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격전
한국어: 전격전(電擊戰)
일본어:
중국어: 闪电战
독일어, 영어[1] , 체코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크로아티아어, 네덜란드어, 노르웨이어, 루마니아어, 슬로바키아어: Blitzkrieg
러시아어, 세르비아어, 카자흐어: Блицкриг
폴란드어: Wojna błyskawiczna
1. 개요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개전과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군이 보여준 전략으로서 공식적으로 전격전이라 호칭된 것은 아니었고 번개와 같이 빠른 진격이라는 뜻의 독일어 Blitzkrieg가 그대로 하나의 고유명사화 되어 전격전이란 용어가 되었다.[2] 당연히 군사 전문가가 아닌 기자들의 드립이 군사용어화(?)되어 역이식된 것. 번개처럼 빠른 기동으로 종심 타격을 하여 적을 마비시킨다 하여 '마비전' 드립도 나왔지만, 묻혔다. 하지만 리델 하트가 내세운 마비전의 아종임은 분명하다.
선형 대형으로 이루어진 방어 전선에 특효약이다. 선형 대형이란 것이 말 그대로 적은 예비대만 후방에 두고 나머지는 죄다 방어선에 배치하는 것인데,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 "병력을 여기저기에 배치하는 지휘관은 무능한 지휘관이다." 라고 할 정도로 선형 대형은 완벽 탐지 및 방어에 고집이 있는 모리스 가믈랭 같은 장군들이 주로 써먹었고, 전격전은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한 곳에 전력을 집중하여 빠르게 전선을 돌파해 적의 빈약한 예비대가 손도 못쓰게 하고, 방어선에 배치되있던 적 주력 병력들은 황급히 후방으로 복귀하는 사이 적 후방을 개차반으로 만드는 전술 혹은 작전술이다.
2. 과거 냉전기 통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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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술의 개요는 첫 번째로 강력한 공군의 지원을 받는 제1선 돌파부대(기갑)가 빠른 속도로 적 방어선의 취약지점에 돌파구를 형성하여 후방으로 진출하고, 두 번째로 돌격부대(기계화)가 돌파구를 확장하며 적 방어선을 절단하여 적을 고립시키고, 세 번째로 뒤따르는 후속부대(보병)가 조각조각 분리되어 고립된 적 부대를 섬멸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 사이에 '''선두부대는 최대한 (적의)후방으로 깊숙히 진출하는 것이 목표일 뿐, 적과의 직접적인 교전과 섬멸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말하자면 속도가 핵심인 기동전'''.
더 쉽게 설명하자면 전차부대, 경보병부대 같은 기동력이 좋은 부대를 내세워 '''적의 영역에 일단 깊게 찌르고 들어간 뒤 헤집고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적의 입장에서는 소규모라고 할지라도 자기 영역 내부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적 부대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심리적인 위협을 받으며, 사기가 위축될 뿐 아니라 평시에 미리 준비해놓았던 각종 보급선, 연락선들이 산발적으로 끊어지는 상황에 놓인다. 거기다 전격전은 1차적인 정예부대의 침투 이후 후속부대의 신속한 호응이 뒤따르므로 여기저기서 고립되어 있는 주둔부대가 각개격파될 위험이 크다. 전격전은 역사적으로 전쟁을 거는 쪽이 시도했는데, 전쟁선포하여 쳐들어가는 행위 자체가 간첩 등을 동원하여 한참 전부터 적의 부대위치, 규모 등을 파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3] . 따라서 통상적으로 공격자가 방어자의 전력배치를 반대의 경우보다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전격전이 시작되어 방어국의 부대가 일단 한번 이 전술에 말려들게 된다면 망치와 모루 전술에 철저하게 박살이 나는 것.
