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루스 2세

 


'''아케메네스 제국 제5대 샤한샤'''
'''Cyrus II | 키루스 2세'''
[image]
'''탄생'''
기원전 580년(혹은 590년)
'''사망'''
기원전 529년
고대 페르시아어
𐎤𐎢𐎽𐎢𐏁
Kūruš
페르시아어
کوروش بزرگ
kurosh bozorg
그리스어
Κυρος [1]
히브리어
כורש [2]
영어
Cyrus[3]
1. 개요
2. 상세
3. 정복 활동
3.1. 메디아 정복
3.2. 리디아 정복과 델포이 신탁의 전설
3.3. 성경과 키루스
3.3.1. 이사야의 예언
3.3.2. 신 바빌로니아 정복
4. 사망과 그 이후
5. 기타
5.1.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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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케메네스 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키루스 대제'''라는 호칭으로 유명하다. 본 문서는 대체로 헤로도토스의 히스토리에(역사)에 기초하고 있으며, 크세노폰의 키로파에디아(키루스의 교육)와는 많이 다른 내용이다. 다만 키로파에디아가 히스토리에보다 민속적, 지적 가치는 크더라도, 사료적 가치는 낮다는 것이 정설이다.

2. 상세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

-

크세노폰

세계 최초의 거대 제국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 키루스 1세의 손자이자 캄비세스 1세의 아들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Κυρος', 퀴로스[4]로 표기했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표기법으로 '고레스'라고 하며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Kūruš'(쿠루쉬)라고 불리고 키루스 대왕은 'Kūrošé Bozorg'라고 한다.[5][6] 어려서 키루스 2세가 왕이 될 것이란 예언을 두려워한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에 의해 버려진 뒤 소치기에게 주어져 장성한 뒤 권력을 얻었다는 성장 설화가 있는데 이와 유사한 설화의 원류가 아니냐는 말이 있다.
페르시아, 혹은 세계에서 최초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사람으로, 대왕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업적을 이루었다. 세상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면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이념 아래, 계속해서 저항하던 칸달루스 등, 페르시아보다 강대한 왕국들[예]을 박살냈으며,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고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군인이 점령지 백성을 약탈하는 걸 금하고, 빚 때문에 남자든 여자든 종이 되는 것에 반대하고, 인간들을 억압하지 말고 노동자들에게 걸맞는 급여를 지불하라고 하였으며, 인권운동의 시초로 불려 뉴욕 UN 본부에도 복사본이 있는 키루스 원통이라는 법조문도 만들었다. 전문 한국어 번역 키루스를 전후한 시절에 페르시아엔 장례를 치르고 상이군인에게 의족을 다는 것을 골자로 한 세계 최초 보험 제도도 있었다.
이는 아시리아의 참혹한 피정복민 정책 때문에 틈만 나면 반란이 일어나 결국은 멸망해버린 것에 대한 반면교사인 것으로 보인다

