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충자
1. 개요
蘇忠子 / 蘇忠至
생몰연대 미상
후삼국시대에 김인광에 이어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일대를 차지했던 호족 세력. 충지(忠至)라는 이름 기록도 있다.
소충자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고승들을 후원하고 후삼국시대 거친 난세에서 안전하게 보호했으며 그를 거쳐간 승려들은 소충자를 잊지 않고 비문에 기록했다. 이런 금석문을 통해 후삼국시대 당시 김해가 선종(禪宗)의 안식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생 소율희가 고대 한국어의 특성상 김율희로 기록되기도 했던 걸 볼 때 형인 소충자도 사실 김씨(金氏)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율희 문서 참조.
2. 생애
가락국기 및 낭공대사비의 기록을 볼 때, 이미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양강구도+겨우 버티는 신라의 후삼국 구도가 거의 완성되었던 906~911년경, 그 이전에 김해지역의 관군 세력을 동생 소율희와 함께 몰아내고 김해를 차지했다. 그의 출신은 잡간(匝干), 즉 신라 제3관등 잡찬이란 것을 봐선 신라 중앙의 진골 귀족 출신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시대 호족들이 많이들 그랬듯 자칭일 확률이 높다.신라 말년에 충지(忠至) 잡간(匝干)이란 자가 있었는데 금관고성(金官高城)을 쳐서 빼앗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김해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옛 금관가야의 고도였고 가야계 김씨 토착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삼국유사에는 이들과 소충자 집단의 충돌을 말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소충자의 부하 중에는 아간(阿干)[1] 영규(英規)라는 자가 있었는데, 주군 소충자의 위엄을 빌려 가야 시조 수로왕의 제사를 지낼 권리를 금관가야 왕실 후손들에게서 빼앗아 멋대로 제사를 지냈다. 수로왕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세우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단오를 맞아 수로왕에게 제사를 지내다가 사당의 대들보가 이유 없이 무너져내려 영규가 깔려 죽었다. 놀란 소충자는 비단에 수로왕의 진영(얼굴을 그린 그림)을 새로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공경히 받들었지만 3일만에 그림의 수로왕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소충자는 깜짝 놀라 예전 명령을 취소하고 수로왕의 친자손 규림(圭林)에게 제사를 지낼 권리를 돌려줬다. 이후 영규의 아들 준필(俊必)이 아버지의 죽음에 불만을 품고 수로왕의 사당에 난입해 제사상을 뒤엎고 아버지처럼 멋대로 수로왕에게 제사를 올렸지만 제사를 다 마치지도 못하고 갑자기 병이 들어 집에 돌아가서 죽었다고 한다.
신이한 설화도 모두 실은 삼국유사의 기록답게[2] 설화적인 각색이 되어있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만한 부분만 보더라도 소충자 세력과 금관가야계 김씨 토착세력간에 알력이 있었고, 한때 다퉜지만 결국 소충자 세력이 사실상 굴복하거나 타협을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소충자는 김인광처럼 선종(불교) 후원 정책은 이어받아 계속했다. 태자사낭공대사비에는 소씨 형제가 불심이 깊고, 이름이 높던 낭공대사에게 자기 세력권인 김해의 사찰에서 머물며 복을 빌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다 광조사진철대사비, 봉림사진경대사비의 기록에는 소충자가 빠지고 동생 소율희의 이름만 있는 것으로 보아 소충자는 곧 자연사해서 동생에게 세력을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1] 신라 제5관등 아찬. 물론 이 역시 자칭일 가능성이 높다. 영규와 아들 준필이 수로왕에게 제사를 지내려 했다는 것을 봐서 금관가야계 김해 김씨의 방계 혈통으로 추정하기도 한다.[2] 당장 곰이 사람이 되는 내용인 단군신화도 삼국유사에 실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