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부

 



역임한 관직



'''사마팔달(司馬八達)
司馬孚
사마부
'''
'''시호'''
안평헌왕(安平獻王)
'''작위'''
관내후(關內侯) → 창평정후(昌平亭侯) → 장사현후(長社縣侯) → 장락공(長樂公) → 안평왕(安平王)
'''최종직위'''
태재(太宰)[1] 겸 지절(持節) 겸 도독(都督) 중외제군사(中外諸軍事)
'''성씨'''
사마(司馬)
''''''
(孚)
''''''
숙달(叔達)
'''아버지'''
사마방(司馬防)
'''생몰기간'''
180년 ~ 272년
'''고향'''
사례(司隸)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재임기간'''
'''사공 재임기간'''
251년 3월 ~ 7월 28일
'''태위 재임기간'''
251년 6월 28일 ~ 256년 8월 29일
'''태부 재임기간'''
256년 8월 29일 ~ 265년 12월
'''안평왕 재위기간'''
265년 12월 ~ 272년 2월
1. 개요
2. 정사
2.1. 조비 시절 친위세력
2.2. 조예 시절 문관으로서
2.3. 형의 죽음 이후 지휘관으로
2.4. 위나라의 마지막 충신?
3. 평가
3.1. 형과의 기묘한 2인3각
4. 기타
5. 연의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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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문관이자 나라의 황족. 자는 숙달(叔達). 경조윤 사마방삼남, 사마랑사마의의 동생. [2]
맏형인 사마랑이 당대의 명사였고, 둘째 형인 사마의가 모략의 명수였다면 사마부는 겸허하고 유순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과 원한을 맺은 적이 없었으며 학문과 경전에 해박하여 사마팔달의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일단은'''.

2. 정사


사마부의 관직생활을 보면 문,무 양면에서 충실하게 형과 사마씨를 서포트 한 인물이다.
조식의 문학연으로 관직을 시작한[3] 사마부는 조조 직속으로 일하게 된 형의 빈자리를 매우기 위해 조비의 태자중서좌로 전임된다. 중히 쓰여 가 세워지자 상서우복야, 상서령, 사공, 태부 등 요직을 역임했다.[4]

2.1. 조비 시절 친위세력


조조가 죽자 아직 위나라는 다들 울며 다들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사마부는 화흠과 함께 혼란스런 상황을 정리했고 조비가 빠르게 즉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덕에 중서랑[5], 급시상시를 맡고, 성내에서 오래 일해 황문시랑[6]으로 임명되고 기도위[7]로 일했다고 한다. 모두 황제 직속의 근위하는 벼슬이다.
이때 손권이 조비에게 항복할때 이를 받아들이라고 조언했으며 그 후는 하내의 전농이 되고 관내후가 되고 청하태수로 근무한다.

2.2. 조예 시절 문관으로서


이후 조예가 사마의와 같은 풍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마부를 높게 평가하고 [8] 그에게 도지상서 직을 제수했다. 도지는 다름아닌 재정부로 조예는 이 두 형제들에게 집착한 나머지 군권이고 재정권이고 모두 사마씨에게 내준 셈.
그는 형 사마의를 내정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촉한의 침공 때마다 멀리 떨어진 수도로부터 주력을 지원받아야 했고 사마부 본인 도 지원군을 이끌고 가야했던 서부 전선의 방어태세 보완을 위해 보기 20,000명을 추가로 뽑아 배치하고, 또한 피폐해지는 관중의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상규에 기주 농부 5,000명을 이주시켜 둔전한다는 정책을 실시한 것.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에 따르면 '(관중의) 장정들에게 가을과 겨울에 전진(戰陣)하는 법을 배우고, 봄과 여름에는 밭과 뽕나무를 일구도록 하였다. 말미암아 이에 관중(關中)의 군국(軍國)에 여분이 있게 되었으며, 적들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했다. 여기에 비슷한 시기(233년) 사마의가 진나라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개수로인 성국거를 진창에서 견수까지 확장시켰다는 기록이 진서에 있는데, 이것은 사마부가 제안한 관중 부흥책과 연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어쨌거나 이 덕분에 사람이 없어 비었다던 관중에는 백성들이 충원될 수 있었고 제갈량은 5차 북벌에서 이를 역이용해 오장원에 눌러 앉아 백성들과 촉군들을 한데 섞어 둔전을 하면서 수많은 양곡을 수확하면서 장기전 태세에 돌입하여 위수 남쪽을 점거하다시피 했다. 결국 견벽거수로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제갈량이 죽고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는 제갈량의 주둔했던 기지에서 많은 양곡을 노획한다. 하염없이 제갈량의 식량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견벽거수를 노리던 사마의, 사마부 형제에게는 이 상황이 씁쓸하게 다가 올 수 밖에 없었을것이다.
어쨌든 이후 조용히 지내던 사마부는 고평릉 사변에서 사마의가 조상과 대립하여 정변을 일으킬 때, 상서령으로 태위 장제(蔣濟)와 함께 군기고를 점령했고 이후 사공-태위-태부 코스를 찍었다.[9]

