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식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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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3대 국무총리
정원식
鄭元植 | Chung Won-shik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출생
1928년 8월 5일
황해도 재령군 서호면 신환포리 95
(現 황해남도 재령군 신환포리)
사망
2020년 4월 12일 (91세)
본관
진주 정씨 충장공파[1]

서호(西湖)
재임기간
제30대 문교부 장관
1988년 12월 5일 ~ 1990년 12월 26일
제23대 국무총리
1991년 7월 8일 ~ 1992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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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 배우자
임학영
자녀
슬하 4녀
학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 학사)
피바디 칼리지 교육대학원 (심리학 / 석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 만기전역
종교
개신교
약력
중앙교육연구소 연구원
문교부 장학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
제30대 문교부 장관
제23대 국무총리
제12대 대한적십자사 총재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반기~해방 이후
2.2. 교육인 시절
2.3. 문교부 장관 시절
2.4. 국무총리 시절
2.5. 국무총리 퇴임 이후
2.6. 말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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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23대 국무총리.

2. 생애



2.1. 생애 초반기~해방 이후


1928년, 황해도(현 북한 황해남도) 재령군에서 태어났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1940년 황해도 사리원상업학교에 입학 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였다, 심상소학부 고등부(직업교육) 과정에 적을 두고 재수 하여 황해도의 유일한 인문계 중학교인 해주동중학교에 합격하였다. 38선을 월남하여 1946년 경성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예과를 마친 뒤 1948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재학 중이던 1951년부터 5년 동안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군 복무 중인 1954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1955년 육군 대위로 예편한 후, 1956년 공무원에 임용되어 중앙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발령받았다.
1957년 미국으로 유학, 조지 피바디 대학교[2] 교육대학원 심리학과에 입학하여 1년 만인 1958년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2.2. 교육인 시절


1960년 8월 문교부 장관 오천석의 비서관, 문교부 장학관을 거쳐,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모교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조교수로 교편을 잡기 시작하여 부교수로 승진하였다.
196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조지 피바디 대학교 교육대학원 박사 과정을 마치고 1966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0년 한국교육학회 교육심리연구회 회장, 1972년 카운슬러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74년부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정교수로 승진하였고, 197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장이 되었다.
1979년부터 조선일보 등에 칼럼을 기고하였고, 그 해 조선일보에 '머리를 써서 살아라' 는 제목으로 유태인의 가정교육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칼럼을 단행본 '인간과 교육'으로 만들어 출판했는데, 100만 권 넘게 팔리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1979년 월간 샘터에서 발행하는 유아잡지 「엄마랑 아기랑」에 '정박사와 의논하세요' 라는 컬럼을 맡아 1994년까지 15년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상담, 컬럼을 기고하였다. 장관, 총리 재직 중에도 기고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2.3. 문교부 장관 시절


