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펼치기 · 접기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image]
'''이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VLADIMIR HOROWITZ
'''
'''분야'''
'''음악'''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ffd700 위치}}}'''
'''}}}#ffd700 1680 Vine Street}}}'''

[image]
'''Vladimir Horowitz'''
'''본명'''
블라디미르 사모일로비치 호로비츠
Vladimir Samoylovych Horowitz[1]
'''출생'''
1903년 10월 1일
(러시아 제국 키예프)
'''사망'''
1989년 11월 5일
(미국 뉴욕)
'''국적'''
미국 [image]
1. 소개
2. 생애
3. 연주 성향
3.1. 1920~1950년대
3.2. 1960년대~1970년대
3.3. 1980년대
4. 이모저모
5. 어록

[clearfix]

1. 소개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미국계 피아니스트. 1903년생으로 우크라이나 국적이었으나 1920년대에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

2. 생애


유대계인 사무일 호로비츠와 소피아 보딕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여 6살 때부터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첫 스승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소피아였고, 세르게이 타르놉스키 아래에서 제일 오래 공부하였다. 그 결과, 키예프 음악원에 겨우 9세에 입학. 삼촌과의 연을 통해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앞에서 연주하고 재능있다는 평가를 들은 적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 사사하였는데, 이 때 대부분의 기교나 스타일은 완성기에 접어들어, 블루멘펠트는 "피아노에 관해서는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서유럽으로 떠날 때 블루멘펠트는 "너는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어떤 스승도 모시지 말라"고 했다(!). 다만 꼭 찾는다면 베를린에 있는 페루초 부소니를 찾아가라고 했다.[2]
본래 작곡가가 되고 싶어 했다지만 이후 러시아 혁명 때문에 집안이 쫄딱 망하면서[3] 생계를 위해 피아니스트로서, 소년가장으로 데뷔하게 된다. 소년 가장이라고 하지만, 이 때 양친은 멀쩡히 생존. 호로비츠는 훗날 이 시절에 무슨 정신으로 콘서트 준비를 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회고했다. 당시 준비한 프로그램은 총 열 개. 두 시간 길이 기준이다. 2년간 수십번의 공연을 했는데 (페트로그라드에서만 23회), 당시 러시아 내전 직후의 국내 사정 때문에 공연비를 자주 빵, 초콜릿, 버터 등으로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러시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중, 본격적으로 서방 세계에 이름을 알린 것은 1925년베를린에서 열린 공연이었다. 자기 이름 걸고 준비한 무대도 아니고, 그곳에서 갑작스레 병이 난 피아니스트 함부르크의 대타로 연주회 거의 직전에 준비하여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고 대단히 호평받았다. 호로비츠가 첫 카텐차를 시작하자 지휘자였던 유겐 팝스트는 그 힘에 너무나 놀라서 자신의 귀를 믿지 못해 연주 도중임을 잊은 채 그의 손을 보러 지휘대에서 내려왔다고. 이 예기치 않은 공연 이후로 호로비츠는 즉각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차례로 데뷔하고 단단히 이름을 알리게 된다.
