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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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장로회 목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양전백이 사망한 직후에 평양 장로회신학교 기관지 <신학지남>이 1933년 3월 게재한 '약력'에 따르면, 양전백은 1870년 3월 10일 평안북도 의주군 고관면 상고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일제 경찰이 4월 25일 양전백을 신문한 내용을 기록한 <양전백 신문조서>에 따르면, 양전백 본인은 자신이 50세라고 밝혔다고 한다. 이로 볼때 그가 태어난 년도는 1870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양전백은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의 21세손으로 양반 가문의 후예였다. 그는 어렸을 때 증조부 슬하에서 한학을 수학했지만 9살 때 가세가 기울자 고관면 관동리로 이사갔고 쇠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과거 준비에 정진해 15세에 이르러서는 시와 문장에 능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가세가 더욱 몰락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구성군 천마면 조림동으로 다시 이사가야 했다. 이후 그는 과거를 보는 걸 포기하고 동네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 훈장 노릇을 해 생계를 유지했다.
2.2. 기독교 입교
1888년, 양전백은 19세의 나이에 홀연히 서당 훈장을 그만두고 집을 떠나 각지를 유랑했다. 그는 의주군 송장면에 거주하던 유학자 이정로(李梃魯)의 문하에 들어갔고, 이듬해 집으로 돌아와 박영신(朴永信)과 결혼했다. 그는 다시 서당 훈장을 하며 생계를 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유교 경전을 연구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892년, 존 로스 목사의 한글 성경 번역에 참여한 의주 상인 백흥준(白鴻俊)의 사위인 김관근(金灌根)이 양전백을 선생으로 초빙해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했다. 김관근은 양전백의 언행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그를 마음에 들어하며 양전백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확고한 유학자였던 양전백은 쉽사리 기독교 교리에 감화되지 않았다. 이에 김관근은 1892년 9월에 다시 찾아와 노잣돈을 댈 테니 함께 서울 여행을 하자고 제안했다. 양전백이 동의하자, 김관근은 그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리고 있던 장로교회의 도사경회(都査經會)로 데리고 갔다.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공부하는 도사경회는 서울과 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교인 16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 달 동안 진행되었다. 얼떨결에 도사경회에 참석한 양전백은 모임에 나가며 기독교와 서구사상을 접했다.
도사경회를 마치고 구성으로 돌아온 양전백은 김관근의 아버지 김이련이 주선해 사기면 신시에 세운 학당의 교사로 초빙되어 한문과 함께 한글과 성경을 가르쳤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교인과 학생 수십명과 더불어 학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학을 신봉했고 기독교는 부차적인 학문으로 여겼다. 그러던 1894년 12월 청일전쟁으로 인해 평안도 일대가 전쟁터로 변하면서 학당 운영이 불가능해지자, 그는 집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상경한 양전백은 사무엘 A. 마펫 선교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비로소 기독교 교리에 감화되었다. 1895년, 그는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마펫 선교사는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보고서를 보내면서 양전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후 양전백은 집을 처분해 4백냥을 마련하고 그레엄 리 선교사가 보낸 보조금 2백여 냥을 더해 초가 6칸을 사들인 후 수리해서 예배당으로 만들고 김관근을 조사로 세워 신시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평양에 있던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권서(勸書) 직책을 받고, 평안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복음서와 전도문서를 팔면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학식이 있어서 아는 것이 많고 누구도 추종하기 어려울 정도로 으뜸이 될 것이다. 그는 이미 성경을 많이 읽고 신앙심이 깊으므로 곧 세례를 주었다.
2.3. 목회 활동 및 계몽 운동
1896년 12월, 양전백은 평양에 새로 부임한 노먼 C. 휘트모아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휘트모어 선교사와 함께 선천에 거점을 마련하고 평안북도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선천에서 집에서 예배를 드리던 교인들을 규합해 1897년 가을 선천읍교회를 설립했다. 그가 이렇듯 각지를 돌며 전도에 힘쓴 결과, 1899년 무렵 평안 북도 일대에 26개 장로교회에 세례교인 202명으로 늘어났다.
양전백은 교육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1900년 선천 유지와 교인들의 기부금을 받아내 이를 바탕 삼아 초등교육기관으로 명신학교(明信學校)를 설립했다. 창립 당시 12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명신학교는 1901년 부속 여자소학교를 설립하며 점차 교세를 확장했다.
1902년 2월, 양전백은 선천읍 장로로서 안수를 받았고 이듬해 장로회공의회의 결의로 평양에서 개교한 장로회신학교의 신학생으로 추천을 받아 목회자가 되기 위한 신학 수업을 받았다. 이 무렵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평안북도 일대의 교회들이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막사 또는 병원으로 징발되거나 파괴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양전백은 약소민족의 설움을 느끼며 민중계몽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이기로 결심했다.
