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대전

 



'''이릉대전
夷陵大戰'''

'''시기'''
221년 7월 ~ 222년 8월
'''장소'''
형주 이릉, 효정[1]
'''원인'''
촉·오 외교관계 파탄에 따른 유비의 친정(親征)
'''교전국'''
'''촉한'''
'''동오'''
'''지휘관'''
한(漢)황제 유비
대도독 풍습
오왕 손권
대도독 육손
'''참전 장수'''
오반
상총
진식
보광
이조
장남
정기
마량
왕보
부융
사마가
두로
유녕
황권
사합
방림
습진
번주
<^|1>반장
주연
한당
서성
손환
낙통
송겸
선우단
이이
유아
장일
보즐
반준
'''병력'''
10만 명[2]
5만~ 6만 명
'''피해'''
'''사망자 수만'''[3]
'''투항자 수만 명'''[4]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동오의 승리
'''영향'''
촉·오 외교관계 복원 및 국경선 최종 확정.
유비 백제성에서 병사(病死).
[image]
1. 개요
2. 전개
2.1. 개전 준비
2.2. 위나라에 칭신하는 손권
2.2.1. 그 동안 위나라에서는
2.2.2. 오나라의 반응
2.3. 유비의 공격
2.4. 칠백 리를 태운 불꽃
3. 결과
4. 평가
4.1.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이었나?
4.2. 전과에 대해
5.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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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릉지전, 서릉대전(西陵大戰), 서릉지전(西陵之戰)이라고도 일컬는 중국 삼국시대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이자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삼국지 3대 대전으로 평가받는 전투이다. 221년 촉한의 황제 유비가 형주를 수복하고 의형제인 관우, 장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오나라를 침공해 발발했다.

2. 전개



2.1. 개전 준비


[image]
형주를 수비하던 관우형주 공방전 중에 오군의 공격에 포로가 되어 참수당하고 형주를 잃게 되자, 분노한 유비는 수년 후에 오나라를 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많은 신하들이 이에 대해 간언했으며[5], 진밀은 천시로 보아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고 조운은 위를 쳐야 한다며 말렸다. 호삼성은 이런 조운의 말에 대해 일에 있어서 앞에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안다고 칭찬한다.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조운을 강주로 보내고 진밀은 하옥했다.
또한 초청한 도인 이의기에게 길흉을 묻자 이의기는 답하지 않고 종이와 붓을 구하고서 병마, 병기와 의장을 수십 장을 그린 다음 하나하나 손으로 찢고는, 다시 대인(大人) 한 명을 그려, 땅을 파 이를 묻고는, 곧바로 떠나며 불행을 예견한다. 유비 역시 이에 대해서 마뜩치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래도 출전을 강행한다. 어쩌면 그 역시 이 전투가 마지막으로 친정하는 전투가 될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걸 알았기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였으리라.
거기다가 그 와중에 221년 장비범강장달에 의해 죽고 마는 등 불안한 조짐이 보였으나 유비는 제갈량을 성도에 남기고 조운을 강주에 둔 뒤 오로 진군한다.[6][7] 제갈량이 조운과 달리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유비의 원정을 반대하면 오의 중신으로 있는 제갈근 때문에 반대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으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형 제갈근도 유비에게 사자로 갔을 때 제갈량 때문에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받았었다.
7월 유비군이 백제에 도착하니 오나라에서는 제갈근이 편지를 보내 같은 원수라면 더 큰 원수인 조비를 치라는 조운과 같은 이론을 앞세워 화해를 청한다. 호삼성은 이를 칭찬했으나 배송지는 여기에 주를 달아 "이건 레알 개소리. 글자가 아깝다."라고 평했다. 유비는 이를 거절하고 오나라를 공격하고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대항하게 한다.

신 송지가 말하건대 유후(劉后: 유비)가 애쓰느라 촉을 관(關: 함곡관)·하(河: 황하)로 삼고 형(荊)·초(楚)를 줄기로 삼자, 관우는 병사를 면수와 한수 위로 올리니, 그 뜻이 상국(上國)을 능멸하려 했으니, 비록 주인을 바로잡고 패업을 정하고자 하였다 해도 그 공을 기필할 수 없었지만, 그 위세가 멀리까지 떨쳤고 그 경략한 땅을 가졌다. 손권이 앙심을 품고, 위(魏)를 도와 위해(危害)를 제거하니, 이것이 종실 자제의 근왕(勤王)의 군대를 잘라버리게 되었고, 조공의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이행하게 되어서, 한(漢)을 돕는 계책은 여기에서 그치었다. 의기(義旗)가 가리키는 곳에는 의당 손씨가 있었다. 삼가 대의로써 유비를 꾸짖는다면 답할 게 없다는 게 무슨 걱정이겠는가! 또한 관우와 유비는 서로가 마치 손발과 같아, 분노와 통한이 너무 깊으니, 이 오만하고 성긴 편지가 군대를 되돌릴 수 있겠는가? 이 편에 실린 것은 '''실로 글의 낭비'''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글자를 낭비한다'는 표현이 있다! 배송지는 조운의 진언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안 하다가 오나라가 제갈근을 통해 보낸 편지는 이렇게 대차게 디스했는데, 통수를 친 인간들이 할 소린 아니라고 당연히 여겼던 것 같다. 조운이야 피해자 측이니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자는 말을 꺼내도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때의 오나라는 '''위와 연합해서 의형제나 다름없는 관우를 죽인 뒤''' 익양대치 이후 '''촉한령으로 인정했던 형주 지역까지 빼앗은 엄연한 가해자이다.''' 이런 주제에 위를 먼저 치자는 소리를 내세우면 그게 먹힐 리가 없다. 그뿐이면 모르겠는데 4.1 문단에서 서술되듯 오나라는 계속해서 도발로 일관했으니, 이런 화해 요청을 유비가 받아들였다면 그야말로 인의의 군주 정도가 아니라 호구감일 것이다(…).
물론 오나라가 아니라 제갈근 본인으로 한정하면 이는 어쩔 수 없긴 했다. 제갈근은 촉 측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설득이나마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제갈근이 오만하고 멍청해서가 아니라는 뜻.
결국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해 대항하게 한다.

2.2. 위나라에 칭신하는 손권



2.2.1. 그 동안 위나라에서는


한편, 조비 쪽에서는 그 누구도 유비가 손권을 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대부분 신하들의 의견은 '촉은 관우가 죽었으니 공격할 여력이 없다'였지만 유엽만은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예상했는데 첫째는 위신을 세우고 촉이 약하지 않음을 보이는 것이요, 둘째는 관우와의 개인적인 관계였다.
221년 8월 손권은 스스로 번국을 청해오며 관우를 물리치며 얻은 우금을 돌려보낸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축하하지만 이번에도 이때 유엽과 조비와의 대화는 자치통감에 길게 소개되어 있는데 간단하게 넘어가도록 하자.

