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묵자(墨子)
묵적
墨翟


(子)

(墨)

(翟)
최종직위
대부(大夫)
고향
미상
생몰 기간
음력
BC 480년~ 390년
한글전문
1. 소개
2. 출신과 이름
3. 행적
4. 사상
4.1. 겸애
4.2. 절장(節葬)
4.3. 비악(非樂)
4.4. 행설(行說)
4.5. 하늘, 운명
5. 기술
6. 기타
7. 서적 墨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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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지금 천하의 군자 된 선비로서 의로움(義)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곧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말하건대, 하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함께(兼)한다는 것이다. 하늘의 뜻에 반한다는 것은 차별(別)을 두는 것이다.[1]

함께함(兼)이 도(道)로 여기는 바는 '의로움(義)으로 바로잡는 것'이며, 차별함(別)이 도(道)로 여기는 바는 힘으로 바로잡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로움(義)으로 바로잡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큰 자는 작은 자를 공격하지 않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많은 자들은 적은 자들을 해치지 않고

약삭빠른 자는 어리석은 자를 속이지 않으며

귀한 자는 천한 자에게 오만하지 않고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에게 교만하지 않으며

건장한 자는 늙은이의 것을 빼앗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천하의 여러 나라들이

물과 불과 독약과 무기로써 서로를 해치는 일이 없게 된다.

《묵자》, <천지天志[2]

하(下)편)> [원문] : 하늘은 뜻이 있어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아우르기를 원하는데, 여기서 함께한다는 것은 의로움(義)을 나타내며, 의로움(義)이란 약자의 마음을 챙기고 살피는 것을 말한다.

전국시대의 사상가이자 기술자[3]이며, 묵가(墨家)의 창시자이다.
당시대에 드물게 하느님을 인격신으로 믿었으며,[4] 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듯이 우리도 남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혼란한 사회가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사람을 대할 때는 구분 짓지 말고 모두를 함께 아울러서 아끼고 챙기자는 것이 '겸애(兼愛)'이며, 이러한 사랑은 실제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交相利).
또한 하느님은 천자에게 상과 벌을 내리고, 천자는 관료들에게 명령을 내리며, 관료는 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하여 엄격한 수직적 권력구조를 긍정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남을 차별없이 사랑할 수 있는 자가 앉아야 된다고 말하였다. 또한 유교의 친족 중심적 사랑을 비판하여, 자기랑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면 그 사회는 혈연, 지연 등으로 뭉쳐서 공동체를 해롭게 만들 것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유교의 3년상 장례나 궁중 음악 예식 역시 극심한 비효율적 낭비로 보았다.
그의 평등적 사랑은 수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또한 물자 절약과 전쟁 반대를 주장하여 함부로 전쟁할 수 없도록 방어술을 발전시키고 전파하였으며, 여타 실용 기술에도 관심이 많아 여러 가지를 발명하기도 했고, 언어의 중요성을 알아 단어의 뜻을 명확하게 하는 작업을 펼치기도 하였다.

2. 출신과 이름


그의 생존 연도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으나 그의 사상에 대해 제자들이 기록하여 남긴 책인 《묵자》와 전후의 다른 사상가들의 언급으로 대략을 알 수 있을 뿐인데, 그는 아마 공자 사망 전후에 태어났고 맹자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에 대해서도 이설이 분분하다. 송나라의 대부라는 설[5]고죽국(孤竹國) 왕족의 후손[6]이라는 설이 있고, 오형 중 죄인의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묵형을 받은 인물이라 墨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고, 혹은 피부가 검은 즉 노동자(하층민) 출신 또는 외국인[7]이라는 주장, 이외에 먹줄을 긋는 데 쓰는 도구를 묵이라 했으니 목수 등 장인이 아니었겠느냐는 말도 있다. 또는 묵가 학파 사람들이 검고 거친 옷을 입으며 강력한 규율을 가진 집단이었다는 일면에서 협사(俠士)[8]나 멸망한 나라의 군인 출신이 아니냐는 주장도 존재한다.

