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
1. 개요
'''保守主義 / Conservatism'''
국어사전에서의 사전적 의미는 '새로운 것과 변화보다 옛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 정치성향에서의 보수주의란 현 체제에 대한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최소한의 개혁과 변화만을 지향하는 정치이념이다. 상대어는 진보주의.
2. 상세
"보수는 반개혁적이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사상"이라고 왜곡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보수주의는 어떤 변화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진보주의와의 비교에 의한 상대적인 개념이다.[1] '보수'라고 분류되는 것에는 '바꾸지 말자'와 '천천히 바꾸자'와 '바꾸자' 등이 모두 혼재되어 있다.[2] 심지어는 과거로 회귀하려는 것이 진보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3] 굳이 보수주의적인 관념을 요약하자면, "바꿀건 바꾸고, 지킬건 지키고, 조심할건 조심하자"는 상당히 상식적인 요약문만이 나오는데, 이런 요약은 어디에 강조점을 두느냐의 뉘앙스 차이만 있을 뿐 진보주의자들도 똑같이 동의하는 것이다. 결국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구체적인 개별 사안에서, 상호 의존적으로 분류될 뿐이다.
보수주의는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과거에 진보적 이념이었다가 근래에 보수적 이념으로 변한 것들이 많다.[4] 또한 반대로, 과거에는 보수적 이념이었다가 근래에 진보적 이념으로 바뀐 것들도 많다.[5]
정치이론가 코리 로빈에 의하면 "보수주의는 바로 사람들이 상급자들(혹은 상위 개념)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 특히 사적 영역에서 자유를 얻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우파라는 단어의 시작이기도 하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우파라는 이름은 프랑스 혁명 시기 당시 삼부회에서 왕당파가 오른쪽에 앉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당시에는 사회주의 운동도 본격화되기 이전이니 경제적 이념보다는 유지파/개혁파로 좌우가 갈릴 수밖에 없었다.
3. 상징
보수주의의 상징은 파란색 깃발이다.[6] 파란색은 영국 토리파 시절부터 유래한 것이다.
역사상에서 군주정과 교회를 상징하는 색깔은 빨간색이고 프랑스나 러시아 등의 왕당파가 하얀색 깃발을 쓰기도 하고 "적백내전", "백색테러", "백의사" 등의 용어는 여기에서 유래했으나 흰색은 평화주의를 상징하는 색깔로 받아들여지고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파란색을 보수주의에서 자주 쓴다.# 그래서인지 종종 민족주의자들도 파란색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에는 공화당의 영향으로 빨간색이 보수주의를 상징한다. 물론 갈색 등 다른 색을 쓰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대표적인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파란색을 썼으나, 2012년에 새누리당으로 개편하면서 미국의 공화당처럼 빨간색을 채택하여 2020년 국민의힘까지 붉은 계열의 색상을 사용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전원책은 빨간색은 좌파의 색인데 한국에서는 보수정당이 쓰고 있다며 몇 차례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2018년, 2020년
이후 국민의힘은 기존의 빨간색과 보수주의의 색인 파란색, 흰색 이렇게 3가지 색깔을 당색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아직도 당 로고는 붉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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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
보수주의는 역사적 보수주의와 심리적 보수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일컫는 보수주의는 역사적 보수주의, 즉 사상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의미를 지닌 정치사상의 한 조류를 말한다.
초기 보수주의는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18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정치철학자였던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 프랑스 대혁명 이듬해인 1790년 내놓은 저서 <프랑스혁명에 대한 성찰>을 통해 사상적 조류로서 이론적 기초를 갖추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가 영국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면서 당시 급격하고 과격했던 프랑스 대혁명 이후 급진적이며 급격한 변혁보다는 검증된 과거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점진적으로 조금씩 체제의 현상을 개선해 나가자는 영국의 <ins class="diff">고</ins>점진주의(개량주의)를 지지했다.
