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다 문 밖의 변

 


1. 개요
2. 배경
3. 사건 발생
4. 사건의 결과
5. 화해
6. 번외
7. 사쿠라다 문 18사
8. 음모론?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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桜田門外の変(さくらだもんがいのへん, 사쿠라다몬가이노헨). 1860년 3월 24일, 일본 에도 성 사쿠라다 문 밖에서 일어난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 암살 사건.

2. 배경


안세이 5년(1858), 오오쿠의 난키(南紀)파의 지지로 다이로에 취임한 히코네 번(彦根藩)[1] 번주 이이 나오스케는 두 가지의 중요한 현안을 처리해야만 했다. 첫 번째는 에도 막부 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徳川家定)의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였고, 두 번째는 미국과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 문제였다.
후계자 문제를 놓고 히토츠바시(一橋)파는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제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를 지지했고 난키파는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를 지지했는데 이이 나오스케는 이에사다의 의중이 자신과 혈연이 가까운 이에모치에게 있음을 알고 이에모치를 밀어서 14대 쇼군에 오르게 했다. 그리고 안세이 5개국 조약은 미국 총영사 해리스의 압박과 막부 내 개국파의 주장에 밀려서 고메이 덴노의 칙허없이 비준했다. 이를 두고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나(徳川斉昭)[2] 마츠다이라 슌가쿠 등은 이이 나오스케를 맹비난했지만 오히려 이이 나오스케는 이들을 처벌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히토츠바시파는 덴노의 권위를 빌어 이이 나오스케를 밀어내려했다. 고메이 덴노에게 상황을 알리자 고메이 덴노는 이이가 자기 마음대로 조약을 체결했다고 격노했다. 그리하여 덴노는 정치쇄신과 다이묘들의 결속을 명하는 무오의 비밀칙서(戊午の密勅)를 미토번에 내리고 세력이 큰 다이묘들에게 사본을 보냈다. 또한 관백 쿠조 히사타다를 멀리했다.
비밀칙서였음에도 불과하고 이이 나오스케에게도 알려져 큰 문제가 되었다. 덴노가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고 막부를 무시하고 다이묘에게 직접 칙서를 내림은 막부 체제를 흔드는 전대미문의 사태였기 때문이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대대적으로 조사와 심문을 시작했다. 고메이 덴노가 내린 칙서의 배후에 미토번이 있다고 측근이 진언하자 배후의심세력을 철저히 탄압했다. 이에 따라 안세이의 대옥이 일어나 히토츠바시가 당주인 히토츠바시 요시노부, 후쿠이 번주 마츠다이라 슌가쿠, 우와지마번주 다테 무네나리, 토사 번주 야마우치 요도 등이 근신이나 은거 처분을 받고 하시모토 사나이, 요시다 쇼인 같은 존왕양이 지사들이 투옥되거나 참수당했다.
이 일로 양이론자였던 미토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번주 자리를 내놓고 칩거하는 형을 받았고, 미토 번의 가신들은 로닌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리되자 미토 번의 가신 다카하시 다이치로, 가네코 마고지로 등은 이이 나오스케를 죽일 것을 결의했다.
당초 미토 번은 존왕양이파들과 함께 거사를 모의했지만 사츠마 번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면서 문제가 되었다. 사츠마 번주였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병으로 급사한 후, 뒤를 이은 시마즈 타다요시의 친부로 섭정을 맡은 시마즈 히사미츠는 '니들 하는 일은 눈감아 주겠는데 우리 도움은 기대하지 마.' 하는 정도로 사태를 관망할 뿐이었다. 이리되자 미토 번 가신들은 사츠마번과 연계하길 포기하고 단독으로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3. 사건 발생