3. 행적


사마천사기에 열전이 실려있기는 하지만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라서 묵자의 실존 여부조차 의심받고 있다. 실존 인물라고 가정한다면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유력한 국가는 송(宋)나라인데 그 나라에서 대부로 지낸적이 있다고 나와있기 때문이다.
묵자의 논리는 개혁적으로, 그 근본은 유가에 있다. 묵자는 당초 유교를 공부하였으나, 유교가 기득권의 권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통치를 맡겼던 것과 묵자의 생각에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요소들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에 유가의 단점을 혁파하고 일반 백성들을 중심으로 현실에 기반하여 새로운 학파를 창시하였다.
그의 사상은 당시 중국에서 유가보다 훨씬 성행했던 학문이자 종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약자의 편에 서는 이미지도 있었다. 게다가 전국시대 당대의 천재들은 사상가가 되거나 장군이 되는 수밖에 없었는데, 묵자는 사상가이면서 전쟁도 하였으니 그야말로 전국시대 최고의 스타로 우뚝 서게 된다. 때문에 후대의 유학 사상가 맹자는 "천하의 학설이 양주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묵자)에게로 돌아간다."며 한탄한 바 있다.

4. 사상



4.1. 겸애


묵자는 기존 유교에서 강조하는 친족 중심의 가치관이 여러가지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고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유교의 친족중심의 가치관은 '친족'과 '친족이 아닌 자'를 구별하여 편애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문제에 있어서 친족을 감싸도는 혈연의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으며, 혈연을 중시하기에 집단의 공정과 공평에 균열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묵자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였는데, 겸애란 '모두에게 공평한 사랑'을 말한다. 묵자는 겸애를 설명할 때, 겸애와 구체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유교의 친족 중심의 사랑은 '구별하여 차별하는 사랑'인 별애(別愛)라는 개념으로 설정하였다. 이에 대해 화가난 유학자들은 묵자의 이론이야 말로 친족이 없는 이론, 즉, '아버지'가 없는 이론이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않다고 반론을 한다.
여기서 묵자는, 두 가지 자세한 예를 들어서 이것에 대해 설명한다.
1. 친구 중에 한명은 별애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명은 겸애하는 사람이라고 하자. 만약 당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곤란한 부탁을 해야된다면, 별애하는 사람에게 할 것인가? 겸애하는 사람에게 할 것인가?
현실로 닥쳐오면, 다들 겸애하는 사람에게 부탁할꺼면서.. 겸애가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 한명은 별애하는 임금이고 다른 한명은 겸애하는 임금이 있다고 하자. 만약 이 나라에 전염병이 돌아 백성들이 기아로 죽게 생겨서 누군가에게 의탁해야 된다면, 별애하는 임금을 선택하겠는가? 겸애하는 임금을 선택하겠는가?
다들 현실로 닥쳐온다면 겸애하는 임금에게 갈거면서.. 왜 겸애가 현실성이 없다고 하는가?
정작 따지고 보면, 유교에서 주장하는 성인(聖人)의 정치도, 사실은 겸애하는 것이지 별애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유교에서는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정작 겸애는 현실적이지 않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를 지적하고 있다.
이런 덕택에 농민과 노동자, 전쟁과 기아로 인한 피난민과 고아, 그리고 부양받지 못하는 노인들은 묵자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당대에는 공자보다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또한 가족관계나 과거를 묻지않고 사람들을 모여 살게 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기도 하고, 송나라를 침략하려던 초나라의 왕을 열흘 동안 걸어가서 설득하여 전쟁을 그만두게 한 적도 있었을 만큼 능력이 있었다.

4.2. 절장(節葬)


성대한 장례를 자세히 계산하여 보면, 모은 재물들을 많이 묻어 버리는 게 된다. 오래 상을 입는 결과를 계산해 보면, 오랫동안 일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게 된다. 이룩해 놓은 재물들을, 도와서 땅에 묻어 버리고, 뒤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던 일을 금지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富)를 구하는 것은,

이것을 비유하면 농사짓기를 금하면서도 수확을 하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부유(富)하여 진다는 이론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집안을 부유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될 수 없는 게 분명한데도, 그런 백성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생각컨대 가능하겠는가?