이후 현 한국도서출판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1985~1988) 및 방송위원회 산하 방송심의위원장(1988)을 역임한 뒤 1988년 12월부터 1990년 12월까지 문교부 장관을 지냈다. 문교부 장관 재임 시절 공안정국에 발맞춰 '학원안정 4단계 방안'과 '5.6 조치'로 학생운동과 사학분규에 강경 대응을 하는 한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련자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1989년 5월 28일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되자, 즉각 불법 단체로 규정하고 전교조 교사들에 대한 구속과 해임, 불이익 조치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이는 교육공무원법에 따른 교원의 정치적중립을 적용한 것이다.[3]
당시 선진국에서 교원노조는 다 있으며, 교원의 정치적 의사표현도 자유롭다는 의견과 함께 전교조 해직교사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다. 심지어 일부 보수언론에서도 전교조 가입 해직교사들에 대해 복직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전교조 교사들은 '결국 정치세력화했고 정권퇴진투쟁에 나서고 있다'며 '이미 정치세력화한 그들을 다시 교직에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또 1990년에는 세종대학교 학원자주화투쟁에 대해서도 집단 유급조치로 강력 대응했다.
문교장관 퇴임 후 1991년 3월부터 덕성여자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등지에서 시간강사를 맡다가 1991년 5월,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와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으로 노재봉 전 총리가 사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총리 임명에 대해 야당의 반대가 심하였으나, 3당 합당 이후 여당의 의석수가 압도적이었기에 여유 있게 총리로 임명될 수 있었다.
1991년 4월 백골단이 시위대에서 떨어져서 도망가던 명지대생 강경대를 붙잡아서 백주 대낮에 쇠파이프로 때려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전국적으로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가 폭발하였고, 5월에는 역시 성균관대생 김귀정도 백골단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졌다.[4] 여기에 강경대와 김귀정의 죽음에 항의하는 연쇄적인 분신이 벌어지면서 당시 민심은 최악으로 치닫았고, 노태우 정권이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던 상황이었다.
정원식은 문교부 장관 시절 전교조 문제, 세종대학교 학내분규에 관하여 지나치게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던 탓에 이미 세종대, 덕성여자대학교, 부산대학교 등에서 심한 조롱과 야유를 당한 상태였다. 그가 한국외국어대학교를 방문하기 전에 학생들이 집단적으로 시위를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아랑곳 않고 경호원 동반 없이 홀로 한국외국어대학교의 강단에 섰다.[5] 그러나 1991년 6월 3일 오후 6시 30분 경, 강의를 마친 후 분노한 학생들과 마주쳐야 했고, '전교조 선생님과 귀정이를 죽인 살인마', '귀정이 살려내라', '전교조 선생님들을 살려내라' 등을 외친 외대 학생들에게 무려 20분 동안이나 계란과 페인트와 밀가루 세례를 받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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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는 공교롭게도 '강의 약속을 지킨 총리'가 미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총리 비서실의 귀뜸으로 뒤늦게 촬영온 방송팀에 의해서 촬영되었다.
총리 내정자가 밀가루와 페인트를 뒤집어 쓴 사진이 전국 신문 1면에 실리자, 민심이 급변했다. 이 당시 몇몇 언론들은 운동권을 스승을 공격하는 패륜아들이라고 맹공격했고, 여기에 당시까지만 해도 운동권의 우상이었던 김지하 시인이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칼럼을 기고하면서 재야운동권을 비난했다.[7] 그리고 정권이 조작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터지면서 민심은 완전히 돌아서고 정권퇴진투쟁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게 된다. 정원식은 말 그대로 자기 온몸을 던져서 정권을 구원한 것이다.[8] 그리고 이를 계기로 집권 민주자유당은 1991년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하게 된다.[9]
훗날인 2006년 12월, 그에게 밀가루와 계란을 투척했던 당시 한국외국어대 학생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명예회복 및 보상되었다.

2.4. 국무총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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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로 재임하면서 남북 고위급 회담의 남측 대표로 나섰고, 1991년 12월 13일 연형묵 북한 총리와 남북기본합의서, 1992년 1월 31일‘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를 조인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에 이미지가 안좋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그다지 존경 받는 총리는 아니었고, 재임기간 동안의 민심의 이반은 심각한 수준이었다.[11]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태우가 중립내각을 구성할 때에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5. 국무총리 퇴임 이후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대통령선거대책위원장에 임명되었다.[12] 김영삼 후보 당선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역임하고 김 대통령 취임 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을 4년간 지냈으며 같은 해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도 5년간 맡았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을 앞두고 민주자유당 서울특별시장 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국회의원을 누르고 승리했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충격적이게도 민주당 조순, 무소속 박찬종에 밀려 3위 득표로 치욕적인 패배를 경험하였다. 집권당 후보가 고작 20.7%만 득표했다는 것은, 소위 여권 고정표의 절반도 못건졌다는 것으로 대한민국 선거 역사상 전무후무한 참패 기록이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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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자당의 정원식이 민주당의 조순에게 참패한 것을 기회로 하여 김대중이 정계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에게는 정원식이 은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2.6. 말년