3. 정복 활동



3.1. 메디아 정복


전설에 의하면 키루스의 성장 과정은 아래와 같다.
이란 고원을 중심지로 발흥한 국가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어느 날 딸 만다네의 소변으로 온 세상이 잠기는 꿈을 꾸었다. 이에 사제들을 불러 해몽해보니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내용이었고, 이에 겁을 먹은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의 후손이 왕위에 오를 수 없도록 낮은 신분의 페르시아 출신의 남자와 결혼시켰다.
결혼한 만다네는 얼마 후 임신했는데, 어느 날 음부에서 포도나무가 자라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꿈을 꾸었다. 이 또한 사제들이 해몽해보니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아스티아게네스는 결국 하르파고스라는 신하에게 만다네의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당시 아스티아게스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외손자가 차기 왕이 되는 것은 순리였다. 이 때문인지 하르파고스는 키루스를 직접 죽이지 않고, 소치기에 주어 죽이라 명령하였다. 그런데 소치기도 아이를 죽이지 못해 아내의 제안으로 사산한 자신의 아들의 시신과 바꿔치기 해서 키루스를 길렀다. 하르파고스는 이를 모르고 사산된 아이의 시신을 가져가 아스티아게스에게 임무를 끝냈다고 보고했다.
세월이 흘러, 키루스는 동네 아이들과 왕 게임을 하던 중 왕으로 뽑혔는데, 어느 고위 관리의 아들이 고집을 부리면서 '내가 왜 소치기 자식의 말을 들어야 하냐'며 키루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훼방만 잔뜩 놓아댔다. 이에 화가 난 키루스는 그 아이를 흠씬 패서 반 죽여 놓았고, 관리의 아들은 이를 아버지에게 이를 말해 키루스를 고발케했다. 그렇게 고발 당해 아스티아게스 앞으로 불려나간 키루스는 '놀이라지만 왕인 나의 명령을 어긴 것은 죄가 아니냐'며 변론했고, 이 변론을 들은 아스티아게스는 단박에 키루스가 자신의 외손자임을 알아챘다.
그리고는 소치기와 하르파고스를 불러 심문해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 즉 변론하는 아이가 자신의 외손자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에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를 죽이려하기보다는 사제들을 불러와 이를 해석케해 '놀이지만 어쨌던 왕이 되었으니 이제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답을 듣고 수긍해 키루스를 페르시아의 친부모에게 돌려 보냈다.
이후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의 13살난 아들과 하르파고스를 식사에 초대했다. 그리고는 하르파고스에게 고기를 먹길 종용한 뒤, 그 고기의 정체가 하르파고스의 13살난 아들임을 밝혀 겁박했다. 그러나 하르파고스는 당황하지 않고 왕에게 임무 실패에 대해 사죄하며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다. 아스티아게스는 만족하여 하르파고스를 돌려보냈으나 이는 실책이었다.[7]
하르파고스는 이 뒤로 키루스를 계속해서 충동질해 반란을 모의케 했고, 장성해 군을 일으킨 키루스에게 아스티아게스가 진압하라며 붙여준 메디아 군을 통째로 헌납해 아스티아게스를 배신한다. 이후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에 의해 참수당한다.
이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고, 만화히스토리에》에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렇게 키루스는 메디아를 정복했다~ 고는 하지만 이는 실화가 아닌 설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8]

3.2. 리디아 정복과 델포이 신탁의 전설


메디아의 이웃 나라이자 우호국이던 리디아의 국왕 크로이소스에게 있어서 키루스의 쿠데타는 좋은 침공 구실이었다.[9]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저서 히스토리아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궁금하여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다. '피티아'라는 이름의 여제관이 답신을 주었다. "(크로이소스가 페르시아를 치면) '''강력한 제국이 무너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강력한 제국'이라면 누가 봐도 페르시아가 아니겠는가? 크로이소스는 바로 전쟁을 선포했고, 낙타 부대를 동원한 키루스의 우회 기동 전술[10]

에 보기 좋게 패배한다. 리디아도 페르시아 못지 않은 강국이었음을 그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11]

다행히 크로이소스 본인은 키루스의 아량으로 목숨을 건지고 왕의 조언자로 살 수 있었다.[12]

이 이야기는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1권에서도 소개되며 김광수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서도 주어의 모호함을 지적하면서 언급된다. 'Delphic'이라는 단어의 뜻은 '애매모호'가 되었으며, 델파이 기법 역시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다.
  • 리디아와의 전투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키루스는 군대를 모으고, 고지대에서 크로이소스의 군대를 맞이한다. 리디아와 페르시아 군대는 기병이었다. 그들은 병거 앞에 도열해 있었다. 크로이소스는 밀집대형으로 유명한 이집트 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키루스도 비밀 병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페르시아 사령관은 키루스에게 조언하기를 리디아의 말들은 낙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낙타 향기는 적들의 말들을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키루스의 허락하에 새로운 낙타 군대가 조직되었다. 새로운 낙타 군대가 뛰어 나오고, 리디아 보병과 기병이 혼란에 빠진 사이, 키루스의 궁병은 진지와 방어탑에서 쉴새 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페르시아 사령관의 예측대로 리디아 군대는 큰 혼란에 빠져갔다. 어떤 기병은 놀라서 떨어지기도 하고, 말을 버리고 도망가기도 하였다. 키루스의 승리였다.
페르시아는 지중해 전역의 신흥 권력으로 떠올랐고, 그 공세는 겉잡을 수 없이 커졌으며, 주변 국가들은 벌벌 떨면서 이 무적의 정복자의 위세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BCE 540년 까지, 고레스는 엘람의 수도 수사를 정복했지만, 아직도 서아시아에는 큰 힘이 남아있었으니 바로 신바빌로니아였다.