3월 24일 아침[3], 이들은 도카이도 시나가와에 있던 숙소를 출발해 사쿠라다 문 쪽으로 집결했다.
이이 나오스케도 에도에 있는 히코네 번 저택을 출발해서 500미터 떨어진 에도 성으로 입성하는 중이었다. 그날 아침 이이 나오스케를 습격할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들어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로 경비를 강화하는 것은 전례가 없었다는 이유로 이이 나오스케는 경비를 강화하지는 않았다. 히코네 번의 가마 행렬은 약 60명 정도였다.
때마침 그날은 봄철인데도 폭설이 내려 시야가 나빴고 사람들은 비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습격하는 쪽에서는 칼을 비옷 속에 숨길 수 있어 습격하기에 용이했다.
다이묘들의 입성 행사는 구경거리라서 길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시각은 오전 9시. 가마가 가까워지자 미토 번 번사 모리 고로쿠로(森五六郎)가 뛰쳐나와 가마행렬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를 저지하려고 히코네 번의 쿠사카베 사부로에몬(日下部三郎右衛門)이 다가가자 갑자기 그가 칼을 빼들어 쿠사카베를 베어버렸다. 이는 가마 앞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게 하려는 미끼였다. 놀란 호위들이 가마 앞쪽으로 달려나가자 경호가 허술해진 틈을 타서 쿠로자와 추사부로(黒澤忠三郎)가 가마를 향해 권총[4]을 발사했다. 이것을 신호로 남은 이들이 칼을 빼들고 달려들어 검투가 벌어졌다.
가마에 탄 이이 나오스케는 총에 맞아 대퇴부(허벅지)에서 허리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습격에 놀란 주변 사람들과 가마꾼들, 히코네 번의 가신 대부분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고 가신들 몇 명만 남아 어떻게든 가마를 끌고 이이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려고 애썼지만, 총격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많아 가마를 어찌 끌고갈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가마는 눈밭에 방치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히코네 번의 호위무사들은 칼에 습기가 참을 막으려고 손잡이에 자루를 씌워놓았기에 대응이 늦었다.
그럼에도 히코네 번 최고 검객이라 불리던 카사이 추자에몬(河西忠左衛門)은 침착하게 비옷을 벗고 칼을 빼서 가마 곁으로 다가오는 이나다 주조(稲田重蔵)를 쓰러뜨려서 습격자들이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카사이 추자에몬은 중과부적으로 적을 당해내지 못하고 죽었다. 또한 젊은 검객 나카타 타로주베(永田太郎兵衛)도 열심히 맞서 싸웠지만 총상이 심해 결국 죽고 말았다. 이때 쓰인 카사이 추자에몬의 검과 나카타 타로주베의 검, 투구, 갑옷이 현재 히코네 성 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결국 호위들마저 죄다 죽자 미토 번 가신들이 중상을 입은 이이 나오스케를 가마에서 거칠게 끌어냈다. 이이 나오스케가 무의식적으로 땅을 걸으려 했지만 곧 아리무라 지자에몬(有村次左衛門)의 칼에 목이 잘렸다. 이들은 이이 나오스케의 목을 칼 끝에 꽂아 돌아오려 했지만 쓰러진 히코네 번의 코가와라 히데노조(小河原秀之丞)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덤벼들었다. 히데노조는 아리무라의 뒤통수를 베어 중상을 입혔으나 히로오카 네노지로(広岡子之次郎)에게 베여 쓰러졌다.
히코네 번 저택에서 사태를 알고 가문의 병사들이 달려왔을 때는 이미 사건은 끝난 뒤였다. 이들은 철저하게 잘린 손가락 하나까지 회수했다. 뺏긴 이이 나오스케의 목은 그와 체격이 비슷한 가타 구로타의 목으로 속여서 바꿔치기해 겨우 회수하였다.