당시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그가 구현해 낸 테크닉을 손모양만 따졌을 땐 도저히 이해하질 못하다시피 했다. 이유는 호로비츠의 연주 시 손모양은 당대뿐만 아니라 역대급을 통틀어 거의 모든 피아니스트들과 반대되는 연주법이었기 때문, 일반적인 주법은 손가락과 손, 팔굽 등에 힘이나 압력을 조절해 치는 방법인데 호로비츠는 손가락을 튕겨서 치는 방법이었다. 이런 손모양을 사용하는 피아니스트는 호로비츠의 그 손모양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뤄진 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조차 호로비츠 외엔 시도한 사람이 별로 없다. 게다가 그런 튕겨 치는 주법으로 극찬을 받는 톤 하며, 완벽한 레가토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때리는 소리까지 나지 않게 한다는 건 대단한 능력인 셈.
이후 미국 데뷔를 하고 우상이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과 만나면서 음악적으로 한층 성숙하게 된다. 1930년대에는 음악적 능력이 있던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 토스카니니 호로비츠'''와 결혼하고 딸 소냐를 얻기도 했다.[4]
이후 연주를 이어가던 그는 과도한 스케줄과 평생 가는 우울증 때문에 콘서트를 중간중간 쉬곤 했었다. 여기서 특히 1953년부터 1965년까지 12년간 한 번도 콘서트를 열지 않은 최장 기간의 은퇴가 있기도 했다. 첫 2년간은 집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피아노 연주 자체를 포기하려고도 했었다고. 그래도 RCA에서 음반 제작은 비교적 꾸준히 했고, 이는 아내 완다의 도움과 함께 그가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 카네기 홀에서의 복귀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1965년 5월에 카네기 홀에서 열린 복귀 리사이틀은 20세기 클래식 음악 역사에 길이 남는 이벤트였다. 이틀 전부터 카네기홀 안에 있는 매표소에서 서쪽 57번가로 이어져 6번 도로 모퉁이로 내려가서 모퉁이를 돌아 다음 블록까지 줄을 서 있었다고 한다. 완다의 회고에 따르면 아예 매트리스를 들고 와 잠을 지새운 사람들도 있었다고(...) 호로비츠는 표를 사려는 이들을 위해 도넛과 커피를 보내줬다고 한다. 표는 인터넷 예매 등이 없던 당시로써는 매우 빠른 시간인 2시간만에 매진돼버렸다.
이후 연주 경력에 별다른 차질 없이 콘서트를 많든 적든 꾸준히 열었었다. 1983년 의사가 처방한 항우울제로 인해 심각한 연주상의 문제를 겪어 잠깐 쉬긴 했지만, 2년만에 화려하게 복귀해 최고로 무르익은 노장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하기도 했다. 쉬면서 제자들을 받을 나이인 80세 이후에도 음반사와 전속계약까지 맺어가며 녹음활동 또한 계속 이루어졌다. 마지막 연주 여행은 1986년~1987년에 있었으며 마지막 리사이틀은 1987년 함부르크에서 있었다. 그 이후로도 녹음 활동을 계속하였고, 1989년에 페라이어 부부의 저녁약속을 앞두고 아내 완다와 이야기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음반은 RCA, 소니도이치 그라모폰 등에서 나와 있다. RCA의 녹음들은 주로 20~50년대, 그리고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소니(원래 CBS)는 60년대 초반~70년대 초반, DG(도이치 그라모폰)에서는 1985년부터의 극후기 레코딩이다. 그의 마지막 녹음은 소니에서 나왔다. DG에서는 이 거장의 심기를 맞추기 위해서 오랫동안 같이 작업했던 사람을 고용해서 녹음을 했는데, 호로비츠 사후에 이 사람이 소니로 회사를 옮길때 이 녹음까지 같이 가져갔기 때문.
RCA는 초기여서 음질이 좋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호로비츠가 RCA의 음질과 악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기록도 꽤 있다. 소니는 스테레오 시절 이후라 꽤 괜찮은 편이다. DG 판은 정말정말 손쉽게 구할 수 있는데 모스크바 실황연주와 그 이후의 음반들로서 전성기의 기교보단 노장으로서의 훌륭한 통찰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특히 모스크바 연주에 모스크바 대학의 한 교수는 '그의 연주는 단단하고 투명한 다이아몬드 같았다.'라고 평했다.