이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으로 복귀하였다. YS의 배려로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였다.[14] 이후 파라다이스복지재단 이사장, 유한재단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2001년부터 계속 교육학 서적을 집필하였다.
흑역사도 있다. 2002년 12월 부산광역시 브니엘학원 이사장으로 선임되었으나[15] 관선이사 체제에서 어느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던 브니엘학원 사태가 제대로 꼬이면서 고작 9개월 뒤에 낙마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꼬여버린 브니엘학원 사태는 2014년, 그동안 쌓이고 쌓인 것들이 거하게 병크를 터트리면서 보수 교육감 연류설까지 퍼지는 바람에 부산지역 보수 교육계에 크나 큰 타격을 입히고 부산지역에서 최초로 진보 교육감이 선출되는 데 어느정도 기여를 하게 된다 (...) [16]
2020년 4월 12일, 신부전증을 앓다 사망했다.#

3. 여담


만 넷을 두었다고 한다. 역대 국무총리들 중에서 현재까지 슬하아들이 없는 사람은 둘 뿐인데, 그 중의 1인이 정원식이다.[17]
비리사학으로 악명을 떨치다가 강제 폐교 조치 당한 서남대학교의 설립 인가를 내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서남대학교 설립 승인 및 인가 시기(1988년 12월 20일~1990년 11월 28일)가 정원식이 문교부장관으로 있던 시기(1988년 12월 5일 ~ 1990년 12월 26일)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 당시 이홍하 설립자는 옥천여상을 운영하던 시절에도 여러모로 말이 많았던 인물이었으나, #1, #2 정원식은 이를 그저 전교조의 꼬장으로 인식하고 서남대학교 인가를 내준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그 서남대학교는 정원식이 개입하여 산으로 가버린 브니엘학원 사태와 막판에 엮여서 정면충돌하여 폐교에 결정타를 맞아버렸다는 사실에서 정말로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그 외에도 같은 시기에 폐교가 확정된 한중대학교 또한 정원식이 문교부 장관이던 때 설립계획이 승인(1989년 11월 3일)되었다.[18][19]

