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연구소
世宗硏究所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1983년 12월 설립된 외교부 소관 국가정책연구재단. <남북의 창>이나 TV 뉴스 볼 때마다 본 연구소 소속 연구원이 나온다.
원래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순직자 유자녀를 위한 장학재단이었던 '''일해재단'''[1] 으로 설립되었으나, 이후 전두환 대통령의 '''비자금 모집''' 노릇을 하던 재단으로, 당시 대기업들에게서 자금을 모집하는 데 이용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의 대통령 퇴임 후 위상 정립을 위한 연구소로 거듭났다.
창립 초기 명칭은 (재)일해재단이었으나, 1987년부터 (재)일해연구소를 거쳐 1988년부터 (재)세종연구소로 바뀌었다. 이후 1996년부터 (재)세종재단이 되었으나 2015년부터 이전 명칭으로 회귀하였다.
재단 발기인은 모두 7명으로 최순달, 정수창 대한상공회의소 의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구자경 럭키금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이 발기인을 맡았고, 원래는 발기인들이 이사진이었으나 1987년부터 각계 대표들이 이사진을 맡고 있다.
재단 부설이었던 평화안보연구소는 일해연구소를 거쳐 '세종연구소'로 이름을 바꿔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
2. 주요 사업
2.1. 연구사업
- 중장기정책연구, 종합연구
- 학술행사
- 외부용역 수탁
- 이슈분석
- 출판
2.2. 교육·연수사업
- 세종국가전략연수
- 세종-KOICA국제외교관연수
- 세종청년아카데미
2.3. 유가족지원사업
- 아웅산테러 순직자 유가족 장학금 지급
3. 역대 임원
3.1. 이사장
- 최순달 (1983~1985)
- 이정오 (1985~1986)
- 김기환 (1986~1987)
- 정주영 (1987~1989)
- 이용희 (1989~1993)
- 정원식 (1993~1997)
- 강영훈 (1997~2000)
- 오기평 (2000~2004)
- 임동원 (2004~2008)
- 공로명 (2008~2011)
- 권철현 (2011~2015)
- 박준우 (2015~2018)
- 백종천 (2018~ 2021)
- 문정인(내정)
3.2. 소장
- 김기환 (1986~1989)
- 이용희 (1989~1991)
- 정일영 (1991~1994)
- 한배호 (1994~1999)
- 김달중 (1999~2000)
- 백종천 (2000~2007)
- 박기덕 (2007~2009)
- 송대성 (2009~2015)
- 진창수 (2015~2018)
- 백학순 (2018~ )
4. 주요 출판물
- 세종논평
- 정세와 정책
- 정책브리핑
5. 논란
5.1. 설립 과정의 강제 모금
5공 시절 연간 운영비용으로 당시 돈 100억 원(3년에 걸쳐 300억 원)을 확보하기 위해 청와대에서는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들에게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현대그룹 및 삼성그룹은 15억원을, 럭키금성그룹 등은 12억 원을 부담하기로 결정했는데, 재계 서열 7위로 사실상 이들 다음의 대기업이었던 국제그룹이 5억 원만 내려고 하자,[2] 일해재단 초대 이사장인 최순달[3] 은 양정모 회장에게 아들은 미국 유학 가서 외제차 끌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나라를 위한 일(?)에는 야박하다고 비아냥조로 면박을 준다.
그리고 이때 일해재단 기부금을 적게 냈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찍힌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은 1985년 12대 총선 직전 전두환 대통령에게 부산 기반 최대 기업인 국제그룹이 야권 강세 지역인 부산에서 힘 좀 써달라며 사실상 선거 개입 협박을 당하게 되지만, 결국 여당인 민정당은 부산에서 대패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총선 직후 온갖 치졸한 수단으로 사실상 국제그룹을 강제 해체시키게 된다.
위와 같은 재원을 바탕으로 1986년에 세운 산하기구 일해연구소는 점차 전두환의 평생집권 기도를 위한 기구로 거듭나기 시작했는데, 전두환은 대통령 퇴임 후 일해연구소 내 사저에 거주하며 내정 및 외교에 적극 개입해 국가서열 1위로 격상코자 했다. 그의 구상은 1988년 퇴임 전날 국무회의에서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을 공포해 실체를 드러냈고, 13대 국회에서 새세대육성회, 새마음심장재단과 함께 5공 비리의 대표적 사건으로 취급되어 5공특위의 조사대상이 된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해당 기사 참조.
심지어 일해연구소 건설 중인 1985~86년 무렵에는 항간에서 비밀사저설, 지하벙커설, 근처 서울공항 간 지하도로 연결설 등 온갖 종류의 루머가 나돈 바 있었다.
1988년 세종연구소 개칭 후 정부정책연구소로 거듭났으나 심각한 운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원래 기금 300억으로 시작해서 이자와 골프장 임대 수입으로 운영했는데 이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부동산 투자했다가 170여억 까먹었다. 그래서 2011년 기준 잔고가 37억만 남았다고 한다. # 그래서 부지 일부를 매각하기로 정부에 신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5.2. 정부 성향에 따른 인사 영향
이처럼 태생부터 정치적 논란을 빚었고, 정부 출자 형태여서 소장 등 주요 구성원 인사에 정부 개입이 가능한 구조다. 이렇다 보니 정부의 정책 성향에 따라 운영에 논란을 빚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0년도 초반에는 백종천 소장이 채용에 비리가 있었다는 이유로 정옥임 연구위원을 해고하였는데 복직판결을 받았다. 해당기사 참조. 시간이 지나 정옥임 연구위원은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고 18대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복수는 나의 것 백종천 소장은 친민주당계 인사로 참여정부 통일외교안보실장과 NSC 상임위원장을 역임했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세종연구소 이사장으로 있다. 정치적인 대리전으로 비춰지는 상황.
2016년 중반에는 강명세 수석연구위원이 재임용에 탈락했는데 2019년에 복직하였다. 강 위원이 박준우 이사장으로부터 박근혜정부의 정책 방향과 맞지 않는 연구를 한다는 질책을 받자 여기에 반발해 해고되었다고 했는데, 강명세 수석연구위원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해당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270여명의 학자가 강명세 수석연구위원에 대한 해고반대 서명에 참여했다.
정권이 교체된 뒤인 2018년 4월, 미국인 방문학자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박사가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해고되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세종연구소 측에서는 부당해고가 아닌 계약만료라는 입장으로 반박했다. 해당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