2.2.2. 오나라의 반응


그동안 형정은 오나라에 도착한다. 오나라 사람들은 왕이라는 직책 따위 받지 말고 상장군이나 구주백[8]으로 불러야 한다고 하지만 손권은 단칼에 거절한다.
하지만 형정의 무례에 장소가 일갈하고 서성은 주위장수들을 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분해하니 형정은 오나라가 오래 밑에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어쨌든 손권은 조자를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한다. 거기서 조자는 끝내주게 손권을 띄워주는데 말을 너무 잘하니[9] 조비가 조자에게 자신에게 귀순할 걸 권하고 조자는 그동안 오를 치켜세운 건 다 어디갔는지 덥썩 수락해 위의 조정에 임관한다.
그리고 조비는 사신을 파견하여 손권에게 작두향과 큰 조개, 맑은 구슬, 상아, 물소 뿔, 대모, 공작, 비취, 싸움 오리, 장명계 등을 오에 요구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치품의 요구에 다른 신하들은 모두 기겁하며 사치품의 요구양이 예법에도 맞지 않는다며 반발하지만 손권은 여기서 조비는 근본적으로 예의를 모르는 인간이라 예의를 가지고 드는 것이 의미 없다는 말과 함께 조비가 요구한 모든 것을 갖추어서 보내준다.
그 후 조비는 손권의 아들 손등을 만호후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손권은 손등의 나이가 어리다며 편지를 올려 받지를 않고 단지 심형을 파견해서 감사의 뜻을 밝히며 방물을 바친다. 심형을 만나본 조비는 그가 훌륭하다고 여기고 일단은 이 문제를 덮어둔다.[10]

2.3. 유비의 공격


촉한군의 처음 기세는 매서웠다. 육손, 이이, 유아는 무현과 자귀현을 주둔해 있었는데, 촉군의 선봉인 오반풍습은 무현에서 이이 등을 격파하고 자귀에 주둔한다. 거기에 마량의 회유로 사마가를 비롯한 무릉의 오계만이까지 촉군에 합세한다.
거기다가 영릉과 계양마저 습진을 필두로 반란을 일으키자 손권은 따로 보즐을 파견한다. 보즐은 습진을 반준과 함께 격파하고 익양에서 적을 대비하니 결국 영릉과 계양의 군대는 이릉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비군에 호응하지 못하고 전투가 끝난 후에 토벌되고 만다.
이때 황권이 선봉장을 자청하나 유비는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장강 북쪽에 있는 여러 군사를 감독하라고 보내버렸다.[11]
222년이 되자 송겸이 촉의 진채 다섯 곳을 함락시키고 주연이 촉군의 선봉대를 격파하였으나 유비는 다시 공세로 나가 이도에서 혼자 공을 세우겠다고 앞서 나선 손환을 격파해 포위한다. 그러나 육손은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겠다며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간다. 이에 손책 시절부터 섬겨왔던 노장들과 손권의 친척들도 합세하여 육손에게 싸울 것을 청하나 육손은 칼을 들고 그들을 복종하게 할 뿐 나서지 않는다. 또 이릉성에서 포위당한 손환이 도움을 요청하자 육손은 그것을 거부하고 왜 손권의 동족을 구원하지 않는냐는 장수들의 말도 무시하며 수비로 일관한다. 이에 오군은 고릉군에서 패배한 데다 이릉까지 밀리게 된다.
이에 유비는 오반에게 수천 명의 군사만을 주어 육손을 유인하니 다른 오나라 장수들은 모두 공격을 주장했는데, 육손만은 유비가 산골짜기에 복병을 둔 것을 간파하여 공격하지 않고 버텼다. 결국 유비는 8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산골짜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렇게 버티기만 한 육손에게 반격의 때가 온다.

2.4. 칠백 리를 태운 불꽃


육손의 전략은 맞아 떨어져, 그의 전략에 의하여 오의 영토내로 5, 6백리를 들어온 유비군은 양자강을 따라서 전군과 후군이 7백리나 되는 긴 전선이 형성되게 된다. 이 사실을 들은 조비가 말하길 "유비는 병법을 모르니 손권이 곧 이길거란 소식이 들릴 것이다." 이라고 말할 정도로 병법에서 금기하는 일이었다.
한편 육손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처음에는 그가 수륙병진할 걸 걱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보면 그는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보로 곳곳에 진영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유비는 별 거 아닙니다, '''제가 이겼습니다.''' 폐하께선 마음 편히 주무시면 됩니다."[12] 라고 말한 다음 행동을 취한다.
육손이 이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니 다른 장수들은 유비를 이기려면 처음부터 싸웠어야 하지 어째서 본토에 5,6 백리나 들어온 지금에서야 들어오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적의 영채 한 곳을 공격하게 하며, 온갖 자뻑을 하며 공격하지만 근데 거기서 패배. 장수들이 헛되이 병사들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으나 육손의 계책은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이미 유비 진영을 격파시킬 방법을 알고 있다.'''

라고 하고는 곧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촉한군을 화공과 기습으로 공격하니 순식간에 형세가 이루어지자,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동시에 함께 공격해 장남, 풍습 및 호왕(胡王) 사마가(沙摩柯) 등의 머리를 베었으며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시켰다. 때는 마침 무더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라[13] 덕분에 화공이 크게 성공하여 촉한군은 마침내 대파되었다. 이릉성을 포위하고 있던 풍습, 장남이 사망하니 이릉성에 갇혀있던 손환의 애움도 알아서 풀려 손환 또한 참전해 유비를 추격했고 무릉만왕 사마가도 죽으니 도망칠 곳이 없는 두로유녕은 항복해버린다.
유비는 마안산에 올라 이렇게 다시 대파된 군대를 수습해 포진시켰으나 이미 사실상 승기는 오군에게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다. 다시 한번 육손이 군대를 격려하고 지휘하여 사방에서 이곳으로 육박해오자 유비의 진영은 붕괴되고 와해되어 오군에 대패하고 자귀에서의 패배로 왕보도 죽는다. 오군은 이제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촉한군의 진지들을 격파하며 유비를 추격했고 결국 유비는 손환과 육손에 대한 푸념을 외친 다음에 백제성으로 들어서니 그런 유비의 뒤를 막기 위해 역을 관리하는 자가 스스로 꽹과리와 투구를 져다가 태워서 후방의 추격을 끊어버린 후에야 겨우 백제성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14]
하지만 이렇게 유비를 구하기 위해 후전[15]을 맡은 부융의 군대는 거의 다 죽어버린다. 부융의 기세는 사그러들지 않았으나 오나라 사람이 타이르며 항복하라고 하자 한의 신하는 오나라의 개들에게 항복치 않는다라며 욕하다가 결국 부융도 전사[16]. 종사좨주 정기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후퇴하는데 여러 가삼들이 뒤에서 추격하는 사람들이 곧 올것이라며 배를 버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가라고 하자

나는 군대에 있으면서 적 때문에 도망하는 것을 아직 익히지 못했다.

