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세노폰

 

Ξενοφῶν
1. 개요
2. 생애
3. 저서


1. 개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군인, 역사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다.

2. 생애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페르시아의 내전이 터지고 그리스 용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와 전쟁을 했던 나라이지만, 페르시아 전쟁에서 크세르크세스의 막강한 군대를 그리스인들이 막아내자 능력을 인정하고 고용하기 시작했다.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게 용병으로 가도 되겠냐고 묻자, 소크라테스는 가지 말라고 하면서, 정 가려 한다면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아오라고 한다. 크세노폰은 어떻게 하면 무사히 돌아오겠냐고 신탁을 묻고 결국 페르시아로 간다. [1]
소 키루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동생으로 그리스 용병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다. 크세노폰은 그에게 고용되어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가며 전투를 시작한다. 그러나 쿠낙사 전투(BC 401)에서 패배하고 고용주들은 모두 사망하고 만다. 이때 남은 그리스 용병이 약 만 명이었고, 이들은 만병대라고 불린다. 크세노폰과 남은 그리스인 용병들은 페르시아의 적군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와야 했다.
크세노폰은 만병대의 수장이 되어 지옥같은 처절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적의 매복이 우려되는 유프라테스 강이 아닌 적들의 매복이 없는 티그리스 강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이때 겨울의 날씨로 동료들이 동상을 입고 높은 산지라 말을 끌 수 없어 두 발로 걸어 흑해로 가야했던 그 상황을 자신의 책 아나바시스에 묘사한다. 페르시아의 영향권에서 탈출한 시점에서 만병대의 숫자가 약 8000명, 이후 다시 용병들이 각자의 이유로 부대를 이탈하면서 6000여명이 됐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의 도움으로 그리스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스에는 돌아왔지만 고향 아테네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고향으로 가던 중 테베에서 일어난 전투에 휩쓸려 우연히 아테네의 적을 도와줬기 때문이다. 아테네에서 추방당한 그는 결국 스파르타의 올림피아에서 책을 쓰며 죽음을 맞이한다.[2]
그의 대표작인 아나바시스가 바로 저 용병대 참전을 다뤘으며 '올라감'이다. 높은 산지를 올라야했던 크세노폰의 기록이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대부분 올라갔던 우리가 어떻게 내려왔는가에 할애된다.
아나바시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대제국, 그것도 적의 수도 중심부에서 닥친 최악의 상황에서도 원래의 직분이 아니었던 총지휘를 임시로 맡아 반 이상의 병력을 살려내는 과정을 보면 확실히 명장의 기질이 있다. 그 상황에서 병력을 수습하고 전멸을 막으면서 안정적으로 퇴각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에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즉, 크세노폰은 스승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주요 제자 중 하나지만 그와 소크라테스의 친분이나 사제관계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좀 붙는 편이다. 그러나 크세노폰의 저작에서 굳이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도 소크라테스가 상당히 많이 나오거나 중요하게 나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인해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대단히 앙모하는 것은 틀림없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여타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는 달리 그는 군인으로서의 삶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처럼 소크라테스의 방식이라던가 인생관 따위의 전부를 추종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견해가 많다.[3] 키루스도 상당히 존경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키루스와 같은 제왕적 혹은 지방 유지의 삶과 생활에 소크라테스풍의 추론이나 지혜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다.
예로부터 같은 스승을 둔 플라톤의 라이벌 철학자, 작가로 취급되어 온 경향이 있으며, 많은 경우 크세노폰이 플라톤에게 많이 꿀리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플라톤에 비해 논리 및 문장력이 박약하고, 플라톤과는 좀 다른 상의 소크라테스를 진술하며, 세속적인 편견을 자랑하고, 말 사육법 같은 별 구질구질한 잡지식이나 논한다는 이유로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고상한 철학자' 상에 영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심지어 그냥 대놓고, '플라톤보다 지능이 덜떨어져서 소크라테스를 잘못 이해했다'고 평했다.
학자들의 이와 같은 평이 딱히 그른 것도 아니다. 분명히 말해서 크세노폰은 플라톤에 비해서 학문적으로 꿀리는 것이 맞다. 그리고 둘 간의 은밀한 대립이 있었다고 보지 못할 것도 없다. 플라톤의 경우 행적을 볼 때 다른 학파를 이뤘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학문교류를 하기도 하고, 또 그들을 거침없이 자신의 대화편에 출연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대의 유명인이라 할 수 있던 크세노폰은 플라톤의 대화편에 출연하지 않는다.[4] 이는 크세노폰 역시 마찬가지로, 크세노폰은 플라톤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툭 던지듯이, 제자 중에 플라톤이 제일이라는 언급을 하고 거기에서 그칠 뿐이다. 뿐만 아니라, 크세노폰의 글들 중에서 좀 고차원적이다 싶은 부분은 걍 플라톤 학설의 복사판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리 많지 않은 크세노폰의 작품들만 봐도 플라톤에 대한 묘한 경쟁의식을 느낄 만한 것들이 제법 있다. 당장 향연이나 소크라테스 회상만 봐도 플라톤을 겨냥했다 볼 수 있는 것들이며, 크세노폰 글을 읽다 보면 플라톤 국가가 끼친 영향력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러셀만 해도, 그의 관심분야는 주로 수학과 논리학에 형이상학까지를 망라하는데 크세노폰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거나, 플라톤 학설의 앵무새라고 봐야 한다. 러셀이 이 부분을 철학과 지성의 본류라고 여겼던 만큼, 크세노폰의 지능 부분에 대해 혹평을 하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로부터 크세노폰의 추종자도 많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다리우스 3세로부터 빼앗은 보석함에 대왕 자신의 평생 애독서 두 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을 넣어 애지중지 보관했다 하는 얘기는 유명하다.[5] 키케로는 크세노폰의 문체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체에 크게 꿀리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크세노폰의 군더더기 없이 간명한 문체야말로 논지가 명확해서 청중에게 이해받기 쉬운 모범적인 문체이며, 능력도 안 되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흉내 내려다가 가랭이 찢어지는 멍청이들의 문체보다야 낫다고 여긴 것이다.[6]니콜로 마키아벨리도 <<군주론>>에서 크세노폰의 저서를 칭찬하였으며,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같은 경우는 예나 지금이나 군사학의 필수 고전이다.
이렇듯 철학자와 현실정치가의 중간에 위치한 사람들이 크세노폰을 중시했다. 크세노폰의 실천적, 현실주의적, 기술적인 내용의 저서들[7]은, 플라톤의 저작들과는 상이한 매력이 있다. 실제로 장군이자 역사가이면서 철학가였던 크세노폰의 저작과 비교할 경우, 플라톤의 정치적 저작들은 지나치게 몽상적이라고 비웃을 수 있을 만큼 플라톤과는 또다른 거대한 설득력이 있다. 이런 크세노폰의 매력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그 저서 목록과 현존하는 저서의 목록이 일치하는 경우로는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유이하다.

