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국어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중 처용가
古代韓國語
1. 개요
2. 계통
3. 문법
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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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대국어 항목
한국어 어휘에 대한 기록이 시작되는 삼국시대~남북국시대까지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80년대 이후의 연구에서부터는 고려시대인 13세기까지를 고대 한국어로 이해하려는 움직임들이 강하다.[1]
고대 한국어 시대에는 고유어를 나타낼 수 있는 문자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한자로 적힌 이두, 구결, 향찰, 서기체, 기타의 어휘 표기와 같은 극도로 제한된 자료로서만 비로소 그 형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아직 정확한 음운이 제시되고 있지는 못하다. 자음 방면에서는 유무성음의 구분 존재 유무, 유무기음의 구분 존재 유무, 반치음과 순경음의 존재 유무 등을 둘러싸고 학자들 간에 일치된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 못하며, 모음 방면에서도 모음추이의 존재 유무 등과 같은 현안을 두고 십인십색의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한자음 재구를 연구한 학자들은 이 시대의 한국어가 일본어와 유사한 개음절어였다는 가설까지 제시했다. 그래서 일단 교과서에서는 된소리가 없었다는 정도만 소개하고 있다.
문법적인 면까지 접근하는 건 꿈 같은 이야기였다. 다행히 1990년대에 구결 자료가 발견되어 재조명되면서 비로소 문법적인 면을 조금씩 다룰 수 있게 되었다.

2. 계통


'삼국 상호 간에 통역 없이 말이 통했는가?', '가능했다면 얼마나 유사했는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어떻게 달랐는가?' 하는 것에는 수많은 가설이 있다. 정사에 기록된 부분으로 미루어 보면 크게 다음과 같다.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백제인은) 현재 언어와 의복이 '''고구려와 같다.'''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백제(百濟)

위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는 말이 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구려어와 백제어가 근연 관계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렇다면, 신라어의 경우는 어떨까? 신라전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無文字, 刻木爲信. 語言待百濟而後通焉.

문자가 없으므로 나무에 새겨 의사를 전한다. '''언어는 백제를 거쳐야만 (중국과) 통할 수 있다.'''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중 신라(新羅)