4. 사건의 결과


히코네 번 무사들이 결사항전하여 습격자들도 다수가 중상을 입었다. 이들은 다른 다이묘들의 저택으로 들어가 자수한 뒤에 할복했다. 습격의 지휘자 세키 데츠노스케는 도망다니다가 1862년 에치젠의 유노사와 온천에서 붙잡혀 에도로 끌려와 처형되었다.
히코네 번에서는 미토 번에 복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가로 오카모토 반카이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사망한 무사들의 자손들에게는 상속권을 인정해주었지만, 생존자들은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여 가문을 단절하고 참수하는 형에 처했다. 심지어 도망간 가마꾼들도 끌려와 처형되었다.
이이 나오스케는 생전에 로주 아베 마사히로의 노선이었던 세력이 큰 다이묘들과의 협력정치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막부 주도의 정국운영과 조정의 정치개입 거부라는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그가 죽음으로써 이 노선은 사라졌다. 이이 나오스케 사후 실권자가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덴노 및 조정과의 협력으로 정국을 운영해 나가는 노선을 택했다.
미토 번주는 도쿠가와 가문의 방계를 대표하는 고산케의 일원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부쇼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가 높았지만, 이 사건 때문에 히코네 번은 미토 번을 필생의 숙적으로 규정했다. 이는 막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을 의미했다. 이로 인해 막부 말기의 대혼란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토 번은 이후 1861년부터 1864년까지 갖가지 사건의 주역이 되었다. 제1차 토젠지 사건, 사가시타몬가이의 변, 텐쿠도의 난등이 바로 그것이다. 텐쿠도의 난에서는 히코네 번에서 적극적으로 이이 나오스케의 복수를 한다면서 미토 번 무사들을 '''쥐 잡듯이 때려 잡았다'''. 히코네 번에서는 이때 붙잡은 미토 번 무사 352명을 츠루가에서 처형했다.
에도 막부와 히코네 번은 각각 이이 나오스케가 부상당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막부로서는 권위가 실추됨을 막기 위해서였고, 히코네 번은 번주 암살을 막지 못함은 무사 실격으로 가문이 단절되고 엄벌에 처해졌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기 전에 나오스케가 암살당했는데,[5] 후계자를 미리 세웠다면 감봉으로 끝날 사건인데 후계자를 안 세우는 바람에 개역될 았기에 처했다. 막부 입장에서도 이이 가문을 개역시키면 또 다시 낭인들이 생기는 게 부담스러우니[6] 말기 양자를 세웠다는 명분[7]으로 감봉시키고 나오스케의 암살은 부상으로 공표하고 한 달 뒤에 죽었다고 처리했다. 위에서 나온 것처럼 히코네번은 나오스케의 목을 필사적으로 수습했는데, 이후 목하고 몸통을 봉합해서 나오스케가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했다.
쇼군은 이이 나오스케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설탕과자 같은 귀한 물건들을 위문품으로 보냈다. 이 소식에 여러 다이묘들도 따라서 위문품과 위문사절을 보냈는데 저간의 상황을 몰랐던 미토 번에서도 이를 따라했다가 히코네 번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는 눈가리고 아웅에 불과했다. 명절날 백주대낮에 에도 한복판에서 이이 나오스케가 죽는 광경을 '''볼 사람은 다 봤기 때문'''이었다. 에도 사람들은 도망친 히코네번 무사들을 '''"좋은 오리를 그물로 안 잡고 가마로 잡았나보네."''' 하고 비꼬았다고 한다.
1861년, 사츠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츠가 상경해 조정의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와 함께 정치개혁(분큐의 개혁)을 주도했다. 이이 나오스케 사후에 막부 각료들을 정리하던 안도 노부마사는 미토 번 무사들의 습격으로 일어난 사가시타 문 밖의 변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분큐의 개혁 때문에 노중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한 히코네 번은 이이 나오스케의 실정을 이유로 35만 석에서 25만 석으로 감봉되었고 교토 수호직에서도 파면되었다. 이로 인해 히코네 번은 막부를 지지하는 쪽에서 멀어져 거리를 두었다.
감봉은 메이지 유신 이후 히코네번에 악영향을 미쳤다. 25만 석으로 감봉된 탓에 백작으로 봉해져서 불만스러워했다. 본래 35만 석 규모라면 후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는 신정부가 안세이의 대옥사로 생긴 원한으로 백작에 봉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감봉 후 실제 수확량이 9만 석으로 감봉 전을 기준으로 해도 후작의 기준인 15만 석에 못 미쳤기 때문에 안세이의 대옥사와는 무관함이 일반적인 견해다. 오히려 히코네 번은 토바 후시미 전투부터 덴노 편에 섰고 곤도 이사미를 붙잡는 등 공을 세워서 덴노로부터 대우받았다고 한다.

