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시간 음반
1. 개요
'''표준시간 음반'''(標準時間音盤)은 음반의 일종으로, 현대 카세트 플레이어나 전축이 아닌 축음기에서 구동하는 음반이다. 역대의 모든 음반 매체 가운데 가장 장수한 매체이기도 하다. Standard-Playing Record를 줄여서 'SP 음반'이라고도 하나, 이 명칭은 오늘날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대개는 78회전반, 즉 "78rpm Record" 또는 이를 줄인 "78s"라는 명칭으로 통한다. LP가 등장하기 이전 시대에 음반이라고 하면 거의 이 물건을 일컫는 단어였다. 이외에 음반의 회전수와 재질에 따라 78회전반, 셸락반, 래커반 등 다른 명칭으로도 불린다.
2. 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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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려는 시도는 이미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있어왔지만, 가장 처음 녹음과 재생 모두에 성공한 이는 실린더 레코드를 사용하는 포노그래프(Phonograph)를 발명한 미국의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이었다. 에디슨의 아이디어는 겉에 납이나 왁스를 바른 드럼(drum) 형태의 금속 실린더에 바늘로 소릿결을 새겨넣고, 실린더가 회전하면 바늘이 세로로 그 소릿결을 따라가며 재생되는 소위 종진동 방식이었다. 하지만 에디슨의 것은 극초기 제품이다 보니 바늘과 실린더 모두 재생할 때마다 마모가 심해서 내구성이 떨어진다는 약점 때문에 상품화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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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에디슨과는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기록하는 시도도 이전부터 있었는데, 프랑스의 에두아르-레옹 스코트가 1860년대에 고안한 포노오토그래프(Phonoautograph)가 대표적인 예였다. 이 기기는 에디슨 방식과 달리 가로로 소리를 새기고 재생하는 횡진동 방식의 기기였는데, 소리의 기록에는 성공했지만 재생이 불가능한 문제가 있어서 특허만 받는데 그쳤다.[1]
독일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온 에밀 베를리너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세운 전화 연구소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1883년에 워싱턴 D.C.에 자신의 연구소를 설립했는데, 베를리너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스코트의 포노오토그래프를 보고 스코트의 구상을 자신의 발명품에 응용했다. 우선 금속 원판에 일종의 아스팔트를 얇게 씌우고 단단한 바늘로 그 위를 긁어 소릿결을 새긴 뒤, 그 위에 약품 처리를 해서 굳혀 원판에서 떼어냈다. 이 아스팔트를 인쇄소에 의뢰해 철판으로 복제해 다시 그 위에 아스팔트를 씌우고, 마찬가지 방법으로 약품 처리를 해서 떼어낸 뒤 바늘로 소릿결을 재생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단 원시적이나마 녹음과 재생에는 성공했지만, 워낙 과정이 복잡했기 때문에 중간 단계인 원반의 철판 복사와 아스팔트 재복제를 생략하는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금속 원판을 유리 원판으로 바꾸거나, 다시 유리 원판에서 아연 원판으로 바꾸고 아스팔트 대신 밀랍을 사용하는 등 추가 연구가 이어졌다.
특히 후자의 아연 원판+밀랍 코팅이 효율적이었는데, 밀랍을 씌워 소리홈을 판 아연 원판에 강산성 용액을 부으면 소리홈이 새겨져 금속 부위가 드러난 부분만 부식되는 화학 작용을 이용해 원판을 더 쉽게 생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에디슨 등의 실린더 레코드와 달리 그 원판으로 음반을 대량 복제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훗날 SP와 실린더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장점이 되었다.
베를리너는 1887년에 이 시제품 음반과 재생기에 대해 '그라모폰(Gramophone)' 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특허권을 획득했고, 이듬해인 1888년 5월에 필라델피아의 프랭클린 연구소에서 공개 시연회를 열었다. 이어 모국인 독일에 가서 특허를 얻기 위해 베를린의 공업박람회에서도 에디슨이 만든 포노그래프와 비교 시연회를 개최했다. 이렇게 선보여진 음반이 훗날 SP로 불리는 원반형 음반의 원조가 되었다.