백제의 통역을 통해 중국과 소통한다는, 백제와 신라의 말이 통했다는 뉘앙스의 기록이다. 따라서, 종합해 보면 고대 한국어는 고구려어와 백제어가 근연 관계였고 백제어와 신라어가 근연 관계에 있는, 적어도 통하거나 방언연속체의 가까운 언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말이 서로 통하기는 했지만 '한 가지 언어는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예컨대 고구려 유민들이 사용하던 '부여 어군'과 삼한(韓)인들이 사용하던 '한 어군'이 있었는데, 백제 지배층에 고구려 출신이 많아 이들은 고구려인과 소통이 가능했고, 일반 백제 백성들은 따로 신라인과 말이 통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말이 서로 다른 '''이중언어''' 국가가 된다. 하지만 백제어가 실제로 이중 언어 체계였는지는 비판점이 있다(신라어의 '부여 계통 언어와의 관계' 단락 참조.).
이전에는 고구려어백제어, 신라어 자료가 각각의 국가에 전수되고 있었으나 고대 한국어 중에서는 신라어 관련 자료만이 그나마 가장 많이 남게 되었다.특히 향가 관련 자료. 그러나 고려시대의 향가는 중부 방언으로 이루어져 신라계 방언으로 된 향가는 실전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건 서동요 항목 참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삼국(신라, 고구려, 백제)의 언어 전통을 계승, 보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대에는 전하지 않는다. 실제 고려시대 중반 김부식을 포함 삼국사기 편찬자들도 고구려어나 가야어에 지식을 상당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대 동아시아 언어를 연구하는 일부 서구권 비교언어학자들은 고구려어(부여어계)을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된 언어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보빈은 고대 한국어가 단일 언어가 아니라 가방어족으로 본다.[2] 고대에서 중세 한국어 시기에 과거 한반도에 존재했던 여러 계통의 종족들의 언어가 합쳐져 부여계어족을 중심으로 단일언어화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 #
실제로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중앙집권 국가의 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탓에 실질적으로 현대 한국어의 어원이 만들어진 시기는 후삼국 시대 이후인 고려시대의 패서호족 즉, 고구려계 호족들이 쓰던 고구려계 언어(고구려어)로 보는 의견 또한 있다. 왜냐하면 현대 한국어의 표준어가 된 서울어는 14세기에 조선의 한양 천도에 의해 개성어가 그대로 이식된 결과이며, 고려 왕조의 개성어는 애초에 고구려 계승 의지를 공공연하게 피력하였던 패서, 즉 오늘날 황해도 및 평안남도 남부의 고구려계 호족들의 언어를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점을 보았을 때, 현대 한국어는 고구려어의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상고시대 신라도 아니고 7~9세기 통일신라 때의 중앙집권이나 지방통제력이 미약하다고 보는 전제부터가 통설과 너무 동떨어진 문제가 있다. 통일신라는 김헌창의 난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해서 지방을 직접 다스리는 체계가 정착돼 있었고, 경주 반대편 호남과 황해도, 금강산까지 불국사 3층 석탑 양식으로 대표되는 통일된 문화양식을 전파했음이 유물로 남아 있다.
고려 건국 세력이 신라 중앙과 이질적인 옛 고구려어를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수백년간 제대로 보존하고 있던 집단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 통일신라-후삼국 시기 기록에서 통역이 필요하다든가 하는 기록도 없고, 애초에 개성은 고구려의 중심이 아닌 남쪽 변방이어서 국내성-평양성 중심의 북부 고구려와 지역적, 계층적으로 같지 않을 수도 있고, 고려 건국집단이 고구려 계승 정체성을 정말로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언어적으로 지배자에 동화되어 영어를 쓰는 아일랜드인에서도 볼 수 있듯 정체성과 언어의 보존이 항상 같이 따라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궁예라면 몰라도 고려는 신라적 정체성을 말살하기는 커녕 융합에 힘썼는데 현대 한국어가 공동 후손도 아닌 부여어족(고구려어)의 직계 후손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러나 신라의 중앙집권화가 고려조선의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음은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만약 신라의 중앙통제력이 지방의 구 고구려, 백제권 지역들의 언어와 정체성까지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고려후백제가 탄생한 후삼국시대는 아예 개막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신라의 중앙어인 경주 쪽의 언어가 다른 지방들의 언어를 완전히 대체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심지어 고려시대까지도 중앙의 지방통제력은 미약한 수준이었음을 한국사 공부를 하였다면 모를 수가 없다. 모든 지방행정구역에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지 못해 주현 속현을 나누어 주현에나 관리를 파견했을 뿐 나머지는 현지 토착세력들이 다스렸던 게 고려였다. 그리고 그 주현조차 청사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현지 토착세력들이 다스렸다. 이게 그나마 신라시대보다 중앙집권화가 진전된 결과였다.