'보수주의'라는 용어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정복고주의자였던 F. R. 샤토브리앙 자작[7] 이 1818년 왕당주의운동 기관지 <보수주의자(Le Conservateur)>라는 간행물을 발간한 데에서 최초로 확인된다.[8] 1830년 7월혁명으로 부르봉왕가가 몰락하기 전까지 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확산을 막고 왕정복고의 정당성을 옹호하던 왕당파의 정치적 입장 또는 이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근대 보수주의로서의 이념은 영국, 독일 등의 유럽국가들은 물론 미국에까지 확산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시민계급의 진보주의와 대립한 귀족 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 근대 보수주의와는 달리, 19세기 후반부터는 사회주의에 바탕을 둔 노동자 계급의 진보주의에 대해 시민 계급의 자유주의[9] 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하기 위한 현대적 보수주의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역사적 보수주의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급진적인 성향에 대하여 현재의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질서를 유지하고 그의 발전에서 이익을 꾀하는 것으로 변모한 것이다.
5. 특징
아래의 특징은 주로 서방세계의 보수주의[10] 에 한해서 적용된다. 또한, 모든 보수주의자들을 아래의 특징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
- 보수주의의 기본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상대 의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관용에 있다. 즉, 일단 상대편의 의견을 듣고 그 안에서 점접을 찾는다. 어떤 보수정치인은 그래서 정치는 100점이 아니라 60점이어야한다고 주장했다.
-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기회의 평등과 이에 따른 차등적 분배를 선호한다. 이에 따라 정부에 의한 일련의 분배 정책에 반대, 즉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할당제 역시 기회의 평등에 위배된다며 반대한다.
- 정당하고 합법적으로 부여된 권력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인다. 예로 들어서 선거를 통해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공직자나 법에 근거하여 합법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 공무원에게 협조적이며 법을 존중하고 자발적으로 따르는 자세를 보인다. 다만 부정의하고 합법적이지 않는 법이나 권력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자는 거부하거나 저항한다. 이 경우, 보수와 진보가 한 목소리로 부당한 법과 권력에 맞서는 풍경도 드물게 볼 수 있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헌법과 하위 법률에 부합하는 합법적이고 정당한 권력에 대해서만 복종하며 오히려 정당하고 합법적이지 않은 권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저항하기도 한다.
- 법치주의와 자유를 중시하기에, 배경이나 결과에 따른 차등 대우를 당연하게 여기며 이를 지키지 않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강경하게 비난하고 법에 따라 처벌하려는 의지가 강하다.[11] 배경이나 결과에 따른 차등 대우를 당연하게 여기기에, 대체적으로 자유경쟁 속에서 일어나는 차이와 격차에 대해 긍정하고 그 속에서 발생하게 되는 하위 계층에 대한 처우 개선에 대해선 어느정도 경시하고,자유로운 경쟁 속에서 발생하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한다. 이는 차등 대우를 당연시하는 것과 관련된 행동이다. 모든 종류의 차별을 반대하며 평등주의에 입각해 하위 계층의 처우 개선을 매우 중시하는 진보주의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
- 관행을 중시하며, 선례가 없는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이다.[12]
- 급진적인 변화보다는 체계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선호하며,[13] 안정적인 삶을 중시한다. 여기서 보수주의(保守主義)라는 말이 나왔다.
- 사회보수주의자 같은 경우,법으로 정해져 있는 규율과 관례는 중시하지만,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는 도덕적·윤리적 감수성(예를 들어 인권 감수성[14] 이나 성소수자 인권 등)은 경시한다.
사회보수주의자들이 중시하는 도덕과 윤리는 가족 가치같은 법률이나 헌법 등을 통해 전해내려온 법치주의적 내용은 개개인에 행동에 따른 의무와 책임을 중시하는 도덕과 윤리를 말하는 것이며 진보주의자들이 주로 주장하는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 등은 법이나 규정이 아닌 가변적인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나쁘게 본다. 사회보수주의자의 시각에서 이런 것들은 비이성적, 비논리적 개념이라고 보는 것.
