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혁(독립운동가)

 


성명
선우혁(鮮于赫, 鮮于爀)
본관
태원 선우씨
생몰
1889년 ~ ?
출생지
평안북도 정주시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선우혁은 평안북도 정주 사람이다. 그가 유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언제 태어났는 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기사가 존재한다. 1962년 4월 20일 경향신문 기사 <사랑의소문…萬里(만리)길도지척>에 따르면, 하와이에 살던 심여사 할머니가 태평양 전쟁 때 딸이 사준 손목시계를 강원도 선혜학원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무료로 가르치고 있던 이혜숙 양에게 전달했는데, 이때 할머니로부터 시계를 받고 한국에 와서 이혜숙에게 시계를 전달해준 사람이 바로 선우혁으로, 그때 그의 나이가 74세였다고 한다. 이로 볼때 그는 1889년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우혁은 일찍이 신민회에 가입했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913년 3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방면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는 동시에 교포 자제들을 가르치다가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장덕수, 서병호, 한진교, 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 그는 1919년 2월 서병호와 함께 국내로 파견되어 평안도 지방에서 양전백, 이승훈, 길선주, 송병조 등 기독교 목사와 천도교 지도자들을 만나 서로를 연계시켜 3.1 운동이 발발할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군자금을 모금한 뒤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3.1 운동이 발발하자 상하이 법조계 보창로에 독립사무소를 설치하고 국내외 각지에서 모여온 지사들이 설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했다. 그는 임시의정원에서 교통차장, 교통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임시정부의 평북정주국조사원에 임명되었으며, 안동교통사무국을 개설해 국내와의 비밀연락을 도모했다. 국가보훈처가 집필한 <독립운동사자료집 6: 삼일운동사자료집>에 따르면, 선우혁은 교통지부장으로서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일인들이 국내에 산포되어 음료수와 생선·소금·설탕 등의 음식류에 독약을 투입하여 한인을 독살하는데, 특히 의주(義州)·용천(龍川)·평양(平壤)·선천(宣川) 등지에서 발현되는 것이 많은 바, 평양에서는 소금 한 되에 4작(勺)의 백색 결정체 약을 발견하여 분석한즉 석회질용해약(石灰質溶解藥)이라 하고, 용천 양시(楊市)에서는 4,5처의 우물에 기름기가 떠오름을 이상히 생각하여 물을 모두 퍼낸즉 헝겊 조각으로 싼 약 덩어리 한 개를 얻은 고로 이를 보내 드리오며, 투약의 형편은 일인이 한인 아동을 시켜 한 차례 투약에 10원 씩을 지급하되 일인은 수풀 사이 후미진 곳에 은신하여 있고 아동으로 하여금 미리 우물의 깊고 얕음을 조사하여 투약하는 것을 바라보고야 돈을 내어준다 하니, 이는 용천 양서면(楊西面) 양성하(梁成河)의 집에서 용인(傭人)된 자인 18세 난 어리석은 아이의 자백이 있으며, 독약이 되는 증거는 용천 사람 최중태(崔仲泰)가 그 약을 닭에게 먹여 보니 4마리의 닭이 즉사하였으며, 김선묵(金善黙)의 모친은 약을 조금 맛보는 것으로 2시간을 깊이 취하였으며, 의주의 자혜병원(慈惠病院)의 일본인 원장도 이를 검사하고 즉사 약은 아니나 고질을 생기게 하는 약이라고 증명하였읍니다.

선우혁은 상해한인거류민단을 조직하고 여운형을 단장에 추대했으며, 자신은 총무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한편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해 교포 아동의 교육에 주력했다. 또한 1920년 7월에는 교민단(僑民團) 상의원(常議員), 동년 11월에는 본구의원(本區議員)에 선출되어 교민들의 민족정신 고취에 기여했다. 1921년 3월 3일에는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고 독립을 위한 진정서를 작성하여 지도급 목사, 집사 등이 연서(連署)하여 국내외 교회들에 발송하기도 했다.
1921년 초 임시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독립운동가들이 국민대표회의 주비회를 설립해 임시정부의 향후 방향을 의논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준비했다. 이때 선우혁은 국민대표회의 주비회의 외교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하지만 1923년에 소립된 국민대표회의가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해체되자, 그는 다시 임시정부에 가담했고 1929년 12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30년 3월에는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1년 1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에 참가한 그는 지도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흥사단의 강령을 실행하기 위한 공평사(公平社)를 발기 조직하여 1931년 3월 29일 엄항섭과 함께 감사에 선출되기도 했다. 1932년 9월 1일에는 김두봉의 후임으로 인성학교 교장에 임명되어 후진을 양성하려 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34년 1월 항저우로 옮겨서 송병조, 김철, 조소앙, 이상일(李相一), 김두봉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해 임시정부를 지원했으며, 진광(震光)을 발간 배포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조국에 돌아가지 않고 하와이로 이주했으며,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1968년 3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 <『윤락의 응달』벗어나 일어선 4.19義擧(의거) 少女(소녀)>에 따르면 선우혁이 이미 죽었다고 하므로 1962년에서 1968년 사이에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선우혁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