3. 연주 성향


호로비츠의 트레이드 마크는 크게 세가지로 알려져 있다: 가장 난해한 패시지를 장난처럼 가볍고 깔끔하게 넘기는 테크닉, 십여개 단위로 쪼갠듯한 셈여림 조절, 그리고 천둥같은 포르티시모. 숙련된 거장 피아니스트들도 힘들어하는 패시지들을 페달없이 여유있게 스타카토로(!) 통통 튀어 넘기는 걸 보면 정말 피아노를 가지고 노는 듯한 느낌을 준다.
20세기의 뛰어난 피아니스트들 중 한 명인 호로비츠는 기교와 표현력 모두 균형을 잃지 않는 연주를 보여준다. 그는 작곡을 "해석"한다기 보다는 스스로의 색채를 입히는 연주자다. 개성이 너무 강해서 그가 친 모든 곡들은 마치 도장을 찍은듯이 호로비츠라는 걸 알기가 쉽다. 다만 그의 손에 거치는 모든 곡들에 그 특유의 다이내믹과 페달 사용법이 묻기 때문에 원작자의 의도에 충실해야하는 몇몇 작곡의 연주는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그의 쇼팽이 대표적인 예시. 절제미와 페달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현대의 쇼팽 해석과는 다른, 페달없이 메마른 사운드가 이곳저곳에서 튀어나온다. 물론 뛰어난 테크닉과 강렬한 색채 덕분에 "호로비츠의 연주"로서 들을 가치는 있다고 평가받는다. 또 이렇게 음색을 자유자재로 다룬 그답게 모든 콘서트에서 자신만의 피아노와 전속 피아노를 가지고 다녔다. 첫 서방 데뷔때 스타인웨이를 고른 이후로 특별제작된 스타인웨이만을 썼다.
러시아의 대표적이라 할 만한 피아노 음악 작곡가들, 즉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를 레코딩한 호로비츠의 연주는 지금까지도 독보적이다. 특히 리스트 곡에 대해선 화려함과 박력으로 전문가와 일반 대중들에게 크게 환호받았다. 이 외에도 전성기 때 자신의 기교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몇곡에 붙인 자신만의 카텐차, 소품 편곡, 수자의 '성조기여 영원하라'에 붙인 매우 화려하고 기교적인 편곡 등이 레퍼토리에 있었고, 소품을 좋아하여 말년에는 표현력이 드러나는 슈만의 소곡, 모츠코프스키의 소품곡, 쇼팽의 마주르카, 스카를라티 곡 등을 자주 연주하기도 했다. 특히 스카를라티 곡에 대한 재발견으로 주목받기도 하고, 말년에 그가 연주한 슈만의 소품곡 중 어린이 정경의 트로이메라이는 그의 라스트 트레이드마크로 그 아름다움과 색채감에 있어서 최고의 절찬을 받는 곡이기도 하다.

3.1. 1920~1950년대




리스트-파가니니 연습곡 2번 (rec. 1930)
카르멘 변주곡 (rec. 1947)


브람스, 왈츠 Op.39 No.15 (rec. 1950)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rec. 1943)


생상스-리스트-호로비츠 편곡 죽음의 무도 (rec. 1942)
수자-호로비츠 성조기여 영원하라 (rec. 1947)


프로코피예프, 토카타 (rec. 1930)
도흐나니, 6개의 콘서트 에튀드 Op. 28, No. 6 (rec. 1928)


