수 아래라고 평가되던 오지 오스본 이나 로니 제임스 디오 그리고 딥 퍼플 시절 그의 후임자였던 데이빗 커버데일 등은 모두 밴드 탈퇴후 자신의 밴드로 독자적인 명성을 얻었고, 실력도 환갑이 넘은 지금 젊을 시절 때 보다 훤씬 좋다. 길런의 독자적인 활동은 큰 성공이라고 말하기엔 상당히 부족한것이 사실이다. 길런 스스로도 '나는 딥 퍼플에서 너무 빨리 소진 되었다' 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또한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했던 로니 제임스 디오나, 시간이 갈수록 가창력이 늘어난 데이빗 커버데일에 비해서 워낙에 에너지와 성대의 소모가 큰 테크닉[3]을 난사하고 다니며 좋지 못한 습관들의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이기에 그의 보컬 실력이 70년대 중반 이후로 계속 퇴보해 온 것도 사실이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특유의 스크리밍 창법을 구사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노화가 계속 진행되면서 이젠 자랑거리였던 스크리밍 조차 아예 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샤우팅은 커녕, 딥 퍼플 곡 중 쉬운 축에 속하는 Smoke on the Water 조차도 제대로 소화 못하고 헥헥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사 까먹고 애드리브로 대충 때우는데도 박자는 정확했던 20대 시절과는 다르게 박자가 밀리는 현상도 생기고, 오페라 곡도 소화했을 정도로 숙련되었던 발성은 어디가고 이젠 목으로 쥐어짜며 노래하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 때문에 ‘귀곡성’이라 불릴 정도로 전설적인 샤우팅과 파워, 리듬감을 구사하던 그의 리즈시절을 기억하는 수많은 팬들이 굉장히 마음 아파하고 있다.[4]
하지만 팬들의 이러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안 자신은 워낙에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이제는 당당히 종이에 적힌 가사를 펼쳐놓고 부른다.
하지만 골수팬들은 이언의 나이를 생각할때 이해 하는 편이고 그나마 그의 매력적인 음색은 거의 변하지 않은것 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긴다.
이언 길런이 눈에 띄게 역량이 너무 빠르게 떨어진 것 때문에 80년대에 딥 퍼플의 재결합 때 리치 블랙모어와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사실 역량 저하에는 보컬리스트치곤 자기 관리가 잘 안된 부분도 있는데 바로 흡연이다(...) 생각보다 상당한 골초고 딥 퍼플 재결합 기자회견 때도 계속 담배를 피우고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70년대의 라이벌인 로버트 플랜트 또한 레드 제플린 이후 미적지근한 솔로활동을 해왔다는 점과 흡사한 점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이안 길런이나 로버트 플랜트 두 명 모두 당대의 명 그룹 딥 퍼플 과 레드 제플린 에서의 활약이 너무나 대단했기에, 상대적으로 그 후의 활동이 더욱 미약하게 느껴질수도 있다.[5]
어찌됐든 1970년부터 73년까지 만 4년여 기간 딥 퍼플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그의 보컬만으로도 그가 록 음악계에 끼친 영향력은 엄청난것이었고, 현재까지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보컬리스트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2. 생애


1945년 8월 19일 영국의 미들섹스 주의 혼슬로우에서 태어난 그는 60년대 대부분을 문샤이너스(Moonshiners), 자벨린스(Javelins), 에피소드6(Episode6) 등을 비롯한 수많은 록밴드에서 활동하면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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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식스 시절의 길런 뒷줄 맨 왼쪽. 가운데 여자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은 로저 글로버
69년 당시까지 메인스트림 록밴드로 명성을 날리던 딥 퍼플에 길런이 영입되면서 딥 퍼플은 본격 하드록으로의 전향을 꾀했다. 그때부터 딥 퍼플은 70년대 하드록 계의 거목이 되었으며 [Deep Purple in Rock], [Machine Head], [Made in Japan]같은 앨범은 헤비메탈의 교과서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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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딥 퍼플을 탈퇴한 뒤 75년 쿼터매스와 락시뮤직을 거친 베이시스트 존 구스타프슨 과 기타리스트 레이 페닉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을 딴 Ian Gillan Band 를 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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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페닉과 이안 길런
그 이듬해 첫 앨범인 [Child in Time]을 발매했는데, 앨범 명 처럼 딥 퍼플 시절의 곡 Child In Time 이 리메이크 되었다는것 외에는 기존의 하드록이 아닌 재즈록 퓨전 사운드를 선보였다. 명 키보디스트 콜린 타운즈가 참여한 77년 발표된 두번째 앨범 Clear Air Turbulence 와 세번째 앨범 Scarabus 는 재즈록을 전면에 내세운 앨범으로 멤버들의 수준 높은 연주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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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본 부도칸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고, 이때의 실황은 Live At The Budokan 이라는 라이브 앨범으로 기록 되었고, 자신의 곡 과 딥 퍼플 시절의 곡을 절반씩 담고 있다.
