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제25대 통일부장관
제23대 국가정보원장
임동원
林東源 | Lim Dong Won
'''
'''출생'''
1934년 7월 25일 (90세)
일제강점기 조선 평안북도 위원군
'''본관'''
나주 임씨[1]#
'''가족'''
아내 양창균, 슬하 3남
'''전직'''
국가정보원장
'''학력'''
위원소학교 (졸업)
선천중학교 (졸업)
신성고등학교 (졸업)
육군사관학교 (13기 / 학사)
'''약력'''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과장
육군본부 전략기획처장
나이지리아 대사
호주 대사
외교안보원 원장
통일부 차관
통일부 장관
'''종교'''
개신교
1. 소개
2. 초기 이력
3. 김대중 정부에서
4. 여담


1. 소개


대한민국군인, 정치인이다.

2. 초기 이력


1934년 평안북도 위원군[2]에서 태어났다. 위원소학교, 선천중학교, 신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6.25 전쟁이 일어나자 1.4 후퇴 때 단신으로 월남했다. 이후 국민방위군에 들어갔다가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민방위군이 해산되는 바람에 미군 부대에 들어가 거기서 숙식을 해결하고 영어를 공부했다. 1952년 육군사관학교에 제13기로 입교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직업군인으로 복무하였다. 이종찬 등과 청죽회를 결성하여 하나회를 견제하기도 하였다. 초급장교 시절에는 전방 소대장으로 복무 후 육군사관학교 교수사관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이 교수사관 시절에 국지적으로 활동하는 적군을 대상으로 한 전술 교본을 집필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북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 근방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경찰들의 필독서로 주목, 임 대위의 이름이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합동참모본부 전략기획과장, 보병 연대장, 육군본부 전략기획처장 등을 지냈다. 합참 근무시절에는 이재전 장군[3] 밑에서 율곡사업의 기획실무를 맡았는데, 이재전 장군은 훗날 이 시절을 회고하며, '''"내가 주요 지시를 내리면 그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내 생전 그렇게 일 잘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는 찬사를 보냈다.
1980년 10월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고 전두환 정부에서 주 나이지리아 대사, 주 호주 대사 등을 지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 원장, 남북고위급회담 대표, 통일원(현 통일부) 차관 등을 역임하며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을 이끌어내는 등 북방정책의 대북 분야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1992년 9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발생한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이동복의 '''대통령 훈령 조작사건'''의 여파로 통일부 차관에서 물러났다.
참고로 이 사건은 당시 평양에서 열리고 있던 제9차 남북 고위급 회담을 파탄내기 위해서 '''안기부가 멋대로 대통령의 지시사항을 조작'''해서 평양의 대표단에 전달한 사건이다.[4] 대통령 지시대로 회담장을 박차고 나와서 서울로 귀환했던 대표단은 그 명령이 조작된 것이라는 진실을 알고 나서 아연실색했으나, 정작 아무런 처벌이나 징계는 없었다. 그러나 국회에서 야당의 이부영 의원이 이 사건을 폭로하였고, 여러가지 논란이 되자 이동복 특보가 사퇴하였고 몇 달 뒤에 임동원 차관도 물러난다. 정작 임동원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엉뚱하게 같이 날아간 것. 사실 안기부의 막장 짓거리에 열받은 임동원이 야당쪽에 정보를 흘렸고, 이게 문제가 돼서 물러났다는 썰도 있으나, 야권에 영입된 후에도 임동원의 처신과 관련해 구설수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군사정권의 차관급 인사가 김대중 진영에 가담하는 파격 행보에서 비롯된 '''"썰"'''로 추정된다.

3. 김대중 정부에서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다가 1995년 김대중이 창립한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사무총장에 취임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임동원은 김대중의 영입제안을 받고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반DJ 정서가 강한 군부 출신 중에서는 유일하게 이재전 장군만이 "내가 자네(임동원)이라면 OK하겠다. 자네가 가서 직접 그 양반(DJ)과 일을 해 보고서 진로를 결정하는게 좋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아태재단 사무총장직을 수락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김대중은 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의 내용을 담은 '''남북기본합의서'''를[5] 만든 유연함과 외교안보 분야의 폭넒은 시야를 높히 사서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 수석비서관에 이어서 통일부 장관 겸 부총리로 남북대화를 주도하였다. 2000년 국가정보원으로 부임하였고, 특히 2000년 6월의 첫 남북정상회담에도 국정원장 자격으로,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방북했다.
[image]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왼쪽), 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함께 한 모습. 임동원에 따르면, 당시 김정일이 귓속말로 "임 선생, 내가 졌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당초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 당국은 정상회담 조건으로 김대중 대통령 등의 방북단이 김일성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에 참배하는 것을 요구했고, 김 대통령 일행이 평양에 도착한 후에도 이를 고수했다. 그러자 임동원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정상회담을 취소하겠다"고 응수했고, 결국 북한측도 고집을 꺾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후 대북송금 사건이 폭로되면서, 햇볕정책을 비판하는 보수 진영은 위 사진의 귓속말 장면이 대북 송금에 관한 것 아니냐는 주장을 제기했다.
남북정상회담 직후에는 국가정보원장에서 다시 통일부장관으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재임 중인 2001년 8월 동국대학교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방명록' 사건으로 해임건의안이 통과되면서 경질되었다.[6]그러나 이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방북하는 등, 신임을 계속 인정받았다.
이 시기에 임동원은 햇볕정책의 총지휘자로 남북화해/협력 정책을 주도하면서, 김대중의 키신저라는 평가를 듣게 되었다. 참고로 임동원 본인은 서독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을 지휘했던 에곤 바르를 롤모델로 삼았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에서 2005년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하였고,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2018년부터 남북관계 관련 특강에 초청받고 있다.

4. 여담


후임 노무현 정부에서도 대북 포용정책이 유지되면서, 이후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는 이종석이 그의 포지션을 물려받게 되었다. 임동원은 1990년대에 막 박사학위를 받은 이종석이 세종연구소에 취직하도록 주선하여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북한 연구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이종석을 수행원에 포함시킨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회고록 <피스메이커>가 있다. 이 책은 영어, 일본어판으로도 번역, 출간되었다.

[1] 절도공파 31세 '''동(東)''' 채(采) 근(根) 항렬.[2] 현재 자강도 위원군.[3] 10.26 당시 대통령경호실 차장이었던 그 분 맞다.[4] 정확하게 하자면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2가지만 의견일치가 되면 합의문을 발표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안기부는 3가지 모두 우리쪽 주장을 양보하지 말고 무조건 관철하라고 협상지침을 조작해서 전달했다. 당시 북한도 2가지 문제는 동의했고, 이대로 합의문을 발표하고 웃으면서 마무리하는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서울에서 내려온 (실제로는 조작된) 강경한 협상지침에 회담은 파토가 나버렸다. 이후로 남북고위급 회담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5] '''"남북문제 해결의 길이 여기에 있다." '''며, 문서가 공개된 순간부터 DJ가 유독 매우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실제로 DJ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전과정을 임동원과 함께 의논하였으며, 임동원을 대북특사로 보내기까지 하였다.[6] 당시 공동여당으로 정권에 참여하고 있던 자민련이 임동원 장관 해임결의안에 찬성하면서 위태위태한 상태에서 간신히 유지되던 DJP연합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후 국회에서 과반수를 상실한 김대중 정권과 집권 새천년민주당은 사실상 국정통제력을 상실하였으며,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들의 부패스캔들까지 연이어 터져나오면서 계속 추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