스크리아빈, 소나타 Op.68 (rec. 1953)
클레멘티, 소나타 Op.34 No.2 (rec. 1954)
데뷔 당시 테크닉으로 명성을 얻은 그의 전성기 연주에 있어선 뛰어난 테크닉으로 인정, 칭송받았다. 호로비츠의 기교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은 옥타브 연타나 빠른 속도의 화음 패시지 등의 기교에서 드러난다. 40년대 초반에 녹음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연주들을 들타보면 3악장 피날레 옥타브 난사 부분에서 초당 10회 꼴로 건반을 두드리는(...) 초인적인 손목힘을 보여준다. 그와중에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하듯이 페달을 통해 음을 흐리는 대신 옥타브 전체가 총을 난사하듯이 또박또박 들리는 건 덤.
1920~50년대의 그는 우상으로 섬겼었던 라흐마니노프 풍의 전통을 많이 물려받았다. 즉, 직선적이고 박력있으며 모든 부분에서 깔끔하고 완벽함을 이상으로 삼았다 할 수 있으며 그의 스타일은 그가 가진 완벽한 테크닉과 조화를 이루면서 더욱 찬란히 빛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랬기에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권위자로서 작곡가에게까지 인정받았고[5] 심지어 라흐마니노프는 그의 연주에 너무 감명받았는지 자신의 모든 작품에 대한 편집권을 호로비츠에게 맡겼다.
여러 녹음에서 보통 연주 속도를 늦출 가장 까다로운 부분에서 오히려 속도를 더 높여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는 걸 보면 경악스러울 정도이다(...) 이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1942년에 녹음된 <죽음의 무도>다. '''그리고 단연코 압도적이다.''' 클라이막스는 여타 악명높은 곡들에 비해 기교적으로 난해하지 않지만 피아니스트들이 매우 힘들어 하는 부분이다. 대다수의 경우 페달에 많이 의존하고 간간히 템포를 늦추며 힘조절을 하는게 보통인데 호로비츠는 페달을 거의 쓰지 않고도 모든 음을 하나하나 뚜렷하게 강타하고, 피날레에서는 힘이 빠지는 기색을 보이기는 커녕 더욱 앞부분보다 템포를 훨씬 더 올려서 연주를 한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힘의 한계에 달해서 페달로 뭉개기 시작하는 양손 옥타브에서는 마치 건반이 튕겨져 나오는 듯한 소리를 내고(그것도 매우 빠르게), 이것마저도 모자라 원래 왼손은 그냥 코드이고 오른손만 옥타브로 연주하는 클라이막스를 왼손까지 옥타브 연타가 생기게 직접 바꿨다. 이 모든것을 '''아예 페달을 안쓰고''' 눌러 찍는 초인적인 힘을 보여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녹음에서는 휘몰아치는 듯한 속도가 인상적이다. 특히 33:30초 이후로 그만이 낼 수 있다는[6] 천둥처럼 울리면서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포르테시모 소리의 클라이막스 코드는 섬뜩할 정도의 테크닉에 대한 방증이자, 전성기 시절의 트레이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워낙 옛날 사람이다 보니 이러한 초기 녹음 자체가 많이 남지 않아있고, 남은 것 자체도 음질이 열악하다는 점은 상당히 아쉬운 점. 이때는 LP도 있기 이전어어서 SP 음반에 녹음을 했고, 녹음비 자체도 매우매우 비쌌다. 그래서 흔히 죄르지 치프라등의 기교파 피아니스트들과 테크닉 면에서의 비교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녹음조차 되지 않은 호로비츠의 초기 기교 레퍼토리들(이를테면 리스트의 돈 주앙의 회상, 스페인 랩소디, 단테 소나타 등)을 고려하면 비교 자체가 힘들다.

3.2. 1960년대~1970년대




스크리아빈, 에튀드 Op.8 No. 12 (rec. 1968)
스카를라티, 소나타 K.466 (rec. 1964)


스크리아빈, 시곡 Op.32 No.1 (rec. 1965)
리스트, 오베르만의 골짜기 (rec. 1966)


