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운동
1. 개요
부흥은 쇠퇴했던 것을 흥하게 한다는 뜻으로, 한국사에서 이미 멸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던 일련의 과정들을 부흥운동이라 칭한다.
2. 논의점
통일신라 이후 백제나 고구려같은 부흥 운동을 '진짜 유민들'이 일으킨 게 아니라는 이상한 주장이 있지만, 멸망한 지 시간이 얼마 안 흘러야 하고 통일신라가 융화 정책을 시도라도 안 했을 상황에서만 있는 게 '진짜 유민'이란 관점은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하는 독자 연구다. 이런 종류의 얘긴 1945년에 조선인 따위는 없었고 죄다 일본 제국 신민이었다는 일본 우익들과 그 동조자들도 주장하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어디에서도 진지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애초에 당대 정권에 대항한다면 망한지 오래된 나라 이름을 구태여 빌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많으며, 그런 게 통할 수 있는 조건은 유민 의식이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밖엔 없다.
국가 정체성은 어떤 국가의 국체가 소멸되었다고 사람들 마음에서 바로 사라지는 게 아니며, 상황이 바뀌면 그것이 백 년이든 오백 년이든 어떤 이유로든 정체성이 불식될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표출될 수가 있다. 다만 망한지 오랜 세월이 지날수록 예전에 망한 국가에 대한 정체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지만, 인간은 복잡한 존재기에 이것이 수학 공식처럼 늘 어느 상황에서든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닐뿐이다.
물론 백제부흥운동의 경우 전라도=백제로 동일시한 건 오류지만, 충청도와 경기도만 백제며 전라도는 무조건 마한이므로 백제와 후백제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생각 또한 조선 시대에 생긴 행정구역 개념과 근대 들어 생긴 지역감정 대립 구도를 무리하게 밀어올리다 하게 되는 논리비약이므로, 역시 수정되어야 할 흔한 편견 중 하나다.
주로 잘 알려진 특정 시기에 한하는 영토를 떠올리면서 겹치네 안 겹치네를 하며 관계가 있다 없다를 따지는 족보도 없는 면적사관식 이상한 프레임에선 고려와 고구려도 별 상관이 없으며, 특정 시기에 잘 알려진 강역의 일치에만 집착하는 견해는 상식적인 역사 해석에서 당연히 설 자리가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 목록
3.1. 고구려부흥운동
3.2. 백제부흥운동
사실 신라는 고구려 부활보다는 백제 부활을 방지하는 데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웅진과 사비 일대에 적극적으로 신라 진골 출신을, 백제 왕가가 집중적으로 육성했던 제2수도권인 전북 일대에는 고구려 유민을, 그리고 전남 동부와 남부의 저개발 지역에는 원신라 지역 주민들을 사민했었다. 나름대로 매우 상식적인 조치였고 어느 정도 효과는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신라의 위기는 통일 후 경제적 그리고 행정적으로 꾸준히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다. 전반적으로 국가경제력이 성장하면서 지방 세력들의 실력 또한 상승했고, 행정적으로는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방 통치 체제는 중앙에서 파견된 태수들이 어느 정도는 일원적으로 행정력을 투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골품제가 여전히 강고했기에 실력이 성장한 지방 호족들은 중앙에 진출할 경로는 차단되고 지방에 이식된 다름아닌 옛 진골 출신들도 권력에서 밀리게 되며, 행정력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지방 호족들이 자기네 동네에서 자치와 자율을 누리는 폭도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되자 지방 호족, 지방에 심겨진 신라 진골 출신 귀족 모두가 신라에 대해 불만을 쌓아가는 일이 발생한다. 즉 적어도 옛 백제 지역에 있는 이들은 그 조상이 백제든 고구려든 신라든 행복할 일이 없게 되었으며, 그래서 신라로선 나름대로 할 수 있는 건 다했지만 결국 다름아닌 원신라 지역 출신인 신라 장군 견훤이 백제를 부활시키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나고야 만다.
백제의 영토와 후백제, 이연년 형제의 난의 위치와 관련하면서 백제와 후백제는 영토 면에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괴이한 면적사관이 대두하는데, 이는 실제 역사와 완전히 관련이 없는 틀린 생각이다. 오늘날 서울이 수도였던 시절의 한성백제는 직할 통치 지역이 오늘날 일반 대중에게 널리 퍼진 인식과는 달리 황해도 남부 일대와 경기도, 충청남도 약간 뿐이었으며, 이후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고구려에게 빼앗긴 후엔 충청도에 중심을 두었다고 하지만 충북은 실제론 신라와 각축하던 지역이고 대전 일대도 오늘날 동대전 지역은 신라가 영유했었다. 그 시기의 웅진 백제가 직할 경영하던 곳은 충청남도 대부분과 전북 상당 부분, 전남 지역의 거점 몇 군데인데, 웅진 백제 또한 직접 지배 지역이 한성 백제와 겹치는 지역 또한 많지가 않다. 그리고 분명코 알아야 할 것은 사비 백제 같은 경우 그 지배하던 영역 전체, 즉 충남과 전라도 전체를 결국은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제하여 무려 최소 120년 넘게 통치했다는 점이다. 사비 백제 같은 경우 충북 약간 지역과 경남 서부 일대도 잠깐 영유하긴 했지만 신라의 강력한 견제 탓에 그 지역은 거점 지배로 만족해야만 했다.
