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현

 



''' 제2대 SK그룹 회장
최종현
崔鍾賢 | Jong-hyun Chey[1]
'''
'''국적'''
[image] 대한민국
'''출생'''
1929년 11월 21일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現 경기도 수원시)
'''사망'''
1998년 8월 26일 (향년 68세)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본관'''
수성 최씨
'''부모'''
아버지 최학배, 어머니 이동대
'''형제자매'''
최종건 등 4남 4녀
'''배우자'''
아내 박계희(1935~1997)
'''자녀'''
장남 최태원, 차남 최재원 장녀 최기원
'''학력'''
동성상업학교 (졸업)
수원농림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화학과 / 재학 중 유학)
위스콘신 대학교 (졸업)[2]
시카고 대학교 (경제학과 / 석사)
1. 개요
2. 생애
3. 사망
4. 이야깃거리
5. 수상경력
6.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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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SK그룹 제2대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제21,22,23대 회장.
SK그룹 창업주 최종건의 동생이자 현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아버지이다.

2. 생애


1929년, 아버지 최학배와 어머니 이동대 사이에서 4남 4녀 중 차남으로 경기도 수원군(현 수원시)에서 태어났다. 수원농림중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서울대학교 농화학과 재학 중 미국 유학을 떠나 위스콘신 대학교로 편입해 1956년 졸업하였다. 3년 후인 1959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귀국하였다. 유학시절 자유주의 시장경제학파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의 수업을 들었다. 그의 영향으로 국내기업인 중 자유시장경제이론에 가장 밝았으며, 가장 잘 실천했다.
1962년에 선경직물 이사직을 맡으면서 선경그룹 경영에 참여하였다. 형 최종건이 1973년 폐암으로 별세하자 선경그룹을 지휘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선경그룹[3]은 잠재력은 있어도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기업이었지만, 최종현의 리더십 아래 한국 재계 5위 이내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물론 최종건이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지만 창업주가 아님에도 창업주와 같은 대접을 받고 SK 그룹을 최종건의 자식이 아닌 최종현의 아들인 최태원이 물려 받은 이유이다.

선경을 국제적 차원의 기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두 가지 명제를 분명히 제시해 여러분이 적극적으로 실천해 줄 것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첫째 명제는 석유로부터 섬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계열화를 확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섬유산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석유화학공업에의 진출이 불가피한 것이며, 더 나아가 석유정제사업까지도 성취시켜야 하겠습니다. 둘째 명제는 기업 확장과 더불어 경영 능력을 배양시키는 것입니다. 섬유공업에서 석유정제사업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를 성취해 나가는 데에는 수억 달러에 달하는 자본력과 고도의 전문지식과 기술이 필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국제적 기업으로서 손색없는 경영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975년 선경그룹 신년사에서