실제로 국문학계와 사학계에서도 "중부방언은 기원적으로 '''고려가 왕도(王都)를 개성으로 정하면서 형성된 중심으로 하여 중앙어(中央語)에 소급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앙어는 조선이 왕도를 개성과 동일한 방언권에 있는 현 서울로 옮김으로써 그대로 유지되어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중앙어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서울의 말은 곧 표준어의 중추를 이루므로 중부방언은 말을 바꾸면 표준어의 특징을 다른 방법보다도 가장 많이 공유하고 있는 방언이라 할 수 있다."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이와같이 진정한 의미의 한반도 최초의 중앙어는 고려가 수도로 정하였던 개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언어라고 추정하였다.
또한 보빈은 자신의 학설에서 고대 한국 남부를 '고일본어권(Old Japanese)'이라는 개념으로 보고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열도의 야요이족이 같은 계통의 언어(고일본어)를 사용하였으나 Peninsular Japonic 한반도 중남부의 고일본어족은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북쭉에서부터 남하한 어족(현대의 한국어로 계승된 어족 부여어족으로 추정)에게 흡수 및 소멸, 추방되어 한반도 내에서 거의 사라졌으며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어족은 일본열도에만 남게되어 오늘날의 일본어를 구성하였고 현대 한국어는 북쪽에서 남하한 부여계어족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을 구체적으로 논증하였다.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ǒ to T’amna)'
주된 근거는 삼국사기 권34, 권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서 기재된 한반도 중남부 지명이나 고유명사가 한국어보다는 고일본어와 상통하는 면이 많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일반명사나 지명이 근거로 거론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삼국사기 44권에는 加羅語謂門為梁云라고 하여 가야에서는 梁을 문(門)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梁의 발음은 돌(twol)이었고 한국어에서 문을 '돌'로 발음하는 경우는 없다.[3]. 문(門)의 고유어라는 '오래' 역시 '돌'과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 따라서 해당 단어는 한국어족과는 전혀 관련 없는 발음이며, 그보다는 고일본어에서 문을 뜻하는 토(と, to)와 유사하기 때문에[4] 가야 토착어와 일본어간 관계는 가야 토착어와 한국어간 관계보다 훨씬 가깝다는 것이다.[5]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열도에 동일한 어족이 존재하였다는 학설은 임나일본부설을 연상시키기에 한국인 입장에서 수용이 껄끄러울 수도 있겠으나, 해당 학설의 대표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임나일본부설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논문을 읽어보면 오히려 임나일본부설과 배치되는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6]
즉, 요약하면 한반도 중남부에는 원래 고일본어 화자들이 주로 거주했었지만[7], 이후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 그룹은, (대략) BC 6-7세기부터 만주에서 남하한 고대 한국어 사용자들(부여어족을 사용하는 화자들로 추정)에게 밀려, 일부는 일본 열도로 건너가거나, 또는 언어적으로 한국어에 완전히 병합당했고 현대의 한국어는 이 남하한 부여어족의 직계 후예라는게 보빈 교수의 주장이다.
한편, 한국학자 중에서 이와 유사한 개념을 제창한 학자로는 서울대 김방한 명예교수가 있다. 김방한 교수는, 한반도에 퉁구스(알타이)적 영향을 받은 북방계 어족이 존재하는 것과 별도로, 이들과 이질적인 언어인 '원시한반도어'를 사용하는 기층적 집단이 따로 있어서 서로 공존하였으나 이들 원시한반도어를 쓰는 어족은 북방계 어족에게 흡수되거나 북방계 어족을 흡수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한국어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일본어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삼국사기의 수사자료(3, 5, 7, 10)은 부여계 어족인 고구려어가 아니라 원시한반도어라는 것이다. 관련 주장은 알렉산더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과 세부적인 면에서 그 주장을 달리하지만 한반도내에 이질적인 2개의 언어집단이 공존했다는 입장에서는 보빈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별개로 고대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연관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고대 일본어와 고대 한국어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6세기 백제어는 고대 일본어와 언어 계통이 달랐으며[8] 6~7세기 신라어 역시 고대 일본어와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보빈의 학설에 따르면 고대 일본어는 한반도 남부에서 먼저 탄생하였지만 이후 북방에서 내려온 부여계어족들에게 밀려서 일본 열도로 쫓겨났고 이후 한반도의 언어는 부여계어족이 주류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이질적인 언어들로 바뀐 것이라고 한다.