1978년 이안 길런은 자신의 밴드의 재즈록 퓨전 스타일이 대중적으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판단을 하고, 딥 퍼플 출신 아니랄까봐 키보디스트 콜린 타운즈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을 몽땅 교체하고 밴드명도 Ian Gillan Band 에서 간단하게 Gillan 으로 바꾸고 다시 하드록 헤비메탈 계열의 음악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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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밴드 Gillan의 첫 데뷔 앨범 'Gillan' 이 발표되었고, 이듬해인 1979년 기타리스트를 Steve Byrd에서 Bernie Torme[6] 로 교체하고 발표한
두번째 앨범 'Mr. Universe' 가 히트를 치게 된다.
1979년 크리스마스에 딥 퍼플 시절의 동료 리치 블랙모어가 그를 찾아와 자신의 밴드 레인보우 에 가입할것을 권하나,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 하길 원했던 이안 길런은 이를 거절한다. 하지만 그 둘은 그 후 마키 클럽에서 3일 밤동안 잼을 하게 되고 이것은 1973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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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런 밴드의 무대에 함께 한 리치 블랙모어
이후 Glory Roads 와 Future Shock 의 앨범들이 연달아 성공하면서 전성기를 맞지만 Bernie Torme가 탈퇴하면서 밴드는 하락세를 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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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후임으로 후에 아이안 메이든에 가입하게 되는 야닉 거스가 뽑혔고 두장의 앨범을 더 발표한다. 1982년 가을 Magic 앨범이 발표 되었으나 전 같은 반응은 오지 않았고, 그리고 1983년 어느날 이안길런은 나머지 멤버들에게 성대에 이상이 생겨 수술이 필요하다고 통보한다. 나머지 멤버들은 그의 쾌유를 빌며 휴식기에 들어가는데... 하지만 그는 불과 몇달뒤 그는 블랙 사바스에 가입해 [Born Again] 앨범을 발표한다.
Gillan 의 베이시스트이자 공동 작곡가였던 John Macoy는 후에 인터뷰에서 자신을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은, 길런이 블랙 사바스에 가입했다는 소식을 뉴스로 듣고 나서야 자신들의 밴드가 해체 되었다는걸 깨달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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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길런의 블랙 사바스 가입은 딥 퍼플과 블랙 사바스의 만남으로 대단한 화제였지만, 단 한장의 앨범과 투어로 끝이 났다. 이 거물 보컬리스트는 블랙 사바스의 리더 토니 아이오미 입장에서는 영입했다기 보다는 모셔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고, 덕분에 [Born Again] 앨범은 기존의 블랙 사바스의 스타일과는 너무나 다른 스타일을 담고 있다.