1975년에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선언했고, 1979년 경영관리체계 'SKMS(Sunkyoung Management System)'를 정립해 그룹 의식구조 개선을 시작했다.
선경직물에서 생산하는 합성섬유들의 주 원료인 석유를 수입하면서 중동거래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 뒀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 2차 석유파동으로 한국이 석유위기에 직면했을 때 최종현 회장이 위기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나라에는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결정에 따라 한국은 석유수출금지국으로 분류 돼서 원유공급이 어려워 지자 신군부는 최종현 회장을 사우디로 급파했다. 최종현 회장이 사우디로부터 하루 15만 배럴 씩의 원유를 공급받을 정도로 사우디 왕실 측근과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디에 급파된 최 회장은 사우디 왕실과 접촉하면서 야마니 석유장관을 만나 한국에 대한 OPEC의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우디 왕실은 그의 요구를 들어줬다. 그 동안의 이런 노력을 높이 평가 받아 1980년 대한석유공사 인수전에서 당시 재계 1위 삼성과의 경쟁에서 이겼다.[4][5]
노태우 대통령 재임 중 노태우의 장녀 노소영과 자신의 장남 최태원이 결혼함으로써 노태우와 사돈지간이 되었다.
1980년에 이미 정보통신 중심의 시대가 올 것임을 강조하는 혜안도 보였다. 유공 인수 후 임직원과의 대화에서 "조만간 무선 정보통신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테니 여러분도 거기에 대비해야 된다."고 발언했다. 실제로 최종현 회장은 선경그룹의 통신사업 진출을 10여년간 진두지휘해 1985년 전 세계 통신시장을 이끌고 있는 미국에 텔레커뮤니테이션팀을 조직했다.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과 경쟁할 수 있는 민간사업자(제2이동통신 사업권) 선정"을 발표하자 그동안의 준비를 바탕으로 입찰해 압도적인 점수 차로 1위에 선정됐고,[6] 1992년에 주력계열사 유공을 중심으로 미국 GTE와 영국 보다폰 등 국내외 주주들을 총망라해 '대한텔레콤'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재벌사돈 특혜 의혹이 생겼다. 14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서 노태우와의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당 대표로 있던 김영삼이 자신의 지지율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선경그룹이 사업권을 포기할 것을 강요해 최종현 회장도 정부가 먼저 사업권을 취소하면 받아 들이겠다 하지만 김영삼이 이 말을 듣고 바로 기자들에게 선경이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발언해 1992년 8월 27일 선경그룹이 공식적으로 노태우 정권에서는 통신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듬해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청와대에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선경에 주지 않기 위해서 사업자 선정을 최종현이 회장을 겸직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맡긴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민간 자율에 의한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바꾸고 컨소시엄 구성을 전경련에서 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선경그룹에서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포기[7]하는 대신 제1이동통신을 서비스하고 있던 공기업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 인수 후 CDMA 상용화에 힘써 1995년 12월 31일 최종 테스트에 성공해 1996년 1월 3일부터 상용화했다.
폐암 투병 중에도 그룹 업무보다 나라경제 걱정을 많이 했다.
병상에서 그는 여러차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의 가정이나 회사는 그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제 여생은 국가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보람된 일에 몰두하고 싶다.”(최종현 지음,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
실제로 그는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 그룹일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면서도 학자들과의 토론만은 거르지 않았다. 미국 뉴욕의 슬론 케터링병원에서 폐암수술을 받고 코네티컷의 한적한 곳에 집 한채를 빌려 요양중이던 97년 8월에는 송병락 서울대 교수,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등 학자들을 일부러 미국으로 초청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건강이나 챙기라고 극구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나면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는게 주변사람들의 회상이다.
최 회장은 이 시절, 학자들과의 토론내용을 빠짐없이 정리해나갔다. 이같은 원고들을 모아 사후에 출간한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SK그룹 발간)이란 책을 보면, 최 회장의 당시 관심사는 대부분 우리경제의 장래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인재양성, 글로벌라이제이션, 국가경제의 선진화 등은 지금 곱씹어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내용들이다. #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기 1년 전부터 아시아 경제위기를 경고했으며 폐암 투병 중이던 1997년 10월에 산소마스크를 단 채 청와대에 가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외환과 환율, 은행이자율에 관해 직언을 했다. 비상조치를 더 이상 늦췄다가는 ‘큰일난다’는 호소도 했지만 돌아온 김영삼 대통령의 반응은 고작 "알아보겠다."가 끝이었다. 이에 자택으로 귀가한 최종현 회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그리고 1997년 IMF가 터지자 한국은 결국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정말 아이러니한것은 본인이 그렇게 강조했던 경제선진화와, 글로벌 경영은 최종현 회장의 사망 이후 후대의 삽질로 그 의미가 퇴색된 것이다.
외환위기만큼이나 나라가 휘청거렸던 00년대 초의 카드 대란, SK글로벌 분식회계, 닷컴버블, 외국펀드에 제대로 털린 소버린 사태등으로 최 회장이 저승에서 탄식할 만한 일만 벌어지고 있다.
사망 전 유공의 CI를 SK로 변경해[8] 선경그룹에서 SK그룹으로 바뀌었다.