이러한 부분은 형법으로는 규문주의라고 하는데 법의 조문 그대로의 해석을 중요시한다. 진보주의의 경우 판례주의라고 칭한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진보주의에 비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으나, 정치적 올바름 관련 이슈에 대해서 보수주의가 취하는 입장은 일관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진보주의와의 공통점으로 작용한다. 보수주의자가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하는 사례가 많으나 반대로 보수주의자에 의해 정치적 올바름이 주장되고 옹호되는 사례도 드물게 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본래 모든 차별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이념이었기에 진보주의자의 성향과 부합되지만, 동시에 대중주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일반 대중에겐 도덕이나 윤리와의 연관성도 커 보이기 때문에[15] 지나친 정치적 올바름으로 인한 폐해는 문화적으로는 보통 진보주의자에 의해 발생되지만, 정치적·사회적으로는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의 좌우합작에 의해 발생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16]
5.1. 재산과 보수주의의 관계
보통 부유한 계층일수록, 그리고 부강한 국가일수록 현상 유지를 바라는 성향이 강해 보수적이기 쉬울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적 우파는 맞아도 사회적 보수주의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부유층=보수와 같은 등식은 절대 성립되지 않는다. 현대까지 혁명에 투신했던 사람들은 나름대로 당신의 정치적 배경이나 시대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 였는데, 이러려면 아무래도 당장 먹고사는게 어렵지 않고, 잘 교육받은 쁘띠부르주아지 계층이 아무래도 혁명의 선두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던가, 마르크스라던가, 체 게바라라던가 시몬 볼리바르라던가.
동시에 티 파티나 네오나치와 같이 사회 하층민이 쇼비니즘이라고 불리는 보수적 태도를 띄는 경우도 심각하게 많다. 오히려 혁명을 반대하는 보수주의는 사회 하층민들의 경우에서도 보기 쉽다. 보수주의 하층민들은 "변화가 동반되는 경우 현 상태에서 누리고(?)있는 코딱지만한 혜택마저 박탈 될 것을 두려워 해" 보수화 된다고 보는 것이다. 상류층이 보기에는 그런 작은 혜택에 집착하는 것은 우스워 보일 수 있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하층민에게는 당장 생존의 문제가 걸리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오바마 케어에 가장 극렬히 반대했던 것은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의 혜택을 누리고 있던 빈곤층과 노령층이었다. 당시 공화당은 "오바마 케어가 시행되는 경우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에 반영되는 예산이 깎여 혜택이 줄어든다."고 오바마케어를 공격했으며 여기에 동조한 것이 바로 미국 사회의 빈민층과 고령층이었다. 그 밖에도 변화 그 자체를 받아들일 정신적 여력이나 변화에 대해 정보를 획득할 수단 역시 부족하다는 점 또한 문제가 된다.
이와는 반대로 낮은 교육수준과 정보부재로 인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는 저학력 빈곤층이나 고연령층과는 달리 쁘띠부르주아 계층은 충분한 교육수준과 더불어 정보를 획득할 수 있는 여력도 많다보니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 큰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변화를 통해 더 많은 이익을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6.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의 대략적인 특징은 작은 정부(경제 정책에서만)와 강력한 공권력과 엄벌주의, 사회/문화적 보수성과 북한과의 대치로 인한 강력한 반공주의, 절대적인 미국 중시 외교와 반중 성향으로 압축해볼 수 있다.
한나라당계 정당은 여야를 떠나서 한국의 보수정당들이 수십년 전부터 계승한다고 천명한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17] 와 시장경제[18] 를 보수가 추구해야할 양대 가치이자 핵심적인 보수주의 이념으로 본다. 또 여기에서도 해석이 나뉘는데 혹자는 이미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달성했으므로 지키기만 하면된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시장경제도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각자의 정견에 따른 정책으로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대한민국이 탄생한 1948년도 직후에는 모든 보수주의자가 모두 위와 같이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민주당계 보수정당은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에 대해서 반대하는 반동주의적인 보수주의를 추구했다. 정부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정치처럼 대통령 중심제를 추구하였으며 한민당은 유럽정치처럼 의회 중심의 의회민주주의 정치를 추구하였는데 이것은 정치권력의 배분과 관련된 문제로서 이로 인한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결국 반동주의적인 보수주의와 이승만이 추구했던 개혁을 수용하는 보수주의로 분화되었다. 이후 한민당은 민주국민당, 민주당을 거치면서 다양한 정파와 계파가 이합집산하며 1948년도 기존의 반동주의적인 성향이 약화되어갔다.