앨범 발표 후 진행된 순회공연에서도 언제나 앵콜로는 딥 퍼플 시절의 'Smoke On The Water' 가 연주되었다. 여담이지만 이안 길런은 'Smoke On The Water'의 가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라이브 때 마다 가사를 자주 바꿔 불렀는데, 이는 딥 퍼플 시절 부터 늘상 있어 왔던 일이었다. 이에 대해 리치 블랙모어는 인터뷰에서 대놓고 "그 놈이 'Smoke On The Water'의 가사를 틀릴때 마다 기타로 머리를 후려 처버리고 싶었다." 라는 말까지 한적이 있으며, 이안이 가사를 틀릴때 마다 존 로드는 "이안 가사가 틀렸어." 라고 그냥 웃어 넘겼지만, 리치는 이안에게 험한 쌍욕을 퍼부었고, 이는 이안과 리치의 사이가 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번에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 길런은 블랙사바스 로서의 활동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이안 길런을 영입할 때 단 한장의 앨범으로 끝낼 계획이 아니었던 블랙사바스 입장에서는 황당한 일이었지만 결국 그를 놓아줄수 밖에 없었다. 1984년 딥 퍼플이 재결성 되었기 때문이다.
이안 길런은 그때부터 2019년 현재까지 딥 퍼플 의 보컬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중간에 다시 한번 탈퇴했다가 재가입했지만 이제는 리치 블랙모어 도 없고 존 로드 도 없는 딥 퍼플 에서 명실 상부한 리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제 딥 퍼플은 완전히 그의 밴드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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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앨범도 여러번 발표했는데 가장 최근작은 2009년에 발표한 [One Eye to Morocco] 다. 2007년 부터는 딥 퍼플 활동 외에 오케스트라와 함께 개인 투어를 돌고 있다.
영국인 답게 축구와 크리켓을 좋아하며, 어떤 막장팀의 서포터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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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에 현 부인인 브론과의 사이에서 딸 그레이스를 낳았고, 그레이스는 Papa Le Gál 라는 밴드에서 보컬로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안이 돈 에일리 밴드와 함께한 2016년 11월 동유럽 투어에 그레이스와 Papa Le Gál 이 참여하여, 부녀가 함께 공연을 하였다.
여담이지만 상상플러스에서 배철수가 나왔을때 어떤분이 이안 길런 이 한국분 이연길이냐고 애드립을 친적이있다.

3. 관련 항목


  • 겟세마네#s-2 :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가장 어려운 삽입곡으로 꼽히는 노래로, 작곡가인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르게 한 사람이 이안 길런이다. 그런데 악보에 '예수의 애드립으로 채워라'라고 적힌 부분을 이안 길런이 최초로 3옥타브 솔로 그냥 내질러버려 이 곡에 유명세 비스무리한 악명이 생겼고 이후 이 부분에서 고음을 내지르는 게 공식처럼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이 뮤지컬에서 예수 역의 배우들은 이 부분 때문에 매우 고생한다는 후문이(...)

[1] 가성 포함하면 '''4옥타브 레(D6)'''까지 올라갔다.[2] 이는 오페라 가수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3] child in time 라이브와 space truckin’, the temple 등 리즈시절 곡들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그 시절의 이안 길런은 G5~B5에 해당하는 초고음의 샤우팅을 말그대로 난사하고 다녔다. 그것도 스크래치까지 걸면서; 한창 날릴땐 가사 까먹은 부분을 A5 이상의 샤우팅으로 대충 때우는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4] 그의 최근 라이브 영상들이 올려진 유튜브엔 ‘made in japan 앨범의 그 괴물 보컬은 어디로 갔나?’, ‘내가 아는 그 이안 길런은 이제 없다’ 등 그의 노화한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팬들의 댓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5] 그나마 로버트 플랜트의 경우엔 기량 저하가 심하게 진행되던 시절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관리를 해 남은 기량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지금도 아주 가끔 젊은 시절의 고음 발성을 애드리브로 보여주기도 할 정도. 솔로 가수로서도 레드 제플린 시절에 못 미칠 뿐이지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괜찮은 평가를 받은 수작 앨범을 여러 장 발표하며 그래미 상까지 탄 바 있다.[6] 훗날 랜디 로즈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오지 오스본의 기타리스트로 잠깐동안 활동하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