근본적으로는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8년 독일 제국군이 춘계 공세에서 사용했던 후티어 전술과 다르지 않으며 차이점이라면 포병 대신 공군, 보병 대신 전차가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개념을 처음으로 창안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군사학자인 존 퓰러와 전쟁사학자 바실 리델 하트였다. 그러나 기동전의 개념은 당시의 연합군으로서는 쉽사리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대신 기동전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독일의 하인츠 구데리안이 이 개념을 연구하고 적용함으로서 독일 전차부대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1939~40년간 이 전술이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했던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채 30여년이 흐른 시점에 당시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속도전이 전개되었던 덕분이었다. 폴란드군, 프랑스군, 영국군은 1차대전 당시의 진격속도를 기준으로 독일군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있었으나 독일군의 진격속도는 예상을 한참 뛰어넘었고 통신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탓에 적의 현재위치나 진격방향을 판단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이미 적 병력이 자신들을 지나 저멀리 달려나가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적의 후방에 고립되었다는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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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격전에도 단점은 있어서 정확한 공군지원이 없이는 선두부대의 진격이 어렵고, 적 주력과의 교전을 회피하고 기동하기 때문에 적의 병력피해는 사실 크지 않아서 적이 패닉에 빠지지 않고 재정비하여 반격할 시 오히려 선두부대가 적들의 한가운데에 고립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4]
2차대전 하면 회자되는 유명한 장군인 롬멜도 빠른 기동으로 넓은 지역을 점령했지만 그만큼 보급선이 길어져 한계를 노린 영국군과 횃불 작전으로 인해 옆에서 치고들어오는 미군의 반격으로 아프리카 전선의 패망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처음에 동맹국의 삽질로 인해 개전된 아프리카 전선의 패망 문제는 히틀러의 잘못된 망상의 문제도 일익을 담당했다. 더구나 독소전의 발발로 인하여 아프리카로 가야 할 보급품들은 러시아로...
3. 소련 몰락과 2차 대전 문서 유출 이후의 재평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에서 설명된 소위 전격전이라 불리는 교리는 '''실존한 적이 없으며''', 그 세부 사항은 실제 독일군의 전투 수행 방식에 대해 서방의 마비전 과 기동전, 그리고 소련군의 전술적, 작전술적 개념들을 이것저것 뒤섞어 투영하여 만들어진 잡탕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하인츠 구데리안의 도움을 받아 만든 작전을 프란츠 할더 장군이 꽤나 도용해서 현실에 옮겼더니 나온 결과가 놀라워서 '''"마치 폭풍같군! 이 작전을 전격전이라고 부릅시다!"''' 라는 경위로 전격전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사실 전격전이라는 용어는 주로 서부전역에서 독일군이 보여준 포위중심기동전을 뜻하는데, 서부전역을 일컫는 다른 말인 지헬슈니트(낫질)도 처칠이 서부전역의 결과를 보고 '흠 낫질한 것 같은 작전이다'라고 한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즉 처음부터 딱히 명확한 개념이었던 적이 없었다. 전격전이란 단어가 최초로 공식적으로 쓰인 것도 영국의 일간지에서였으며, 당시 독일에는 이를 지칭하는 단어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독일군은 결코 적 주력과의 교전을 회피하지 않았다'''. 독일군의 목표는 언제나 적 주력의 '''물리적 섬멸(annihilation)'''이었으며, 이는 19세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졌을 만큼 그 유래가 깊다. 2차 대전기 독일국방군의 기본 교범이었던 1933년판 부대지휘론(Truppenführung)에서도 적 전력의 끊임없는 섬멸을 강조했다. 이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독일군은 적을 심리적으로 마비시키기 보다는 물리적으로 섬멸하는 것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5] 일례로 1933년판 부대지휘론에서는 기갑부대의 주요 과업으로 '''전선이 참호전등의 진지전으로 고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의 포병과 예비대를 섬멸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기갑부대는 적과의 교전을 회피한다'는 개념과는 다르다. 실제로 독일군이 수행한 수많은 포위섬멸전에서 기계화부대는 돌파-돌진 이후 대규모 희생이 따라오는 전투를 마다하지 않고 섬멸에 직접 참여했다. 만약 프랑스가 기동방어 나 종심방어 + 공세적 방어를 취했다면 독일군의 전격전이라 불리는 기동전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애석하게도 프랑스는 마지노 선을 중심으로 한 고정방어 + 수세적 방어 전략을 취했다. 프랑스군의 전차들은 분명 1930년대 독일 전차들과 비교하면 월등히 우수했지만 무전기를 비롯한 여러 문제들이 산재해있었고, 더군다나 방어선에 차려진 요새들 역시 독일군이 뚫기 불가능하다싶을 정도로 단단했던 것도 매한가지였으며, 벨기에 지방은 에반-에마엘 요새의 존재로 인해 뚫리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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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전차병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고 있다.