3.3. 성경과 키루스



3.3.1. 이사야의 예언


나는 고레스에게 명령한다. '너는 내 양을 쳐라.' 그는 내 뜻을 받들어 이루리라. '너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여라. 성전의 기초를 놓아라.'"

이사야 44장 28절(공동번역)

개신교공동번역 성경 속 고레스는 이 항목의 주인공인 키루스 2세를 가리킨다. 이사야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8세기경의 저작으로 이해되어 왔다. 때문에 기원전 6세기경 태어난 키루스를 이미 기원전 8세기에 이사야가 히브리어로 쿠루쉬, 즉 고레스를 예언한 것은 성경 속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의 발흥 이후 독일의 신학자 베른하르트 둠은 이른바 3구분설을 제시하는데, 40장에서 55장까지를 제2이사야, 56장 이후를 제3이사야로 구분하여 무명의 다른 저자가 이사야의 이름을 빌려 후대, 즉 키루스의 등극 이후인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저술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둠은 사용된 어휘와, 심판 이후의 회복의 메시지가 제2, 제3이사야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제시한다.[13]
물론 이사야서의 예언이 사후 예언이냐 아니냐는 것과는 별개로, 전반적으로 이사야서는 키루스에 대해서 매우매우매우 호의적이다.

이사야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키루스를 일으키시고(이사 41,2.25) 부르셨다(42,6 등). 그는 목자(44,28), 기름부음받은이(45,1), 하느님께서 오른손을 붙잡아 주신 이(42,6; 45,1)라고 일컬어진다. 고대 근동에서 이러한 표현들은 신이 선택한 임금에게 적용되는데, 페르시아 임금을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점이 보통의 경우와 다르다.

-안소근,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2: 이사야서 40-66장》, 바오로딸, 2017, 145쪽


3.3.2. 신 바빌로니아 정복


신 바빌로니아 말기, 바빌론 성벽에 누군가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이라는 기묘한 문구를 적어뒀는데, 유대인 예언자 다니엘은 이 낙서를 바빌로니아에 대한 심판의 내용으로 해석하였다.[14] 그리고 이 내용과 관련이 있는지 몰라도 오래잖아 키루스가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막고 우회해 바빌론 침공에 나섰다. 성경 내용에 의하면 저녁의 어둠 속에서 페르시아 특공대가 그 유명한 바빌론의 문을 통과했고, 벨사자르의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바빌론은 페르시아에게 함락되었다고 한다.
바빌론을 정복한 뒤, 키루스 2세는 자신을

나는 키루스.

I am Cyrus.

세상의 왕이요,

king of the universe,

위대한 왕이며,

the great king,

강력한 왕이고,

the powerful king,

바빌론의 왕일지니,

king of Babylon,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이자,

king of Sumer and Akkad,

세계 사면의 왕이다.

king of the four quarters of the world.

라고 선포한다. 수메르와 아카드는 이전 시대 오리엔트를 지배했던 문명들로, 자신이 오리엔트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신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를 계승한 공포의 압제자였기 때문에, 신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키루스는 해방자로 보여졌을 것이다. 더구나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풀어주는 것은 물론 본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으며 심지어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돕기까지 했으니 당시 유대인들의 감격은 말할 것 없었다.그래서 유일하게 유대인 계 인물이 아닌데도 키루스는 성경에서 구원자로 크게 칭송받고 있다.

4. 사망과 그 이후


이후 키루스 2세는 신하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마사게타이[15] 정복 전쟁에 나서는데, 초반에 선전을 해 마사게타이 여왕 토미리스[16]의 아들을 포로로 잡는다. 이에 분에 찬 여왕이 "피에 굶주린 키루스여! 내 아들을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태양신의 이름으로 그대가 좋아하는 피를 실컷 맛보도록 해주겠다!"라고 외쳤으나 키루스는 끝끝내 풀어주지 않고 결국 왕자는 자살한다. 키루스로 인해 자신의 아들이 죽은 마사게타이의 여왕은 분노했고 그 다음 전투에서 매복끝에 키루스를 상대로 승리를 했고 이 전투에서 키루스는 전사한다. 이에 여왕은 키루스의 시체를 난도질하고 키루스의 머리를 맹세대로 핏물에 담가두었다고 한다.루벤스의 그림 이상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른 것인데, 헤로도토스 자신도 이 일화를 정확히 정설로 설명하지 않고 키루스 2세의 죽음에 관한 여러 가지 설 중 하나로서 카더라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키루스 2세의 말년과 죽음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17][18]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겐 신 바빌로니아로부터 민족을 구해준 영웅 중의 영웅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성지인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도와준 것 등으로 인해 키루스를 일컬어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라고 했을 정도다.[19][20]

