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희(1917)

 




1. 개요
2. 생애
3. 한국 국제정치학의 비조
4. 미술사학자로서
5. 저서
6. 가족관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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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用熙
1917년 3월 23일 ~ 1997년 12월 4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학자, 미술사학자, 관료. 호는 동주(東洲)이다.
한국 국제정치학의 사실상의 비조.

2. 생애


1917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독립운동가 이갑성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3년 중국 대련에서 만주국 어용 기구였던 협화회에서 근무했으나, 이내 그만두었고 만주 봉천/하얼빈과 원산(현재 북한)을 잇는 무역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조사부에서 근무했다. 광복 이후 1948년부터 서울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고, 1949년에 정치학과 조교수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초창기의 문리과대학 정치학과가 자리잡는 데 기여하였고, 1950년대 중반에는 외교학과의 창설을 주도했다. 1962년 서울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9년에서 1975년까지 해당 학과의 교수를 역임하였다.[1] 한편 1960년에서 1961년까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을, 1956년에서 1967년까지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산하에서 대통령정치담당 특별보좌관을 역임하였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는 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하였다.
1981년부터 1982년까지 아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세종연구소 이사장 및 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3. 한국 국제정치학의 비조


이력에서 알 수 있듯, 이용희는 외교학과의 창설을 주도할만큼 한국에서 국제정치학이 갖는 특수성에 주목하였고 이를 관철하고자 노력하였다.
초기 한국 정치학은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은 타 분과와 달리 이러한 일본의 유산이 적었다. 일제 학제에서 정치학 교과과정에 "외교사", "국제공법"만이 있었을 뿐, 국제정치학이라는 교과가 없었고, 미국에서도 "국제정치학"이 한스 모겐소 등 독일 출신 망명 학자들에 의해 막 태동한 신생 분과학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사"나 "국제공법"이 아닌, 국가 간의 권력관계를 다루는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학자는 물론, 관심을 갖기 시작한 정치학자 자체가 국내에 극히 드물었다.
이용희는 1948-49년 대학 강단에 데뷔하기 전 국제정세 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타 정치학자들과 달리 일본식 학제 하에서 대학 교육을 받지 않았으며, 영어에 능통하여 만철 조사부 재직 기간 중 E. H. 카의 20년의 위기와 그레이슨 커크[2]의 현대국제정치론을 입수하여 탐독하는 등, 영어권 정치학계의 최신 동향에 익숙하였다.[3] 이 때문에 기존 일본의 정치학 내의 한 분과인 외교사나 국제공법의 연장이 아닌, 새롭고 독립된 분과학문인 국제정치학을 한국 대학에 소개하고 가르치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렇게 최신 학문인 국제정치학을 국내에 수입하는 데 가장 앞장서면서도 한편으로 한국의 현실에 적합한 한국적 국제정치학의 필요성 역시 강조하였다. 미국에서 갓 태동한 국제정치학이 주권국가를 기본 단위로 한 국가 간의 권력관계를 주로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면, 이용희가 보는 국제정치학은 이러한 국가 단위의 국제정치학 외에도 서방의 자유진영과 동방의 공산진영이라는 일종의 국제사회가 있고,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UN과 같은 국제기구가 있는 다층적 구조의 국제관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냉전 구조의 최전선인 한국적 현실이 일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국제사회"에 주목한 그의 이론은 "권역이론"으로 불리기도 했다.
인적 측면에서도 이용희는 한국 국제정치학의 비조에 해당한다. 전술한 대로 1940년대, 1950년대만 하더라도 국제정치학을 일제 때 배운 사람들이 적었고 영어에 능통하거나 국제정치학에 관심을 갖는 학자들이 많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외교학과 분리 및 창설 당시, 서울대 내 외교학과 전임교수는 이용희 교수 단 한 명뿐이었다. 이후 여러 학자가 충원되기는 하지만, 외교학과 초기 졸업생 대부분은 학과를 사실상 홀로 떠받쳤던 이용희 교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후에 노재봉, 김용구를 비롯해 각 대학의 많은 국제정치학자들이 그 문하에서 나왔다. 그리고 1956년 한국국제정치학회 설립도 주도하여, 국제정치학이라는 학문의 도입, 학자의 양성, 학자 간 교류의 장의 구축 모두 그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4. 미술사학자로서


한편으로 예술에도 깊은 조예가 있었다. 한국 고미술(주로 회화) 분야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1969년부터 잡지 '''아세아'''에 이동주라는 필명으로 '''우리나라의 옛 그림'''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미술사학 분야에도 활동한 이유는 1960년대 후반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으로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다 전공 활동에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4]

5. 저서


2018년 중 전집이 출간될 예정이다.
「국제정치원론」(1956)
「정치와 정치사상」(1958)
「일반국제정치학(상)」(1962) [5]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1966)
「한국의 회화소사」(1972)
「일본속의 한서」(1975)
「우리나라의 엣 그림」(1975)
「한국 민족주의」(1977)
「미래의 세계정치 : 국가연합론 강의」(1994)
「근세한국외교문서 총목(외국 편)」(1996)

6. 가족관계


부친은 독립운동가 '이갑성"이며, 제14대(민주자유당-신한국당 전국구), 15대(신한국당-한나라당-새정치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 인천광역시 부평구 을) 국회의원을 지낸 이재명이 그의 아들이다.

[1] 정치학과 교수 재임 시절 포함[2] 컬럼비아대학 총장을 역임한 정치학자. UN 창설에 관여[3] 한편으로 영국과 미국의 국제정치학의 차이점을 주목하기도 했다. 이용희가 보기에 카를 비롯한 영국의 국제정치학은 여전히 국제기구 및 제도론 등 국제공법 연구의 연장에 가까운 반면, 미국의 국제정치학은 제도 그 자체보다는 국가를 하나의 단위로 한 권력관계에 초점을 맞춘 신생 학문이었다.(이용희, 국제정치론 中)[4] 그러면서도 박정희 정권에서 대통령 특보와 통일원 장관등을 역임하였는데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다 재무장관으로 발탁된 남덕우와 비슷한 케이스라 할 것이다.[5] (하)는 집필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