쇼팽, 발라드 1번 (rec. 1968)
라흐마니노프, 에튀드 Op.39 No.5 (rec. 1975)
1965년 카네기 홀 복귀를 이후로 그는 두 번째 전성기를 맞는다. 특히 복귀한 1965년부터 잠시의 콘서트 휴식이 있기 전인 1969년까지는 매우 인상적인데, 이때 쇼팽 발라드 1번, 스크리아빈 에튀드 8-12,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 등의 전설적인 녹음을 한꺼번에 남기고 콘서트 자체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직 잃지 않은 젊은 시절의 테크닉과, 12년의 공백 사이에 매우 성장한 음악적 감각의 결합, 그리고 LP의 발명으로 인한 고음질의 녹음기술의 시너지가 엄청나다. 특히 여기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하는 다이내믹 폭과 음 자체에 대한 조절[7]은 말년까지 이어지는 그의 음악능력의 초석이 된다.
70년대는 약간의 과도기적인 시기이다. 그의 전체적인 음악성향의 변화를 살펴보면, 60년대에서 80년대로 거쳐가며 레퍼토리와 연주 스타일이 상당히 변했는데, 70년대의 연주는 그 사이에 껴있어 다소 혼란한 느낌을 준다. 이 시기의 그의 해석은 과장된 셈여림 등의 신경질적인 면이 상당히 돋보이곤 한다. 이는 곡의 자유스러움이 결여되고 불안정감이 생긴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너무나 자세히 곡을 쪼개놓아서 전체적인 흐름 자체를 절단낸다는 것이다. 이 시기때 연주된 그의 쇼팽 레퍼토리를 들어보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한편 레퍼토리 자체는 60년대와 비슷한데, 같은 곡의 연주에 있어서 속도와 테크닉은 60년대보다 다소 뒤쳐지지만 새로운 해석의 방향을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의 연주는 악마적인 저음과 함께 과격하면서도 신경질적인 성향이 드러나는 것이 특징으로, 1979년에 몇 번 연주한 리스트 메피스토 왈츠의 연주를 들어보면 이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 39-5의 1962년과 1975년 연주를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전자는 물 흐르는듯한 깔끔함이라면 후자는 다소 걸쭉하면서도 호소력 있는 음색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징.

3.3. 1980년대




스크리아빈, 에튀드 Op.2 No.1 (rec. 1986)
로베르트 슈만, 트로이메라이 (rec. 1986)


리스트, Au Bord d'une Source (rec. 1985)
슈베르트, 악흥의 순간 3번 (rec. 1987)


슈베르트, 즉흥곡 D. 899 No.3 (rec. 1987)
모차르트, 론도 K. 485 (rec. 1989)
1980년대 초반까지도 70년대부터 시작된 과도기가 이어진다. 1960년대에 호평받던 스크리아빈 8-12,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 등의 레퍼토리를 계속 끌고 온 것이 그 증거. 그러나 의사의 항우울제 처방으로 그는 수전증으로 제대로 건반을 짚지도 못할 정도의 심각한 신체적 문제를 겪고, 결국 1983년의 도쿄 리사이틀을 기점으로 2년간 콘서트를 쉬어야 했다. 아래 영상은 쇼팽의 에튀드 한 곡조차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당시 그의 심각한 상황. 당시 한 일본의 평론가는 아래 연주에 대해 "깨져버린, 굉장히 귀한 꽃병"같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우울제 복용을 중단한 그는 아내 완다의 도움과 함께 다시 한번 우울증을 이겨낸다. 1985년에 2년만에 복귀한 그는 과도기를 완전히 끝내고 말년의 스타일을 제대로 정립하는데, 우선 예전과 같은 과격한 스타일 자체를 버리면서도 이전부터 뛰어나게 평가받던 음색에 대한 조절을 살려 가히 '''피아노 음색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조절'''이라고 할만한 스타일을 가지게 된다.[8] 위의 모차르트의 론도 등에서 얼마나 깔끔하면서도 구성감 있는 연주를 해내는지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9] 또 이전 레퍼토리를 더이상 연주하지 않는 대신 모차르트스카를라티를 상당히 발굴해내며 본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새뢰 성공적으로 구성하기도 했다.
마지막 순회공연 중, 조국인 러시아에서는 1986년에 61년만에 첫 연주를 가지게 되는데 당시의 연주회는 러-미 양국간의 정치 문제와도 연관될 만큼 단순한 연주회 외에도 많은 의미를 가졌었다. 당시는 무려 냉전이 한창 진행되는 중이었는데, 그런 와중에 소련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을 한 피아니스트가 다시 러시아로 와 공연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 호로비츠는 1987년에 콘서트를 끝낼 생각이었다고 했고[10] 지금이 아니라면 다신 그곳에서 연주회를 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모든 부담을 감수하고 진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연주회에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통해 관객 여럿을 눈물 흘리게 만든 점은 매우 인상적.