5. 화해


사건 이후 미토와 히코네는 적대적인 관계였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부터 텐쿠도의 난까지 양측의 앙금은 계속돼서 현대로 넘어와서도 으르렁대지는 않았어도 사이가 좋다고도 하기 어려웠다.
결국 사건 110년이 지난 1970년, 미토와 히코네는 오랜 앙금을 털어내고 츠루가 시의 중재로 친선도시 결연을 맺게 되었다. [8] 당시 히코네 시장은 이이 나오스케의 증손자이자 이이가의 당주이기도 했다. 그리고 츠루가 시는 히코네 번 무사들이 텐쿠도의 난에 연루된 미토 번 무사들을 처형한 장소라서 의미가 깊었다. 양측은 각 도시를 대표하는 벚꽃과 백조를 교환하고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6. 번외


  • 이후 사가시타 문 밖의 변 때 안도 노부마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호위를 강화하여 존황양이지사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무사하였다. 하지만 이때 입은 부상으로 무사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는 명목으로 실각하고 만다.
  • 사건 5개월 후인 8월 15일에 생전 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했던 미토 번주 나리아키도 사망했는데,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한때 주군의 원수를 갚으려는 히코네 번사에게 암살당한 것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히코네 번에서는 암살을 부정했으며, 기록에 의하면 사망 전후로 협심증의 징후를 보였던 것 때문에 오늘날에는 심근경색으로 인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1932년 이봉창 의사의 의거도 같은 장소에서 벌어졌다.
  • 츠츠이 야스타카의 SF 단편집인 '최후의 끽연자'에 이 사건을 다룬 단편소설인 '만엔 원년의 럭비(제목 자체는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 원년의 풋볼'을 패러디)'가 수록되어 있다. 초반까지만 해도 이 사건을 묘사하는 것 같더니[9], SF와 미스터리 덕후인 츠츠이의 작품답게 후반부에는 닌자들과 타임슬립한 영국의 럭비 선수들이 이이의 목을 가지고 럭비를 한다.
  • 이 사건으로 인해 고메이 덴노는 연호를 안세이(安政)에서 만엔(万延)으로 바꾼다.
  • 이이 나오스케는 상당한 검술의 달인이었지만 위에 나온대로 양이파(외세 배적)들의 신식 리볼버에 당해서 별 힘을 못 쓰고 죽었다. 앞서 가마에서 입은 총상만 없었어도 검술로 위기를 타파하고 빠져나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7. 사쿠라다 문 18사


  • 이나다 주조(稲田重蔵, 1814~1860) : 본래 농민출신으로 안세이의 대옥사 이후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가담한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 때 나오스케를 습격하나 전투 중 사망.
  • 세키 테츠노스케(関鉄之介, 1824~1862) : 미토 번사. 안세이의 대옥사 이후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가담함여 사쿠라다 문 밖의 변을 지휘하였다. 이후 에도에서 처형.
  • 오카베 산주로(岡部三十郎, 1818~1861) : 미토 번사.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가담한 이후 오사카로 도망쳐 그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 미토로 귀환한다. 이후 처형.
  • 히로오카 네노지로(広岡子之次郎, 1840~1860) : 미토 번사. 무오의 비밀칙서 사건 때 미토 번이 이를 반납하려 하자 반대하였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 때 부상을 입고 자해.
  • 야마구치 타츠노스케(山口辰之介, 1832~1860) : 미토 번사. 무오의 비밀칙서 사건때 미토 번이 이를 반납하려 하자 반대하였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 때 중상을 입어 자해.
  • 코이부치 카나메(鯉渕要人, 1810~1860) : 스와신사 신직. 사쿠라다 문 밖의 변 때 중상을 입어 자해.
  • 사노 다케노스케(佐野竹之介, 1839~1860) : 미토 번사. 사쿠라다 문 밖의 변 때 중상을 입어 로슈 와키자카 야스오리저택에서 자해.
  • 쿠로자와 추사부로(黒沢忠三郎, 1830~1860) : 미토 번사.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근신처분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서 이이를 저격하여 중상을 입혔으며 이후 병사.
  • 사이토 겐모츠(斎藤監物, 1822~1860) : 카시마신사(静神社) 신관. 안세이의 대옥사때 신관 61명을 이끌고 옥사를 끝낼 것을 건의한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때 중상을 입어 이후 사망.
  • 오오제키 와시치로(大関和七郎, 1836~1861) : 미토 번사. 쿠로자와 타다사부로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가담. 이후 구마모토 번저에 자수, 처형된다.
  • 모리 고로쿠로(森五六郎, 1838~1861) : 미토 번사.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가담, 이이 나오스케를 권총으로 저격한 인물. 그전에도 암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한 적이 있었다. 중상을 입어 구마모토 번저에 자수, 처형된다. 여담으로 모리 코고로와 아무 상관없다...
  • 하스다 이치고로(蓮田一五郎, 1833~1861) : 미토 번사.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가담, 중상을 입어 로주 와키자카 야스오리저택에 자수한다. 이후 에도에서 처형.
  • 모리야마 시게노스케(森山繁之介, 1835~1861) : 미토 번사. 다카하시 다이치로를 섬긴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가담. 이후 구마모토 번저에 자수, 처형된다.
  • 카이고 사키노스케(海後磋磯之介, 1828~1903) : 미토에서 검술과 포술을 배웠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아이즈와 에치고에 은신하여 살아남았다. 메이지유신 이후 경시청과 현청에서 근무.
  • 스기야마 야이치로(杉山弥一郎, 1824~1861) : 미토 번사.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가담하여 중상을 입는다. 이후 구마모토 번저에 자수, 처형된다.
  • 히로키 마츠노스케(広木松之介, 1838~1862) : 미토 번사.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가담 후 가가, 에치고에서 은신하나 다수의 동지들이 죽었음을 알자 자살.
  • 마시코 긴파치(増子金八, 1823~1881) : 미토 번사.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가담 후 히타치에서 은신하여 살아남았다.
  • 아리무라 지사에몬(有村次左衛門, 1839~1860) : 사츠마 번사. 안세이의 대옥사 이후 형 유스케와 함께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가담한다. 사쿠라다 문 밖의 변때 나오스케의 수급을 들어올렸다. 이후 중상을 입은채로 도주하다 형과 함께 붙잡혀 사츠마에서 자결.