라고 하고는 죽었다.
이걸 보고 호삼성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적에게 다가서는 것은 진실로 죽으려고 가는 것이지 아직은 도망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라는 평을 남겼다.
이렇게 촉군의 배, 병기, 수군, 보병의 물자는 한 번에 거의 손실됐고, 병사들의 시신은 장강을 떠 다녔다. 이 와중에 상총의 진채만이 온전했다고 한다. 이렇듯 수십 리에 거친 진지가 함락되어 퇴로가 끊긴 황권사합(史郃)은 결국 222년 8월, 위나라에 항복한다. 한편, 무릉만에 가있던 마량 또한 오계만에서 사망한다.[17]
한바탕 전투가 끝난 후 육손에 의해 목숨이 살아난 손환은 육손을 만나 감사의 뜻을 전한다. 손권은 육손의 부하장수들이 육손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되자, 육손에게 왜 그런 사실을 나에게 알리지 않냐고 물어보았고, 육손의 설명을 들은 다음 크게 기뻐하며 육손을 승진시켜준다.
유비는 매우 부끄럽고 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육손에게 좌절과 모욕을 당했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닌가?'''

패퇴 후 유비가 백제성에 도착하자 서성, 반장, 송겸은 그를 쫓자고 주장하였으나 육손과 주연, 낙통은 조비의 남하가 있을 것이므로 그를 대비하여야 한다고 하니 육손은 손권의 명을 받아 다시 화친을 제의하고, 기록적인 패배를 당한 유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10월에 화친이 이뤄지고 이릉대전은 끝난다. 한편 당시 조비는 유비와 손권이 싸워서 둘이 힘을 빼게 한 뒤 둘 다 먹을 속셈이었고, 육손의 예상대로 이릉대전 후에 오나라로 밀고 들어온다.
한편 조비가 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자 유비가 육손에게 한 번 편지를 보내본다.

유비: 적군은 지금 벌써 강릉에 있소.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나는 다시 동쪽으로 갈 것인데, 장군은 이에 동의하오?’

육손: 단지 걱정되는 것은, 당신의 군대는 방금 패배하여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않았으며, 양국의 화친 관계를 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스스로 보충해야만 되지 병력을 궁핍하게 할 틈은 없습니다. 만일 십분 헤아리지 않고 다시 뒤엎어지는 상황 속에서 생존자들을 멀리 파견하여 오게 한다면,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해당년도에 촉오가 이미 화친했으므로 유비가 정말로 재공격하려고 엄포했다기 보다는 그냥 내질러봤다고 보는 게 매끄럽고 이에 육손도 잘 받아쳤다고 해석하는 편이 매끄럽다.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패배를 당하고 나서 또 공격할 만한 암군도 아니고.

