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사

 


1. 개요
2. 출생
3. 성장
4. 웃음을 잃은 여인
5. 이후의 행방
6. 정말 포사 때문에 주나라가 망했을까?


1. 개요


褒姒
달기와 더불어 주유왕중국 희대의 경국지색으로 꼽히는 여인.

기록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주나라의 서주시대를 끝내고 동주시대를 열게 만든 인물로 주나라를 사실상 끝내고 명맥만 남게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2. 출생


포사는 전설적인 경국지색답게 출생부터 판타지스러운데, 이야기는 하나라 말기 걸왕(桀王) 때 두마리의 이 왕궁 뜰로 내려와 입가에서 거품을 흘렸다로 시작된다. 걸왕은 그 거품을 황금 그릇에 받아 상자 속에 보관했고, 후에 주나라 선왕 때에 그 상자를 열자 용의 거품이 나왔는데, 그 고약한 악취는 가시지 않았다. 이에 주변 신하가 '''더러운 것에는 지저분한 것으로 대항하는 것'''이라며 그 방법으로 '''월경하는 여인들을 동원시켜 발가벗기고 소리를 지르게 하는 것'''을 간청하여 왕이 '''생리 중인 궁녀를 집합 시키니 그 수가 500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1].
왕의 명령으로 궁녀들을 모두 발가벗기고 용의 거품 앞에서 소리를 지르니 용의 거품은 금세 '''한 마리의 도마뱀으로 변했고 그 도마뱀은 곧바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궁녀들은 도망가는 도마뱀을 쫒았으나 도마뱀은 어린 궁녀[2]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 후 뱃속에서 수십 년 동안 잉태된 채로 있다가 이윽고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를 낳은 궁녀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그 아기를 요람에 태워 강물에 띄워 버렸다.
그런데 그 시기를 전후하여 당시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에서는 이상한 노래가 아이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산뽕나무 (혹은 화살)과 기초로 짠 화살통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이는 점술가가 한 예언과도 같았다. 그래서 주나라 조정에서는 산뽕나무 활과 기초로 짠 화살통을 만들지 못하도록 법으로 엄금했는데...
하필 운명의 장난인지 어떤 노부부가 깊은 산골에서 살아온 탓에 조정의 그런 방침을 못 듣고 문제의 산뽕나무 활과 기초로 짠 화살통을 만들어 팔기 위해 상경하다, 관헌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잡혀버린 여자는 사형을 당했고 남자만 간신히 빠져나와 도망쳤다. 그는 도망치던 중 강가에 새들이 부리로 잡아당겨 어떻게든 땅으로 끌어올리려고 한 요람 속의 아이를 주워 기르게 되었다고 한다.

3. 성장


아이를 발견한 촌부는 가난 때문에 포성(褒城)에 사는 사대(似大)라는 사람에게 아이를 팔았다. 그는 아내와 아들은 무사한데 딸만 얻으면 태어나는 족족 죽어나가는 터라 여자아이를 얻고 싶어서, 아이를 사서 포성의 포(褒)에 사(似)의 사람 인 변을 계집 녀로 바꾼 사(姒)로 포사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키웠다.
14세가 되자 그 아름다움이 두드러졌고 17세 때는 절세가인이 되었다. 시골에 사는 데다 나이가 어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빨래와 밭일만 하는 시골 여자아이의 모습 그대로였으나...
어느 날 같은 포성 사람 홍덕이 그녀를 보고는 그녀를 왕에게 바치면 왕에게 밉보여 3년째 옥에 갇혀있는 아버지 포향을 구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거액을 주고 그녀를 사서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히고 궁중에 있었던 노부인에게 도움을 받아 예법을 철저히 가르쳐 당시 주나라 왕인 유왕(幽王)에게 바쳤다. 워낙 미인이라 바로 후궁이 되었고 옥에 갇힌 포향은 풀려나왔다.