그 이론 조차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묵자》, <절장편>

유교에서 성대한 3년상을 치르는데 돈을 다 쓰게 되면, 힘써 모아둔 돈을 땅속에 묻는 것이되고, 3년동안 일을 하지 않아서 가난해지게 되니, 부유하고자 하여도 부유해 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공맹자(公孟子)[9]

가 말하였다.

"귀신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군자는 마땅히 제사지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묵자가 말하였다.

"귀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제사 지내는 예를 배우라는 것은, 마치 손님이 없는데도 손님 대접하는 예의를 배우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없는데도 고기 그물을 만드는 것과 같소"

《묵자》, <공맹편>

또한, 유교는 귀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제사를 지낸다고 비판하고 있다.다만, 묵자는 귀신의 존재를 믿었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나쁜 짓을 할 떄 꺼리낌이 있게 되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또한 세상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4.3. 비악(非樂)


오늘날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들은 악기를 만드는 것을 국가에 필요한 일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그 악기들은 단순히 땅에 괸 물을 퍼 담고, 허물어진 흙담을 빚어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백성들로부터 거둔 많은 세금으로 큰 종과 북 그리고 거문고와 비파 더하여 피리와 생황 등의 악기를 만드는 것이다. 옛적에 성황들 역시 백성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거두어 이로 배나 수레를 만든 적이 있다. 그들은 그것들을 다 만든 후에 말하였다.

"내 장차 어느 곳에다 이것을 쓸 것인가? 배는 물에다 쓰며, 수레는 뭍에서 쓴다. 그리하여 군자(君子)는 그의 발을 쉬게 하고, 소인(小人)들은 어깨와 등을 쉬게 하리라!" 그런 까닭에 백성들은 많은 재물을 내어 나라에 바치고도 감히 그 일에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어찌 된 일인가? 그것이 오히려 백성들의 이익에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악기의 경우에도 백성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또한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니, 나는 감히 그르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비악 상(非樂 上)>

묵자의 미학에 대한 논설 중에서 후대에 가장 자주 거론 되는 것은 '예악의 무용성'이다. 이를 '비악(非樂)'이라고 한다.
묵자는 '비악'을 통해 사회의 심미와 예술적 활동 영역에서 현실 생활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부귀의 대립이나 착취자와 피착취자들 간의 첨예한 모순 등을 폭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묵자의 '비악'은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대 소생산자 계층의 극단적인 공리주의 관점에서 심미와 예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비악 상(非樂 上)>편에서 이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10]

묵자는 말했다. "인자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천하의 이익을 도모하고 천하의 폐해를 제거하도록 힘써 구하는 것이니, 장차 그것으로써 천하에 법을 세워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일이면 하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이면 하지 않는다. 무릇 어진 사람이 천하를 위해 일을 도모하는 것은 눈에 아름다운 것, 귀에 즐거운 소리, 입에 맞는 맛, 그리고 자기 몸의 안락 등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 백성들이 입고 먹는 데 필요한 재물을 빼앗는 것은 어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묵자는 '비악'과 일체의 심미 활동을 반대하였지만, 미의 존재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으며, 음(音), 색(色), 감(甘), 미(美)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며, 이들은 필요한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는 물건의 실용적인 디자인에 대해서 굉당히 긍정적이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묵자는 생황을 잘 불었으며, 음악에 조예가 있었다는 말까지 전해진다. 또한 묵자는 논리학의 개념을 논하며, 미(美)와 추(醜)는 객관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다.[11] 따라서 미의 가치를 부정한다기보다 위정자들이 그 미를 향유하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과, 허례허식때문에 사회 역량이 낭비되는 것을 비판하는 쪽에 가깝다.

4.4. 행설(行說)


공맹자가 묵자에게 말하였다.

"진실로 선한 사람이라면, 누군가는 알지 않겠습니까?

비유를 들면 좋은 구슬과 같으니, 들어 앉아 나가지 않아도 넉넉한 양식을 얻습니다. 비유를 들면 미녀와 같은 것이니, 들어 앉아 나가지 않아도 사람들은 다투어 구혼합니다. 다니면서 스스로 자랑을 한다면, 사람들은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께서는 두루 사람들을 쫓아 다니면서 설복을 하는데, 무엇 때문에 수고를 하시는 것입니까?"