2.3. 형의 죽음 이후 지휘관으로


태위 시절, 대오전(對吳戰)에서는 관구검 등을 지휘하며 제갈각과 교전했으며 대촉한전선에는 왕경의 패배이후 최고사령관으로 임했으며 등애의 후속 부대로써 교전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형 사마의와 조카들을 도와 사마씨의 적들을 상대로 창업을 도운 최고 공신이나 원로나 다름없다. '''그런데...'''

2.4. 위나라의 마지막 충신?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킬 때 표에 따르면 조방 폐위 당시 사마부는 조방의 폐위에 대해 '진심으로 슬퍼하며 그를 전송했다'고 하고 260년 조모가 피살되자 태부였던 그는 상서복사 진태와 함께, 죽은 조모의 머리를 무릎에 받치고 대성통곡하며 '폐하(陛下)를 살해한 것은 신(臣)의 죄입니다.'라며 시해를 주관한 사람을 규명하자고 주청하였다.(진서 안평헌왕부열전)
265년 종손[10]사마염조환에게서 선양을 받아 서진을 세우자 황제에서 퇴위한 진류왕 조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진의 신하들 모두가 진류왕 조환이 퇴위된 후, 새로 황제가 된 사마염에게 밉보일 수 없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부만이 사마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환을 방문하였다. 사마부는 공신이자 황족 중에서도 큰어른[11]이었기에, 황제인 사마염도 그를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사마부는 폐위된 조환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였다. "신은 위나라의 신하입니다. 신은 평생 위나라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사마부는 조환의 거처를 자주 방문하였다고 한다.
사마염으로부터 안평왕에 봉해지고, 태재·지절·독중외제군사에 임명되어 황족 및 신료들의 최고 원로 대우를 받았다. 비록 황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를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항상 근심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위나라의 신하였음을 잊지 않았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사마씨가 정권을 잡고 조방 폐위를 기점으로 그는 갑자기 사마씨 창업의 공신에서 '''조위의 충신''' 포지션을 취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조방의 폐위를 부른 고평릉 사변의 최고 공신 중 하나가 사마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 묘하다고 밖엔 할 수 없다.
272년 '''92세'''의 고령으로 사망했는데, 후한 영제 때 태어나 사마염의 서진 건국까지 사실상 '''삼국지의 시작과 끝을 모두 살다간 인물이다.''' 3개의 황조(후한, 조위, 서진) 밑에서 살았으며 그가 살아있는 동안 무려 황제가 9번이나 바뀌었다. 만약 8년만 더 살았으면 100년을 살고 오의 멸망과 서진의 삼국통일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후손으로 자치통감의 편찬자인 사마광이 유명하며 손자 중 하나나라를 말아먹는다.