4. 웃음을 잃은 여인


유왕은 포사를 총애하여 원래의 왕후인 신후(신나라 공녀 출신)와 그 소생 태자 의구(후의 주평왕)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포사의 소생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포사는 미녀였지만, 도통 웃지를 않아서 왕의 애간장을 녹였다는 것. 어떻게 하면 웃겠느냐고 묻자 포사가 비단 찢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판본에 따라서는 우연히 어느 날 한 궁녀가 비단옷을 입고 근처를 지나가다 매화나무 가시에 옷이 걸려 찢어지자 왜인지 포사가 그 소리가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는 버전도 있다. 일본소설가진순신은 '이야기 중국사'에서 '버려진 아이였으니 성장 과정이 편했을 리 없고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억지로 궁궐에 끌려왔다. 이 때문에 스스로 웃음을 버렸을 수도 있다'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유왕은 그 비싼 비단을 있는 대로 사서 찢어댔고, 당연히 국고는 초스피드로 탕진. 게다가 포사도 갈수록 비단 찢는 소리도 이제는 지겹다고 하였을 정도여서 더 이상은 비단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에서 비롯한 사자성어가 천금매소(千金買笑)이다. '천금을 들여서 웃음을 산다'라는 뜻으로, 지극히 어리석고 무모한 행동을 의미한다.
그 후 한 술 더 뜨는 일이 벌어졌으니, 어느 날 여산의 봉화대전쟁이나 위급한 상황이 났을 때만 피워야 하는 봉화가 아무 일도 없는데도 피어오르는 일이 생긴 것이다. 놀란 제후들이 병사들을 데리고 부리나케 모였다가 아무 일도 없는 것을 알고 다들 어이가 없어 화를 냈다. 그런데 포사가 보기에 그 사건이 꽤나 재미있었는지 신나게 웃었다고 한다. 그 웃음 소리가 마치 악기와도 같고 웃는 얼굴은 꽃이 만발한 듯이 아름다워서 유왕은 더욱 신이 나 봉화를 시도 때도 없이 자꾸 올리게 했다. 이런 짓거리를 자꾸 해대다 보니, 제후들도 낌새를 눈치채고 다시는 출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렵에 유왕은 기존 왕비를 내쫓고 포사를 왕비로 임명시켰고, 왕비는 복수를 하고자 군사를 일으켰고, 오랑캐 서융이 침략했다. 다급해진 유왕은 봉화를 올려서 도움을 요청했으나, 마치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처럼 제후들은 또 거짓말이겠거니 치부하고 아예 출정하지 않아 유왕은 아들과 함께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오랑캐인 견융족에 의해 붙잡혀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한다. 일부 제후들은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눈치 채고 진짜 침략임을 알았지만, 여자 하나에 저리 미친 왕이라면 차라리 이 참에 죽는 게 낫다며 일부러 방치했다는 설도 있다.
문제의 거짓봉화 사건이 일어난 경위에 대해서는 판본에 따라 다르게 서술되어 있는데, 단순한 실수였다는 설과 아예 처음부터 의도되었다는 설이 있다. 전자의 설에 따르면 봉화 관리자의 실수로 봉화대에 불씨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불이 올라갔고, 유왕이 봉화 관리자를 불러 문책하려다가 포사가 웃음을 보이자 이를 본 유왕의 기분이 갑자기 좋아져서 봉화 관리자를 벌하려던 것도 취소하고 되려 상을 내리더니 그 뒤로 계속 거짓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후자의 설에 따르면 괵석부라는 아첨쟁이 신하가 "천하가 태평해 오랫동안 봉화를 올릴 일이 없었으니, 이번에 갑자기 봉화를 피워 제후들을 당황케하면 포사를 웃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유왕이 이를 실행에 옮기려 하자 그 자리에 있던 한 제후가[3] "봉화는 그런 용도로 쓰라고 있는 게 아닌 줄 아뢰오."라고 하면서 유왕을 말렸다. 그러나 유왕은 이를 무시하고 봉화 장난을 강행했고, 진짜로 포사가 웃음을 보이자 아이디어를 낸 괵석부에게 큰 상을 내리고 그 뒤로 계속 거짓 봉화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그 후 서융이 쳐들어오자 유왕은 급히 진짜 봉화를 올렸으나 그 제후의 말대로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았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방영분에서는 단순실수설을 따르고 있으며, 반면에 천일야사 방영분에서는 처음부터 의도되었다는 설을 따르고 있다.

