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당
1. 개요
중국 당·정·군·재계 고위층 인사들의 자녀들의 집합을 말한다. 당이라고는 하지만 공식적인 모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당연히 우두머리나 지도자 따위는 없다. 태자당이라고 붙은 이름도 중국만 특정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중화권 언론에서는 다른 나라의 상류층 모임에 자주 쓴다. 그러므로 이들은 공식적 단체가 아니라 친목과 혈연으로 얽힌 네트워크에 가깝다.
이들의 기원은 대장정 전후로 중국 공산당에 지도부에 진입했던 고급 당원들의 자녀들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이들 고급당원들은 당(黨)·정(政)·군(軍)· 재(財)계의 고위직에 올랐는데, 1930-1950년대생이 많은 이들의 자녀들은 당연히 금수저로 부모의 배경과 함께 고급교육을 받으며 빠르게 출세하게 되었다. 이들은 하나의 조직으로 모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혈연관계에다 결혼, 학교, 직장 등을 통해 그물망처럼 촘촘한 ‘꽌시(關係)’를 맺으며 중국의 정·관계와 경제계를 주름잡고 있다.
다만 이들도 문화대혁명을 피해갈 수는 없어서 상당수가 고초를 겪었다. 시진핑도 문혁기간 중 아버지 시중쉰이 반동으로 몰리면서 누나 시허핑이 홍위병에게 폭행당해 사망했고, 본인도 시골로 끌려가 몇년간 야오방이라는 토굴집에서 살며 삽질을 했다. 아래 설명할 덩푸팡 같은 경우는 반동으로 몰린 아버지 덩샤오핑 때문에 홍위병에게 박해를 받아 하반신이 마비되는 불구가 되기도 했다. 보시라이 같은 경우는 본인이 홍위병에 가담해서 무사히 넘어간 경우.
2. 구성
太子党ㆍ太子黨, (영어)Princelings 혹은 중국어를 직역해서 Crown Prince Party.
이들은 보시라이의 항목에 써있듯이 대장정과 국공내전, 항일전쟁을 이끌면서 신화화된 중국공산당의 초창기 핵심 멤버의 후손들[1] 이다. 중국의 붉은별의 저자 에드거 스노우는 대장정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까지를 이끈 초창기 핵심 멤버의 숫자를 대략 800여명 정도로 추산했다. 태자당의 당원들은 실제로 부모 이름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인물들이 많다. 가령 덩샤오핑의 자녀들과 그의 사위, 그리고 저우언라이의 양자 등, 이들은 중국에서는 영웅담 속 인물들의 후손인 것이다. 이 당원들은 부모의 후광을 받아서 중국 정계에서든지 군에서든지 아니면 재계에서든지 모두 다 한 끗발 한다. 본인은 물론 가족 내력까지 꼼꼼하게 살핀다는 면에서 중국 공산당의 3대 파벌 중 들어가기가 가장 힘들다고 한다. 2012년부터 중국의 지도자가 된 시진핑이 바로 태자당 지도부 출신이다.
이들은 내부적으로도 엄격하다고 알려진다.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지만, 워낙 자녀의 숫자가 많아서 태자당 내에서만도 경쟁이 치열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보시라이이다. 본래 태자당의 수뇌부에 있었던 명문가의 자제이었고 집권 세력도 태자당인지라 선처를 받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물론 보시라이가 워낙 도를 넘은 행동으로 화를 자초해서, 도저히 못 봐준 상황이었다. 그래도 100% 사형받을 상황에서 무기징역으로 감면해서 목숨은 살려줬다.
3. 활동방면
한국에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정계보다는 재계에서 더 큰 세력을 이루고 있다.
3.1. 재계
덩샤오핑의 자녀들을 보면 태자당들의 동향을 대충 알 수 있다. 덩샤오핑의 큰아들 덩푸팡[鄧樸方]은 전국장애자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전국 정협 부의장을 역임했다. 덩푸팡은 1987년 태자당을 대거 취합해 캉화[康華] 개발공사를 창립했는데, 겉으로는 영리를 목적으로 한 상업기관이지만 중국인들에게는 또 하나의 권부(權府)로 통했다. 특히, 국내 생산물자들의 구입권을 독점으로 인정받아 홍콩 등에 내다팔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1988년 캉화그룹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덩푸팡이 금융비리를 저지른 것이 밝혀져 그룹 전체가 공중분해되기도 했다. 다만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장쩌민은 자신에게 대권을 앉혀준 덩샤오핑에게 은혜를 갚으려 했는지 덩푸팡을 감옥에 보내지는 않았다.