3. 평가


정사, 연의를 통틀어 충심을 강조하는 '충신'으로의 행보가 강조되나 행적으로 보면 고평릉 사변부터 일관되게 조위에 대한 충심과는 관련없는 행보를 걸었다. 형인 사마의가 조예 때부터 군권을 손에 쥔 것과 대비되게 재정권을 손에 쥐었는데 이는 사마의 파벌을 위시한 귀족세력에 힘을 몰아주는 행보였다. 사마의의 정변 이후에는 오히려 관직이 빠르게 올라갔으니 사마의로 대표되는 귀족세력과 대립 또한 없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조씨를 위해 나선것은 조모가 시해당했을 때 소극적인 진상규명 요구 뿐이었다.[12] 하지만 사마부는 그냥 울며 주관자를 규명하자는 건의한게 끝[13] 고평릉 사변때는 형을 도와 조상을 몰아냈고 사마사가 진짜 조위 마지막 충신이라 할 만한 하후현을 죽일때는 사마소조차 말리는 와중에 사마부는 죽이라고 부추겼다.[14]
결정적으로 그가 다리 위에 올려놓고 슬퍼했다는 고귀향공 조모의 장례에 대해서 올린 상소를 보면 그가 과연 조모를 위해 흘린 눈물이 진실인지 의문이다.

8일, '''태부 사마부''', 대장군 사마문왕, 태위 고유, 사도 정충 등이 머리를 조아려 상주하였다.

신 등은 황태후의 칙령을 받았습니다. '''고인이 된 고귀향공은 악역무도하고 스스로 커다란 재화 속에 빠졌는데''', 한 창읍왕(昌邑王)이 죄를 지어 쫓겨난 선례에 따라 평민의 예식으로 안장했습니다.

신 등은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재난을 구하여 혼란을 바로잡지도, '''사악한 반란'''을 제어할 수도 없었습니다. 칙령을 받고 두려워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춘추(春秋)의 대의에 의하면, 왕 노릇하는 자에게는 천하가 집입니다. 그러나 ‘주나라 양왕은 정나라에서 거주하였다 -춘추(春秋) 희공(喜公) 24년’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왕의 자격을 버린 것입니다.

지금 '''고귀향공은 충동적으로 행동하여 인륜을 저버리고 국가를 위험에 빠지게 했으며, 스스로 멸망하여 사람과 신을 모두 버렸습니다.''' 평민의 예식으로 안장하는 것은 확실히 옛날 제도와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등은 황태후 전하의 자애로움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마음속에 대의가 있지만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는 정이 있으니, 신들도 마음속으로는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해 고귀향공을 왕의 예의로써 안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황태후는 이 의견을 따랐다.

위서 삼소제기 고귀향공 감로 5년(260) 5월 8일 부분

이 상소는 고귀향공 조모가 죽은지 '''하루만에''' 올라간 상소이다.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에선 이 상소에 대해 '태후가 조모를 서인으로서 예장하려 하자, 사마부와 공(公)의 무리들이 상표를 올려, 왕으로서 예장을 할 것을 빌어 이를 좇았다'라고 했다. 그런데 무릎에 조모의 목을 올려놓고 '''폐하가 시해된 것은 자신의 죄라며 울었다'''는 양반이 '그' 고귀향공 조모의 장례에 대해서 '''하루만에 '조모는 죽어마땅한 천하의 죄인이나, 태후의 체면을 봐서 왕으로 장례해주겠다'며 깎아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은''' 상소문을 상주한 점은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사마부가 정말로 고귀향공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다면, 최소한 앞장서서 저런 상소를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귀향공을 위해 조금 울고 실권도 뭣도 없는 어린 폐황제 몇 번 방문한 것으로 '''서진의 안평왕'''은 '''조위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휘황찬란한 명예를 받아가는데 성공했다. 참된 충신들은 역적으로 몰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지만 사마씨는 조위의 충신으로 둔갑한 것이다. 사마씨가 고아와 과부를 속여가며 천하를 얻은 집안이라던 석륵의 평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황제시해라는 대역무도로 누대에 걸쳐 욕될 사마씨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자 충신인 척한 정객에 가깝다. 딱히 위나라의 충신 포지션이었던지도 의문이던 인물이, 황제가 백주대낮에 정권의 주구에게 시해되자 위나라의 충신으로 태세전환 했다는 것은 자못 섬뜩한 일이다. 형 사마의에 뒤지지 않는 처세술의 인물인 셈. 사마부의 처세술 탐구
과거 시대에도 사마부의 충성심에 의문을 표한 사람이 있었다.
정작 조위에 끝까지 진심어린 마음으로 절의를 굽히지 않은 사마씨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의 조카이다.