야훼께서 당신이 '''기름 부어 세우신''' 고레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잡아주어 만백성을 네 앞에 굴복시키고 제왕들을 무장해제 시키리라. 네 앞에 성문을 활짝 열어 젖혀 다시는 닫히지 않게 하리라."

이사야서 45장 1절 (공동번역성서)

이민족의 지도자로서 유대인에게 이 정도로 칭송받은 사람은 키루스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다.[21] 그 외에도 '(유대 민족에) 빛을 가져온 자'='샛별(헬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호칭이 라틴어번역된 것이 'Lucifer(루키페르)', 즉 루시퍼의 어원이 되는 단어다. 이 호칭은 키루스 이후 페르시아의 왕들이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부정적 의미가 강해졌고, 이후 중세 시대 라틴어 성경으로 신학을 하던 수도자들이 바빌론의 몰락을 샛별이 지는 것에 비유한 이사야서의 구절을 확대 해석하면서 루시퍼에 지금의 타천사의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메시아의 이명 중 하나가 타천사의 이름으로 인식이 변화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22][23]
키루스의 일대기는 전설이 되어 그리스인로마인 지배계층들의 모범서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나 크세노폰 등 당대 페르시아와 적대하던 그리스 기록자들도 키루스를 강력하고 모범적인 영웅으로 묘사하였다. 사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역은 키루스의 후계자인 캄비세스 2세가 정복한 이집트[24] 다리우스 1세가 정복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펀잡 등 자잘한 부분을 제외하면 전부 키루스가 정복한 것이다. 그것도 조그마한 파르스 일대를 기반으로 봉기하여 서아시아 세계의 4대 왕조(메디아, 리디아, 신 바빌로니아, 이집트) 중 3개를 잇달아 무너뜨린 것이다. 물론 정복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제국이 어수선했고, 이는 키루스와 캄비세스가 죽은 뒤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반란들을 모두 진압하고 본격적인 교통정리를 시작하며 제국의 기틀을 다진 것은 다리우스 1세의 공이다. 다리우스 1세는 캄비세스 2세의 6촌으로 키루스의 5촌 조카이지만 키루스의 딸 아토사가 다리우스 1세와 결혼했고 그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키루스의 외손자이다.

한편 키루스부터 후대의 아케메네스 왕조 왕중왕들은 관용과 자비를 통치의 으뜸 덕목으로 삼게 되었다. 이전 왕조들에 비하면 통치 이데올로기가 한 단계 발전했다는 의의를 찾을 수 있다.[25]
한편, 키루스의 무덤은 바로 이란남아있다. 키루스가 무덤을 검소하게 만들라고 유언해서인지 당대 여러 왕들의 무덤에 견주면 정말 작다. 오죽하면 키루스가 죽고 약 2백 년 뒤에 쳐들어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이게 그 전설의 키루스 2세 무덤이란 말인가? 이리도 초라한 무덤이?"라며 믿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키루스 2세는 무덤에 글을 새기게 했는데

아무리 제왕이라도 결국 죽을 때는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나 또한 여기서 그냥 빈 손으로 가고 이렇게 작은 쉼터에서 쉬고 싶을 뿐. 이름 모를 제왕이여, 그대는 나의 잠을 깨우지 말길. 빈손으로 가는데 화려한 보물이 뭐하러 필요하겠는가? 어차피 그대도 빈손으로 가기 마련이다....

O man, whoever you are and wherever you come from, for I know you will come, I am Cyrus who won the Persians their empire. Do not therefore begrudge me this bit of earth that covers my bones.

이보게, 자네가 누구든 그리고 자네가 어디서 왔든, 나는 자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네, 나는 페르시아인의 제국을 건국한 키루스라네. 나의 뼈를 감싸고 있는 이 한 줌의 흙을 비웃지 말게나.