후백제는 한편 교과서에서 주로 그리는 영토와는 달리 경상도 대부분과 충청남북도 상당 부분을 영유했고, 거꾸로 전남 지역은 고려에게 상당히 영역을 빼앗긴 형국이었는데, 경상도 일대 외엔 그 영역이 전부 백제가 영유했던 지역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역 가지고 백제와 후백제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짓이다.
후백제가 멸망한 후 300년이 지나 1236년에 나주에서 이연년 형제가 담양에서 최씨 무신정권에 반감을 가진 사람을 모아 백제 부흥운동을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연년 형제의 조상이 후백제 견훤 정권에서 나름 대우받던 잘나가는 호족이었고, 이후 시기에서 그 집안이 그다지 두각을 일으키지 못했기에 백제를 이름을 걸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즉 일각의 생각과는 달리 백제와 아무 연관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삼한일통의 이념에 오히려 보다 충실했으며, 때문에 이들의 부흥운동에 대한 호응도나 성과는 견훤의 후백제만 못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부흥운동이 비슷한 시기 고려 치하에서의 신라부흥운동보다 파급력이 떨어졌던 것도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3.3. 신라부흥운동
신라는 삼국시대에 멸망한 적이 없었으므로 신라 부활 시도는 고려 중기의 혼란기 무신정권시대에 국한된다.[1] 주요 주모자층은 고려 시대때 향리 계층으로 떨어져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아온 옛 신라 진골 출신들이었던 걸로 추정되며, 원신라지역 출신의 중앙 집권자였던 이의민이 이를 은밀히 지원하기도 했다.[2]
훗날 신라부흥운동이 벌어진 지역들은 경주 외엔, 후삼국시대 당시 견훤의 대대적인 침공 이후 후백제에 대한 두려움 탓에 자발적으로 신라 왕실을 버리고 고려에게 투항했던 지역들이기도 했다. 나름대로 왕건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도 고려 왕실의 장악력이 약해지고 흔들리자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신라와는 달리 중앙 정부에 충성하는 지방 세력을 조직적으로 육성했었기에 신라 부흥운동은 미수에 그친 채 실패하고 만다. 로마의 동맹시 전쟁 당시 반로마 동맹 안에 구멍처럼 친로마 도시들이 숭숭 뚫려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부흥운동이 장악했던 지역도 강원도와 경상도 적지 않은 일대라 꽤 넓어는 보이지만 구멍처럼 관망파 내지는 적극적인 고려 찬성 지역들이 많이 뚫려 있었던 상황이었다.
신라 말기에 고구려부흥, 백제부흥을 외치는 반신라운동이 초반 동참 지역은 적었어도 꽤 응집력은 있었던 것관 대단한 차이를 보인다. 이 시기에 경주를 비롯해 신라부흥운동에 동참하는 군현들에게 스스로 대항해서 자발적으로 근왕군을 조직했던 곳이 본디부터 신라 지역이었던 경북 영주였던 현상은 이러한 양면성을 반영한다.[3]
3.4. 발해부흥운동
3.5. 고려부흥운동
조선 건국 초기 왕씨 몰살을 통해 무자비하게 싹을 잘라냈는데, 사찬읍지인 고령지에 따르면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위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고려의 안동장군 이미숭, 진서장군 최신 등이 고려를 부흥시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켜 니산, 덕대산, 운라산성 등에서 패하고 상원산에 성을 지어 항거했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군사를 해산했다 한다.
3.6. 조선부흥운동
1910년에 임병찬이 만든 독립의군부라는 단체에서 고종의 복위를 내세웠지만 일제에 발각당해 실패했고, 1919년에 고종이 사망하자 일본을 몰아내고 구 대한제국(조선) 황실이 다스리는 국가를 세우려던 복벽운동은 흐지부지되고 공화정 수립이 대세가 되었다.
3.7. 한국독립운동
외세에 항거하여 계승하는 국가를 세우게 되는 한국독립운동 역시 부흥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
4. 외국의 사례
넓게 보면 나라 없는 민족의 국가 수립 시도, 독립운동이나 옛 왕실이 왕정복고를 하려는 시도 또한 부흥운동에 포함된다고 할 수도 있다.
4.1. 동아시아
- 한나라부흥운동: 촉한
- 요나라부흥운동: 동요, 후요
- 금나라부흥운동: 후금
- 명나라 부흥운동: 삼번의 난, 정씨 왕국
- 청나라 부흥운동: 장훈복벽
- 남조#s-1.4 부흥운동: 후남조(後南朝)라고 부르기도 함
4.2. 서아시아
4.3. 유럽
4.4. 아메리카
[1] 마의태자가 부흥운동을 했다는 카더라통신이 있지만 근거는 없다.[2] 다만 이에 대해선 후대 집권자인 최충헌이 경주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지 못한 책임을 이의민 일파에게 떠넘기기 위해 기록을 조작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3] 이 지역은 신라가 백제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시점에 고구려군의 사령부가 설치되어 오랬동안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왔고 고구려 고지라 불리며 서라벌 입장에선 경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고창 전투에서 고려에 합류하여 친고구려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 바 있다.[4] '제국'으로서의 잉카가 스페인의 침략으로 멸망한 뒤 추대된 꼭두각시였으나 스페인에 맞서 빌카밤바에 잉카 망명정부를 차렸다. 이 때 망코가 세운 망명 잉카는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투팍 아마루가 1572년에 스페인군에 처형되면서 멸망했다.[5] 잉카제국 황족 출신은 아니고 원주민 호족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