소위 전격전의 사례로 나열된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러시아 침공 중 심리적 마비가 일어난 것은 오로지 단 한번, 프랑스 전역에서 뿐이었으며, 그나마도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전역에서의 심리적 마비는 독일군이 연합군 주력을 물리적으로 포위섬멸하기 위해 기동부대를 연합군 후방으로 돌진시키면서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부수적 효과였을 뿐이다'''. 이것은 1941년 초기 러시아 전역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키예프, 비야즈마, 스몰렌스크, 민스크 등에서 일어난 수차례에 걸친 대규모 포위섬멸전(Kesselschlacht)에서 소련군은 심리적으로 마비, 붕괴되지 않고 끝까지 저항했으며, 독일군은 격전 끝에 수십만명의 포로를 잡으며 물리적으로 소련군을 섬멸했다.
현재 알려진 전격전의 개념에 가까운 작전이 벌어진 사례 중 하나가 초창기 소련 침공인데, 막상 여기서는 독일군이 완전히 패배하고 아프리카, 프랑스 등에서의 승리를 통해 축적된 군사적 우위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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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에서 잡힌 포로를 살펴보는 힘러
영국의 J.F.C. 풀러나 바실 리델 하트의 저작이 독일군의 전격전 교리 성립에 크게 기여했다는 통설 역시 완전한 허구이다. 풀러의 Plan 1919가 독일과 소련에서 주목을 받기는 했으나 그것은 전적으로 대규모 기갑부대 운용을 실제 야전훈련과 부대편성으로 현실성있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은 것뿐이지 그 사상이 무슨 대단히 혁신적이고 선구적이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 정도의 이론은 세계 각국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리델 하트의 저작은 아예 평균 이상의 주목을 받았다는 사료적 근거가 거의 없다.[6][7] 그리고 소련은 1차 대전 이후 적백내전을 겪으면서 투하체프스키의 주도로 독자적인 교리를 거의 완성해나가고 있었으며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동안 잠시 부정되었지만 결국 그것을 다시 부활시켰다. 이를 '''종심작전'''[8] 이라고 하며, 독소전쟁 후반기에소련이 써먹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것 때문에 종심작전이론을 "소련식 전격전 이론"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소련이 독일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전격전 전에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이론이다.
소위 전격전은 사실 따지고 보면 기계화부대와 항공기라는 신무기를, 그 뿌리가 프로이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전적 독일식 기동전에 성공적으로 접합한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도 설명되었듯 '''독일군의 '섬멸'과 '포위', 그리고 '기동'에 대한 집착'''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사방이 적국에 둘러싸인 프로이센, 그리고 독일의 지정학적 특성상 독일군은 언제나 자군보다 강력한 적과의 양면전쟁, 혹은 다면전쟁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집요하게 발전시켰다. '기동'과 '포위', '섬멸'이다. 말하자면, 신속하게 '기동'해서 우선 하나의 적을 '포위', '섬멸'하여 전열에서 완전히 탈락시키고, 다시 신속하게 '기동'해서 또 하나의 적을 '포위', '섬멸'하는 방식으로 1:2의 절대열세를 두 차례의 대등한 1:1 전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9] 유구한 역사의 독일식 기동전은 1차대전기에 화력 팩터가 기동 팩터에 대해서 결정적 우위를 잡으면서[10] 잠시 사라졌으나, 기술적 발전으로 다시 기동 팩터가 우위를 잡자 1940년대에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런 수백 년에 걸친 역사의 독일식 기동전을 누군가가 가르쳐 줬다거나 기발한 새로운 전술이라거나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이다.