3. 결과


실제로는 유비군 본대 4만가량에 마량이 끌어들인 다수의 무릉만이들과 선봉으로 나선 오반과 진식의 수군, 북쪽에서 위를 견제하며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 할 황권의 부대에 육손이 8만을 죽였다는 유엽전 기록까지 감안하면 대략 8~10만가량으로 추산할 수 있다. 유비군의 총 전력이 4만 명이었다는 설은 위서에 기록된 유비군 본대에 대한 기록만 참조하면서 생긴 오류인 듯하다. 하지만 정사에 기록된 병력 숫자 자체도 대군임이 확실한 데다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대패가 맞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전력상으로 유비는 약 8만 명 정도의 병력에 조운, 위연[18][19], 오의, 이엄, 진도 등 1세대 명장들을 제외한 2세대 중진 장군들이 대거 투입 되었다.
보다 상세히 서술하자면, 풍습은 '''장비 대신 촉한군 대도독'''을 맡을 정도였다. 장남은 형주 시절부터 종군하였으며 풍습과 함께 '''손환을 깨트릴 정도의 인물'''이였다. 정기는 유장 시절 일어난 반란에서 '''아들을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꿈쩍하지 않고 자신의 직무를 행하던 사람'''이었다. 부융은 '''한(漢)나라 장군으로 항복하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라고 외치며 싸우다 전사한 맹장이었다. 두로와 유녕은 자세한 내용이 없다.
여기서 1세대 명장들과 한중공방전에서 활약했던 법정이 투입되지 못한 것을 보고 2선급 전력으로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기 쉬운데, 사실은 이와 달라서 황충법정이 전쟁 1년 전에 사망하고 마초도 전쟁이 일어난 해에 죽은데다 전쟁 직전에 하필 관우와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명장 장비까지 갑자기 죽어버린 이유로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간 것이다. 장비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도독 자리가 장비에서 풍습으로 교체되는데 아무래도 능력의 차이가(…). 차라리 조운을 관우와 장비가 없는 상황에서 촉 본진에서 제갈량을 보좌할 경험 많은 장군 역할을 할 사람은 실력으로나 위상으로나 조운이 적임이었고 또 이릉대전을 반대한 인물이라 이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시킬 명분도 없었기에 강주에서 후방지원용으로 놓아둔다. 또 조운의 포지션 자체가 일군을 이끄는 장군, 도독보단 내부 군정에 더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기에 만약 이릉에서 잘못되었을 경우 후방을 책임질 사람으로 놓아두는 것도 필요했다. 실제로 이릉에서의 패배 이후 조운은 백제성으로 신속히 군을 이동시켜 후퇴하는 유비를 맞이한다.
물론 촉한이 대오전에 동원한 병력 자체가 완전히 전멸했다고 볼 순 없다. 오 역시 1년 동안 싸움으로 이도까지 밀렸다가 촉한군에 무릉만이들이 대거 가세하여 군율과 전선이 흐트러지고 늘어난 것을 이용해서 화공 및 유비본대의 연쇄적인 격파로 기세를 몰아나가 이긴 싸움이었기에 쉽게 이기지만은 못한 싸움이었고 유비가 영안에 머물고 있는 상태에서 손권이 유비와의 교류를 복원시키는 등, 그 이후 촉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비록 조비와의 항쟁이 있다 하더라도, 촉한이 하다못해 위와 오 사이의 허라도 찌를 정도의 힘이 없을정도였다면 손권이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형주를 침공하면서 불어난 현지의 힘은 전멸되었다고 봐도 되겠지만, 적어도 이 당시 촉한은 내부반란을 수습하고 기회를 엿볼 만한 힘은 남아 있었다, 다만 인적자원면에서 손실이 컸다는 것.
제갈량의 불참도 유비의 패배 중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본디 유비 생전에 제갈량은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서 지휘한 적이 없었고[20], 1인자와 2인자가 모두 자리를 비우면 국정을 돌보고 병참을 지원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유비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촉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제갈량은 이를 제압해야 했다. 얼핏 보면 한순간에 이루어진 전투로 보이나, 거의 반 년에 걸친 대결전이었다.
촉한은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마량, 황권 등의 핵심 참모들이 죽거나 투항하고 풍습, 장남, 정기, 부융, 두로, 유녕 등 군부를 이끌어가야 할 2세대 장수진들이 거의 붕괴되었다. 황권과 함께 위에 항복한 것으로 기록된 사람이 무려 318명인데 그중에 열후로 봉해진 사람만 해도 42명이고 장군 낭장으로 봉해진 것이 100명이니 '''말 그대로 촉한의 당시 인재가 통째로 날아간 형태였다.'''
이때 조운은 황실복원이라는 절대적 명분으로 주적인 위를 정벌해야한다고 했고 위가 망하면 자연스럽게 오나라도 망하게할수 있다며 말렸지만 유비는 조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유비가 죽고 4년이 지난 시점인 제갈량의 1차 북벌 때도 천수, 남안, 안정 3군이 일시에 위를 배반하고 촉에 붙었는데 유비가 직접 북벌을 지휘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이다. 하다못해 전쟁이 교착상태가 되었을 때 전쟁을 멈추고 군대를 돌렸으면 물자 소모는 막대했을지언정 인력의 손실은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인재부족은 후에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경험 많은 장수들이 부족해 군경력이 일천한 마속과 인격 문제로 좌천되어 있었던 '''양의를 기용'''하는 결과를 낳았다.[21] 그리고 양의는 애초부터 유파와 갈등을 빚는 등 철저하게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위인이였기 때문에 유비가 실각시킨 인물이었으나 이러한 인재 부족 때문에 제갈량이 눈물을 씹으며 어쩔 수 없이 기용했고 그 결과 양의는 제갈량 사후 반목하던 위연과 그의 일족을 제멋대로 죽인 뒤 자기가 승상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위씨를 따랐어야 했다."'''는 망언을 내뱉었다가 숙청당했다.
또 제갈량은 북벌을 하면서도 오나라를 경계해 의식하여 영안의 방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제갈량 사후 그래도 동맹인데 영안에 병력을 너무 많이 배치한다고 오나라가 궁시렁 거린 적도 있을 정도. 어쨌든 촉한이 북벌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게 만든 것도 이 사건의 영향이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촉한을 도와 참전했던 무릉만이 역시 사마가가 죽은 것을 비롯해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무릉만이의 반오감정은 사그라들기는커녕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이라도 부은 듯 이후로 몇 차례나 반란을 일으켰고 오나라가 5만 명이나 동원한 대규모 정벌에도 불구하고 복속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후에 촉한이 위나라에게 멸망하고 위가 진으로 바뀐 뒤 오로 쳐들어가자 무릉만이는 바로 진나라 편을 들었다.
의 경우도 사실상 국가의 존망을 두고서 전력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대전 초기 손권은 유비에게 화친을 청하고 위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여 협공을 피하는 한편, 위의 도움요청은 거절해서 유리한 위치를 확실하게 잡은 뒤에야 상대하는 등, 이때 보인 외교적 균형은 손권의 전성기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
오나라는 촉한에게서 뺏었던 형주 땅을 지킬 수 있었으나, 이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 기껏 뺏은 양양도 위략의 표문의 말마따나 포기하듯 다시 위로 넘기고 위에 임시 항복을 해야했으며, 수많은 사신들을 위와의 관계를 위해 갈아넣고, 전쟁에서 이긴 직후에도 유비를 견제, 이민족의 토벌과 동시에 조비의 3로 군대를 막아야하는 위급한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더구나 오나라 또한 인적손실이 컸고 전쟁도 오나라 국토 안에서 벌어진 만큼 막대한 피해를 보는 등 상처투성인 승리를 거두었을 뿐이다.
촉한과 오가 같이 힘을 합쳐도 위에 될까 말까 한 상황에서 잘 소화시키지도 못할 형주를 먹었고 형주를 그렇다고 잘 활용한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전선은 넓어졌고, 무릉만이는 계속해서 속썩이고. 익양대치부터 형주공방전, 이릉대전까지 이어지면서 유표시대의 풍요로운 형주는 쑥대밭이 돼서 형주의 생산력은 말 그대로 박살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형주가 손오의 땅이라는 대외적인 명분이 유비를 앞선 것도 아니다. 이렇게 형주를 먹었지만 정작 서주나 회남 지역에는 여전히 손도 못 댔다는 점에서 그다지 좋을 것도 없었다.
불가피했던 점도 상당부분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둘 다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지만 막상 지나고보니 둘 모두가 손해를 본 형세만이 남게 된 것이다. 강력한 위를 두고 동맹국끼리 서로 싸우는 바람에 1강 2약의 구도를 만들어 버렸고 이는 서진이 통일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결국 '''촉한이나 오나 큰 상흔을 입고 양국의 최대의 적인 만 이득을 얻은 전쟁이었다.'''
위나라는 이릉대전의 최고 수혜자였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후계를 잇고 황제에 오르면서 생긴 불만과 반란, 손권의 공격을 유비 덕택에 정리할 수 있었고, 오히려 상용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으며 양국의 국력 약화로 최대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비도 유엽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기껏 얻은 찬스를 낭비했다. 유엽이 조언한 대로 촉을 도와 오를 무찌르고 촉을 먹었다면 정말 통일을 순식간에 이뤄서 난세를 끝냈을 것을…괜히 뒤늦게 혼자 오나라로 쳐들어갔다가 오히려 관광당했다. 정리하자면 이릉대전 덕분에 촉한과 오는 모두 건국 초기로 상황으로 돌아가고 기껏 기회를 얻은 조비마저 오를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릉대전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이 당시만 해도 이를 위, 촉한, 오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4. 평가