묵자가 대답 하였다.

"지금 세상이 어지러워, 미녀를 구하는 사람들은 많음으로, 미녀는 비록 나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구혼을 하오.

지금 선함을 구하는 사람들은 적어서, 힘써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오. 또한 여기에 두 사람이 있는데, 모두 다 점을 잘 친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고, 한 사람은 들어 앉아 나다니지 않소.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점을 쳐주는 사람과 들어앉아 나다니지 않는 사람은 그 양식이 누가 많겠소?"

공맹자가 대답 하였다.

"그야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점쳐주는 사람이, 그 양식도 많겠지요"

묵자가 말하였다.

"어짐과 의로움이 같다면, 나다니면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사람이, 그 공과 선함 역시 많다오. 무슨 까닭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려 다니지 않는단 말인가."

《묵자》, <공맹편>

알아주기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유학자를 비판하는 글이다. 남들에게 자랑한다고 비난받아도, 여러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묵자에 따르면, 선(善)을 구하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설득하는데서 오는 것이다.

4.5. 하늘, 운명


천자에게 선함이 있으면, 하늘은 그에게 상을 주고,

천자에게 잘못이 있으면, 하늘은 그에게 벌을 줄 것이다.

천자의 상과 벌이 합당하지 못하고, 옥사의 처리가 공정하지 못하면,

하늘은 질병과 재화를 내리고, 서리와 이슬을 제때에 내리지 않도록 한다.

천자는 반드시 소와 양과 개와 돼지를 잘 기르고, 정결히 젯밥과 제물 및 술과 단술을 장만해 가지고서, 제사와 기도를 드리며 하늘에 복을 빈다.

나는 일찌기 하늘이 천자에게 복을 주기를 기도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12]

나는 이것으로서 하늘이 천자보다도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의로움(義)이라는 것은, 어리석고 천한 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귀하고도 지혜있는 곳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귀한 것인가?

하늘이 귀한 것임을 알수가 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로운 것인가?

하늘이 지혜로운 것임을 알수가 있다.

그러니 의로움(義)이란 과연 하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묵자》, <천지편>

묵자는 '하늘'을 지혜롭고 의로운 인격을 가진 神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천자라 할지라도 그가 잘못을 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

운명이 있다고 고집하는 자가 있어 민간을 어수선하게 하는 자들이 많다. 운명이 있다고 고집하는 자가 말하기를, 운명이 부유하게 되어 있으면 곧 부유하게 되고, 운명이 가난하게 되어 있으면 곧 가난하며, 운명이 많아지게 되어 있으면 곧 많아지고, 운명이 적어지게 되어 있으면 곧 적어지고, 운명이 다스려지게 되어 있으면 곧 다스려 지고, 운명이 어지러워지게 되어 있으면 곧 어지러워 지며, 운명이 장수하게 되어 있으면 곧 오래 살고, 운명이 일찍 죽게 되어 있으면 곧 일찍 죽는다는 것이다.

비록 굳세고 강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로써 위로는 임금과 대신들을 설득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섬기는 것에 흥정을 붙인다.

그러므로 운명을 고집하는 자들은 어질지 못한 자들이다. 따라서 운명을 고집하는 자들의 말은, 명확히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묵자》, <비명편>

하느님을 믿었으나 운명을 믿지는 않았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천하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운명을 믿지는 않았으니, 운명을 믿으면 천하에 이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5. 기술


묵자의 특이한 점은 중국의 여러 사상가 중 가장 기술자적인 면이 강했으며, 여러 학자들은 그가 목수를 본업 삼아 공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췄을 것이라 보고 있다.[13] 이와 관련되어 대표적인 일화로 삼년에 걸쳐 나무로 새를 만들었더니 날기는 했지만 하루만에 부서졌다는 것이 있으며, 카메라의 원리(카메라 옵스큐라)를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고, 묵자가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는 말도 있다. 또한 위에 나온 초의 송 공격을 포기시키려는 유세 도중 초의 기술자 공수반과 서로 나무 모형 병기를 만들어 모의 공성전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발명가적 면모를 보인다는 점에서 벤저민 프랭클린과 유사하다.
그러나 사상가로서의 그를 평가 절하해서는 안 된다. 묵자는 노동의 중요성과 분업에 대하여 처음으로 설파한 사람이다. 짐승들이야 털가죽 있고 풀 뜯어 먹으면 되므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인간은 노동이 없으면 빈곤하게 살 것이며, 나라가 어지러울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의 사상 중에는 아랫 사람들이 아침부터 밤까지 부지런히 바느질하고 농사 짓고 있으니 지도층도 열심히 정무를 봐서 그들에게 할당된 노동을 하라는 내용이 있다. 비공, 비악, 절장 등등 묵자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주제마다 기반으로 깔리는 게 바로 이 논리이다.