5. 이후의 행방


이후의 그녀의 행방은 정확히 알려진 게 없다. 여러 설이 있는데, 이후에 견융의 우두머리에게 강간을 당하고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설, 그 부족 추장이 왕과 태자를 처형한 이후 포사를 보고 미모에 반해서 아내가 되어야겠다고 유혹하자 포사는 저런 사람의 아내로는 절대 살 수 없다면서 사전에 자살했다는 설 등 여러 설들이 있지만, 실제로 그녀의 최후는 불명이다.
다른 일각으론 왕은 살해당하고 대신 포사가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주나라는 흔들린 이후 춘추전국시대까지 비참한 수명을 계속 유지했다. 이때 포사는 견융족의 수장과 잠자리를 가지며 그를 복상사시키고는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천일야사 방영분에서는 신후가 폐위된 후 아버지 신후(申侯)가 오랑캐들과 연합해 주나라 궁성을 공격, 다급히 봉화를 올렸으나 상술한 바와 같이 잦은 봉화 장난에 연거푸 속은 제후와 군사들은 이번에도 장난이려니 싶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마침내 신후가 군사를 이끌고 궁 안으로 쳐들어와 유왕에게 "포사를 기방에 넘길래, 아니면 둘이 같이 목숨 내놓을래?" 하고 협박하자 유왕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전자를 선택해 군사들에게 붙들려 기방에 팔려간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이후 유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그녀는 어떻게 됐는지 불명인 것으로 나온다.
달기서시와 달리 누군가가 작정하고 나라 말아먹게 하려고 보냈다는 설도 없다는 점에서 더욱 무서운 경국지색의 미녀. 그런데 사실 포사 본인은 달기나 말희와는 달리 직접 악행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유왕이 포사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툭하면 비단을 찢고 봉화를 올리는 삽질을 스스로 했을 뿐, 포사가 그런 행동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6. 정말 포사 때문에 주나라가 망했을까?