[1] 29세손 口식(植) 항렬[2] George Peabody College for Teachers. 현재는 밴더빌트 대학교에 합병되어 그 일부가 되었다.[3] 이 해임조치로 수많은 해직교사들의 생활고가 극심해졌다. 정원식 본인도 "제 결정에 대한 후회는 없으나 젊은 교사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데 대한 자책을 떨칠 수 없었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들 중 일부는 1994년, 김영삼 문민정부에서 해임 전 동일 학교에 복직할 수 없다는 것과 단체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서약 후 복직되었는데, 정원식도 비슷한 시기 서울대 동기인 오병문 장관에게 복직을 건의했다고 한다. 완고하게 탄압을 했으나 자책감과 동정심은 있었다...는 정도의 일화.[4] 박용진 20대 민주당 국회의원이 김귀정의 성균관대 후배로, 이 사건에 충격을 받고 운동권에 투신하게 된다.[5] 수행원은 있었다. 민병환 비서로 사진 우측의 사람이다.[6] 다만 여하간에 학교에서 정원식을 부축하여 데리고 나온 사람도 시위 학생이었다. 사진 왼쪽 인물. 정원식도 기억을 더듬어 수업을 듣던 대학원생이 아니었다며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 또한 “회초리로 내 종아리를 때리고 싶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7] 당시 운동권은 완전히 폭주하는 분위기로 자신들의 의견과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같은 민주화운동계 인물이라도 비난을 퍼부었고, 이때 김지하 시인도 운동권의 행보를 비판했다가 제명당하는 충격적인 일을 겪어 결국 극우화되는 계기를 낳았다.[8] 스스로도 훗날 이 사건 이후 투신자살이 멈추었다며, “비록 개인이 고난을 당하기는 했으나 사회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라고 회고했다.[9] 사실 이 지방선거도 원래 노태우 정권에서 질 것 같아 안할려고 일방적으로 연기했던 것을 김대중이 20일이 넘게 단식투쟁을 하면서 간신히 얻어낸 것이었다.(...)[10] 남북기본합의서는 5차 남북 고위급 회담에서 체결되었고, 그 전후의 4차 때 3일간, 6차 때 이틀간 등 세차례 평양을 방북하기도 했다. 4차 회담 중 개성에서 평향행 특별열차로 이동할 때 고향인 사리원에 잠깐 정차하기도 했지만, '총리친척이 126명이나 되는데 만나보겠는가'라는 제안은 거절하였다고 한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6차 회담에서 나온 것이다.[11] 실제로 행정각부 통할 등의 본 역할은 거의 하지도 못했는데, 총리 기간의 절반 이상을 남북 고위급 회담 준비로 보냈다고 회고하였다.[12] 사실 중립내각을 요청한게 김영삼이라 병주고 약주느냐...라는 반응이었지만 옹졸하다고 여겨지기 싫다며 결국 선거전까지 뛰었다. 김영삼은 인수위원장은 물론이고 당대표까지 제안했지만 거절했다고. 후일 김영삼 서거 후 "정치를 위해 태어나신 분 같았다"면서도 "어떤 정치인도 그런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라며 긍정적 평가를 남겼다.[13] 본인은 네거티브 선거전을 싫어한 탓도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박성범, 강용식, 서청원, 이연석 의원과 손풍삼 등의 참모들은 공격적인 전략을 주문하였지만 거절했다고.[14] 웃기는 일화가 전임자인 강영훈 총재와의 일화다. 두 명 모두 노태우 정부에서 총리를 지냈지만 YS의 배려로 노른자 원로직을 재임했는데, 강영훈 쪽은 또 퇴임 직후 세종연구소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는데 맞바꾼 셈이라, 두 사람이 이/취임식을 같이 했다고 한다(...)[15] 이는 브니엘학원 사태로 당시 이사진에서 해임된 상태였던 브니엘학원 설립자 및 부산지역 교계의 요청으로, 브니엘학원이 경남노회기독교교육학원의 전례 처럼 비신자(금정구민들에 따르면 김진재 전 국회의원이 인수자로 가장 유력했다고..)에게 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2002년 당시 부산 고신대학교 의과대학 부도 사태로 삼성그룹성균관대학교 의대 정원을 증설하려고 의대 모집정원 76명 규모의 고신대학교 인수를 노리고 있던 상황이라서 부산지역 교계는 사립학교들을 넘겨주지 않고자 단단히 결집되어 있던 것도 한몫 했다. 결론은 김진재 전 국회의원 같은 능력있는 비신자에게 넘어가는것을 막아서 설립자가 복귀하기 위하려는 초석을 마련하는것이 주 목적이었지만... 그 외에도 당시 서울 교육감이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를 인가 내주지 않으려고 했던것과 대조되게, 부산 교육감은 여건이 되면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를 인가 내주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오면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전환을 노리고 일부 유명 대기업들도 브니엘학원 인수를 노리면서 김진재와 일부 유명 대기업(삼성그룹CJ그룹 인수설이 가장 짙었다.)의 인수 시도에 설립자가 제대로 위기감을 느껴서 정원식을 개입시킨것이라는 분석도 있다.[16] 자기 인터뷰에서도 이 대목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 것을 봐서는 어지간히 흑역사였던 듯 하다. 하지만 부산 지역 신문 등에서는 부고 기사에 총리도 아니고 '브니엘학원 관선이사장 별세'(...)라고 제목을 뽑기도 했다.[17] 또 다른 한 사람은 이해찬. 이 쪽은 딸만 하나다. 반면에 한덕수는 자녀조차도 아예 없으므로 제외. 나아가 한덕수 또한 역대 국무총리들 중에서 자녀가 아예 없는 유일무이한 총리다.[18] 1987년 6월항쟁 이후 들어선 노태우 정부는 지역민심 달래기 차원에서 지방사립대 설립 허가를 남발하였다. 이것은 김영삼 정부까지 이어져서 불과 10년 사이에 수십여개 대학들이 졸속 개교를 했는데, 2000년대 이후 이들 중 상당수가 부실에 빠져서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19] 정확히는 지역민심을 등에 업은 지역토호들의 재산불리기용도 였다. 민주화 이후 낙후되었던 지방 주민들 사이에서 지역개발 열망이 분출하자, 이것을 기회로 노린 지역토호들이 지방자치제에 대비해야 한다며 자신들의 숙원이었던 그린벨트 해제, 4년제 종합대학교, 신도시 건설 등의 개발사업을 요구했고 상당수가 졸속으로 처리되었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