3. 실용화
하지만 베를리너가 갓 내놓은 음반은 아직 에디슨의 포노그래프 만큼이나 결점도 많았는데, 음반 지름이 겨우 12.5cm에 불과해 장시간 재생이 힘들었고 무엇보다 음반을 재생하는데 필요한 기계 장치의 개발이 더뎠다. 이 때문에 초기 SP를 재생하기 위해서는 듣고 싶은 사람이 직접 자전거 페달처럼 생긴 손잡이를 계속 돌려야 음반이 돌아가는 매우 원시적인 구조를 갖고 있었다. 덕분에 처음 상품화된 SP와 그 재생기는 독일의 켐머 운트 라인하르트라는 완구 제조업체에서 일종의 장난감으로 3년 가량 생산된 것이 고작이었다.
물론 베를리너도 그 단계에서 만족하지는 않았고, 기존의 아연 원판을 니켈 도금한 구리 원판으로 바꾸거나 음반 크기를 기존의 지름 12.5cm에서 17.5cm로 확대하는 등 추가 개량을 실시했다. 하지만 여전히 재생 방식은 수동 구동 방식이라 에디슨 등의 실린더 음반에 비하면 여전히 시장성이 희박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베를리너는 수동 구동 방식에서 일종의 태엽 구동 방식을 구상했고, 그에 필요한 스프링 모터를 찾다가 뉴저지의 캠든에서 엘드리지 존슨이라는 기술자가 생산한 모터가 적당하다고 보고 존슨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존슨은 이내 베를리너 그라모폰의 중요한 모터 납품자가 되었고, 더 나아가 녹음/재생용 바늘의 개량이나 밀랍에서 왁스로 원반 커팅용 재료를 바꾸는 등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베를리너도 음반 생산 재료를 에보나이트나 인조고무에서 일종의 니스 염료인 셸락을 기본 재료로 하는 것으로 바꾸어 음질 개선을 꾀했다. 그리고 스프링 모터의 도입으로 음반의 정속 회전 방식이 만들어져 SP의 재생 속도가 78rpm으로 정해진 것도 이 무렵 부터였다.[2]
베를리너는 1895년에 존슨, 비슷한 시기 만난 조수 프레드 가이스버그[3] ]와 함께 3자 합자 형식으로 아메리칸 그라모폰이라는 음반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음반과 재생기의 사업을 시작했고, 1897년과 1898년에는 각각 영국과 독일에도 지사를 설립해[4] 유럽 시장에도 진출했다. 사업 중간에 동업자였던 프랭크 시맨이 무단으로 음반과 재생기를 복제해 조노폰(Zonophone)이라는 유사품을 만드는 바람에 고소크리가 가해지는 등 이런저런 사건이 있었지만, 에디슨 포노그래프보다 내마모성이 월등히 좋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이점 때문에 차츰 실린더 레코드를 누르고 음반 업계의 주류 상품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5]
4. 리즈시절
베를리너의 그라모폰 레코드는 20세기 초가 되자 시장을 유럽과 미국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오세아니아까지 거의 전세계를 포괄할 정도로 넓힐 수 있었고, 표도르 샬리아핀이나 엔리코 카루소 같은 당대 본좌 성악가들의 녹음으로 대박을 치는 등 상업적인 성공도 거두기 시작했다. 특히 엔리코 카루소의 음반은 100만장이나 팔리는 대히트를 쳤다. 1903년에는 한 면 당 약 2분~2분 30초 정도만 녹음이 가능했던 기존의 17.5cm 외에 25cm와 30cm 판이 나와 각각 3분과 4분 30초에 이르는 확대된 재생 시간을 갖게 되었다. 1904년에는 독일의 오데온 음반사에서 원반 레코드의 앞뒷면을 모두 활용한 양면 레코드를 선보여 레코드 한 장에 최대 9분까지 녹음이 가능해졌다.