4. 이모저모


  • 한국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호로비츠가 이 호로비츠다.
  • 손 크기에 대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여러 연주에서 들어볼 때 장10도를 한 번에 짚기 어려운, 피아니스트로써는 평균 이하의 손크기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 호로비츠의 아버지는 그가 징집되어 손가락을 잃을것을 염려해 그의 나이를 1년 어리게 조작했다. 이 때문에 오래된 자료를 찾아보면 그의 출생년도가 1904년으로 기재된 곳이 많다.
  • 졸업연주로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2번과 리스트의 <돈 주앙의 회상> 등을 쳤는데 키예프 음악원 역사상 처음으로 심사위원들이 졸업생 애송이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 아내 완다와의 사이에 소니아(Sonia)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1934년생이었으나 1975년에 자살했다.[11]
  • 아내의 요리솜씨가 매우 형편없어서 매번 화를 삭혀야 했다고 한다. 덕분에 피아노 칠 시간이 더 생기는 셈치고 체념했다고 한다(...)
  • 디누 리파티는 호로비츠가 연주하는 브람스 왈츠 작품 39-15를 듣고 '호로비츠는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다'라는 극찬을 했다. 들어보기
  •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도 자신의 악기 인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공연을 다니는데 피아니스트는 왜 못하냐면서 평생동안 자신의 스타인웨이 콘서트용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면서 콘서트를 했다. 과연 20세기를 빛낸 최고의 피아니스트 다운 패기다. [12][13] 다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가지고 다니는 피아노 자체가 수 회 새로이 제작된 적은 있었다. 물론 그의 음색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 모두 주문제작된 스타인웨이들이다.

5. 어록


타악기처럼 두들기기만 하는 피아노 소리는 지루하다. 내가 콘서트에 갔는데 누가 그런식으로 연주한다면 내 반응은 둘중에 하나다: 집에 가던가 졸던가. 피아니스트의 목적은 피아노로 하여금 노래, 노래, 노래하게 하는 것이다. [14]

[15]

피아노의 미스터치는 인간의 것입니다. 왜 모든것이 완벽해야 하겠습니까? 완벽 그 자체로 불완전함입니다. [16]

나는 장군이다. 건반이 내 병사들이며 나는 그들에게 명령을 내린다.[17]

나에게 있어서 논리는 항상 (연주의) 가이드가 되지만 그것이 공연의 목표는 아닙니다. 3가지가 조정되어야 하고 그 중 하나라도 튀어서는 안 됩니다. 학자가 돼버릴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지성은 피합니다. 슈말츠[18]

가 돼버릴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감성은 피합니다. 기계공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너무 많은 테크닉은 피합니다.[19]

내가 끔찍한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말하겠습니다. 내 연주가 매우 명확하기 때문에, 내가 실수를 하면 당신이 그것을 듣게 됩니다. '''다이내믹 조절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난 단 한개의 미스터치도 없을 것입니다.''' 결코 엄두 내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20]

[21]

말하자면 음악을 열어서 그 뒤에 뭐가 들어있는질 확인해야 한다. 바흐든 누구든 음표는 다 같기 때문이다. [22]

악보는 성경이 아니며 난 두려워하지 않는다. 음악은 그 점들 뒤에 있는 것이다. [23]