4.1.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이었나?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오로지 복수심에 불타서 앞뒤 안가리고 일으킨 전쟁인 것처럼 묘사된다. 유비가 가장 총애하고 가깝게 대하는 측근인 조운제갈량의 반대마저 무시하고 끝까지 강행하면서 유비의 분노가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음을 묘사하고 있다. 정사에서도 관우의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고, 무엇보다 결과가 대패로 끝난 전쟁이다 보니 라이트한 삼국지 팬들 사이에서는 '''이릉대전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 할 전쟁'''으로 평가된다. 정사에 기반한 연구를 하는 역사가들 역시 유비의 감정적인 대처가 패인 중 하나였다고 지적하는 사례가 많은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이릉대전이 정말 시작하면 안 됐을 전쟁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일단 이릉대전의 격발 원인부터가 단순히 관우의 전사와 형주를 빼앗긴 문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나라는 단순히 동맹관계를 깨고 형주를 취한 뒤 관우를 죽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손권은 익주의 후방을 흔들기 위해서 교주의 사섭을 통해 옹개를 친오파로 포섭하고 촉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하는 한편, 형주를 장악한 이후 공안에 머물던 유장과 그 일가가 오에 항복하자 유장을 익주목으로 삼아 남군 자현에 주둔하게 했다. 그리고 유장이 죽자 아들인 유천을 익주자사로 삼아서 교주와 남중의 경계에 머물게 했다. 촉의 민심을 뒤흔들려는 의도였던 셈이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유수독으로 있던 주태를 한중 태수 분위장군으로 임명하고 능양후로 봉했다. 익주와 한중은 촉한의 영역이었다. 쉽게 말해서 오는 '''형주를 빼앗고 더 나아가 촉한을 멸망시키켜 자기 땅으로 만들겠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촉나라 입장에서는 가만히 맞고 있을 수만은 없었고 어떻게든 대항하는 제스처를 보여야만 했다. [22]
유비가 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정사나 연의에서나 관우의 복수지만 정사의 경우 유엽의 말에서 보듯 가장 큰 목적인 관우의 복수 뿐만이 아니라 아직 오에 복속된 지 얼마 안 된 형주의 재탈환과 촉의 국력 과시 등의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형주는 일찍이 촉한의 국가전략이기도 했던 제갈량의 융중대에서 형주는 익주와 함께 동시 북벌로 위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으로 내정되어있던 핵심 요충지였다.
게다가 촉한 장수들의 기둥들이라 할 수 있는 관우, 장비, 황충 등은 물론 동화, 법정, 미축, 이적, 유파 등의 문신들까지 여러 공신들이 불길하게도 해마다 연이어 죽어가니 위축된 군사들의 사기고양을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릉대전의 발발 이유 중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북벌의 문제다.'''[23] 연의와 달리 유비는 분명히 군재(軍才)가 뛰어난 군웅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형주 없이 파촉 지역에서 관중 평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험난한 진령 산맥을 넘어야만 했다. 잔도를 이용해 관중 평야를 점령할 만큼 막대한 양의 군사, 식량, 냉병기 등을 수송[24]해야 하는데 따른 제약이 매우 크다. 만약 한중과 관중평야 일대에 진령산맥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한중공방전에서 조조는 사활을 걸었어야 했었다.[25] 제갈량의 1차 북벌 때처럼 별동대로 위군을 기만하고, 본군을 량주로 군을 돌리는 것을 얘기하지만, 설령 여기서 성공을 한들, 거기서 관중평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소관을 넘거나 진령산맥의 우측을 타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여기에 조조는 한중을 버리고 물러나면서, 한중에서 관중으로 가는 요새마다 수비도 견고하게 태세는 갖춰놓았다. 그렇기에 북벌을 하기 위해서는 형주에서 군을 가지고 있으면서, 연주와 예주를 지척에 두고 위의 주력군을 묶어두면서, 관중평야로 진격을 해야만 했었다. 이미 하북과 중원을 통합한 조조를 두고, 손오와 결전을 치루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지 않다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유비정도의 백전노장이 이릉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요컨대 위와의 전면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역인 형주가 손권에게 넘어간 이상, 이릉대전은 반드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4.2. 전과에 대해


애시당초 유비 자신이 이끄는 본영 40영의 병사들은 4만 명인데 부자의 기록에는 8만 명이나 되는 촉한군이 전사했다고 하지만 촉한이 동원할 수 있는 전체 병력을 감안하면 이 정도 패배를 당했으면 촉한 자체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느냐는 의견이 있다. 물론 촉한군이 대패를 당한 건 사실이긴 한데 여기에는 유비가 현지에서 호응한 병력, 무릉만이를 회유해 불어난 병력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고 본영 40영의 병사들이 격파될때 이들의 비중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유비는 본군이 격파되고 이를 수습하여 백제성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하며 오군을 계속 견제하고 있었고 육손 역시 위나라의 침공을 우려해 더 이상 쳐들어가지 않는다. 게다가 이후 오나라 측에서 위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먼저 저자세로 유비에게 화친을 청하는데 만약 유비의 주력이 전멸했다면 유비에게 이 정도로 저자세로 나올 이유는 없었다. 물론 이후 촉한이 전력을 재건하기 위해 쩔쩔맨 것은 사실이기에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특히 인적손실은 매우 커서 오나라 쪽 상장은 패퇴하거나 위태로운 상황을 당했을지언정 한 명도 전사했다는 기록이 없는데 촉한의 중요 장수와 참모들은 풍비박산난 결과가 그걸 증명하며 '''삼국시대에 단일 전투로 이렇게 양측의 손실이 차이나는 전투는 드물다. 적벽에서도 패배 측이 한번에 이렇게 많은 중책이 죽거나 잡히진 않았다.'''[26]
유비는 에 비해 빈약한 수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릉은 장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유비는 강가에 병력을 배치하여 육군이 수군을 최대한 지원할 수 있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유비군이 강가에 배치되어있는 정황은 육손이 공격할 때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불을 놓았다라고 하는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27]
조비는 이릉전 당시 유비의 패배가 칠백 리에 걸친 긴 전선진지 구축 때문이라고 평가했고 본 문서에서도 유비의 이런 배치는 1차대전 이전에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조비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그런데 이와 대치되는 주장도 있다. 이 게시글을 본다면 유비군에겐 어복과 자귀에 이르는 보급로가 구축되어 있는데 이 보급로는 육손이 산길을 타고 급습하거나 장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는 등의 기습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고 때문에 유비가 길게 병력을 포진시켜 보급로를 수비하는 것은 조비의 말과는 달리 지극히 상식적인 배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넓게 퍼져 배치한 것이 패배의 요인이 아니고 다만 유비가 본영이 화공에 쉽게 노출되는 장소[28]에 주둔한 것이 문제라는 설명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어복에서 자귀까지 나가는 길은 외길이며, 장강의 흐름 때문에 형성된 골짜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동쪽이 낮고 서쪽이 높은 경사가 있는 길이며 대군이 움직이는데 있어서, 좁은 오르막길을 장시간 행군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오군이 자귀 북쪽이나 장강 남변으로 돌아서 어복에서 자귀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을 끊기라도 하는 날엔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귀찮은 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비는 일단 보급선에 병력을 뿌려서 보급로 차단을 방지하고 뿌려둔 병력을 압도할 만한 병력이 돌아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려고 병사를 갈랐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릉만이들을 이도 쪽으로 동원하여 장강 남변으로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도록하고, 본군은 지강쪽으로 놓고, 황권의 분대는 위나라와 맞닿는 임저쪽으로 놓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 세 갈래가 충실히 연계하고, 뿌려둔 병력들이 자기 위치만 지키면 보급선을 지키면서 공안까지 무리 없이 진격할 수 있는 구도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이 길을 이용한 게 수번이나 되어 촉으로 들어가면서 한 번, 익양대치 때 공안으로 나오면서 한 번, 다시 들어가면서 한 번, 이릉전 하러 나오면서 한 번이다. 총 네번에 걸쳤기에 조비는 물론 육손이나 다른 오나라 장수들보다는 이 길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수백 리 대영이라고는 하지만 영의 중심은 유비의 본영과 황권이 이끄는 분영, 두 개에 집중되어 있지, 뒤에 긴 꼬리는 그저 보급선을 지키기 위한 소규모 분대들이었을 거라는 것이며 전과를 보건데 불에 타고 격파된 것은 유비의 본영 뿐이었을 거라는 점 등을 보면, 유비의 실책은 본영을 잘못 잡았다는 것일 테고, 길게 진영을 잡은 건 별로 영향을 못 줬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이 있는데 바로 위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으로 사실 유비가 지형의 한계로 700리를 이어서 병력을 분산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전선을 늘인 것이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지만 유비의 본대와 장수들이 선봉에서 이끈 병력도 만만치 않았으며 분산된 병력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리라는 견해가 있다. 오히려 이 덕분에 유비는 오나라 땅에 장기간 주둔하고도 보급에 문제가 없었고 육손과 오나라 장수들은 공격할 틈을 찾지 못하고 유비군이 강릉 앞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을 방치해야만 하였다. 즉 유비는 공격해 들어오면서 수세에 몰렸을 때를 대비해 각 진영을 험지에 둠으로서 육손이 틈을 찾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고 이것이 이릉전 초기에 육손이 기습하면서 오히려 불리했던 이유이라는 것이다.(육손전에 초반에 공격했으나 불리하였다는 기록이 분명 존재한다.) 즉 유비가 패한 것은 육손이 예상치 못한 화공을 동원함으로써 완벽히 허를 찔러 촉군이 와해되게 만든 거 자체가 문제였지 전선을 늘인 것은 오히려 유비가 어떻게든 간신히 후퇴하고 후방의 남은 각지의 소수 병력을 추스릴 수 있도록 도와준 전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유비의 역을 지키고 있던 이들이 임기응변으로 유비의 후퇴를 도운 기록이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런 주장을 토대로하고 정사 삼국지를 살피면서 이릉대전을 찬찬히 재구성해보자. 당장 이릉대전 승리의 주역인 육손의 열전을 보자. 총사 육손 휘하 오나라 대부분의 장수들은 조비가 언급한 식으로 그렇게 오나라 영토로 분명 수백 리나 유비의 진영이 들어왔음에도 유비가 많은 요충지를 모두 점거해 굳게 지키고 있어 공략하면 이쪽이 불리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유비가 세운 진영은 요충지에 굳게 지키고 있어서 수백 리에 늘어져 있음에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다른 오나라 장수들은 모두 육손이 처음 공격을 시작할 때 오히려 무의미한 병력 소모일 뿐이라고 핀잔을 주기까지 한다.