6. 기타


  • 묵가 교단은 종교적인 비밀결사[14]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자들의 사유 재산은 교단 공동체와 공유되었고, 개인적인 명리를 탐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으며, 교리를 어기는 자는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주저없이 죽여버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중 일부는 그를 최초의 마르크스라고도 부른다.
  • ||진나라의 복돈이 거자를 맡고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살인죄를 저질렀다. 복돈은 나이도 많은 데다가 대를 이을 사람이라곤 그 아들 하나뿐이었다. 진나라 혜왕이 복돈에게 말했다.
“당신은 늙었고 또 외아들이니 죄를 감해 주겠소.”
“묵가의 법에 따르면 남을 죽인 자는 죽어야 하고, 남을 해친 자는 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대의입니다. 나는 묵가 사람이니 묵가의 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복돈은 이렇게 대답하고 자기 아들을 처형하였다. 《여씨춘추(呂氏春秋)》〈거사〉||
  • 이런 엄격함은 묵가의 사상이 고평가되는 요인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널리 인정 받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문제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에는 하층민 및 기술자 계층의 지지를 널리 받은 것으로 보이며, 맹자도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로 '양묵지도'(楊墨之道. 양주와 묵적의 도)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특히 맹자는 양자 항목에서도 언급하듯이 인이 가족에 대한 애정을 기초로 다른 대상에 대해 차등적으로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과 반대로 가족 등 집단의 해체까지 주장한 묵자에 대해선 '무부(無父)', 즉 아버지도 없는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쉽게 말해서 묵가는 '남의 부모자식도 자기 부모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해라'라고 주장했는데, 맹자는 이에 대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남의 부모랑 자기 부모랑 같냐'라는 식으로 나온 것.[15]
  • 그러나 맹자나 양자도 자신들의 사상에 배치되는 묵자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는 진실로 천하를 사랑하였다"며 그를 인정했다. 그런데 의외로 맹자와 묵자가 서로 통하는 부분도 있는데, 위정자들이 나라 통치를 개판으로 하면 하늘의 뜻을 받아 그들을 몰아낼 수 있다고 한 부분이다.[16] 다만 이 부분이 정작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계층의 입장에선 굉장히 껄끄러운 내용인지라 상당히 박해를 받았는데, 묵가는 이 외에도 사상이 전반적으로 지배계층 입장에서 반국가적인 내용이 많은지라 이미 진나라 대부터 상당한 공격을 받아서 한나라 대에 이르면 아예 묵가 학파 자체가 절멸될 정도였고, 맹자의 경우는 후대 왕조들이 이 부분만 쏙 빼놓고 말한다던지 아예 주희성리학을 집대성하면서 이 부분을 없애버리고 형이상학적인 내용까지 더해서 유가를 마개조시키기까지 한다.
  • 묵공의 혁리는 묵자의 수제자 중 한 명으로 묘사되며 묵자가 주창한 '겸애'를 실천하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양성을 지키러 오는 것이다. 많이 왜곡되고 과장되었지만 묵공에서는 묵자 사후 묵가가 어떻게 분열되고 사라져 갔는지를 보여준다.
  •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노동의 가치에 관한 얘기라던지, 잉여생산물의 재분배를 주장하는 등 공산주의와 통하는 부분도 있고, 심지어 공동체의 초소화, 반강권주의, 반전주의 등 아나키즘과도 통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 또한 청조 말기와 민국 시기에 열강들의 침략으로 개판 5분전이 된 중국에서 제자백가 사상가들 중 상당히 재조명된 학파이며, 양계초 등의 지식인들이 주석을 달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공산주의 중국에서도 배척받았다. 이는 하느님 사상(天志論)과 비폭력 사상 때문에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대에는 다시 '제자백가들 중에서는' 이라는 단서를 달아서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높이 평가하는 추세이다.[17]
  • 사상의 주가 되는 "겸애" 때문에 천주교(=기독교)가 조선에 들어올 때 역시 묵자의 일파로서 인식되어지기도 했다. 얼핏 보면 묵가의 겸애와 기독교의 박애는 비슷해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전혀 같다 할 수 없다. 기독교의 아가페는 보다 정신적이고 희생적, 무조건적인[18] 부분을 강조하는 반면 묵가의 겸애는 '내가 남을 사랑해야 남도 나를 사랑하고 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된다'라는 논지로 철저히 호혜적이고 세속적, 실용주의적인 부분을 강조하기에 혹자는 이를 이타적 이기주의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겸애든 박애든 현실적으로는 매우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만 제외하면 묵가의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그가 말한 겸애(兼愛)는 사실상 '집단이 극초분할화되어 나라도 가족도 구별짓지 않는 절대평등 및 공유의 세상'이라는데, 이것이 가히 후세에 나타날 공산주의와 같이 2500~3000년을 앞서간 사상가인지는 일단 그런 세상이 성큼 다가오고 나서야 논할 만하다. 그리고 이상적 공산주의도 그의 이상에는 미치지 못할 정도인지는 묵적과의 정교한 비교가 필요한 작업이나 원전의 보존이 문제다.[19]
  • 묵가의 기술혁신을 고평가하는 의견도 있으나 오히려 제자백가 사상들 자체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상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했으므로 혁신을 반대한 학파를 찾기 어렵다. 다만 다른 제자백가 학파들의 경우는 주로 사회구조나 정치구조에 대한 개혁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묵가는 그 뿐만 아니라 공학, 기하학, 물리학 등에도 시대에 비해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 여담이지만 오기와 관련된 책자에서 이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이러한 기록문물에서 묵가의 사람들은 좋은 방어술을 널리 알려 모두가 방어술만 익히면 전쟁이 나지 않을것이라 생각했기에 우주방어에 매우 뛰어난 자들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묵가 사상의 기본인 겸애를 실천하는 방법들이 비전과 비공인 관계로 그는 공격법은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묵자 편명을 봐도 제목이나 내용이 대부분 방어전술 위주로 쓰여져 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치는 것을 악하게 보고 반대로 약한 자가 방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는 이들로서 전쟁 자체를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봤기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방어를 통해 공자(攻者)를 지치게 해 회담장으로 이끌어 화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비(備)로 시작되는 일련의 편들을 보면(비성문,비고림,비수 등등...) "진정한 우주방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묵가의 전쟁에 대한 시각은 비공(非攻)편에서 잘 드러난다.
군주들이 전쟁을 통해 패권을 쥐어봤자, 승전국 백성이나 패전국 백성이나 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없고, 천하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을 할 수가 없게 되니, 애초에 전쟁은 하지 말아야하며, 설령 누가 전쟁을 일으키면 공격자를 우주방어로 꺾어버려서 최대한 전쟁을 하지 않게끔 만들라는 게 포인트.
  •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발사한 퀀텀 통신 위성(Quantum-Communications Satellite)에 묵자(Micius)라는 이름을 붙였다.