이 글귀를 본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일절 무덤을 건드리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무덤은 작지만 내부에는 많은 보물들과 사치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알렉산드로스 3세가 멀리 원정을 간 사이에 도굴당했다고 전해진다.

5. 기타


페르시아와 그리스 폴리스간의 첫 접촉이 이루어진 것이 바로 키루스 대왕의 치세였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받았던 예언에는 제국이 멸망할 것이란 예언 말고도 '그리스의 가장 강한 폴리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예언도 있었기에, 크로이소스는 아르고스스파르타 두 폴리스 중 스파르타를 택해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동맹은 해주었으나, 외국으로 원정 나갈 여력이 안되었기에 키루스에게 사신을 보내 '만일 이오니아로 진출을 시도할 시 스파르타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경고장만 보냈다.
이는 세상 그 누구든 간에 "스파르타"라는 말 하나면 두려워 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경고였다. 물론 실제 스파르타는 현대에 들어서도 그 무용으로 이름이 높지만, 당시 키루스 입장으로는 저 멀리 조그마한 반도의 '도시'의 이름이나 위명을 알 턱이 없었고, 오히려 이오니아 출신 시종을 불러다 '스파르타가 대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5.1. 대중 매체에서


키루스 2세의 이야기는 만화 《히스토리에》 1권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일본에서 불리는 명칭인 큐로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원래 역사물 자체가 역사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번역하기 쉽지 않은 장르라 생긴 오역.[26] 참고로 이때 키루스 2세에게 붙어 메디아의 함락을 도운 하르파고스라는 장군의 일화도 같이 나온다. 왕이 시킨 한 가지 일을 끝까지 완수하지 못해서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친자식의 고기 요리를 먹어야만 했다고 나오는데, 《히스토리에》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그 한 가지 일이라는 것이 키루스 2세의 신탁과 관련된 것. 태어나자마자 데려다 죽이라고 했는데 살려보내서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했던 《페르샤》라는 작품도 키루스 2세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고 있다. 문제는 고증이 아랍풍 판타지라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고대 이란 문화는 후대의 아랍 문화에 영향을 주기는 했어도 근본적으로 궤가 다른데, 만화는 '''양자를 동일시하는 오해를 대단히 충실하게 구현하는 우를 범했다.'''[27]
문명 4문명 6에서 페르시아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덤으로 실제역사에서 키루스 2세를 죽인 토미리스의 문명6에서의 지도자 특성이름이 키루스의 살인자다(...)
카자흐스탄 영화 토미리스에서는 가산 마수드가 연기하였다.
[1] '키로스' 또는 '퀴로스'[2] 그대로 읽으면 '코레스'. 성경에는 '고레스'라고 쓴다.[3] 발음은 '사이러스' 또는 '사이어러스' 정도로 난다.[4] 국내의 일반적인 표기법으로는 키로스지만, 천병희 교수의 번역을 따름.[5] 아랍 문자로는 'کوروش بزرگ'와 같이 표기[6] 후대 사산 왕조의 왕 이름이며 현대 이란에서 남성 인명으로도 널리 쓰이는 호스로(Khusrau)는 이 쿠루쉬에서 유래한 것이다.[예] 메디아, 리디아[7] 이 일로 메디아 전역의 국민들은 아스티아게스에게 마음을 돌렸고 페르시아 지역은 반란준비를 계획했으며 하르파고스는 때를 기다려 키루스에게 여러 조언과 계략을 알려주었고 겉으로는 왕에게 충성하는 척 하여 왕의 의심을 피했다.[8] 이야기 자체가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와 거의 같다. 또한 인도의 크리슈나도 이와 동일한 내용의 탄생설화를 지닌다. 즉 여기저기 퍼져있던 설화를 키루스에게 갖다붙였다는 얘기.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고전 영웅이나 위인과 같이 묘사하고자 그 행적을 배끼는 행위는 고대시대에 빈번했다.[9] 아스티아게스는 리디아의 왕녀와 혼인 했다고 한다.[10] 이를 제안한 사람이 위에 나온 하르파고스라고 한다.[11] 당연하지만 강대국에 전쟁을 선포하려면 선포하는 쪽도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12] 하지만 바빌로니아의 기록에는 키루스가 크로이소스를 즉각 처형했다는 기록이 있다.[13]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사야 문서 참조.[14] 메네는 수를 센다, 테켈은 저울에 단다, 우파르신은 나눈다란 뜻을 가진다. 이 뜻 풀이대로 바빌론의 왕을 하느님의 저울에 매달았으나 그것이 기준에 미치지 않아 왕의 나라를 다른 나라에 준다고 해석한 바 있다.[15] Massagetae. 트란스옥시아나 서부, 호라즘 북부 일대에 살던 스키타이계(이란어족) 유목민들이다.