이후 1940년대 후반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녹음들은 거의 이 25cm 혹은 30cm 양면판 SP로 나왔다. 1900년대 후반 무렵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관현악 녹음과 여타 기악 작품의 녹음으로 성악 위주의 음반 카탈로그가 확대되기 시작했고, 1917년에는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스 밴드[6] 의 연주를 담은 최초의 재즈 레코드가 출반되었다. 진공관과 전기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1925년에 실용화된 전기 녹음은 마이크와 앰프를 사용해 전기 신호의 조절이 가능해져 대편성 작품의 녹음을 용이하게 해주었고, 녹음/재생 가능 주파수 대역도 기존 어쿠스틱 녹음의 300~1500Hz에서 50~6000Hz로 크게 넓어져 소리도 한결 명료해졌다. 이 전기 녹음 기술은 1934년에 더욱 개량되어 30~8000Hz 이내의 소리를 담을 수 있게 되었고, 이 시점부터 소위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 줄여서 하이파이(hi-fi)라는 용어가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5. 단점
하지만 이렇게 개선된 녹음 기술에도 불구하고 재생 시간의 한계는 SP의 큰 약점이었고, 이 때문에 오페라의 전곡 녹음 같은 장시간 녹음 프로젝트가 다른 장르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 1931년에 RCA에서 한 면 당 15분 씩 총 30분의 녹음이 가능한 장시간 재생 SP를 개발했지만, 이 음반도 재료의 한계 때문에 오히려 음질 열화가 오거나 쉽게 파손되는 등의 단점만 많아져 버로우했다.
청취자 입장에서는 돌아가는 음반과 접촉해 소리를 읽어내는 바늘을 자주 갈아줘야 하는 것도 불편함을 느끼는 요인이었다. 바늘이 읽어낸 소리를 스피커나 나팔로 전달하는 사운드박스가 상당히 무거웠기 때문이었는데, 정석 대로면 한 면 당 바늘 하나가 필요했다. 만약 바늘을 귀찮다고 안갈고 계속 돌릴 경우, 바늘이 마모되면서 음반의 소릿결을 손상시키고 심하면 무거운 사운드박스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냥 SP 양면판 한 장을 듣는다고 해도 바늘 두 개가 필요했고, 음악 덕후일 경우 바늘을 박스 단위로 사놓아도 금방 동나는 경우가 많아서 상당히 비경제적이었다. 이 때문에 서구에서는 선인장의 가시를 가공한 특수 바늘이 나오기도 했고, 일본에서는 대나무를 얇게 가공한 죽침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들 비금속 재질의 바늘은 청취자가 마모됐다 싶으면 칼로 살살 깎아서 여러 번 쓸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깎아써야 한다는 것 자체부터 귀차니즘을 유발시키는 데다가 금속 바늘보다 음질이 둔탁하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 시절을 기억하는 한국 기성세대가 하는, 음악 들으려고 바늘 갈다가 깨트리거나 부러트렸다, 혼났다가 바로 이 얘기다.
이 문제는 전기 녹음이 실용화된 뒤 스피커와 앰프를 축음기와 일체형으로 만들어 음량을 자유자재로 변환시킬 수 있는 전기 축음기가 상용화되자, 사운드박스의 무게가 많이 가벼워지면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하지만 바늘을 자주 갈아줘야 한다는 고질적인 문제는 후술할 LP가 발명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2차대전 중에는 영국 해군에서 독일군의 U보트 엔진 소리 식별을 위해 12000Hz까지 들을 수 있는 고주파 청음기가 개발되었고, 이 청음기의 제작 기술을 활용해 1945년에 영국의 데카에서 ffrr(Full Frequency Range Recording)이라는 슬로건으로 내놓은 음반이 큰 각광을 받았다. 음반 업계의 기술자들은 녹음 기술의 발달과 병행해 새로운 형태의 장시간 재생 가능 음반 개발을 계속 시도했지만, 그 중 실용화된 것은 콜럼비아의 직경 40cm짜리 대형 디스크 뿐이었다. 그나마도 크기만 키워서 재생 시간을 약간 늘린 정도였고, 너무 크고 무겁다는 이유로 방송국 녹음용으로만 겨우 쓰일 뿐이었다.
6. 쇠퇴와 몰락
전쟁 중 활발히 전개된 고분자 물질의 발명과 실용화로 플라스틱이라는 신소재가 등장했는데, 가볍고 단단하며 충격에 쉽게 깨지지 않는 특성 때문에 전후 여러 공산품의 제조에 급속도로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이용해 새로운 음반을 만드는 연구가 CBS 기술 연구소에서 진행되기 시작했고, 1948년 6월에 뉴욕에서 새로운 음반인 LP와 그 플레이어의 발표회가 열렸다.