결국 전격전은 2차대전 독일군의 전쟁 수행방식이 아니라 영미 군사학계의 가공의 개념일 뿐이었다. 결국 현재 전격전이 2차대전 때 존재했던 전쟁수행방식이라는 통설은 깨졌고 애초의 민간인 기자의 의도대로(?) 화끈한 기동으로 전과를 확대한다 정도의 일반 명사로만 남아있다.
'''(…) 전격전은 어떤 정책도, 경제적 수단도 아니었으며, 군사 교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 전격전은 하나의 결과, 또는 아마도 그 결과의 사후 기술에 지나지 않았다. 전격전은 전술적이거나 작전적인 하나의 체계가 결코 아니었다.'''
-전격전이란 무엇인가? Hughes, Daniel J. 1996. Blitzkrieg. (ed.) Franklin D. Margiotta. Brassey's Encyclopedia of Land Forces and Warfare. Dulles : Brassey's Inc., 1996, pp. 155-162.
관심이 있다면 칼 하인츠 프리저가 쓴 전격전의 전설이라는 책을 참고하면 좋다.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국내에서 전격전이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논지들은 이 책에 근거를 두고 있다. 물론 해당 책에도 일부 사실적 오류가 존재하며, 다른 의견도 엄연히 있다는 점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전 세계 국가들이 독일군의 새로운 전쟁수행방법(전격전)을 연구하고 있으나, 그런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전쟁이란 항상 임기응변으로 수행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전역 종결 직후 독일군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 장군, 일조각, 카알 하인츠 프리저 저, 진중근 역, 2007, <전격전의 전설> 29쪽에서 재인용.
위 책과는 상관없지만, 보통 생각하는 전격전 비슷한 것을 가장 잘 구사했던 건 다름 아닌 '''당시 미군'''이다. "선두부대는 최대한 후방으로 진출하는 것이 목표일 뿐, 적과의 교전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말하자면 속도가 핵심인 기동전"이라는 위의 언급은 오히려 당시 미군 기갑부대 교리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고, 이는 44년 이후 서부전선에서 조지 S. 패튼의 진격에서 전형적으로 전개된다. 패튼이 어찌나 이 교리에 충실했던지 교전을 회피하다못해 적을 그냥 '''방기'''하는 게 아니냐는 평가까지 있었을 정도. 덕분에 그 뒤를 따르는 연합군 보병부대의 뒤치다꺼리는 뒤치다꺼리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치열한 소탕전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4. 기타
'전격'이라는 단어는 중국 주나라 여상(呂尙)[11] 이 지은 육도(六韜)"라는 병서(兵書)에도 병법 중 하나로 쓰인 적이 있다.[12]
도미네이션즈에서 수비병들을 혼란시켜 소통을 방해하고 적군을 쉽게 압도하게 하는 전술로 등장한다.