육손 수하의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유비를 공격한다면 응당 그가 처음 병사를 내었을 때 했어야만 했습니다. 현재는 그로 하여금 오나라로 5, 6백 리를 들어오도록 하여 서로 대치한 지 7, 8개월이나 되었으며, 많은 요충지는 모두 그가 굳게 지키고 있으므로[29]

그를 공격하면 반드시 불리할 것입니다."

육손이 말했다.

"유비는 교활한 적이며, 매우 많은 일을 겪었고, 그의 군대가 처음 집결했을 때, 그의 생각은 조밀하고 전일하였으므로 침범할 수 없었다. 현재는 매우 오랫동안 출병하여 병사들은 피곤하고 사기는 떨어졌으며 다른 계획은 없다. 앞과 뒤에서 협공하여 적을 잡을 때는 바로 오늘이다."

그리고 나서 육손은 먼저 유비의 한 진영을 공격했지만, 불리했다. 장수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헛되이 병력을 소모시킬 뿐입니다."

-육손전

오나라 장수들이 육손에게 이런 반응을 보인것도 이유가 있었다, 육손전 주석 오서에 따르면 여러 장수들은 유비가 처음에 들어올때 맞받아 칠 것을 바랬지만, 육손이 이를 제지한다.

“유비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내려와서 날카로운 기세가 비로소 성대하며, 또 높은 곳을 타고 험준한 곳을 지키니 섣불리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고 할 것이오. 그것을 공격하여 쫓아내는 것은 다 이기기 어려운 것과 같고, 만약 불리한 일이 있으면 우리의 대세(大勢)에 손해가 생겨 작은 소치가 아닐 것이오. 지금은 단지 장수와 병사들을 장려하고 넓게 방략(方略)을 펼쳐 그 변화를 관찰해야 하오. 이렇게 이 평원과 광야에서, 서로 맞부딪히는 우려로 (우리가) 무너질 일이 있을까를 마땅히 걱정해야지, 지금 산기슭으로 행군하면 세력을 펼치지 못해 저절로 나무와 돌 사이에서 끝장나게 될 것이니, 서서히 그들이 피폐해진 것을 제압해야 할 뿐이오.”

여러 장수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육손이 두려워한다고 여겨 각자 분한 마음을 품었다.

-육손전 주석 오서

즉, 이를 종합하면 오나라 장수들은 처음부터 유비가 오나라로 요충지를 점거하며 들어오기 전에 요격하여 물리쳐야 한다고 봤는데 이 당시엔 이미 유비가 깊숙히 들어와 요충지를 다 점령하고 굳게 지키고 있으니 이길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거기에 유비는 오나라에 반항적인 형주의 주요 이민족들까지 금은보화와 비단을 풀어 포섭하면서 일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이때 육손 휘하에 있던 장수들이 주연, 반장, 송겸, 한당, 서성, 선우단, 손환 등 나름대로 식견있는 오나라의 명장들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육손은 총사라는 명분하에 혼자서 거의 아슬아슬하게 이들의 불만을 틀어막고 있는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결국엔 이 시점에선 그들의 걱정대로 된 것이다. 반면 육손의 경우엔 당장 싸우면 오히려 기세등등한 유비에게 패배하여 대세를 그르칠 것을 심각하게 걱정하고 있었기에 싸우기를 주저하고 그 기세가 꺾이길 기도했던 것이다. 실제로 전쟁 초기, 무현, 자귀현에 주둔하던 육손 본인도 같이 주둔하던 이이가 격파되는 와중에 물러서야만 했다.
어쨌거나 육손은 이릉에서의 첫 싸움에서 오히려 불리하고 휘하 제장들의 시큰둥한 반응 와중에도 유비를 반드시 격파할 기책이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육손이 말했다.

"나는 이미 유비 진영을 격파시길 방법을 알고 있다."

곧 병사 각각에게 띠풀을 하나씩 갖고서 화공(火攻)으로 격파시키도록 명령했다. 순식간에 형세가 이루어지자, 육손은 각 군대를 인솔하여 동시에 함꼐 공격해 장남, 풍습 및 호왕(胡王) 사마가(沙摩柯) 등의 머리를 베었으며 40여 곳의 진영을 격파시켰다.

-육손전

풍습은 적을 경시하여 시기를 잃고 위험을 초래했다. 문진(장남)은 분투하였지만, 똑같이 이 패배로 목숨을 잃었다. 재난은 한 사람으로부터 생겨 확대된다.

풍휴원(馮休元)의 이름은 풍습(馮習)이고 남군(南郡) 사람이다. 선주(先主)를 수행하여 촉(蜀)으로 들어갔다. 선주가 동쪽의 오(吳)를 정벌하러 갔을 때, 풍습(習)은 영군(領軍)으로 임명되어 여러 군대를 통솔했는데, 효정(猇亭)에서 크게 패배했다.