LP는 음반 회전수를 절반 약간 넘게 줄여 한 면 당 22분 30초까지 녹음이 가능했고,[7] 종래의 셸락 혹은 래커 위주로 제작되던 SP보다 잡음이나 뒤틀림도 적고 훨씬 가벼웠다. 더군다나 플라스틱 재질 사용으로 잘 깨지지 않았기 때문에 SP의 입지는 극도로 좁아졌다. 물론 그 뒤 SP에도 LP의 미세 커팅 기술을 응용해 재생 시간을 한 면당 9분 가량으로 늘리거나 하는 등의 추가 개량이 진행되었지만, 오픈릴 테이프 녹음과 스테레오 레코딩 기술까지 도입되면서 모든 면에서 우월했던 LP와 EP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결국 SP의 생산은 1963년 무렵에 전세계적으로 완전히 중단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7. 이후의 취급
제작이 중단된지 한참 되었지만, 의외로 중고 시장에서는 아직도 많은 수가 거래되고 있으며, 소수이지만 꾸준한 많은 매니아 층이 있다. 특히 테이프가 도입되기 이전에 원판에서 바로 떠서 제작하는 다이렉트 커팅 방식의 음반이었기 때문에, 상태가 좋은 것들은 2차대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독일이나 일본, 이탈리아 음반사들의 원판 유실 음반들을 CD 등으로 복각하는 작업에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당대에 SP음반 재생용으로 시판되던 축음기 이외에도, 현재 유통되고 있는 고가의 LP 턴테이블에 장착된 모터와 속도 조절기에도 LP용의 33과 1/3rpm, EP용의 45rpm 외에 SP용의 78rpm 기능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음질 등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오래된 것' 이라는 골동품 가치 때문에 모으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LP와 달리 습도나 온도(특히 영하의 저온)에 민감한데다, 탄성이 없어 부서지기 쉽고 상당히 무겁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관리를 소홀히 하면 금이 가거나 심지어 쪼개진 레코드를 보며 한없는 분노와 슬픔을 느낄 수 있으니(...) 소장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8. 한국에서의 SP
191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도 SP 음반이 제작되었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나 박향림의 오빠는 풍각쟁이 등 현대인에게도 잘 알려진 고전 가요들이 SP 음반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SP는 LP에 밀려 점차 사라졌다.
한국의 잘 알려진 SP 수집가로는 이경호 씨가 있다. 2,000여 장의 SP 음반을 보유중이며 음악 외에 손기정 선수 육성 음반 등 희귀 음반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 노출을 꺼리지 않을 뿐 아니라한국일보 SP 기록물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하여 보존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2018년에는 세상에 이런일이에 출연하여 소장품들을 공개하였다.
축음기와 마찬가지로 해외음반들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때 많은 물건들이 수입되거나 국내 음반회사를 통해 발매되기도했다. 국내외 SP판들은 인사동 이나 황학동 풍물시장 뒷골목 등 골동품상이나 경매를 통해 구할 수 있다.
[1] 하지만 과학기술의 부단한 발달 덕에, 2008년 미국의 로렌스 버클리 국립 연구소에서 스코트의 녹음 원판을 스캔해서 컴퓨터로 재생하는데 성공했다. https://youtu.be/znKNQXo58pE[2] 다만 음반사 간의 통일된 규약이 없었기 때문에 1930년대 중반까지도 78회전 전후로 꽤 심한 속도 차이가 나곤 했다. [3] 세계 최초의 음반 프로듀서로 평가받는다.[4] 이 지사들이 훗날 각각 EMI와 도이체 그라모폰이 되었다.[5] 다만 재생되는 소리의 질에 있어서는 에디슨 포노그래프가 베를리너 그라모폰보다는 나았다는 것이 연구 결과로 증명되었다. 하지만 에디슨은 상업화의 가장 큰 과제인 대량 복제에 사실상 실패했고, 베를리너 그라모폰도 꾸준한 녹음 기술과 음반 개량 덕에 1930년대 이후로는 결코 포노그래프보다 성능이 낮은 물건이 아니었다.[6] 이 음반을 낼 시 밴드명은 Jazz가 아닌 Jass였다. 항목참조[7] 이후 2년도 채 되지 않아 버라이어블 피치 커팅이라는 기술 개발로 30~32분까지 수록 시간이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