3.1. 형과의 기묘한 2인3각


사마의는 조비의 문학연으로 관직을 시작했고 사마부는 조식의 문학연으로 관직을 시작했다. 그 후 사마의가 조조 직할로 옮기자 조비 휘하로 옮겼으며 조비 시절 기도위, 중서랑,황문시랑으로 사마의를 서포트했다. 그후 조예 시절 도지상서로 재정권을 장악해 군권을 잡은 형을 도왔다.
사마의 사후에는 형의 벼슬을 그대로 이으면서 최고지휘관으로도 활동했다.

4. 기타


형인 사마랑 관련 기록인 사마랑전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때(12세) 시험을 보는데 하도 덩치가 커서 나이를 속인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고, 게다가 역시 한 덩치하는 동탁이 사마랑에 대해 '내 아들이랑 꼭 닮았다'고 평가했다고. 사마랑 본인 말에 따르면 아버지, 어머니의 집안 유전이라니 동생들인 사마의와 사마부도 꽤 한 덩치 했을것이라고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5.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조비가 위왕 자리를 이어 받는 논의 내지 조방을 쫓아내고 조모를 세울 때 개입하는 등 선위하는 자리에서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또 조모가 살해당하자 그 시체를 얼싸안고 통곡하는가 하면 정사와 달리 사마염이 선양받는 자리에서 안평왕 자리를 사양하고 물러나는 등, 사마씨 집안에서 가장 양심적인 인물로 서술되어 있다.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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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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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13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언제나 고만고만한 능력치를 지닌 내정형 문관이지만, 수명이 긴지라 성장할 여지는 많다. 작은 형인 사마의만은 못하지만, 큰형인 사마랑보단 능력치가 좋은 편. 말년에 군대도 이끌어봐서 통솔도 어느정도는 찍어준다. 연의에서의 충절을 반영했는지, 정작 가장 높은 능력치는 지력, 정치가 아닌 매력이다. 그런데 어찌 일러스트는 선함과는 거리가 있는 은근히 독해보이는 인상이다.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는 67/49/78/87의 준수한 문관. 투석, 혼란, 고무를 가지고 있어서 원한다면 전장에서 써먹을 수도 있다.
삼국지 10에서는 72/35/77/79/87의 좋은 문관으로 등장. 명사 특기도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농업, 보수, 진정, 유인, 명사. 총 5개다.
삼국지 11에서는 전반적으로 조금 너프 당했지만 70/37/76/79/85로 여전히 쓸만하다.
삼국지 12에서의 일러스트는 두 개의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데 정황상 황제 자리를 차지하는 사마염을 꾸짖는 모습이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매력만 빠진 상태에서 전작과 같으며 중신특성은 없고 특기는 상업 2, 농업 3, 문화 6, 언변 4인 쓸만한 B급 문관. 전수특기는 문화이며 전법은 위무.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1, 무력 37, 지력 76, 정치 79, 매력 84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1 상승했다. 개성은 조달, 문화, 주의는 왕도, 정책은 세출개선 Lv 3, 진형은 방원, 충차, 전법은 연노, 고무, 충차, 친애무장은 조모, 혐오무장은 없다.
진삼국무쌍7에서는 고평릉 사변에 아군 클론무장으로 참전한다. 장성모드에서 형 사마의와 특수대사가 있는데, 형과 사상적으로 대립한다. 사마의도 인정할 정도의 재능을 가졌지만 재능있는 자에게만 충성하는 사마의와 달리 어떤 상황에서든 진심으로 섬기는 인물로 캐릭터가 잡혀있다.
반삼국지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문관 이미지와는 다르게 무장으로 등장해서 형 사마의를 도와서 싸우다가 허리가 두 동강이 나서 죽는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캐릭터 자체가 원래 나올 예정이 없다가 갑자기 나와서인지 형 사마랑과 더불어 오리지날 캐릭터로 등장한다.
화봉요원에서는 사마의와 바둑을 두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달고 나온다. 그런데 사마부는 180년생으로 제갈량과 헌제보다 1살이 더 많은데 도저히 제갈량보다 나이가 많아보이지가 않는다... 불법스캔본엔 사마규라고 오역.
대군사 사마의에서는 지나치게 이미지가 미화된 모습을 보인다. 사마사와 더불어 실제 역사와 작중에서의 모습 사이의 괴리감이 큰 인물이다.[15] 극초반부에는 형 두 명에 비해 꽤 아둔한 듯 보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경험이 쌓이면서 꽤 믿음직스러운 캐릭터로 변화한다. 이후 시즌2 초중반부는 제갈량 북벌 때문에 비중이 공기화(...)되지만 이후 사마의가 조상과의 정치싸움을 시작하게 되면서 점차 비중이 증가하고 고평릉 사변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하지만 이후 흑화한 형과 반목하고 끝내 결별한다.

