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위

 

1. 개요
2. 생애
3. 기타

李子威
(? ~ ?)

1. 개요


고려 중기의 재상.

2. 생애


출신이나 임관 경위, 나아가 생애 초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이름이나 후일의 행적을 보면 혹 이자연(李子淵)과 같은 항렬의 인천 이씨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문종 말에는 이미 관직이 6부의 시랑(정4품)에 이르렀다. 문종 30년(1076)에는 형부시랑으로 호부상서 왕석과 함께 요나라에 가서 황태후의 장례에 참석한다. 문종 35년(1081)에는 이부시랑으로 예부상서 최사제와 북송에 가서 조공한다. 이듬해에는 우부승선(정3품)으로 승진한다.
선종 초 지중추원사에 임명돼 재추의 지위에 오른다. 선종 3년(1086) 왕을 책봉해준 것에 감사하는 사절로 요나라에 다녀온다. 이 해에 지공거가 돼 동지공거 예부시랑 김근과 진사를 선발한다. 왕이 직접 복시를 보고 박경백 등 33명이 급제한다. 이후 동북면병마사 겸 지행영병마사, 검교사공,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선종 7년(1190) 상서우복야 참지정사 수국사가 되니 재신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재상이 된지 얼마 안 돼서 송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를 감수하다 요나라의 연호를 적는 실수를 한다. 문서는 반려되고 이자위는 실수의 책임을 지고 문책당한 뒤 파직된다. 얼마 뒤인 선종 9년(1192) 서경유수사에 임명되는데, 선종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청탁한 끝에 관직을 얻은 것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비난을 듣는다.
헌종 즉위년(1094) 6월 소태보와 함께 문하시랑평장사 상주국에 오른다. 당시 외척과 종친이 대립하는 구도에서 이자위는 외척 이자의 쪽 당파에 합류한다. 이자의 당파는 주로 하급 관인들로 구성돼 있었는데, 이자위는 헌종대 재상 중에서는 유일하게 외척과 결탁함으로 국정을 농단하고 권세를 부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헌종 원년(1095) 종친 계림공이 소태보, 왕국모 등을 통해 이자의 당파를 먼저 제압함으로 전세는 역전된다. 이자의가 처형되고 이자위는 다른 당여와 함께 남부 지방으로 유배된다.
이후의 생애는 알 수 없다. 숙종 6년(1101) 역모 가담자 대부분이 감형되고 일부는 귀경이 허락되는데 이는 연좌된 이들을 구제한 것이므로 이자위가 감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3. 기타


이자위와 관련해 고려 중기의 문학관을 살필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첨지추밀원사를 지낸 문인 김황원(金黃元)은 당대의 문인 이재(李載)와 더불어 한림에서 명망이 있었다. 두 문인은 당시의 시류를 따르지 않고 고문(古文)을 추구했고 김황원의 문장은 해동제일(海東第一)이라고 받들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재상 이자위는 "만약 이런 무리가 오래도록 문한의 지위에 있으면 반드시 후학을 그르칠 것이다."[1]라며 둘의 문장을 비판했고, 둘은 낮은 관직으로 폄직된다. 신편 한국사에서는 이 일화를 소개하며 당시 허용되는 산문의 범위는 표현 목적에 따라 달랐음을 설명하고 있다.
[1] 若此輩久在文翰之地, 必詿誤後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