그녀로 인해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나왔으며 하나라를 말아먹게 한 말희, 은나라를 말아먹게 한 달기의 계보를 이었다. 다만 문제는 말희-달기-포사의 스토리 라인이 '''너무 비슷하다'''는 것. 그리고 말희, 달기, 포사 세 여인 모두 정복한 나라에서 바쳐진 미녀들이고, 빼어난 미모로 왕들을 사로잡아 결국 나라를 망치게 했다는 구조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이런 탓에 일각에서는 이런 기록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동양의 역사서는 역사의 인과 관계를 군주 개인의 행동에(유교적 덕치 위주) 끼워넣어 판단하는 경향이 강한데[4], 주나라 쇠퇴의 책임을 주유왕이 여자에게 빠져서 국고를 탕진하고 주위 제후들에게 신임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전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결과론적인 평가는 동양 역사서에서 많이 보이는데, 실제 군주에게 후사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여색을 즐기는 건[5] 오히려 장려되는 일이었고[6], 과 관련된 여흥이나 사냥[7] 등의 행동도 군주의 힘을 과시하여 왕권강화를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역사에서 세종대왕처럼 성군으로 알려진 인물들도 자주 했던 일이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당시와 이후의 국가 상황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것. 문제는 암군 한 명이 나라를 망치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는 거지만, 역사가들은 사회 시스템의 불안이 수대에 걸쳐 쌓여 벌어진 일이라도 군주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처럼 역사를 흐름과 사회 체계 위추로 분석한다면 많이 달라진다. 주나라는 각 지역을 분봉한 봉건제도로 운영되었는데, 상나라 대비 부족한 역량으로 역성혁명으로 정권을 뒤엎어 많은 지역에 지배력을 갖지 못했고, 그나마 주 왕실을 지탱하던 주나라 초창기 혈연으로 연결된 각지의 제후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주나라와 멀어져 주나라 왕실의 힘은 점점 약해졌다.
서주 말기로 가면 봉화로 제후군을 불러모았다는 이야기는 결국 '''주 왕실의 중앙군이 약해서 제후들이 달려와줘야 위급한 상황을 벗어날 정도로''' 주 왕실이 약해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주 왕실이 직할지인 호경 일대를 방어할 군대조차 유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래서 포사의 웃음을 듣기 위한 용도로 거짓 봉화를 올린 것이 아니라, 중앙군이 약해지고 제후군들이 강해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주 왕실이 왕권을 세우려는 시도를 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봉화를 통해 군대를 모아 아직 건재한 주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려는 퍼포먼스였다는 것.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주 왕실과 각 제후들간의 알력 싸움이 있었고 그 가운데 주유왕이 제후들에게 신임을 잃어 망했다고 해석한다. 사기를 비롯한 후대의 역사서를 보면 이를 추정할 수 있는 문구들이 나온다. 오랑캐인 견융이 주나라를 공격한 계기는 신나라의 제후인 신후(申侯) 때문이었다. 포사로 인해 왕후였던 딸이 폐출당하자 신후는 이에 반감을 품고 견융을 끌어들인 것.[8] 이는 엄연히 주 왕실에 대한 반란이지만, 다른 제후들은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견융 세력을 물리친 뒤엔 신후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함께 유왕의 태자를 주평왕으로 옹립했다. 이 태자는 폐출된 신씨 왕비의 아들이므로 신후는 태자의 외조부가 된다.
즉, 내용상으로 보자면 주유왕이 포사를 총애하면서 주유왕의 외척인 신후의 딸을 멀리하고 신후의 외손자를 태자에서 폐위하자, 신후는 견융을 끌어들여 주유왕을 죽이고 자기 외손자를 주나라 왕으로 옹립한 것이다. 이때부턴 주나라는 사실상 허울만 남아있는 상태로 중원의 패자들이 존왕양이라는 명분으로 주나라 왕을 좌지우지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다만 이런 사안에 대해 사실적으로 쓸 순 없으니 최대한 주유왕을 나쁘게 서술하기 위해 포사를 경국지색으로 만들고 주유왕을 포사에 홀린 암군으로 서술하여 서주가 멸망하고 동주가 생긴 원인을 주유왕 개인에게 돌린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정사에 기록된 내용을 다른 각도로 비틀어 본 것 뿐이니 포사가 거짓말이다 뭐다 할 필요는 없다.

[1] 월경 주기의 28일 중, 월경기는 3~5일 정도 지속된다. 즉 생리 중인 있는 궁녀가 500명이라는 건, 전체 궁녀 수는 대략 3500명 정도라는 것(...). 물론 중국 기록은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2] 열국지에서는 20세 정도의 성인 여성, 십팔사략에서는 7세 정도의 소녀로 나온다.[3] 정나라의 제후 정환공이다. 후에 서융이 쳐들어왔을때 제후들이 아무도 오지 않자 혼자서 유왕의 가마를 지키다가 전사한다.[4] 이는 서양도 마찬가지이며, 신앙심이 그 기준이다.[5] 성벽이 있어 상식적으로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 말고 그냥 이 여자, 저 여자 좋아하는 정도는 권장사항이었다.[6]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대왕 또한 후궁 포함 자그마치 11명의 아내와 18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왕은 후사가 없는 게 문제지 많은 건 별 문제가 아니었다.[7] 사냥을 하기 위해 대규모 군사들이 동원 되는데, 지금 기준으론 병력이 허드렛일에 동원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냥감을 몰고 쫒고 하는것으로 군대가 집단으로 기동하는 모의 군사작전의 효과가 있다. 냉병기 시절엔 실전 훈련이었던 셈[8] 때문에 열국지 등 후대의 창작물에서 신후의 행위는 주 왕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좋은 의도였으나, 견융이 멋대로 유왕을 살해해버리고 신후도 '천자를 좀 놀라게 해서 바른 길로 이끌려고 했지 살해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라고 후회하는 것으로 묘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