실제적으로 한국의 보수주의가 첫문단의 성향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배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1960년대 이래로 개발연대식 발전, 특히 박정희 정부가 추구한 1970년대 코포라티즘적이고 정부의 시장개입과 대기업 위주의 관치경제정책을 선호하며 이로 인해 대기업 중심의 관치경제, 재벌 경제를 옹호한다. 친박이 생긴 것도 이런 측면이 크게 작용한다. 1990년대 김영삼 정부 때부터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에서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면서 관치경제에서 탈피하려는 경제개혁을 추구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신보수주의 열풍이 불면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옹호하는 면을 보이는데, 이는 IMF 이후 미셸 캉드쉬로 인해 심어졌으며 대기업 중심으로 시장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민주화 열풍이 불면서 경제노선이 조금씩 수정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단순히 정의내리기에는 복잡하다.
사회적 측면을 따지면 전반적으로 사회보수주의 성향을 주로 가진다.[19][20][21][22] 다만, 종교적인 보수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가 항상 일치한다고 볼 순 없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또한 문화적인 보수주의도 반동주의까지 나아가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경제적 측면을 따지면, 기본적으로 모두들 경제적 자유주의에 따른 시장경제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재벌 중심으로 혜택을 주는 정부의 시장개입정책을 옹호하는 관치경제적 성향도 보이고 경제민주화와 공화주의의 영향으로 공정한 시장경제질서를 위한 사회적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성향도 보이고 재정보수주의 이념에 따라서 재정준칙 등을 도입하면서 자유시장경제를 위한 작은 정부를 주장하는 성향도 보인다. 개괄적으로는 시장경제를 부정하진 않지만 구체적인 세부정책면에서 상호배제적인 정책이 모두 주장되고 있다.
복지에 관해서는 전통적인 사회보수주의 계파는 초저소득층에 국한된 선별적 복지를 찬성하고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면서 어느정도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반면에 새로운 자유보수주의 계파에서는 복지국가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기본소득을 제안하면서 일단 기존 복지들을 전반적으로 재정비하고 그렇게 아낀 재정들로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새로운 정파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기본소득을 보고있으며 사회구조의 변화로 인해서 대규모 실업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실질적으로 미국식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하는 자유지상주의적 보수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대한민국의 안보적 입장에서 친미국적인 한미동맹으로 북한과 대항하는것을 선호하고 반공, 반북, 반중 성향이 강하다.한국 보수주의의 고유한 특성중 하나로는 반공주의가 강력하게 남아있는 국가로 꼽힌다.[23] 때문에 비교적 일본에 우호적이라고[24] 공격받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참고. 2020년 시점에서는 국민의힘이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다.
6.1. 민주당계 보수주의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원래 민주당계 정당은 보수주의 정당이었다.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로 정권교체하기 이전까지 1990년대 정당과 정당사를 연구한 다수의 문헌들을 살펴보면 보수여당계, 보수야당계, 혁신정당계[25] 등으로 정당을 분류했다.
민주당계 보수정당의 시초인 한국민주당은 반동주의 보수정당이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사사오입개헌을 계기로 해서 이승만의 자유당에 맞서기 위해서 정계는 대개편이 이뤄졌다. 그리하여 한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 등 반이승만 세력이 뭉쳐서 최초의 보수야당들의 대연합이 이뤄졌다. 이렇게해서 반동주의적 이념을 버리고 탄생한 보수주의 정당이 민주당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 5.16 군사정변 이후 자유당과 민주당 등이 이합집산을 거쳐서 신민당으로 뭉치게 되었는데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유진산, 윤보선 등 보수주의적인 정체성은 확고했다.
그러나 1970년대 40대 기수론을 계기로 해서 김영삼, 이철승, 김대중 등이 부상하였고 신민당은 기존의 강경한 보수주의 정당에서 온건화된 자유보수주의 정당으로 일부 변화하였다. 물론 당내에 강경보수파들은 뚜렷했기 때문에 온건보수파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26] 이런 신세대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서울의 봄 이후인 1980년대부터였다.
1979~1980년 2년 동안 민주화와 각종 사회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이 신민당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기존의 지하조직이었던 학생운동세력이 급속도로 커지면서 급진화되었고 사회주의 성향이 짙어졌다. 제도권 정치에서 수용되지 못했던 한계 속에서 김영삼과 김대중은 학생운동세력과 제휴하면서 반정부투쟁을 이어갔고 이 과정 속에서 온건보수파들이 주류가 되면서 민주당계 보수정당의 보수주의적인 면모가 약화되었다.