-계한보신찬

이때 육손 본인조차도 유비의 군세가 굳건하여 도저히 상대할수 없었지만 길어진 지구전 상황을 통해 유비의 병사들이 지친것을 언급하면서 이런 상황이니 내가 생각한 대로 화공을 지시하면 이길 수 있다고 언급한다. 거기다 분명 초반에 유비의 진영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불리했고 결정적인 승리 요인은 육손의 기책인 화공으로 인한 것이라는 게 육손전에 분명히 언급되고 있다. 즉, 유비군 자체는 그 늘어진 전선에도 불구하고 지구전에 병사들이 지친 것 외에는 요충지를 굳게 점령하고 진영을 세워 군대가 모두 단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상대편인 육손 및 오나라 장수들 본인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전쟁 당사자들이 아닌 제3자 위치인 조비의 언급만으로[30] 유비의 군 배치와 전술이 잘못되어서 패했다고 단언하긴 힘들다. 또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이릉전 당시 유비의 선봉인 풍습이 적을 가벼이 여겨 시기를 잃고 위험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한 사람으로부터 재난이 시작되어 확대 되었다고 했다. 즉, 근본적인 배치와 전술적인 문제라기보다 육손의 화공을 풍습이 제대로 막지 못해 유비군이 효정에서 연달아 격파되기 시작한 것이 이릉대전에서 유비군이 무너지게 된 근본적인 원인인 것이다.
유비가 전선을 늘여서 퇴각에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게 억지이며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역시 조비의 의견에 동조하는 쪽인데 이를 반박하는 측에선 '유비는 이릉에 도착한 후 사천성 봉절현에서 동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백제성까지 직통으로 연결하였는데 연도에 역마점을 두어 잘 연결되도록 하였고 유비가 도망할 때 오의 군사가 뒤를 쫓아왔는데, 이때 다행히 이 많은 역점에서 일을 맡았던 관리인이 유비군이 버리고 간 갑옷 등을 모아서 좁은 길에 모아두고 불을 질러서 추격군의 추격을 막았다'는 주석이 권중달 번역 삼화 자치통감에 주석으로 엄연히 달려있고 육손전에도 이런기록이 어느 정도 교차 검증[31]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확실히 이렇게 각 지점마다 분산배치된 역마점을 통해서 시간을 끌어 퇴각할 수 있었다는 기록 자체를 무조건 무시하긴 어렵다.
그리고 애시당초 정말로 적의 전략을 예상하지 못한다면 진형을 잘 짜고 있어도 순식간에 궤멸당하는 건 고대로부터 예사로 있어 왔다.[32] 풍습이 육손을 경시해 그의 화공에 제대로 대처 못했다면 갑작스러운 전세 전환에 병력붕괴가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 와중에 유비가 긴급하게 수습하긴 했지만 기세를 타고 공격한 육손군에 패해서 수만의 병력을 잃고 그나마 미리 요충지마다 뿌려놓은 역참을 통해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남은 병력과 백제성으로 귀환해서 강주에서 올라오던 조운의 병력과 합쳐 오나라가 계속 유비를 신경쓰게 만든 것이 이릉대전의 전말이자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보급이 원활해져 군대의 규모가 수백만 명으로 늘어나고, 기관총과 야포의 발전으로 인해 전선 교착이 일반화된 1차대전 시기까지 가지 않는 다음에야, 세계 전쟁사에서 군대의 주둔 진지를 이렇게 길게 배치한 건 전무후무한 수준[33]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거야 산업혁명까지 갈거 없이 조비부터가 비웃은 사항이지만...반면 오히려 정말로 군세를 수백 리에 걸쳐서 1차대전 수준으로 긴 전선에 군사를 골고루 분산해 뒀다면, 육손이 전방에서 불놀이를 해봐야 피해가 더 적었을 것이고 유비가 정말 그런식으로 병력을 배치했고 육손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유비 몰래 기군들을 동원해서 수백 리에 걸친 병력이 고루 분산된 영을 전부 다 태워서 그만 한 전과를 얻었다면 그 전무후무하다는 산업혁명 이후 1차대전 시기 기동력 수준의 미친 기동력을 선보이지 않고서야 불가능하며 육손이 그렇게 수백 리를 모두 일시에 기습하려면 장강 삼협을 엄청 빠르게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건 육손 입장에서도 힘든 일인건 매한가지라는 반박도 있다.
일단 정사 육손전에서 육손이 화공으로 격파했다고 언급한 영채의 수는 40여 개에 불과하고 유비가 한번 이릉 근처 마안산에서 병력을 수습했다 격파된 것이 수만 명인 것으로 보아 유비의 병력자체가 7백 리 전체에 골고루 배치된 게 아니라 오히려 유비군과 육손군 주력 전열에 양측 병력이 집중되어 그곳에서 승패가 판가름 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비군 본대가 연의처럼 수십만 대군이 아니라 수만 명 수준이라는 건 다들 인정하는 사실이니만큼 늘어뜨려진 여러 진영을 동시에 털었다기 보단 지연전을 펼치던 육손이 한타싸움에서 화공을 이용한 절묘한 계책을 통해 대승리를 얻었고 한타싸움에서 대패한 유비의 진영이 견디지 못하고 모두 무너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정리하면 유비의 본군이 주력을 모은 상태에서 선봉부터 화공으로 격파되어 큰 피해를 입은 것이지 유비가 수만병력을 일일이 세세하게 분산배치해서 망한 것이 아니며 수백 리에 걸친 전 영역을 육손이 모두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는 가정은 하기 힘들고, 또 기지가 늘어지면서 진영의 방어력이 허술해졌기에 승리했다고는 전혀 볼 수 없다. 오히려 분산배치 된 역으로 인해 피해를 간신히 수습해[34] 도망갔다는 기록도 분명히 존재한다. 거기다 육손의 공격전에 유비의 진영은 요충지고 굳세게 지키고 있어 공격하면 불리하다고 오나라 장수들이 모두 공격을 반대하고 있으니 굳이 더 유비의 진영이 무조건 잘못된 진영이 아니라는 반박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주연이나 한당을 비롯한 나머지 오나라 장수들 역시 뛰어난 장수들이다. '''그저 그런 상황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육손이 군재가 더 뛰어났을 따름이다.'''