3. 사망


[image]
1998년 8월 26일, 지병인 폐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8세.[9] 유언에 따라 화장(火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이후 SK 그룹의 회장직은 6년 간 전문경영인 출신인 손길승이 맡다가 아들 최태원에게 승계되었다. 당시 서울시민이었던 최 회장의 화장비용은 무료였으며, 반려자도 개장유골이라는 이유로 7천원만 냈다고 한다.[10]
특히 최종현 회장의 화장 유언은 사회적 파급효과가 컸다. 기존 장례문화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화장이 국내 굴지 대기업의 회장의 유언으로 본격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살아 생전에 1980년대에 비행기를 타고가던 중 묘지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좁은 국토에 이렇게 묘지가 많아서야 되겠는가'라고 생각한 것에서 화장을 결심했다고 전해진다. 덕분에 오늘날 화장문화가 어느정도 대중화가 되데에는 최종현 회장의 공이 크다는 시각이 많다. 당시 SK 그룹에서 화장장까지 만들려고 했으나, 화장장은 각 지역 시설공단에서 관리하는 게 일반적인 공공재라는 특성과 대기업이 장묘 사업까지 하려고 하냐면서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흐지부지되었고, SK그룹은 세종시로 돌려서 세종시설관리공단에 기부하는 식으로 은하수공원을 만드는 것으로 결실을 보았다.
사망 20주년이 되는 2018년 8월 14일부터 24일까지 열흘간 SK그룹이 기념 사진전과 추모식 '최종현 회장, 그를 다시 만나다'를 개최했다. 특히 24일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SK텔레콤이 인공지능 AI기술 홀로그램을 활용해 최종현 회장을 재현해 주목 받았다. 이날 행사에서 최태원 회장은 대한민국 국가 경제와 SK그룹을 위해 헌신하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인재를 양성한 선친을 기리는 최종현학술원'의 설립 계획을 발표했고, 그해 중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4. 이야깃거리


  • SK 직원들 사이에서는 인간적인 평판이 매우 좋았다는데, 한성질 할것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직원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서 그랬다고. 부전자전격으로 아들인 최태원 역시 SK 직원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다고 한다.
  • 자신이 암 투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회사인 SK케미칼을 통해 신약 개발을 적극 독려했는데, 임원들과 함께 출석한 보고 자리에서 당시 SK케미칼 연구원이던 김대기 박사(현 이화여자대학교 약학대학 교수)가 개발 중이던 신약에서 부작용이 발견되어 상용화에 실패했다는 발언을 하고 분위기가 매우 어두워졌다. 그런데 최 회장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드디어 입을 열고는 "김박사, 그렇다면 반은 성공한 것 아닌가?"라는 뜻밖의 발언을 한다. 주변의 임원들은 물론 김박사 본인도 당황했는데, 그 다음에 내던진 말이 압권. "부작용을 미리 발견해서 그것까지 해결하면 더 완벽한 신약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앞으로 더 노력하시오."[11]
  • 특히 이 당시 연구원들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연구에 나서도록 독려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대유행 이후 SK바이오사이언스의 백신 개발 성과가 부각되자[12] 과거 최종현 회장의 격려와 바이오 산업을 향한 의지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당시 김대기 박사가 "신약이 나오려면 최소 10년은 물론이고 20년도 기다려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최 회장은 "개발 과정이 그렇다면 20년도 기다릴 수 있는 것"이라면서 "연구에 실패를 한다고 하더라도 실패를 통해 얻는 것이 더 많으니 그 실패를 바탕으로 더 연구에 매진해보시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 결과 SK는 1호 항암 신약인 '선플라'를 개발할 수 있게 됐다.
  •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SK그룹의 회장이자 전국경제인협회장이었는데도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냐하면 구멍난 양말을 신고 다녀서 회의 중에 임원들이 그걸 목격하고 민망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식사는 항상 구내식당에서 했다. 실제로 전경련 회장 재임 당시 한국경제연구원에서 연구위원으로 근무 한 경제학자의 증언에 따르면 최 회장이 경제학자들과 한경연 연구위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점심식사를 할 때마다 어김없이 육개장이나 설렁탕 같은 국물요리에 반찬 몇 가지만 두고 식사했다고 한다.
  • 미국 명문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SK그룹의 경영이념인 SKMS, 선경경영관리체계 정립을 이끌었다. 이는 당시 국내 기업 중에 가장 체계적인 경영이념으로 평가받았다. 1990년대에는 이들을 더욱 발전시킨 SUPEX (수펙스) 경영기법을 정립했다. 이는 Super Excellent라는 최상의 목표를 세운 뒤 목표 달성을 위해 직원들의 역량을 충분히 활용, 최상의 성과를 내고 최고의 이익을 창출하는 기법이다. SKMS와 SUPEX에 관해 강연 하는 최종현 회장의 동영상을 아트센터나비[13]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
  • 장학사업에 관심이 많아서 장학퀴즈MBC에서 할 때 부터 계속 후원해와 EBS에서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과 유학자금을 지원해줬다. 고려대학교 총장 염재호[14]와 연세대학교 총장 김용학이 한국고등교육재단의 도움으로 미국유학을 다녀왔다.
  • 장학퀴즈를 후원하는 과정에서도 에피소드가 있다. 최 회장은 장학퀴즈 장원에 오른 학생들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식사를 했다. 그럴 때마다 최 회장은 "나중에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고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꿈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그러던 최 회장은 대뜸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대학 졸업하고 우리 회사에 오면 안돼! 우리 회사 오지 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분 같은 인재들은 머리가 좋으니까 더 좋은 회사로 가서 나라를 위해 일해야 돼."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한 인재 양성에 대한 최 회장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부분.[15]
  • 환경에도 관심이 많아서 충주시에 있는 인등산을 구입 해 인등산을 아름답게 가꿨다.[16] 최종현 회장이 직접 가꾼 조림지는 ‘인재의 숲’으로 명명하고 연수시설인 SUPEX Center도 위치하고 있어 SK의 인재 육성을 하고 있다.