1980년대 관제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이 몰락하고 민주당계 보수정당인 신한민주당도 몰락한 가운데 1987년 신한민주당에서 분당한 통일민주당이 민주당계 보수정당의 유일한 계승자로 남았다. 그러나 대선을 앞둔 대선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분열하였고 김영삼을 따르는 상도동계만 남았고 김대중을 따르는 동교동계는 분당해서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제6공화국 초창기만 하더라도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보수정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도 서로 이질적인 보수정당들이 합당한 3당 합당이 이뤄진 후 민자당계 보수정당이 탄생하였다. 이때 민주당계 보수정당이었던 통일민주당은 민주자유당에 합류하였고 또다른 민주당계 보수정당인 평화민주당은 다른 야당들과 합당해서 1991년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후 민주당은 연달은 선거패배와 더불어서 김영삼이 장악한 민자당-신한국당과 혁신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민자당에서 떨어져 나온 새한국당을 비롯한 강경보수파와 합치고 보수정당인 자유민주연합와 연정을 맺고 정권교체에 성공하면서 김대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27] 김대중 대통령은 이 시기 중도개혁주의를 내세우기도 했지만 온건보수를 내세우기도 했다는 점으로 봤을 때 완전하게 민주당계 보수의 전통을 이어가지 않았다고 볼 수 없어보인다.
결정적으로 민주당계 보수정당이 소멸하게 된 계기는 열린우리당의 창당으로 보인다. 정당이라는 구분때문에 굳이 김영삼은 자유보수주의 성향이라고 하고 김대중은 보수자유주의 성향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두 대통령이 추진한 정책들을 본다면 대북정책을 제외하면 큰 차이를 느낄 수가 없다. 이것은 정치적 후계들로도 이어지는데 현재의 보수정당과 호남 지역주의 정당도 엄청나게 이념적인 차이, 정책적인 차이가 생긴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김영삼과 김대중에 비하면 확연하게 다르게 보수주의 이념의 계승을 포기한 자유주의 중도 성향의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면서 중도우파에서 중도좌파를 포괄하는 세력들이 뭉쳤고 이것은 이념적으로 민주당계 보수정당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최초의 민주당계 자유주의 정당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다가 열린우리당 이후 2010년을 전후해서 민주당계 정당은 우익적 이념의 계승도 완전히 탈피하고 사회자유주의로 급진화 되어갔다.
결론적으로는 더불어민주당의 이념은 사회자유주의로서 민주당의 민주당계 보수주의 이념을 계승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열린우리당 시기 리버럴의 중도 성향에 가까운 정당이다. 굳이 현재 민주당계 정당에서 민주당계 보수주의의 계승을 찾으려면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계 쪽의 보수자유주의~중도개혁주의에 걸친 이념은 현재 민생당 또는 중도주의를 주장하는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6.2. 합리적 보수
합리적 보수라는 용어가 단순히 중도보수가 자신의 정당성을 위한 프레임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근혜를 무조건 수호하자는 보수세력과 탄핵의 책임을 인정하고 보수의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는 중도보수세력을 구분지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새로운보수당 계열의 중도보수뿐 아니라 국민의힘 일부, 진보진영에서도 자주 들린다. 대표적으로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은 '합리적 보수는 동반자이고 수구 보수는 적'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또한 제19대 대통령 선거기간 중 문재인 당시 후보는 썰전에 전화통화로나마 출연하여 '전원책 변호사같은 애국보수가 가짜 보수를 내몰아야 한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적 보수는 자기합리화용 밈으로 전락한 현실과는 별개로 2010년대 후반 한국 정치판에서 극우·수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우익 정치세력이 추구하는 노선이다.
합리적 보수를 비꼬아 보리적 합수, 보리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보리수 항목을 참고.