[1] 본래 태사(太師)로 사마사(司馬師)의 이름을 피휘하였기에 태재라 한다.[2] 바로 위의 형 사마의가 179년생인데 본인은 180년생이다. 즉 연년생이다.[3] 형인 사마의는 조비의 문학연으로 시작[4] 사마팔달이라곤 하지만 사마부 밑으론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맏형 사마랑은 바로 밑 두 아우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형제들 중 제대로 출세코스를 달린건 사마의와 사마부 2명이다.[5] 조서의 초안을 잡는 벼슬[6] 황제를 곁에서 모시면서 궁궐 안팎을 연락하는 벼슬[7] 황제의 경호군인 우림기병을 감독하는 벼슬[8] 사마의와 닮았다는 평가를 듣고 기뻐했다고 한다[9] 심지어 문학연으로 시작해 태위-태부로 관직 생활이 끝난건 형과 똑같다.[10] 從孫, 형제의 손자, 조카의 아들. 사마염은 사마부의 조카인 사마소의 장남이다.[11] 사마염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사마의와 그 조카들을 훌륭히 보필하였다는 점에서 공이 크고 게다가 서진이 건국된 시점에서 무려 '''85세'''의 고령이기도 했다.[12] 진태가충을 처형해야 한다고 아니하면 사마소 자신이 책임을 지라고 진언하기라도 했다. [13] 똑같이 권신 집안의 출신인 헌목황후 조씨는 오빠인 조비후한을 멸망시킬때 남편인 헌제보다도 더 격렬히 저항한 것과 비교하면 더 명확하다. 참고로 이때 조 황후의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4] <속담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사마사가 하후현을 주살하려고 할때 뜻을 정하지 못해 숙부 사마부에게 하후현에 대해서 "나의 재주로 족히 (하후현을) 제압할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사마부가 조엄이 자식의 장례를 치룰때를 언급하며 "네가 거기에 왔을때 좌중의 절반만 일어섰지만 하후현이 왔을때는 전부 일어섰다, 너는 하후현보다 못한거 같다" 사마사가 이를 듣고 하후현을 주살했다.[15] 사마사가 사서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실상 동생 사마소가 작중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똑같다. 사마부 역시 이 밟은 출세루트를 같이 밟았으며, 고평릉 사변에서도 적극 참여했다. 또한, 작중에서 보여지는 것 처럼 살육을 혐오하기는 커녕 하후현과 그 일당들의 살육에 앞장섰으며, 조방 폐위와 조모 살해를 옹호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