5. 수상경력


  • 은탑산업훈장 (1972)
  • 금탑산업훈장 (1973)
  • 국제경영인상 (1995)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

6. 가족 관계




[1] 보통은 Choi를 많이 쓰지만 미국인에게 직접 물어보고 최와 발음이 가장 유사한 Chey를 썼다.[2] 1956년 졸업[3] 당연히 SK라는 사명은 선경의 약자에서 따온 것이다.[4] 당시 삼성도 이병철회장이 3남 이건희를 후계자로 공식 선언한 후의 첫 책임과제로 석유공사 인수전을 맡겼을 정도로 적극 참여했다.[5] 정확히는 2대 주주이던 미국 걸프 사가 남긴 지분 50%를 인수했다.[6] 1위 선경그룹 8127점, 2위 코오롱그룹 7783점, 3위 포항제철 7711점[7] 이때 포항제철과 코오롱에 낙찰돼 신세기통신이 설립된다.[8] 다만 과거에도 SK라는 이름은 CI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름모 안에 푸른색 글씨로 SK라고 써진 그 CI다.[9] 형인 최종건 회장의 사인과 같다.[10] 지금은 서울시립승화원 기준 서울·고양·파주시민은 12만원을, 그 외 지역주민은 최대 1백만원을 낸다. 자녀가 서울시민인 경우 일부 감면되며, 기초생활수급자와 국가보훈기본법에 따른 해당자만 면제된다.[11] 참고로 이 일화는 1999년 10월 10일 MBC에서 방영된 성공시대에서 다뤄졌는데, 이때 최종현 회장 역을 맡은 배우가 반란군노무 시키로 낙인찍힌 다(...).[12] 빌 게이츠문재인 대통령에게 한국의 코로나 백신 개발 성과를 극찬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 서신에 등장한 업체가 SK바이오사이언스였다.[13] 최종현 회장의 아내 박계희 관장이 경영하던 워커힐미술관을 며느리 노소영 관장이 미디어아트 전문관으로 리모델링 해 운영하고 있다.[14] 최종현 회장의 영결식에서 고등교육재단 장학생 대표 자격으로 추도사를 낭독했다.[15] 실제 장학퀴즈 출연자 중 SK직원은 드물긴 하다.[16] SK임업이란 회사가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