실제로 21대 총선 이후 미래통합당의 천하람 당시 후보가 "70~80년대에는 국가주도형 반공보수가 있다면 2020년에는 그에 맞는 21세기형 보수가 있어야 한다"라며 합리적 보수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6.3. 민족주의와의 관계
서구의 강경우파 또는 극우파들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데 반해 한국의 보수주의는 서구의 중도우파나 우파처럼 국민국가 개념의 내셔널리즘을 조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의도된 이념적인 변화보다는 우연적 요소가 많이 작용한 것으로서 북한의 존재와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게 되면서 민족주의 우파는 헤게모니를 상실했고 보수가 내세우는 내셔널리즘은 점차적으로 민족(Ethnic group)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에서 국민국가(Nation-state)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 내셔널리즘으로 변화하는 중이다.[28]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세계적으로 각지의 계몽주의적 사상가들[29] 에게 있어서 기존 질서의 부족사회,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다만 한국의 경우에는 고려 왕조 이후로 천년 넘게 거의 단일된 정치체를 형성하면서 혈연적으로 거의 동질적인 민족이 형성되었고 조선 왕조 때는 봉건제도를 상당히 많이 타파하고 유교 이념에 따라서 군현제가 전국으로 전면적 확대되면서 기존의 호족들이 분화되어서 중앙조정의 주요지배계급으로 편입된 양반계급과 중앙조정에 진출하는데 실패한 지방의 토착적인 호족들은 고려시대보다 권력이 많이 약화된 향리계급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을 흔히 중앙집권국가와 봉건국가의 혼합된 형태로 생각한다.
그래서 19세기 구한말 개화파들에게 있어서 국민국가의 형성보다는 정치체제에 있어서 전제군주정이냐 입헌군주정이냐 민주공화정이냐가 핵심적인 화두였다. 온건개화파는 전제군주정적인 존왕양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뿌리를 두고 개화사상을 전개하였으며 급진개화파는 입헌군주정이나 민주공화정이냐로 의견이 갈렸는데 당시로서는 민주공화정은 좌익적 이념 중에서 극좌적 이념으로 사실상 역모죄에 해당했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주로 입헌군주정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갔다.
하지만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피탈당하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였다. 국권을 회복하여 국민국가를 재건설하는 것이 새로운 과제로 떠올랐고 1910년대 유림을 중심으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복벽주의자들과 개화파를 중심으로 민주공화정을 주장하는 신진세력으로 나뉘었는데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전자는 소멸하고 후자가 독립운동의 확고한 주류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익의 이념은 민족개념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 국민국가의 건설을 외치는 민족주의가 되었다.
이런 민족주의는 194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지만 1948년 한반도에 두개의 공화국이 건설되면서 대한민국의 우익은 민족주의에서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 내셔널리즘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북한의 존재와 반공이 국시가 되면서 민족주의는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국가주의로 변화했다가 1990년대 세계화 이후로는 시민 내셔널리즘의 양상이 늘어나고 있다. 정당을 기준으로도 거대 양당 가운데 대한민국 보수정당은 민족주의보다는 민족의 개념과 국민국가의 개념이 혼재된 내셔널리즘에 가까운 편이다. 오히려 민주당계 정당이 혈통적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통일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에 더 가깝다.
특이하게도 대한민국에서는 타 국가와는 다르게 북한에 대한 관점, 안보관이 척도가 되는 경우가 있다. 한국전쟁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북한의 대남도발에 대해 북한의 적극적인 태도 변화를 요구한다. 경제력과 국방력 등이 북한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에 선 지가 오래되었지만, 현재 대한민국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가 아닌 북한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전쟁시 북한에 대한 억제력과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미국과의 공조를 중시한다. 이것이 보수우파에게 있어 민족이라는 개념보다는 국민국가의 개념을 더욱 인지하게 만들었다.
범진보 측은 이와 달리 지원과 회담으로 풀어나가자는 게 주된 스탠스다. 그리고 혈연적으로 비슷하다는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한다.