1906년, 양전백은 선천읍교회 교인들과 함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를 설립했다. 초기에 선천읍교회의 공간을 빌려 26명의 학생에 6인의 교사진으로 출발한 신성중학교는 1909년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미국 독지가의 기부금을 받아 교사와 기숙사를 신축하고 학교의 경영권을 넘겨 받음으로써 미션 스쿨로 개편되었다.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운동가들은 백낙준[1] , 이대위, 계병호, 박형룡, 김선량, 김양선, 장준하, 계훈제 등이 있다. 또한 양전백은 1907년 보성여학교(保聖女學校)를 설립하여 여성지도자를 길러내는 교육에도 힘을 쏟았고, 미국 교포들이 보내온 성금으로 1908년 대동고아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1907년 6월, 양전백은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이기풍, 한석진과 함께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 이들 7명은 석달 뒤 대한예수장로회 독립노회가 조직되었을 때 모사 안수를 받고 한국 장로교회의 초대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평안북도와 남만주 일대를 순횅하는 목사로서 2년간 시무했고 1909년 선천읍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2.4. 105인 사건
한일병합 후, 일제는 1910년 가을 양전백, 이상재, 최병현 등 한국 내 기독교 각 교파의 명망있는 교역자 17인을 초청해 일본으로 보내 시찰하게 했다. 이는 일제의 발전된 문물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을 회유 및 포섭하려는 의도였지만, 양전백은 시찰에서 돌아온 뒤 신도들에게 “영국이 100년에 걸쳐 이룩한 사업을 일본이 30년만에 이루었다면 한국인이 이를 10년에 이루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며 종교 도덕의 각성과 각종 사업에 힘쓸 것을 격려했다.
회유가 먹히지 않자, 일제는 1911년 10월 데라우치 총독 모살 미수 사건을 조작해 신민회에 가담한 인사 및 기독교계 인사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이때 양전백 또한 선천 신성중학교의 학생 및 교사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모두 389명이었는데, 이 중 양전백을 포함한 123명이 경무총감부에 의해 정식 기소되었다. 그는 일제 관헌에게 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저항 의지를 꺽지 않았다.
양전백은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그는 자신처럼 유죄를 받은 104명의 인사들과 함께 복심법원에 항소했고, 경성복심법원은 1913년 3월 20일 윤치호, 양기탁, 임치정, 이승훈, 안태국, 옥관빈 등 6인을 제외한 99인이 무죄 방면되었다. 이렇게 무죄로 풀려나 다시 신성중학교 교단에 선 양전백은 사표를 제출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하지만 그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1914년 평북노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16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제 5대 총회장에 선출되면서 전국의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떠올랐다.나는 이제 교직을 그만두어야 되겠습니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나는 재감 중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이 입으로 거짓말을 하였으니, 주의 교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2.5. 3.1 운동
1919년 2월 6일,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간부 선우혁이 양전백을 찾아왔다. 그는 양전백에게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리면서 독립운동 자금의 모금을 부탁했다. 양전백은 취지엔 공감했지만 당장은 경찰의 단속이 심해 모금이 어려우니 일단 압록강 건너 만주 안동현에 가 있으라고 답했다.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국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단행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천도교의 최남선은 선천 사경회에 참석하고 있던 이승훈에게 편지를 보내 기독교계와 교섭할 것이 있으니 급히 서울로 상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승훈은 그 말에 따라 2월 11일 서울로 올라와서 2월 11일 서울 계동 김성수의 거처에서 송진우와 만나 천도교와 기독교가 힘을 합쳐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이후 이승훈은 선천으로 돌아온 뒤 양전백의 집에서 양전백, 유여대, 김병조, 이명룡 등을 불러 거사에 동참할 것을 권고해 모두의 동의를 받아냈다.
양전백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평양에서 열린 교회 집회에서 함태영을 만나 그에게 일본 정부와 제국의회, 조선총독부에 보낼 문서에 날인할 도장을 맡겼다. 그가 나중에 일제 경찰의 심문을 받을 때 밝힌 바에 따르면, 당초 그는 독립운동의 방식으로 독립선언이 아닌 독립청원을 생각했고 거사 직전까지 제1진으로 50명이 독립청원서를 내고, 그 사람들이 체포되면 다음으로 제2진, 제3진이 나서 다시 독립청원을 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월 23일 밤 남대문밖교회 함태영 조사의 사택에서 열린 제2차 장·감 지도자 연석회의에서 독립운동의 일원화를 위해 독립선언서의 발표를 주장하는 천도교측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함으로써 방침이 독립청원이 아닌 독립선언으로 굳어졌다.
양전백은 거사일이 3월 1일로 정해졌으니 상경해달라는 이승훈의 연락을 받고 그 전날인 2월 28일 밤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하여 근처 여관에서 하룻밤을 유숙한 뒤 3월 1일 오전 10시에 함태영의 사택을 방문해 비로소 독립 청원이 아닌 독립선언으로 방침이 변경된 사실을 파악하고 독립선언식이 열리는 종로 인사동의 명월관지점 태화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다가 출동한 순사들에게 체포되어 경무총관으로 연행되었다.
이후 양전백은 1920년 10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구형받았고 1920년 10월 30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상소를 포기했다. 이후 그는 마포 공덕리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2.6. 이후의 경력
양전백은 출옥 후 선천북교회의 담임목사로서 목회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1917년 인가 취소를 당해 서당으로서 명맥을 유지하던 명신학교의 재건에 착수해 1923년 반양식 교사를 신축하고 이듬해 9월 6년제 보통학교로서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유지들의 기부를 통해 자금을 모아 1926년 재단법인 허가를 얻어냈다.
이후 양전백은 1927년부터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아 서울의 피어선성경학원에 머물며 교회사 자료를 수집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집필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 병을 얻어 작업을 중단하고 선천으로 돌아와 요양 생활을 하다가 1933년 1월 17일 선천 천북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4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양전백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