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기성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조선민주당 조직부장, 서북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 대동청년단 부위원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선우기성은 1909년 5월 13일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하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0년 1월 18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정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동교생 380명을 규합하여 교내에서 만세를 벌인 뒤 학교에서 12km 떨어진 정주읍까지 가두 시위를 벌이며 진출했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했던 일본 경찰과 정주 정거장 앞에서 크게 충돌했다. 이로 인해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0년 3월 2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정주군에서 숨죽여 지내던 그는 8.15 해방 후 조만식 등 북한의 우익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조직한 조선민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북한이 급격히 공산화되고 조만식이 연금되는 등 우익 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자,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내려갔다. 이후 그는 평안도 출신 인사들을 결집해 1946년 6월 '평안청년회'를 출범시켰다. 회장엔 백남홍을 추대했고, 자신은 문봉제와 함께 부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에 가담한 회원은 5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선우기성은 남한에서 활동하는 남로당을 상대로 정치 테러를 주도했고, 북한 출신 청년운동단체들을 모두 결집하여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결국 그의 주장이 공감을 사면서 1946년 11월 30일 서북청년회가 출범했다. 그는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부위원장에 장윤필, 조영진이 맡았다. 서북청년회는 발족 후 1947년 6월 10일 대전에 남선(南鮮)파견대를 창설했다. 남선파견대는 충청·영남·호남 지역에서 활동하는 서북청년회의 전진기지였다. 우익 지방유지들이 서북청년회에 지원을 요청해 오면 이들은 20~40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남선파견대장은 함북 청진 출신 임일이었다.
1947년 6월, 충북 영동에서 현지 주둔 국방경비대에 소속되었던 좌익 군인들이 서북청년회원들의 숙소를 습격, 회원 10명을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소식을 접한 서북청년회 남선파견대장 임일은 20명의 회원들을 데리고 충북 영동으로 들어갔다. 훈련부장 허태화가 증원 병력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서북청년회원들은 몽둥이를 들고 좌익 병사들이 모여 있는 막사를 습격했고, 이내 난투극이 벌어졌다. 미군정은 관계자들을 엄벌하려 했지만, 선우기성은 국방경비대 내 좌익세력이 먼저 서북청년회원들을 공격해 죽인 게 원인임을 분명히 하는 한편, 김구에게 광복군 출신인 유동열 통위부장과 송호성 사령관에게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요청해 사건을 무마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정치 테러를 주도하던 선우기성은 1947년 여름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이 귀국한 뒤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자 대동청년단에 합류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문봉제, 김성주 등은 잔류를 주장했고, 선우기성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만 이끌고 대동청년단에 가담해 부위원장을 맡았다. 그 후 대한청년단과 서북청년회는 서로 경쟁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에 협력했지만, 대한민국 건국 후인 1948년 12월 19일 이승만 대통령이 국내 모든 청년단체들을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하면서 두 단체 모두 대한청년단에 흡수되었다. 선우기성은 서북청년회와 대동청년단에서 잇달아 고위직을 맡으면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정치 테러를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이들이 많이 희생되었는데, 특히 제주 4.3 사건에서 그가 이끄는 서북청년회원과 국군에 의해 희생된 제주도민의 숫자는 확인된 사망자만 1만 명이 넘으며, 추정 사망자는 6만에서 8만 명에 달한다.
그의 조직이 대한청년단에게 흡수된 뒤, 선우기성은 1949년 11월 20일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을 결성하고 선전부장을 맡았지만 얼마 후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이 발발하고 자유당이 해산되자, 그는 정계를 은퇴하고 말년을 서울에서 보내면서 회고록 <어느 운동자의 일생>을 출간해 해방 후 자신의 행적을 옹호하고자 노력했다. 1988년 11월 6일 서울에서 사망했고 이틀 후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선우기성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야 하느냐는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