양안관계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 다만 여기서는 입장이 반전된 모습이다. 범람연맹이 현실적인 이유로 본토와의 대화를 중요시 하지만, 범록연맹은 독립을 추구한다. 범람연맹은 민족주의적이고 범록연맹은 국민국가적 시민 내셔널리즘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6.4. 외교적 성향
강력한 한미동맹을 중시하며 일본과의 관계는 과거사 문제, 독도 문제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면서도 우선은 북한이나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당장은 협력해야 한다고 여긴다. 일부 강경보수 계통의 뉴라이트 성향의 경우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신봉하는 측면이 있다. 중국과의 관계에 경우 박근혜 정부 이후 사드보복, 역사왜곡, 코로나-19에 대한 중국 정부의 미미한 대처 등으로 반중성향이 극대화 되었으며 대체적으로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미국의 반중연대 참여, 탈중국화를 주장하고 있다. 공산진영에 반감을 품고 있지만, 탈냉전을 거치면서 노태우 정부 당시에는 북방외교를 수립하는등 어느 정도 현실주의적인 유연한 포지션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30]
7. 분파
8. 같이 보기
- 우파
- 전통 - 보수주의와 연관 있는 개념이다.
- 내셔널리즘
- 고전적 자유주의
- 복음주의
- 반공주의
- 경제적 자유주의
- 신자유주의 -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가 자유시장으로 개혁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문화적으로는 좌경화된 이념이다. 다만 정부축소가 이 이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하부분파다.
- 국제민주연합 - 세계 보수주의 정당들의 연합체
- 존경성 정치 - 보수우파들이 내세우는 역-정체성 정치다. 다만 다수자 역차별을 내세우는 대안우파의 정체성 정치와는 또 다르다.[31]
- 수구
- 반동
[1] 동시에 진보 역시도 보수와 비교했을때 인식되는 개념이다.[2] 가령 낙태가 완전히 금지된 나라에서 보수주의자는 "언젠가는 허용하자"가 아니라 "바꾸지 말자"고 주장한다. 반면 낙태가 완전히 허용된 나라에서 보수주의자는 '바꾸지 말자'가 아니라 '바꾸자'고 주장한다.[3] 가령 19세기 유럽의 민주주의&공화주의는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실현되었(다고 생각되)던 체제로 되돌아가자는 사상이었다.[4] 대표적인 예가 신자유주의이다.[5] 가령 '다문화'는 19세기 유럽에서 보수적 이데올로기였다.[6] Adams, Sean; Morioka, Noreen; Stone, Terry Lee (2006). Color Design Workbook: A Real World Guide to Using Color in Graphic Design. Gloucester, Mass.: Rockport Publishers. pp. 86. ISBN 159253192X. OCLC 60393965.[7] 원래는 루소의 영향을 받은 무신론자였으나 프랑스 혁명에 환멸을 느껴 왕정복고주의자 겸 골수 천주교도가 되었으며,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바탕으로 《기독교의 정수(Génie du christianisme)》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쇠고기 중 가장 비싼 부위로 통하는 샤토브리앙 스테이크가 바로 이 사람에서 유래한 것이다.[8] 이매뉴얼 월러스틴, 근대세계체제 4.[9] 다만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였던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는 대체적으로 2차 대전 이후 지금과 같은 형태의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으로 여겨진다.[10] 자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대부분)경제적 자유주의 등[11] Skitka(1992a; 1992b) 등의 주장에서 근거를 볼 수 있다.[12]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도 선례가 있는 행위만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선례 없는 행위를 항상 부정하진 못한다.[13] 보수는 변화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기 때문에, 모든 변화에 반대하는 수구나, 변화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반동과는 구분이 필요하다.[14] 인권 문제가 제기되어 있는 특정 상황에서 그 상황을 인권 관련 상황으로 지각하고 해석하며, 그 상황에서 가능한 행동이 다른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지를 알며,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식하는 심리과정.[15] 특히 법이나 헌법으로 정해져 있는 도덕이나 윤리는 정치적 올바름과 의외로 높은 확률로 결합되곤 한다. 법이나 헌법에 의해 정해진 도덕과 윤리가 보통 보수주의에 의해 추구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대부분 보수주의자 정치인들은 인기영합주의적 측면에서 정치적 올바름이나 정치적 올바름에 어긋나는 언어사용에 대한 검열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16] 진보주의자는 차별에 대한 반대를 위해, 보수주의자는 대중과의 영합을 위해 이런 행보를 보인다.[17] 헌법상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동의어인데 이것은 방어적 민주주의다. 대한민국 보수주의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미묘하게 다르다. 경제적 자유주의자 중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안에 자유시장경제도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18] 기본적으로 보수우파들은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각론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주류세력인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비주류들로 나뉘어져 있다.