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청년당

 


융희 황제가 삼보(영토, 인민, 주권)를 포기한 경술년(1910) 8월 29일은 즉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8월 29일이니, 그 동안에 한순간도 숨을 멈춘 적이 없음이라.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니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곧 민권 발생의 때요, 구한국의 마지막 날은 즉 신한국 최초의 날이니 (하략)

『1917년 대동단결선언』[1]

'''3.1 운동을 주도한,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
1. 개요
2. 상세
3. 여담


1. 개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은 1918년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한국의 독립 운동 단체이다. 당수는 여운형이며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이었으며, 그 밖에도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신규식 등도 관여하였다.

2. 상세


당의 강령은 '대한 독립·사회 개량·세계 대동' 등 세 가지였다.
1918년 12월 독립 청원서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2] 1919년 1월에는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도쿄, 연해주, 미주와도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했다.
이러한 신한 청년당의 활약으로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2·8 독립 선언을, 한국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3·1 운동을 일으키는 진원이 되었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뒷날 1919년 4월 10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축을 이루었다.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후에 독립 운동가 신규식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1923년에 해체하게 된다.

3. 여담


신한 청년당이라는 이름은 1908년에 혁명 성공으로 국제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청년 투르크당(터키 청년당)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신한 청년당 당수 별명이 터키 청년이었다.
[1] 1917년 7월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신석우, 박용만, 한진교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된 선언문이다.[2] 이 부분에 대한 배경은 1918년 11월, 윌슨의 특사 찰스 크레인이 중국 상해에 와서 '민족 자결주의'를 강연하는데, 마침 그자리에 있던 여운형이 찰스 크레인을 찾아가서 조선 독립에 대한 개인 면담을 나눈다. 그리고 여운형은 '이 민족 자결주의 원칙은 조선독립의 희망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는등, 장덕수를 국내로, 이광수를 일본으로 파견하면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