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야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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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중국 공산당 총서기'''
'''한문'''
胡耀邦
'''한국식 독음'''
호요방
'''영문'''
Hú Yàobāng
''''''
국광(國光)
'''출생'''
1915년 11월 20일
중화민국 호남성 유양현
'''사망'''
1989년 4월 15일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중화민국 [image]
중화민국 [image]
중화인민공화국 [image]
'''신장'''
155cm
'''학력'''
없음
'''직업'''
관료, 정치가
'''종교'''
무종교 (무신론)
'''총서기
재임기간
'''
1982년 9월 12일 ~ 1987년 1월 16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이력
2.2. 대장정 및 중일전쟁
2.3. 국공내전과 공산정권 수립 이후
2.4. 1980년대: 공산당 총서기
3. 사망
4. 사후 파장: 천안문 6.4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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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정치가. 중국 공산당 '''최후의 당 주석'''[1]을 지낸 인물. 자오쯔양 등과 함께 20세기 '''좌절된 중국 민주화'''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후야오방은 국가 체제 재정비와 국력 중흥에서 덩샤오핑과 뜻을 함께 하고 개방개혁을 추진했지만, 공산당 1당 지배라는 정치체제의 개혁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노환으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2. 생애



2.1. 초기이력


1915년 11월 20일 후난성 시골 마을 창팡촌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객가인이라고 한다. 부농이었던 마오쩌둥과는 달리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초년에는 가난때문에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말더듬 증상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매우 머리가 좋았고, 이를 깨달은 집안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신식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과정인 인학당에 입학했을 때 공산당원이었던 교사의 영향으로 좌경화되었고, 곧 공산당의 유년조직인 소년선봉대(보이스카웃)에 가입했다.
12세때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여 장제스에 의한 공산주의자에 대한 학살이 일어났고 국민당군이 학교로 닥쳐와 후야오방의 스승을 살해했다. 공산당은 복수를 결의했고, 마오쩌둥은 1927년 9월 창사시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창사시민들에게 국민당 타도와 공산당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곧 국민당의 압도적 대군에게 참패하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후야오방은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고, 그 이후부터 열렬한 마오쩌둥 지지자가 되었다. 15세인 1929년 불법조직인 공산주의청년단에 비밀리에 가입했는데, 1929년 마오쩌둥의 휘하의 펑더화이군이 창사로 진격해서 학교는 문을 닫았고, 후야오방은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갔다가 홍군에 가담했다. 이후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에 가담해 초급 장교로 복무했다. 정확히는 정치위원이라고 불리는 정치장교로 근무했다. 1933년에 정식당원이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소련파라고 할 수 있는 28인의 볼셰비키와 대립했다.

2.2. 대장정 및 중일전쟁


장시 소비에트 시절 마오쩌둥파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28인의 볼셰비키가 자신들이 지휘한 제4차 초공작전의 패배 책임을 마오쩌둥파에 뒤집어 씌울 때, 패전의 책임을 덮어쓰고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처형 직전 대장정을 떠나는 공산군 본류에 떨어져 루이진에 남은 잔류 부대를 지휘하는 탄위바오(谭余保)가 개입하여 처형을 면하고 장궈타오의 부대 일원으로 대장정에 따라가게 되었다.
대장정 와중에서도 심각한 부상을 당해서 낙오될 수도 있었으나, 어릴 때 친구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장궈타오는 처음부터 산시성 해방구로 향한 마오쩌둥과는 달리 처음에 쓰촨성에 해방구를 건설하려고 했다가, 장제스 대군에게 박살이 났고, 부랴부랴 마오쩌둥의 뒤를 쫓아가다가 산시성 근방에서 회교 군벌 마부팡의 부대에 참패했다. 장궈타오는 패주하여 옌안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후야오방은 포로가 되어서 한동안 마부팡의 영지에서 강제 노역에 종사했다. 하지만 결국 탈출해서 옌안의 해방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서안사변 이후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자 후야오방은 옌안의 항일군정학교에서 사상교육을 받았고, 덩샤오핑과 친교를 쌓게 되었다. 이때 덩샤오핑과의 인연은 나중에 그가 출세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항일전쟁 내내 후야오방은 옌안에 머무르면서 사상교육을 담당하였다. 이때 리샤오와 결혼을 하고 1942년 득남했다.

2.3. 국공내전과 공산정권 수립 이후


항일 전쟁이 끝난 이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18병단 정치장교로 후쭝난, 옌시산 등이 지휘하는 국민당군을 교란하면서 활약을 했다. 이후 전세가 역전되자 후야오방의 부대는 후쭝난군을 계속 추격하여 청두까지 점령했다.
이후 쓰촨 지방에서 국민당 잔당 및 지주 세력 숙청을 담당하면서 군에서 물러나 당직으로 옮겨갔다. 1952년에는 중앙(베이징)으로 전근 와서 공청단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 중에 3후라 불리던 후커스, 후치리와 함께 비투회에 끌려가 홍위병들에게 구타, 모욕을 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1977년 공산당 조직부장을 맡으며 중앙에 진출했고, 덩샤오핑에 의해 후계자로 선정돼 1980년 공산당 총서기에 임명됐다.