7. 서적 墨子


묵자의 사상을 기록한 책.
묵자의 사상이 담긴 저서로 묵자와 그의 제자들을 비롯한 묵가학파의 학설을 정리한 묵자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문장들이 엉키고 설켜서 내용이 중복되거나, 오탈자 등이 많아서 내용의 해설이 생략되고, 전국시대 당시의 저술이 맞는지도 의심되는 등 현재 묵가의 사상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유감스럽게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 책은 묵가가 소멸한 후에 중국에서도 사실상 거의 잊혀지다시피 한 책이었다. 왜냐하면 묵자 판본은 오랜 세월에 방치되었고 1894년에 이르어서야 묵자의 복원이 완성되고 이후 량치차오(양계초)의 연구를 거친 뒤 현대적인 의미의 연구도 후스의 중국철학사대강(1919년)부터 시작되었을 정도로 묵가의 연구는 매우 더딘 편이었다. 더욱 중국 공산혁명 이후에는 묵자의 전쟁반대론을 계급투쟁을 반대했다는 논리로 폄하하면서 더더욱 연구가 더딘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묵자는 도교의 경전인 도장(道藏)에 편입되었고, 원래 71편 중 53편 밖에 남아 있지 않고 제대로 판본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전해지고 있다. 《경상(經上)》, 《경하(經下)》, 《경설상(經說上)》, 《경설하(經說下)》, 《대취(大取)》, 《소취(小取)》 등 6편은 따로 《묵경(墨經)》혹은 《묵변(墨辯)》으로 불리는데 논리학과 자연과학에 관련된 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故, 所得而後成也

小故, 有之不必然, 無之必不然

大故, 有之必然, 無之必無然 若見之成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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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 그것을 얻으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요조건, 그것이 있다 해도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없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필요충분조건, 그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고, 그것이 없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나타나면 그것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力, 刑之所以奮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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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형체가 움직이는 원인이다.

圜 一中同長也

圜, 規寫交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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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하나의 중심에서 같은 거리다.

원, 그림쇠로 그리면 겹친다.