덩샤오핑의 장녀 덩린[鄧林]의 정식직업은 화가이며 그려낸 작품은 작품성과 관계없이 중국 최고실력자에게 줄을 대려는 홍콩, 타이완 기업인에게 엄청난 고가에 팔렸다. 덩린의 남편 우젠창[吳建常]은 서남대학을 졸업한 이공계 엘리트로 원래는 금속공학자였으나 개혁개방시기에 창업하여 장인의 배경을 업고 재벌로 성장했다.
부친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3녀 덩룽[鄧榕]은 의사지만 지나치게 정치에 개입하면서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과 불편한 관계가 되기도 했다. 또한 덩룽의 남편인 남편 허핑[賀平]은 소장까지 이른 군인이지만, 전역후 바오리 그룹을 설립해서 재벌로 성장했다.
막내 덩즈팡[鄧質方]은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양자물리로 박사를 받은 물리학자지만, 귀국후 금융계에 투신 중국국제투자신탁공사(中国国际信托投资公司)에 입사하였고, 이어 비료를 만드는 대재벌 쓰펑그룹에 입사하였다. 이후 홍콩에 케이더 투자사(kader investement)를 설립하고 재벌이 되었다. 그 아들 덩줘디(덩샤오핑의 손자, 1986년생)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국적도 보유하고 있었고, 듀크 대학교 로스쿨을 나왔으나, 이후 귀국하여 미국적을 포기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광시성의 한 현의 부현장이 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외에도 1950년대 중국 경제를 책임졌던 천윈[陳雲]의 아들인 천위안[陳元], 양상쿤[楊尙昆] 전 국가주석의 아들인 양샤오밍[楊紹明], 1993년 사망한 왕전[王震] 전 국가부주석의 아들인 왕쥔(王軍), 저우관우(周冠五) 전 수도철강공사 회장의 아들인 저우베이팡(周北方) 등이 있다.
완다그룹의 창업자 왕젠린도 태자당 출신이다. 아버지 왕이취안은 중일전쟁 당시 덩샤오핑 밑에서 연대장을 지냈다.
3.2. 군
1955년 군에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소장 이상의 장성급에 오른 사람이 450여명 정도 되는데, 이들의 자녀들은 대체로 군에 투신했다. 현재도 인민해방군 장성급에 아버지가 개국 당시 장성이었던 사람이 상당히 많다.
3.3. 정계
정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태자당 출신으로는 국가주석 시진핑이 있다.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대장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대장정해 온 공산당 지도부가 자리를 잡은 옌안 해방구를 건설한 사람이다. 시진핑보다 먼저 주목을 받았다가 후진타오 주석 재임 당시 개인비리혐의로 몰락한 보시라이도 대표적인 태자당 출신 정치인으로 아버지 보이보가 공산당 원로였다.
이외에도 혁명열사의 아들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자인 리펑[李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예젠잉[葉劍英]의 아들인 예셴핑[葉選平], 국가부주석을 지낸 우란푸[烏蘭夫]의 아들 우부허[烏布赫],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을 지낸 장중루[張仲魯]의 아들인 장하오뤄[張皓若] 등이 있다.
4. 문제점
이처럼 태자당은 중국의 정·관·재계 곳곳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왔다. 특히 재계에서는 거대한 인맥을 이루고 있는데다가 중국 특유의 꽌시(의리) 문화 때문에 각종 비리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태자당이 정계보다 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도, 이들이 부모의 배경을 입고 각종 이권이나 특혜를 받기 쉽기 때문. 그나마 정계에서는 본인 능력으로 올라온 공청단파의 견제라도 받지만 재계에서는 이런게 없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4일 톈안먼사건을 야기한 중국민주화운동의 핵심요구 중 하나가 ‘고관 친인척(즉 태자당) 비리척결’이었을 정도로 이들에 대한 중국민의 여론은 부정적이다. 시진핑도 이런 여론을 의식해서 비리 척결운동을 벌였고, 여기에 걸려든 인물들이 대부분 상하이방이긴 하지만 태자당중에서도 상당히 많은 자들이 단속에 걸렸다.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중국 지도부는 1997년 8월 공산당 내부 태자당 출신들의 승진을 늦추도록 결정했는데, 중국이 ‘열린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혈연을 등에 업고 출세가도를 달린 태자당의 역할이 당연히 제한받아야 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시진핑 이후에는 뚜렷한 태자당 출신 대권주자는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