[19] 대표적인 사회보수주의 성향의 정책으로는 성매매 반대와 리얼돌 반대, 마약 및 약물 소지 금지, 총기소지 및 총기거래 금지,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미디어물 규제, 중독에 대한 방지법 제정 등 다방면의 대중문화와 컨텐츠 산업,문화예술행위 등에 대한 규제와 검열 정책을 띈다.[20] 단,동성애 문제에 대해선 보수정당 지지자들과 보수 정치인 뿐만 아니라,일부 민주당계 정치인(김진표,박영선 등)들도 동성애에 대해 반대하는 경우가 상당하고,아예 민주당의 안방인 호남에서는 동성애를 용납조차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선 10대,20대,30대 일부를 제외하고 30대 상당수~40대 부터는 동성애에 대해 상당히 반대하는 모습을 띄는 이유도 있다.[21] 동성애등 여러면에서 차별을 보이는 기독교 우파 등. 대표적 인물인 제명당한 목사 전광훈은 정치극단주의로 유명하다. 반대로 좌파 버전은 극단적 페미니즘 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SJW를 예로 들 수 있겠다.[22] 하지만 사회보수주의적인 것을 반드시 고수한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호주제 폐지, 동성동본 결혼의 수용, 성적 자기결정권에 따른 간통죄 폐지 등을 본다면 어느 정도는 사회적인 변화를 수용하는 모습도 보인다.[23]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에서는 냉전 종식과 더불어 해당국들의 좌우 논쟁에서 자본주의 vs 공산주의 성향의 담론은 많이 옅어진 편에 속한다. 한국에서는 북한의 존재 유무로 인해 계속해서 반공주의가 지속 중이다. 일각에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북한식 권위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오용하는 성격이 상당히 존재한다며 북한의 전체주의는 정치적인 본질에 있어서는 좌파 파시즘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미국, 일본, 한국 등의 나라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가 되어서 좌익 파시즘이 된다고 믿는다. 실제로 중국 공산당, 베트남 공산당만 봐도 한때 시장경제로 개방하면 그들의 권위주의적인 면모가 없어지고 중산층이 양성되면서 민주화가 되어서 자유민주주의가 될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현재만 봐도 알다시피 그냥 독재국가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24] ...이라기보단 적대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특히나 보수는 경제 가치를 중요시 하기에 역사적 문제에서 한발짝 물러나 두드러진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보수 역사를 보면 알듯이 사실이 아니다.[25] 지금의 진보정당 계열을 의미한다.[26] 시대적인 배경도 한몫을 했는데 40대 기수론의 붐이 시작된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전세계적으로 데탕트 분위기가 일면서 냉전이 완화되었고 이로 인해서 정부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서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5년 베트남 전쟁의 결말로 남베트남이 패망하자 그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사회전반적으로 강경보수화 되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1979년부터 본격적으로 풀렸다.[27] 한편 중간에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가 떨어져 나가고 정치적 지지를 통해서 주류 민주당계 정당의 계보를 획득하면서 1991년의 민주당을 계승한 민주당이 YS, DJ 없이 자립해보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삼김으로 대표되는 지역주의 정치구도에 분노하던 중에서 삼김청산을 외치는 개혁보수적 슬로건을 내세운 신한국당의 이회창에게 합류하며 한나라당을 창당하였다.[28] 다만 완전한 시민 내셔널리즘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민족의 통일을 주장하는 우파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민족의 개념과 국민국가의 개념이 혼재된 내셔널리즘으로 보인다. 그러나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국민국가에 대한 자각이 커지면서 통일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으며 이들은 시민 내셔널리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29] 오늘날 고전적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자유주의, 고전적 공화주의라고 불리는 공화주의,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뿌리 형태의 민주주의. 3가지 이념을 흔히 꼽는다.[30] 소련때와는 달리 현재 러시아의 경우는 어느 정도 긴밀한 관계 수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보수정당들도 찬성하는 편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에는 일본의 우경화가 심화되자 친중 포지션을 취하면서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기도 했다.[31] 보수우파들이 존경성 정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는 적고, 주로 보수우파가 사회적 소수자의 정체성 정치를 비난하면서 소수자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행태를 보이는 것에 대해 진보진영이나 자유주의자들이 비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