3. 문법


구체적인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의 문법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고대 한국어의 문법을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학자들마다 저 세 언어 역시 십인십색의 견해가 나오는 만큼, 이렇다 할 분명한 문법을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그나마 어순 등의 일부 요소에서 현대 한국어로 이어지는 몇 가지 특성들을 밝혀낸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향찰을 남긴 신라어의 문법 자료가 그나마 많이 남은 편이다.
  • 어순이 현대 한국어와 같은 SOV였다.
  • 현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피수식어는 수식어보다 뒤에 나왔다.
  • 현대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격 표지가 있었다. 신라어에서는 목적격 표지로 '乙(을)'이, 주제격 표지로 '隱(은)'이 쓰였다.
고대 이전 한국어가 능격-절대격 언어였다는 가설이 있다.[9] 이 설에 따르면 주격 '이'는 본디 그 기원이 능격 조사 -*i였으며, 절대격 표지는 없었다. 그리고 능격 조사 -*i는 다시 기원적으로 지시어 '이(this)'와 뿌리가 같다.
능격-절대격 가설에 따른 고대 이전 한국어의 문장 구조는 아래와 같다.
  • 자동사문: (주어) - (서술어)
  • 타동사문: (주어)'i' - (목적어) - (서술어)
이때 자동사문의 주어와 타동사문의 목적어는 모두 절대격으로, 절대격 조사는 없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면, "돌 움직였다(돌이 움직였다)"가 자동사문이라면 "철수이 돌 움직였다(철수가 돌을 움직였다)"는 타동사문인 셈이고, 이때 자동사문의 주어 '돌'과 타동사문의 목적어 '돌'은 같은 형태로서 같은 격 표지(무표지)를 갖지만 타동사문의 주어인 '철수'에는 능격 조사 '이'가 붙어 있다. 이 같은 문법이 기본 문형이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에서는 이후 절대격이 붕괴하면서 원시 대격인 '-*γir'이 등장했고, 이것이 오늘날의 '을/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4. 같이 보기



[1] 참고로 ISO 639-3에는 일단 3~9세기 한국어를 고대 한국어로 규정하여 OKO라는 코드가 할당되어 있다. #[2] 백제어나 초기 신라어는 고대 한국어와 고대 일본어(반도 일본어)가 모두 사용된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게 그의 주장이다.[3] 한국어에서 문을 돌로 발음하는 경우는 울돌목, 돌쩌귀 등의 사례가 있으니 사실 이는 틀린 것이다. 일본어 토(と, to)보다도 훨씬 정확한 발음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외국 학자들이 대부분 전공이 일본어이고 한국어는 곁가지로 같이 연구하는 정도에 그치다 보니 한국어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런 사례는 오히려 울돌목, 돌쩌귀 등의 돌이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일본어족 계통 언어의 흔적이라는 반박이 가능하다. 게다가 보빈 교수는 한국어 또한 그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는 실력자이다.[4] 신사의 입구에 세워놓는 문인 토리이와의 연관성도 의심된다.[5] 참고로 가야도 여타 한국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한국어족 사용자들에게 정복된 걸로 보고 있다. 다만 중앙집권체제가 제대로 이룩되지 않고 정복이 어려운 복잡한 지형 사이사이에 소국들이 난립했던 특성상, 게다가 일본어족 사용자들이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걸로 추정되는 한반도 최남단이라는 위치상 토착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인다.[6] 일본의 역대 덴노들 중의 몇몇 사람들이 고대 한국어를 쓰던 한국계라는 주장도 한 적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혐한 극우들이 벌이는 역사왜곡의 단골 주제인 진구황후의 정체도 고대 일본을 다스리던 한국인 여왕이라고 하는 사람이니, 일본의 극우들이 알렉산더 보빈의 논문을 읽어봤다면 뒷목잡고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7] 원래의 일본어족은 한반도 중남부에서 먼저 생성되었으며, 이후 BC 7세기와 BC 3세기에 걸쳐 한반도의 고일본어 화자들은 오늘날의 일본 열도로 건너가 오늘날 칸토 서쪽 지역을 모두 일본어 사용지대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8] 사비성(소부리) 일대에서 사용된 백제어를 '카라 사히즈리(カラサヒヅリ[韓語\])'라고 주석을 달았다. '사히즈리(サヒヅリ[佐比豆利\])' 는 아스카~나라시대 고대 일본어로 외국어, 변방어를 의미하고 '''고대 일본인이 알아들을 수가 없는 언어'''가 본래 의미이다.[9] 휘트만, 보빈 등의 주장으로, 의외로 다방면으로 제기된 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