8. 음모론?


일각에서는 사쿠라다 문 밖의 변에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정실부인인 아츠히메가 관여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 근거는 바로 가담자 중의 한 명인 아리무라 지사에몬의 존재 때문. 아리무라 지사에몬은 사쿠라다 문 18사 중에 유일한 사츠마 번사다.
문제는 아리무라 지사에몬이 사츠마 번의 일개 하급무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리무라 정도의 무사가 과연 독단적으로 미토 번사들과 함께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가담할까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시마즈 히사마츠가 암살 참여를 거부한 상황에서 아리무라를 움직일 수 있는 인물은 쇼군의 정실부인이자 선대 주군의 양녀인 아츠히메밖에는 없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확실히 아리무라 지사에몬은 의문스러운 인물이다. 그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비밀결사인 정충조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래서 아리무라의 뒤에는 정충조가 있고 그 배후에는 아츠히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아츠히메가 이이 나오스케 암살에 관여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이 나오스케가 양부 시마즈 나리아키라를 암살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1] 오늘날 시가현 지역으로, 당시 고쿠다카는 30만 석이었다.[2] 양이론자이자, 히토츠바시파를 이끈 인물로 실은 히토츠바시 요시노부의 친아버지. 미토 고몬이 편찬하기 시작한 《대일본사》에도 관여해 학문 발전에도 공헌했다.[3] 음력으로 3월 3일, 히나마쓰리 날 이었다. '복숭아의 절구'라 해서 에도 성에서 연례행사가 있었기 때문에 다이묘와 가신들이 입성한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4] 현대 연구에 따르면 Colt M1851 'navy'의 복제품으로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암살을 위해 하사한 것이었다.[5] 아들들이 모두 서자였고 그나마 가장 나이가 많았던 나오노리는 만 12세도 되지 않았다.[6] 이이 가문이 개역되면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났을 것이다. 이이 가문의 낭인들이 미토 번과 같은 식으로 암살사건을 일으킬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또한 이이 가문을 개역하면 미토 번에 사건의 책임을 묻고 추가로 가중처를을 해야 하는데, 이러면 미토 번이 막부에 직접 칼을 들이댈수 있었다.[7] 서자인 차남 나오노리(장남은 태어난 날 죽어 사실상 장자)를 적자로 인정해줬다.[8] 는 아니다. 일본 시골 지역에서는 옛날 번주들의 자손들이 정치계에 입문하여 여전히 그 지역의 유지로 행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9] 사건이 벌어진 발단이 '이이가 소의 도살을 금해 쇠고기를 못 먹게 되어서 원한을 품은 이들이 벌였다'고 왜곡되어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