논리학필요조건과 충분조건, 역학, 기하학원의 정의와 합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묵경의 문체가 일반적인 한문의 문체와는 다르게 방행독법(旁行讀法)[20]으로 읽어야 하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묵경이 방치되어 오랜 시간이 흘러서 방행독법으로 읽어야 하는 문장이 한 줄로 잘못 적혀있고, 연문(衍文)과 오자(誤字)도 있어서, 한문에 익숙한 중국 전통사회의 학자들도 글에 적혀있는 연문과 오자를 제대로 구분해야, 글의 문맥을 제대로 해독할 수 있는 정도였다. 쉽게 말하자면 아무리 영어를 잘 한다 하더라도 전문가가 알아보는 학술적 전문용어가 잔뜩 포함되어 있는데다 오타와 오류가 많이 포함된 물리학 논문을 읽는 것이 전공자가 아니면 읽기가 쉽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근대와 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연문과 오자를 걸러내고 묵경 부분의 해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양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는 대단히 다르고 오히려 현대의 형식논리학이나 자연과학의 사고방식과 유사성을 보여 준다[21]. 그래서 중국 전국시대의 공돌이들은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았을까에 대해 알고 싶다면 묵경 부분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러나 국내의 묵자의 번역본들은 전체 본문이 난해한 부분이 많아서 대부분에 번역하기 쉬운 부분만을 발췌 번역하거나, 특정한 부분을 번역하여 자기의 의견을 담은 번역본 등이 상당수가 있으며, 완역이 아니지만 해독하기 힘든 문장을 빼고 대부분 문장을 번역하여 완역본에 가까운 번역본이 있지만, 그중에 진짜 완역본은 신동준의 번역본이 유일하다. 다만 본문/직역 외에 여러 다른 번역본들의 해석도 같이 실어놓아 읽기에는 좋지만 책이 상당히 두껍다.
[1] 겸애(兼愛)와 별애(別愛)를 말하고 있다. 겸애는 모두를 아우르는 사랑을 말하고, 별애는 구분 지어 하는 사랑을 말한다. 전자는 묵가의 방식이고, 후자는 유가의 방식이다.[2] 하늘의 뜻. 하늘의 의지.[원문] 今天下之士君子之欲爲義者. 則不可不順天之意矣. 曰順天之意者 兼也. 反天之意者 別也. 兼之爲道也 義正. 別之爲道也 力正. 曰義正者何若. 曰大不攻小也. 强不侮弱也. 衆不賊寡也. 詐不欺愚也. 貴不傲賤也. 富不驕貧也. 壯不奪老也. 是以天下之庶國. 莫以水火毒藥兵刃以相害也.[3] 당시 기술에도 이해도가 깊은 인물이었다. 때문에 공수반을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4] 묵자는 하늘이 의지를 가지고 있어 옳고 그름을 판단해 인간들에게 상벌을 내리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하늘의 정의로움을 믿는 것이 세상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 송양공의 이복형인 공자 목이(公子目夷)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는데, 공자 목이의 이칭이 묵이(墨夷) 혹은 묵태(墨台)인데, 목이의 후손들이 그의 이름인 묵(墨)을 따서 묵씨(墨氏)가 되었다는 설.[6] 고죽국의 국성이 자성(子姓) 묵태씨(墨胎氏)인데, 고죽국이 망한 이후에 후손들이 성씨를 묵태씨에서 글자 태(胎)를 때고, 묵씨(墨氏)로 호칭되었고, 묵자가 그 후손이라는 설.[7] 인도인 혹은 아랍인.[8] 예를 들면, 예양이나 형가 같은 인물들.[9] 공자의 제자중 한명.[10] 출처 : 중국미학사(中國美學史). 이택후(李澤厚).[11] 출처 : 중국미학사(中國美學史). 이택후(李澤厚).