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문 전투

 

'''석문 전투
石門戰鬪'''

'''시기'''
음력 672년 8월
'''장소'''
석문 들판(현 황해도 서흥군, 배천군 일대)
'''원인'''
신라와 당의 한반도 쟁패(爭霸).
'''지휘관'''
신라
고구려 부흥군


말갈군

'''지휘관'''
춘장(春長)
효천(曉川)†
의문(義文)†
의복(義福)†
산세(山世)†
능신(能申)†
두선(豆善)†
안나함(安那含)†
양신(良臣)†
김원술
지휘관 불명
(고간, 이근행?)
'''병력'''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4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다수 지휘관 전사
포로 3천
전사 수천명
'''결과'''
당군의 승리.
'''영향'''
'''신라군이 수비적 태세로 전환
고구려 부흥군의 소멸'''[1]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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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당전쟁 중인 672년 음력 8월경 백수성(현 황해도 배천군)부터 석문 들판(현 황해도 서흥군)에서 벌어진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 연합과 당나라군의 전투. 나당전쟁 전반부의 분수령이다.

2. 배경


삼국통일전쟁 끝에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했지만 당나라는 당초의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려고 했고 신라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하고 압박한다. 이에 신라가 반발해 고구려 부흥군과 손을 잡고 670년 선제공격해 나당전쟁이 일어난다. 신라군은 전쟁 초반 설인귀가 이끄는 황해바다를 건너온 당군을 격퇴하고 웅진도독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하는 등 기세가 등등한 상황이었고, 고구려 부흥군은 구심점이던 검모잠이 죽고 안승이 신라로 도망오는 등 내분이 있었지만 여전히 지금의 황해도 지역 각지에서 버티는 중이었다. 672년 7월 고간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이 평양성에서 남침을 시작해 한시성, 마읍성을 공격해 점령하고 고구려 부흥군이 지키는 백수성 근처에 주둔한다.

가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이 병사 1만을 거느리고, 이근행은 병사 3만을 이끌고 일시에 평양에 당도하여 여덟 개의 진영을 설치하고 주둔하였다.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의복(義福)과 춘장(春長) 등을 지휘관으로 신라군을 파견한다.

3. 전개


8월, 당나라 병사가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병사를 백수성(白水城)으로부터 5백보쯤 떨어진 곳까지 전진시켜 진영을 설치하였다. 우리 병사와 고구려 병사가 맞아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 등이 후퇴하자 석문(石門)까지 뒤쫓아가 싸웠으나, 우리 병사가 패배하여 대아찬 효천(曉川), 사찬 의문(義文)ㆍ산세(山世), 아찬 능신(能申)ㆍ두선(豆善), 일길찬 안나함(安那含)ㆍ양신(良臣) 등이 그곳에서 죽었다.

'''『삼국사기』 제7권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전투 초반, 신라의 장창당(長槍幢) 부대가 먼저 당군과 교전해 승리, 3천여 명을 잡아 대장군의 군영으로 보냈다.(김유신 열전) 또한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이 당군 수천의 목을 베었다.(신라본기) 당군의 선봉을 꺾자 신라군 여러 군영에서 일제히 소리쳤다.

“장창 진영이 홀로 머무르다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후한 상을 탈 것이다. 우리가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할 필요가 없다.”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 김유신 하'''

각자 부대를 갈라 무분별하게 당군을 추격했는데, 이때 고간이 이를 예상하고는 유인계를 준비했고 신라군은 이에 넘어가고 만다. 결국 전열을 재정비한 당군과 말갈군이 아직 진을 치지 못한 신라군의 틈을 타서 공격, '''신라군이 대패하였으며, 장군 의복, 대아찬 효선 등 지휘관 7명이 전사'''하게 된다.[2]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도 이 전투에 참전했는데, 싸우다 죽으려고 했지만, 그를 보좌하던 담릉(淡凌)이 살아남아야 한다고 만류했고 칠십이 넘은 노장 아진함(阿珍含)(=안나함)과 그의 아들 등의 희생으로 겨우 살아남았다고 한다. 김유신은 김원술이 죽지 않고 도망쳐왔다는 죄를 물어 목을 베려다가 문무왕의 만류로 의절을 선언했다.

4. 영향


한 차례 승리 후 들떠 지나치게 북진 추격하다 역습으로 전선이 후퇴했다는 점에서 훗날 6.25 전쟁1.4 후퇴와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신라군은 다수의 지휘관을 잃었고 병력도 많이 잃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만다. 아직 본토 방어는 가능했지만 더 이상 황해도 이북에서 공세적으로 작전을 벌이기는 힘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고간은 여세를 몰아 고구려 부흥군이 지키던 백수산을 공격하여 함락했고 신라군은 이를 지원하려고 출동했으나 오히려 당군에게 패하고 만다. 그래서 결국엔 신라는 당나라 군과는 전면전을 회피하고 수세적으로 전략을 변경해야 했으며, 임진강선에 수많은 성을 쌓고 우주방어에 들어갔다. 신라군의 도움을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된 황해도 일대의 고구려 부흥세력은 이후 연전연패했다. 백수산이 함락되고 나서 우장성, 대야성, 동자성이 함락당했으며 임진강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당군에게 격파당했고 남은 패잔병은 신라로 진입하여 사실상 소멸했고, 임진강 이북은 나중에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당군이 퇴각할 때까지 당나라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1] 남은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은 한반도 사수 작전으로 대체된다.[2] 즉, '''당시의 신라 주력군이 궤멸'''을 당했다는 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