2.4. 1980년대: 공산당 총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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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한 후 정치·사회 개혁을 적극 추진했고, 문화대혁명 시기 억울하게 박해를 받은 인사들에 대한 사면 복권을 단행했다. 인사 능력도 뛰어나 공청단 출신 중 후진타오, 원자바오 그리고 상하이방주룽지를 발탁해 그들이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성품이 온후하고 검소하였으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일관되게 지지하였다.
달라이 라마티베트에 관해서도 온건한 면모를 보였다. 달라이 라마가 하나의 중국을 지키고 독립 노선을 포기하면 티베트의 자치를 허용하고 티베트인을 중국 공산당의 당직에 임명하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달라이 라마를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하는 등 유화적인 면모도 보였다.[2]
1983년 11월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일본이 적당하게 자위력을 증강시키는 것에 대해 중국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1986년 10월,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였던 예젠잉이 사망하면서 후야오방의 입지는 축소되었고, 1986년 말 보수파로부터 학생 시위를 적극 진압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은 뒤 1987년 1월 16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해임되어 실각하면서, 그동안 그가 추진해 오던 개혁 작업도 결국 좌초된다. 중국 공산당은 그가 "자산계급 자유화를 용인하는 '치명적 실수'를 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이후 열린 제1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어 정치국원 직은 유지했다.[3]

3. 사망


1989년 4월 8일 오전 9시, 정치국 회의에서 중국의 교육문제에 관한 발언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심장마비를 일으켰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1989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중국 공산당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부고에 놀라 피우던 담배를 끈 후 양손을 마주잡아 가슴에 대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다시 담배를 한 개비 집어(...) '맹렬하게' 피웠다고 한다. 천윈, 리셴녠, 왕전 등도 모두 비통해했고 덩샤오핑은 아내 줘린을 시켜 후야오방의 아내에게 위로를 전하게 하였다. 정치국 회의가 긴급히 소집되어 장례 절차를 정하는 한편 정국의 혼란 가능성을 점검했는데,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정법위원회 서기 차오스는 "현재 전국의 전체적인 상황은 양호하다. 사회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대규모의 집단적인 소요 징조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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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 인민대회당에서 후야오방 추모식이 열렸다. 20만명의 군중이 천안문 광장에 운집한 가운데, 덩샤오핑을 비롯한 원로들과 현직 지도자들이 추모식에 참여했다. 양상쿤이 추도식을 주재했고 자오쯔양이 추도사를 낭독했다.[4]

"동지 여러분. 오늘 우리는 침통한 심정으로, 오랜 시련을 겪은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자 정치가, 우리 군의 걸출한 공직자로서 장기간 당의 중요한 영도 직무를 담당한 탁월한 영도자인 후야오방 동지를 추모하는 바입니다."

후야오방의 유족들은 '위대한 마르크스 주의자'라는 칭호도 달라고 요구했으나,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의 자유화 조치가 마르크스주의를 배신한 것이라 여겨 이를 거절했다.

4. 사후 파장: 천안문 6.4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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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5일 저녁 후야오방의 사망 소식이 중앙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졌고 전국에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주요 대도시 대학엔 분향소와 대자보, 현수막이 설치되었다.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은 죽고,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네.

야오방은 이미 죽었고, 좌파가 또다시 번성하니, 국민이여 깨어나라, 투쟁을 잊지 말라.

베이징대학의 대자보

야오방 동지는 민주운동의 최전선에 선 강한 투사다. 그의 서거는 중국 인민에게 메울 수 없는 대손실이다. 우리들의 비할 수 없는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하이 푸단대학의 대자보

학생들은 4월 17일부터 천안문 광장에 모여 추모 의식을 열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4월 18일부터 체계화되어 후 전 총서기를 추모하고 재평가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유례없는 전국적 민주화 시위로 번졌고, 이것이 바로 1989년에 벌어진 천안문 6.4 항쟁의 시작이었다.(저우언라이 총리의 사망 직후 4인방문화대혁명에 반대해서 일어난 1976년의 천안문 사태와 구분된다.)

[1] 이후 1982년 12차 당대회에서 당 주석직이 폐지되었으며, 현재 중국의 권력 서열 1위는 당 주석이 아닌 당 총서기(중앙위원회 총서기)의 직위에 오른다.[2]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후야오방의 해임 후 중국 공산당은 티베트에 대해 강경책으로 돌아섰으며, 이에 분노한 티베트인들이 라싸에서 시위를 펼치자 중국은 군과 무경을 동원해서 이를 유혈 진압하였다. 1989년 시위 이후 중국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에 대해서 지금까지 불타협, 불관용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이때 직접 방탄모를 쓰고 라싸 시내에서 유혈 진압을 진두지휘한 게 바로 후야오방의 정치적 제자인 후진타오였다. 이 공로로 후진타오는 덩샤오핑과 보수파 양쪽의 눈에 들었고, 중앙당으로 진출해서 차세대 지도자 후보군에 들게 된다. 웃픈 일.[3] 이때 후의 전임 당 주석이었던 화궈펑도 선출되었다. 한편 좌파 왕(王)으로 불리던 덩리췬(등력군)은 1차 투표에서 최저 득표라는 굴욕을 받고 스스로 사임했다. 여기에 자그마한 스캔들이 있었는데, 1930년대 옌안 정풍운동 때 덩리췬은 반당분자로 몰려 투옥된 동지 리루이 (1917-2019) 의 아내와 간통을 했고, 리루이는 이 때문에 아내와 이혼했는데, 50여년이 지난후 당대회에서 이 문제를 폭로했다. 이 때문에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덩리췬은 도덕적으로 문제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서 표를 거의 얻을 수 없었다.[4] 자오쯔양은 1987년부터 후야오방의 뒤를 이어 공산당 총서기로 재임 중이었다. 허나 그도 2개월 후의 천안문 사태에서 자유화를 요구하는 학생, 시민들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이유로 진압 후 실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