[1] 'Lightning War'이라고도 한다.[2] 이탈리아 기자가 처음 썼다는 출처도 있다. 베네룩스 3국 전선과 프랑스 전역을 순식간에 쓸어버린 독일군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 기동방법을 묘사하기 위해 썼다고 한다(출처 - 제2차 세계 대전, 플래닛미디어).[3] 전쟁론 참고. 서로 국력, 군사력이 비슷한 두 개의 나라가 있고 산발적인 국지전 없이 바로 일방적인 선전포고후 전면전이 발발한다고 가정한다면 전쟁개시 시점을 기준으로 공격자는 방어자보다 '''항상 보급, 정보면에서 유리'''하다.[4] 이렇게 되면 공격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전선을 돌파한 것에서 끝나게 되는데 전선을 돌파한 것 자체 만으로는 아무 성과가 없으며 거기서 끝나게 되면 오히려 위험해진다. 돌출된 위치로 삼면의 적에게 스스로 둘러싸여주는 꼴이기 때문.[5] 적의 마비는 오히려 소련군 교리에서 중시되던 내용이다. 투하체프스키가 고안한 '종심작전이론'에선 적군의 전열 한가운데에 돌격하여 쐐기처럼 돌파구를 연 이후에 교전을 회피하고 후방 사령부, 통신선로, 보급기지 등 종심표적으로 고속기동해서 타격하여 마비를 안겨주는 일명 '''충격군'''이 설정되어 있다. 충격군은 2차대전말 소련군 기갑부대 편제에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기동전, 제파식 전술, 작전기동군 항목 참조.[6] 사실 나무위키의 전격전 문서와 해당 인물 문서에서 헛소리꾼 정도로 평가 절하되고 있지만 많은 군사 전문가나 군인들 사이에서 군사 이론가로의 리델 하트의 지위는 확고하다. 물론 당대에도 매우 유명했다. 전격전의 전설 책 발매 이후 거품드립과 함께 반작용으로 까이고 있긴 하지만.[7] 상술했듯 가동존애 전차를 적용시키는건 아무나 했지만, 그걸 이론에서 현실로 이끈건 분명 그와 그의 저작이 가지는 큰 공이다.[8] 번역에 따라 '종심전투이론', '종심전투교리'라고도 한다. 당장 위키에서만 봐도 각 문서에 따라 세가지 용어가 혼재되어서 사용되고 있다.[9] 그러나 현재의 전격전 항목에서도 전격전 자체가 하나의 허구 또는 가공의 개념으로 까이는 것 처럼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쟁수행 방식에 있어서 논란이 있다. 20세기 초반까지 독일 군사학계에선 프리드리히 대왕이 "섬멸"에 집착하여 기동전을 구사했다는 것이 통설이었다. 이때만 해도 프리드리히 대왕이 섬멸이 아니라 '소모전'을 추구했다는 주장이 나오면 비군인 아마추어의 주장이라 씹혔지만 현재에 와서는 그 평가가 뒤집어지고 있다. 애초에 전쟁수행 방식을 하나로 평가하여 비결을 알아내려는 것은 일종의 신화에 가깝다.[10] 1차대전 중기까지는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보호되는 적군 방어선을 돌파할 기동수단이 전무했다. 포병의 발달로 고전적 기동전의 핵심인 기병은 무력화되었으나, 이를 대체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고착화된 참호전과 무제한 소모전으로 흐른 것이다. 한때 독가스가 이런 교착 상태를 타계할 수단으로 각광 받았으나 기술적 불안정과 상대방도 독가스 뿌려버리면 된다는 점 때문에 현대적의 끔찍한 악몽과 같은 모습만 남겼지 실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전쟁 말기 등장한 현대판 기병인 전차와 항공기이다.[11] 여상(呂尙)은 모두가 잘 아는 낚시군의 대명사 강태공이다.[12] "대형 (돌격용) 충차 36대가 있다. 당랑(사마귀)처럼 (용맹한) 무사 3명을 태우고, (적진을) 종횡으로 공격하여, 강한 적을 물리칠 수가 있다. (이를) 치차기구, 일명 전차(電車)라고 하며, 병법에서 '''전격(電擊)'''이라고 한다. (이것으로) 적의 진지를 무너트리고, 보병과 기병을 격파한다."(大扶胥衝車三十六乘, 螳螂武士三人共載, 可以擊縱橫, 敗强敵. 輕車騎寇, 一名電車, 兵法謂之電擊. 陷堅陣, 敗步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