[1] 러시아어로는 Владимир Самойлович Горовиц(블라지미르 사모일로비치 고라비츠), 우크라이나어로는Володимир Самійлович Горовиць(볼로디미르 사미일로비치 호로비치). 일각에선 원래 이름이 고로비츠(Gorowitz)였으나 호로비츠로 개명했다고도 하는데, 사실 어느 쪽이든 맞으며 단지 키릴 문자 г가 우크라이나어에서는 h 발음이지만 러시아어에서는 g 발음이라 나타나는 차이. 이후 서방 데뷔 때 Horowitz라는 철자를 사용할 것을 제안받아 이 이름으로 알려졌다.[2] 물론 부조니는 호로비츠가 서유럽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시기 이미 사망하여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3] 아버지가 전기 모터 유통업자였는데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재산을 몽땅 뺏겼다.[4] 인식과는 다르게 둘은 음악가 사이의 보여주기식 결혼이 아닌 진짜로 사랑한 결혼을 했다. 이것은 아내가 직접 회고하기도 한 부분. 이후 호로비츠 연주 경력의 위기마다 완다가 준 도움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5] 20년대 호로비츠의 미국 데뷔(뉴욕) 직전에 만난 후 라흐마니노프가 43년에 죽을 때까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라흐마니노프는 호로비츠가 친 그의 3번 협주곡에 대해 엄청난 찬사와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호로비츠가 자신보다 이 협주곡을 더 잘 연주하며, 자신은 항상 이 곡이 이렇게 연주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생전에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기도 했다.[6] 자신의 스타일에 맞지 않아 일부로 그런 소리를 내지 않은 그에 견줄 만한 피아니스트들도 있지만,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기도 힘들 만큼 극소수이다.[7] 음색을 자유자재로 바꿈과 더불어, 손 3개가 필요할 다성부의 패시지를 각각 분리해내면서도 서로 융합되게 연주하는 것 등[8] 이것을 그가 나이를 이유로 이전 스타일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야만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런 와중에도 1950년대 이후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그만의 스타일이 여전히 분명 존재하기 때문.[9] 피아노 연주자의 입장에서 저런 방식의 연주는 듣기에는 쉬워보이면서도 치기에는 오히려 굉장히 어렵다. 음 하나하나를 균일하게 빠짐없이 다뤄야 하기 때문.[10] 실제로도 마지막 연주회는 1987년 함부르크에서 있었다.[11] 매우 딱딱하고 차가운 성격의 완다였으나 이 사건 이후로 딸의 이름 "소니아"만 들어도 바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마음고생이 극심했다고 한다 [12] 실제로 피아니스트들은 자신들의 악기를 매고 비교적 자유로이 다닐수있는 현악기와 관악기 주자들을 부러워 하는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최상의 연주를 하기위해선 자기가 평생동안 길들인 악기로 연주를 해야 유리한데 피아노계에서는 콘서트때마다 낯선 악기로 적응을 해야하는게 숙명이자 현실이기 때문이다.[13] 마찬가지로 완벽주의로 유명한 크리스티안 지메르만도 최상의 연주를 위해 콘서트 때마다 항상 피아노를 비행기로 싣고 다닌다.[14] Played percussively, the piano is a bore. If I go to a concert and someone plays like that I have two choices: go home or go to sleep. The goal is to make the piano sing, sing, sing.[15] 실제로 호로비츠의 연주 스타일 중 하나인 멜로디의 노래하는 듯한 강한 드러남을 생각해보면 그의 실제 연주 성향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16] False notes (on the piano) are human. Why does everything have to be perfect? You know, perfection itself is imperfection.[17] I am a general. My soldiers are the keys and I have to command them.[18] 거위나 닭 등의 지방 조직에서 나온 기름을 굳힌 것[19] For me, the intellect is always the guide but not the goal of the performance. Three things have to be coordinated, and not one must stick out. Not too much intellect because it can become scholastic. Not too much heart because it can become schmaltz. Not too much technique because you become a mechanic.[20] I must tell you I take terrible risks. Because my playing is very clear, when I make a mistake you hear it. '''If you want me to play only the notes without any specific dynamics, I will never make one mistake.''' Never be afraid to dare.[21] 베이브 루스가 "내가 홈런을 노리지 않고 단타만 쳤으면 타율이 6할은 됐을 것이다"라고 한것과 비슷한 맥락[22] You have to open the music, so to speak, and see what's behind the notes because the notes are the same whether it is the music of Bach or someone else.[23] The score is not a bible, and I am never afraid to dare. The music is behind those do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