[12] 하늘은 천자가 잘되기를 기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늘은 다만, 천자의 행동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를 판단하여 상벌을 내릴 뿐이다.[13] 이는 위에서 설명한 '묵(墨)'이라는 이름자의 어원과 결부되어진다.[14] 그러나 도가처럼 비전 수준의 암흑종교까지는 아니었던 걸로 간주된다.[15] 비슷하게 맹자는 양주에 대해서는 '자기네 임금도 없는 사상', 즉 '무군(無君)'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역시 양주의 사상, 한발 더 나아가 도가 사상에 대한 오독(誤讀)에 가깝다.[16] 맹자는 이를 '천명(天命)', 묵자는 이를 '천지(天志)'라고 표현한다.[17] 이 문서의 다른 수많은 항목에서 공산주의나 극좌파 이념인 아나키즘과의 유사성이 언급된 것을 보면 의아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중국의 공산주의 사상은 소련에서 정립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마오쩌둥이 재정립한 마오주의였다. 폭력 혁명과 노동계급의 독재등은 공산주의, 넓게 보면 사회주의의 수많은 분파 중 유명한 주류 분파인 셈이고 이 문서의 다른 항목에서 언급된 공산주의와의 유사성이란 언급 등은 '공산주의의 가장 기본적 요소'와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18] 다만 기독교에서 아가페를 실천해야 하는 당위성은 하느님과의 언약(특히 신약)이며, 아가페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종류의 무조건적인 내리사랑을 지칭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은 필리아로 따로 구분된다. 기독교에서는 인간도 아가페를 실천할 것을 권장하나, 인간의 내면적 특성상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성령의 은총을 받을 때 진정한 아가페의 실천이 가능해진다고 본다.[19] 묵자는 당시 시대상을 감안해 볼 때 묵가의 첨삭이 당연히 가해졌을 것이며 고고학적 발견이 있지 않은 이상 묵적 개인 사상의 원형을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사실 제자백가 사상가들의 저서라고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저작들 중 가필, 첨삭 의혹을 받지 않는 게 거의 없다. 그 유명한 논어도덕경, 장자조차도 텍스트 중 상당 부분이 후대의 가필 의혹을 받고 있으며, 오히려 묵자는 근세 학자들에 의해 많은 관심을 받고 현대적 방법론으로 상당히 분석된 텍스트이고, 그 결과 묵자도 다른 제자백가 사상가들 못지 않게 굉장히 일관된 논리로 주장을 펼치고 있어서 그 사상의 원형조차 파악하기 힘들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가깝다.[20] 방행은 세로쓰기로 쓸 때 한줄에 상하로 나누어서 두 줄로 글을 쓰는 방식인데, 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에 주석을 삽입하거나, 개인의 의견을 적을 때 사용한다.[21] 흥미롭겠지만 재미로만 받아들이자. 상대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 유사하게 해석가능한 부분이 있다 정도이기 때문에 서양이나 현대와 과도하게 연결짓는 것은 무리이다. 그것은 서양에대한 열등감의 발로에 불과할 것이고 묵자를 매우 편협하고 왜곡되게 해석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특히 동서양을 떠나 고대의 텍스트는 축약적이고 모호한 문장이 많아서 목적을 가지고 해석하려고 하면 한도끝도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