3. 저서


  • 아나바시스
  • 헬레니카
  • 소크라테스의 회상
  • 향연
  • 경영론(οἰκονομία) - 이스코마코스라는 지주의 가정경영학을 다룬 대화편이다. 이스코마코스는 실존인물이기는 하지만 이 대화편에 나타난 모습은 실은 크세노폰의 오너 캐릭터라고 한다.
  • 키루스의 교육
  • 단편들을 포함한 기타 다수
  • - 크세노폰의 저작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민주정을 심하게 디스하는 성향이 크세노폰과 맞아보였던 듯해서 그렇게 알려졌으나, 19세기와 20세기부터는 이름없는 누군가의 저작이라고 본다.
[1]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가도 되는지부터 물었어야지!'라고 크세노폰을 꾸짖었다고 크세노폰의 저서에 써 있다.[2] 이런 경험 때문인지 그는 자신의 저작들에서 아게실라오스 2세를 찬양하다시피 띄워줬다. 아예 아게실라오스라는 단편이 따로 전해질 정도. 그 영향 때문인지 로마 시대까지 가서도 아게실라오스 빠들이 많이 양산되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키케로다. 물론 아게실라오스는 객관적으로 봐도 당대의 명장이고 영웅인 건 맞다. 특히 아나바시스를 읽다가 감정이입한 독자들이라면 헬레니카에서 아게실라오스가 만인대에게는 최종보스 급이자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인물인 티사페르네스를 두 차례나 엿먹여서 참수당하게 만드는 걸 보고 통쾌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3] 예를 들어 플라톤은 누차 철학자의 삶이 가장 좋다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 말하지만 크세노폰은 그러지 않는다.[4] 플라톤 대화편 메논의 주요 등장인물인 메논이,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서도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등장한다는 기묘한 공통점은 있다.[5] 이 두 책의 공통적 특징은 '영웅 일대기'라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키루스의 교육>>의 키루스 대왕을 자신이 지향할 영웅상으로 보았다.[6] 참고로 키케로가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체란, 지금은 소실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편의 문체를 말한다.[7] 이 같은 특징 때문에 중국의 묵자왕수인에 비견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모든 전쟁술을 적극적으로 진술한 크세노폰과는 달리 묵자는 수비술만을 논했다: 모두가 수비에 통달하고 공격은 안 하면 세상에 평화가 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