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왕(주)

 


'''시호'''
선왕(宣王)
''''''
(姬)
''''''
정(靜)
'''생몰 기간'''
기원전 850년경[1] ~ 기원전 782년
'''재위 기간'''
기원전 828년 ~ 기원전 782년
1. 개요
2. 즉위 전
3. 선왕의 중흥을 위한 노력
3.1. 선왕의 정벌 일지
3.1.1. 험윤 정벌
3.1.2. 서융과 북적 토벌
3.1.3. 회이를 치다.
4. 왕실 쇠락
4.1. 노나라 내정 간섭
4.2. 무고한 대신을 죽이다
4.3. 화려한 승리의 이면
4.4. 간언을 듣지 않다.
5. 최후
6. 치적 정리


1. 개요


주나라의 제11대 . 주 여왕의 아들이자 유왕의 아버지이자 정 환공의 형. 이 당시에 그의 노력으로 주나라는 중흥했으나, 하필 다음 왕이 암군으로 악명이 높은 주 유왕이다. 참고로 이때부터 사건의 연도가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2. 즉위 전


그는 주 여왕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여왕이 쫓겨났을 때 그가 어렸던지라 주 정공(周定公)과 소 목공(召穆公)이 나라를 다스렸다. 이 때를 공화 시기라고 한다. 달리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공백 화(共伯和)가 주 여왕을 몰아내고 나라를 다스렸다는 말도 있다. 어느게 정답이든 간에 아버지 여왕이 기원전 828년에 죽자 주 정공과 소 목공은 장성한 그를 불러들여 왕으로 모셨다.

3. 선왕의 중흥을 위한 노력


선왕은 아버지의 잘못을 반면교사삼아 신하들의 간언을 잘 들었으며,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무기를 보수하는 등 정사에 힘썼다. 이때 선왕을 보좌한 이들이 누구냐하면 소 목공, 윤길보(尹吉甫), 중산보(仲山甫), 정백(程伯) 휴보(休父), 괵 문공, 신백, 한후, 현보(顯父), 잉숙(仍叔) 등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제후들이 주나라를 다시 섬겼다.

3.1. 선왕의 정벌 일지



3.1.1. 험윤 정벌


선왕 6년(기원전 823년), 북방의 이민족인 험윤[2]이 설쳤는데, 선왕은 병력을 거느리고 삭방[3]에 성을 쌓아 험윤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선왕 13년(기원전 816년), 선왕은 괵계자백(虢季子白)을 보내 험윤을 치게했다. 낙수 북안에 험윤을 이겨 500명을 죽이고, 50여명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괵계자백은 말, 활과 화살, 부월을 받아 이민족 토벌권을 받았다.

3.1.2. 서융과 북적 토벌


선왕 5년(기원전 824년), 서융[4]이 강성해져 서부 국경을 침략하자 선왕은 진중(秦仲)을 대부로 임명해 서융을 토벌하게 했다.
선왕 7년(기원전 822년), 진중은 서융과 싸우다가 죽었다. 선왕은 진 장공(秦莊公)의 형제 5명에게 병사 7000명을 주어 서융을 치게 했고, 진 장공은 기대에 부응하여 서융을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주 선왕은 그 공로를 기려 진 장공을 대부로 봉하고, 봉지를 넓혀 주었다. 참고로 이때 진(晉)나라도 참여했었다.
선왕 27년(기원전 802년), 천무 땅에서 융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선왕 39년(기원전 790년), 분수와 습수 부근에서 북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3.1.3. 회이를 치다.


회이가 주 여왕 때 다시 세력을 회복해 여왕이 그들을 정벌했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왕 6년(기원전 823년), 선왕은 윤길보에게 명해 회이를 정벌하게 했다. 그리하여 재물과 양식, 노비, 등을 얻었는데, 다시 회이들이 일어나자 선왕은 소 목공에게 정벌을 명해 포로와 재물, 가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회이는 주나라에게 철저하게 굴복하였다.
서(徐)나라는 동이족 계열의 강국으로 그들 또한 주나라와 대적했으나 사마 정백휴보의 공격으로 그들 또한 굴복하였다.

3.1.4. 초나라 정벌


선왕은 초나라를 쳤다. 초나라는 세간에서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고 알려져있으나 사실은 묘족 계열의 이민족이다. 그런데, 그들이 당당히 왕을 칭하자 선왕은 그들을 정벌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승리하여 주나라의 강역이 더 넓어졌다.

4. 왕실 쇠락


그러나 이렇게 중흥을 위해 많은 공을 세운 주선왕이지만 그런 그도 왕실 쇠락의 주범 중 하나이기도 했다.

4.1. 노나라 내정 간섭


선왕 12년(기원전 817년) 봄 노 무공이 장남 희괄 대신 작은 아들 희획(姬劃)을 데리고 주나라에 입조하였다. 선왕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노 무공의 아들 희획을 노나라의 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중산보가 전례에 없는 일이라며 말렸으나 선왕은 듣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노 무공이 선왕을 알현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곧 죽자 희획이 노후가 되니 그가 바로 노 의공이다.
선왕 22년(기원전 807년), 희괄의 아들 백어가 노나라의 국인들과 함께 노 의공을 죽였다.
이에 분노한 선왕은 주선왕 33년(기원전 796년) 노나라를 쳐서 백어를 죽이고 중산보의 건의를 받아들여 노 의공의 아우를 노후로 올리니 그가 바로 노 효공이다. 이 일로 인해 주 선왕은 제후들의 마음을 잃게 되었다.