[16] 본명은 아니며, 이 사건을 기록한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멋대로 지어낸 이름이다. 참고로 이 토미리스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이 실존했는지는 확실치는 않다.[17] 다른 기록도 많다. 크테시아스는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했다고 했으며, 크세노폰은 키루스가 수도 페르세폴리스에서 평화롭게 죽었다고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헬레니즘 시대 바빌론 출신의 역사가 베로수스는, 키루스가 북동쪽 국경지대에 사는 유목민족인 다하이(Dahae)족의 세력에 대해 근심하다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이설이 난무하는 이유는 가장 정확할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록이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면서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18] 히스토리에에서는 크로이소스가 멋진 작전을 설명하는데 진수성찬을 미끼로 마사게타이인들을 제압하자고 제안하여 키루스는 자신의 직속 참모 크로이소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낀 키루스는 아들 캄비세스에게 크로이소스의 남은 여생을 잘 보필해달라 당부한 뒤 두 사람을 페르시아로 돌려보냈다.[19] 구약성서 역대기 하, 이사야 서(제3 이사야), 에즈라 서 등[20] 그리고 지금도 일부 유대인들은 키루스를 메시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21] 굳이 따지면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원하던 2가지인 종교적 자유와 자유무역시장을 약속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 실행에 옮기기도 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호평을 받기는 했지만 약속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키루스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비 로마인들중 유대인들이 가장 슬퍼했다.[22]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 넘어지다니!(이사야서 14:12)> 이 구절에서 샛별을 라틴어로 쓰면 루키페르다. 애초에 루키페르는 샛별을 뜻하는 일반명사였다. 문제는 이후 일부 신학자들이 '이사야서의 몰락하는 샛별'을 '몰락하는 사탄'으로 오해하였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다행이련만, '루키페르'을 사탄의 이름으로 오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것이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여겨지며, '몰락하는 샛별'은 '바빌론 왕'을 뜻한다고 해석된다. 즉 애초에 루시퍼라는 이름의 악마는 후대의 오해가 불러일으킨 성경 동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23]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샛별에 비유하는 경우가 기독교에서는 은근히 많아서, 자칫 오해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바티칸에서 라틴어로 성가를 부를 때, 예수를 샛별로 비유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라틴어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잘못 들으면, '''예수를 악마에 비유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일부 근본주의 개신교에서 악마의 편집을 시전하여, 바티칸이 악마를 찬양한다고 우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에서 부르는 <내 진정 사모하는>(통일찬송가 88장)이라는 찬송가의 후렴구의 초반에는 "주는 저 산 밑의 백합, '''빛나는 새벽 별'''"이라는 가사가 있다.[24] 캄비세스 2세는 즉위 4년에 대규모 원정군을 일으켜 이집트 파라오 프삼티크 3세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정복했다. 4년은 정세가 어지러운 와중에 대규모 원정군을 계획하고 준비하기에는 짧은 시간이므로 키루스 2세가 미리 이집트 정벌을 계획하고 준비한 것을 이어받았을 확률이 높다. 캄비세스 2세의 군사적 능력은 키루스 2세에 비해 떨어지므로 캄비세스가 할 수 있었던 일을 키루스 대왕이 불가능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25] 실제로 이전의 아카드,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의 경우 영토는 거대했으나 얼마 안가 멸망한데 비해 페르시아는 이들보다도 넓은 영토로 몇 백 년이나 버텼다.[26] 당장 다른 작품도 아니고 히스토리에 내에서도 카르디아를 칼데아라고 번역한 사례(전혀 엉뚱한 도시명으로 번역한 사례)가 있음을 감안한다면, 일본식 발음으로 번역한 정도는 오역이라고 깔 정도는 아니다.[27] 당장 이란인들에게 물어보면 아랍과 이란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