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의 종심돌파이론

 

1. 개요
2. 종심돌파이론
3. 공식 채택
4. 상황


1. 개요


소련 붉은 군대의 종심(縱深)돌파 교리는 제정 러시아 군대가 겪은 좌절과 군사력 쇠퇴 등으로 인하여 탄생되었다. 러시아 제국군은 크림 전쟁제1차 세계 대전의 정전협정,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 의한 패전 등을 경험하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붉은 군대의 몇몇 머리가 좋은 고위 지휘관들은 러시아의 군사력이 쇠퇴하는 것을 막고 제도와 전술을 새롭게 정립 하려고 시도 하였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와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로프는 당시 혁신적 교리를 고안해낸 붉은 군대장교들로, 1930년대 스탈린대숙청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2. 종심돌파이론


이 이론의 핵심은 적의 전선을 따라 여러 지점에서 동시에 공격하여 적의 고위 지휘관을 동요하게 만듦으로써 돌파 시도의 초점으로 분명하게 식별된 지점에 예비대를 투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적의 지상 작전 지역을 뚫고 종심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같은 철저한 공세 행동은 적의 전투력을 급속하게 저하시켜 전선을 돌파시키게 한다.

적의 전술구역 전선에 침투하게 되면, 기동부대가 적의 전방을 타격하여 적들의 지휘 통제시설을 파괴하고 보급을 막아서 적 일부를 전체적으로 교란 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종심돌파는 소련군이 전력적 목표를 달성하면 종결된다.

3. 공식 채택


1933년, 붉은 군대는 이 종심돌파이론을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종심 돌파 공세를 시작 하기 위한 계획 단계는 주요 전략적 목표를 정하는 것으로 시작 된다. 그것으로부터 전술이 정의된다.
종심 돌파가 공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방어준비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를 정해 전술 구역들을 요새화하고 포병보병을 배치해둔 강력한 방어 진지를 구축하여야 한다. 일선 방어선 너머에는 광범위 하게 지뢰를 매설 하여 적의 공격을 방어해야 한다. 이로 인해 적은 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추진력을 잃어 결국에는 아군에게 반격을 당하고 패하게 될 것이다.

4. 상황


종심돌파이론은 1930년대의 소련군에게 적합한 것처럼 보였는데, 당시 붉은 군대는 풍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병사의 대부분은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들은 훈련이 부족한 대규모 병력과 러시아 국토를 이용하여서 길게 뻗은 전선을 따라 종심돌파이론을 실험,계획 그리고 작전을 실행 했을 것이다. 여러 지점을 동시에 돌파할 경우, 적이 후방으로 진격하려는 소련군에게 격파당하였기 때문에 종심이론은 더욱 쓸모가 있었다.
종심돌파이론의 장점은 대규모 병력이 넓은 전선에서 동시에 공격하면서, 여러 곳에 집중적으로 공격하거나 한 곳에 집중을 하면서도 다른 전선에서도 지체없이 공세를 지속하여 전선의 적군의 발목을 묶어 적이 아군의 돌파지역에 제대로 된 지원을 보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돌파가 성공하게 되면 연쇄적으로 다른 전선의 아군에 힘을 가세하여 돌출부 없이 안정적인 연쇄 돌파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종심돌파 이론의 단점은 적 병력보다 아군 병력이 우월해야 한다는 점이다(여기서 병력의 우세는 단지 전력의 차이 뿐만이 아닌 용병술, 장비 등을 말한다). 회전문의 효과를 따르듯, 어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하게 되면 다른 전선의 아군의 전력이 그만큼 약화되는데, 적군이 이 약화된 전선을 공격하게 되면서 회전문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침공 당시, 독일군은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기 위해 교란과 적군 발목 묶기, 순식간에 적 후방을 향해 치고 들어가는 전격전으로 회전문 효과가 일어나기 전 신속하게 전쟁을 끝냈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전격전의 이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소련군의 병력이 독일군보다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적 병력보다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종심돌파작전을 감행하게 된다면 돌파는 어찌저찌 성공했다 할지라도 그대로 적군이 우세한 병력을 전선에 밀어붙여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고, 돌파를 담당했던 아군은 그대로 포위될 것이다. 쿠르스크 전투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종심돌파작전과 비슷하게 전선에서 소련군의 발목을 묶고 목표 지역을 향해 진격했지만, 위에 기술한 대로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1941년, 정작 독일과 개전하자마자 대숙청 등으로 인해 기량이 떨어질대로 떨어질 소련군들은 이 이론을 통한 제파식 전술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고, 결국 전초에 공식추산 250만, 비공식 추산 400만이라는 역대급의 피해를 입는다. 특히 기계화보병, 정예병력 중심의 1파를 구성하지 못하고 알보병을 축차투입하게 된 것이 컸다. 그나마 1944년부터 소련의 생산력이 독일의 역량을 압도하기 시작하고, 소련군들이 4년간의 실전으로 독일군 못지않은 정예군으로 거듭나자 종심돌파이론은 다시 부활했고, 이는 쿠르스크 전투이후 수차례의 소련의 대규모 공세로 나타난다. 그리고 만주 작전으로 유례 없는 진격 속도를 보여줘 일본군의 마지막 군대라 할 수 있는 관동군을 일주일 만에 제압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