4.2. 무고한 대신을 죽이다


선왕 45년(기원전 785년), 무고한 대부 두백을 죽였다. 그 이유는 예언에 나온 요망한 여자[5]를 찾으라 했으나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해 죽였다. 결국 두백의 아들 습숙(隰叔)은 진(晉)나라로 달아나 범(范)씨의 조상이 되었다.
중국 전설에 따르면, 두백이 죽은 지 3년째 되는 날 그의 원혼이 나타나서 선왕을 화살로 쏘아 죽였다고 한다. 묵자에도 이 전설이 언급된다.

4.3. 화려한 승리의 이면


옛말에 승패는 병가상사라 했다. 선왕은 멋지게 승리도 거두었지만 패한 일도 많았다. 그 목록을 보도록 하자.
선왕 32년(기원전 797년), 태원에서 융족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
선왕 37년(기원전 792년), 조융 및 분융과 싸워서 졌다.
선왕 40년(기원전 789년), 신융 정벌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주군은 천무 전투에서 강융에게 패했다.

4.4. 간언을 듣지 않다.


선왕은 나이가 들어 교만해졌는지, 젊은 시절 간언을 듣던 귀가 사라져 사유지를 넓히지 말라고 괵 문공이 간했으나 선왕은 듣지 않았다.

5. 최후


선왕은 재위 48년 째인 기원전 782년 죽었다. 그 뒤를 이은 왕은 바로 주나라의 최대의 암군이자 서주 멸망의 원흉인 유왕이다.

6. 치적 정리


선왕의 치적이 본문에서 주요 사건 순으로 끊어 보기 힘드니 연도 순으로 다시금 정리하겠다.(단 같은 년도에 일어난 일은 시기 순으로 정리하기 힘드니 올라간 순서대로 하겠음.)
선왕 5년(기원전 824년), 서융이 강성해져 서부 국경을 침략하자 선왕은 진중(秦仲)을 대부로 임명해 서융을 토벌하게 했다.
선왕 6년(기원전 823년), 북방의 이민족인 험윤[6]이 설쳤는데, 주 선왕은 병력을 거느리고 삭방[7]에 성을 쌓아 험윤의 위협을 제거하려 했다.
같은 해 선왕은 윤길보에게 명해 회이를 정벌하게 했다. 그리하여 재물과 양식, 노비, 등을 얻었는데, 다시 회이들이 일어나자 주 선왕은 소 목공에게 정벌을 명해 포로와 재물, 가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회이는 주나라에게 철저하게 굴복하였다.
선왕 7년(기원전 822년), 진중은 서융과 싸우다가 죽었다. 주 선왕은 진 장공(秦莊公)의 형제 5명에게 병사 7000명을 주어 서융을 치게 했다. 진 장공은 서융을 발랐다. 그리고 선왕은 그 공로를 기려 진 장공을 대부로 봉하고, 봉지를 넓혀 주었다.
선왕 12년(기원전 817년) 봄, 노 무공이 장남 희괄 대신 작은 아들 희획(姬劃)을 데리고 주나라에 입조하였다. 선왕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노 무공의 아들 희획을 노나라의 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자 중산보가 전례에 없는 일이라며 말렸으나 선왕은 듣지 않았다. 같은 해 여름 노 무공이 선왕을 알현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곧 죽자 희획이 노후가 되니 그가 바로 노 의공이다.
선왕 13년(기원전 816년), 선왕은 괵계자백(虢季子白)을 보내 험윤을 치게 했다. 낙수 북안에서 험윤을 이겨 500명을 죽이고, 50여명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괵계자백에게 말, 활과 화살, 부월을 내려 이민족 토벌권을 주었다.
선왕 24년(기원전 805년), 진 목후가 조융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선왕 27년(기원전 802년), 천무 땅에서 융족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선왕 32년(기원전 797년), 태원에서 융족과 싸워 이기지 못했다.
선왕 33년(기원전 796년), 노나라를 쳐서 백어를 죽이고 중산보의 건의를 받아들여 노 의공의 아우를 노후로 봉했다.
선왕 37년(기원전 792년), 조융 및 분융과 싸워서 졌다.
선왕 40년(기원전 789년), 신융 정벌에 나서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주군은 천무 전투에서 강융에게 패했다.
선왕 45년(기원전 785년), 대부 두백을 죽였다.
선왕 48년(기원전 782년), 선왕 붕어하다.
[1] 기원전 841년 기준으로 나이가 어렸다.[2] 흉노의 전신이라고 알려졌다.[3] 북방이라는 뜻이 있다.[4] 현대 티베트인의 조상 민족이다.[5] 그 여자의 정체는 바로 포사다.[6] 흉노의 전신이라고 알려졌다.[7] 북방이라는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