5. 창작물에서



5.1. 삼국지연의


삼국연의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를 중심으로 하던 1세대가 거의 대부분 사라지는 '''1부 완결'''.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사망 플래그대로 '''70만에서 75만'''[35]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나가서 쫄딱 망하는 정도로 설명되는데 유비가 강가에 700리의 장사진을 친 것이 제갈량에게 알려지자 제갈량이 화가 잔뜩 나서 '이 진을 치라고 명한 자를 당장 처형해라' 라고 했지만 그 진을 치라고 명한 자가 자신의 주공임을 깨닫고 이제 촉한은 끝이라며 탄식하는 장면과, 유비군을 치던 육손이 어복포에서 제갈량의 팔진도에 걸려서 빠져나가지 못하다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의 도움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본래는 이 전투에서 사망하는 마량이 유비의 포진을 제갈량에게 알리고, 제갈량이 '너무 늦어서 아군이 패배했다면 폐하를 백제성으로 피신시키시오. 인근의 어복포에 대군을 매복시켰으니 능히 적을 막을 수 있소.'라고 말한다. 마량은 어복포 인근에서 아군을 본 적이 없다며 의아해하지만 어쨋든 명령을 수행하는데, 이 매복의 정체가 바로 팔진도.
주요 인물들이 사망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삼국지연의를 번안하는 작가들에겐 지옥 같은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가 위/오/촉 어디에 비중을 두든 간에 이 이릉대전을 전후로 명장들이 극히 일부만 남고 죽어버리기 때문에 이 이후로는 제갈량을 따라가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 촉나라는 유관장 삼형제는 기본에 황충, 마초 등이 사망하며, 위나라 또한 조조, 하후돈, 장료, 우금, 조인 등도 다 죽어버리고, 오나라도 감녕, 여몽, 장흠 등이 죽어버린다. 그나마 이릉대전 이후로도 살아남은 허저, 서황, 주태, 한당, 서성 등이 있긴 하지만 이들도 이 이후 별다른 활약이 없거나 227년 제갈량의 북벌을 전후로 다 죽어버린다. 즉 스타급 주연은 거의 다 몰살당하고 독자들이 처음부터 봐왔던 얼굴들 다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오로지 위와 촉에 중심을 둬야 되고, 오나라는 이 이릉대전에서 조운을 통해 주연을 죽인 탓에 조중정벌 쪽이 다 날아가버려 합비에서 꼴아박기만 하기 때문에 재미있게 만들기가 힘들다. 이릉대전 이후 제갈량의 북벌 시기까지 활약한 1세대 인물로는 조운, 제갈량, 위연, 사마의, 장합, 육손 정도가 고작이며[36], 이들 중 가장 비중이 높은 제갈량도 삼국지가 다 끝나기 전에 죽어버린다(…). '''2부 완결.'''
또한 제갈량 사후의 에피소드[37]는 위오촉의 1강 2약 체제가 유지되는데다 삼국이 정립되어 전쟁이 없는 대치기간이 이어지는데, 그에 따라 극 진행이 매우 지루해지며 주연으로 띄워줄 만한 인물조차도 드물어져 자세히 묘사되지도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38] 제갈량 사후의 주요 사건이라 해도 공손연의 난, 고평릉 사변, 제갈탄의 난, 관구검/문흠의 난, 이궁의 변 등 세력 내 다툼이 주가 되지 무용담과는 어딘가 거리가 있는 이야기 정도가 고작이며, 그나마 주요 전투로 꼽을 수 있는 낙곡대전[39]은 나관중이 연의에서 누락시켜 버린 데다가 249년부터 262년까지 이어진 강유의 북벌 역시 옹양주를 얻고 관중을 흡수한다는 대전략이 실패했고 제갈량 시대보다 규모도 작아서 더더욱 재밌게 그려내기가 힘들다.[40] 그리고 263년 촉 멸망, 265년 위 멸망/서진 건국, 280년 오 멸망/서진 천하 통일로 '''삼국연의 완결.'''[41]
별개지만 이릉대전 종전 후 250년에 위나라가 오나라의 강릉을 침공할 때 왕기[42]는 이릉에서 보협이 이끄는 군대과 싸웠는데, 보협은 농성을 해서 이릉을 지켰지만 왕기는 이릉성 주변의 식량창고를 공격하여 식량을 얻고 이릉의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왕기에게 투항하여 또 하나의 이릉성을 세웠다. 즉 이릉성을 지키는 데에 성공하지만 이릉 그 자체를 빼앗긴 꼴이었다(…).

5.2. 삼국지 영걸전



[image]

지금이야말로 승리의 '''찬스'''다!

육손

3장 - 촉한건국에서 오와 화친을 맺지 않았다면, 3장의 마지막 전투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유비군이 원작에서 촉이 패배한 전투라서 상당히 어렵다. 초반에서 화공으로 인해 아군의 병력이 '''1/4'''만 남고 '''사기가 절반이 된다.'''[43] 여기까지만 보면 문제는 없어보이지만 '''가운데의 강 때문에 위쪽 장수들과 아래쪽 장수들이 서로 만날 수 없다.'''
그나마 다행히도, 발석차를 이용하면 편해진다. 튼튼한 병과로 입구를 막고 수송대나 주술사로 치료받고 발석차로 오나라 군을 퇴각시키다가 보면 육손이 오게 되는데 이때 육손을 퇴각시키면 전투가 끝난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사마가주태가 붙을 시에 일기토로 사마가가 죽으니 이릉대전 출진 시 사마가를 쓴다면 주태랑 붙이지 말것. 이것이 삼국지 영걸전 게임 내에서 유일하게 일기토 패배로 인한 아군 사망이다.[44][45] 하지만 원작과는 달리 사마가와 감녕의 일기토는 없다.
승리하면 결국 유비육손을 우습게 본 게 실수였다고 하면서 와 화친을 하면서 4장으로 계속된다. 하지만 패배하면 '''유비가 백제성에서 사망하고 사마염의 천하 통일 이후 진나라의 멸망 엔딩이 나온다.'''
이 전투를 보면 손자병법서나 오자병법서는 얻을 수 없고 4장에서 감녕과 능통도 아군으로 합류하지 않는다.[46] 게임 내 육손의 명대사(...)가 나오는 곳이 바로 이릉대전.
4장의 마지막 전투에서는 이 전투의 전말이 밝혀진다.[스포일러]

5.3. 삼국지 공명전


1장의 마지막 전투로 나온다. 제갈량이 촉군의 700리 진형도를 보고 위급하다고 판단하여 조운을 비롯한 촉 원군을 보냈다는 설정으로 시작하며, 시작과 동시에 촉 진영에 불길이 번지고 강 건너에서 오군이 밀려온다.
어째서인지 영걸전과는 다르게 공명전에서는 불이 나도 아군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게다가 유비군 쪽은 유비까지 포함해도 달랑 5개 부대가 나와 있다. 추격하는 육손 쪽 군세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우군이긴 하지만 관흥, 장포의 일기토 이벤트까지 있기 때문에 난이도는 낮다.
PS/SS/GBA판에서는 관우가 생존하면 이릉대전을 진행하지 않는다.

5.4.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0에서 PK 추가 시나리오인 이릉전투를 시작하면 일어나게 되며, 촉이나 오의 장수로 게임을 플레이하면 전투에 참가할 수 있다. 촉군의 경우, 제갈양, 조운을 선택할 경우 자동으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게 되며, 장비로 시작하는 경우엔 장비가 죽지 않아 이벤트가 아예 일어나지 않는다. 그 외의 경우는 대개 전투 참가여부를 선택할 수 있으며 이릉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장비는 암살당해 죽는다.
  • 촉의 입장에서
유비가 성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이릉에서 맞서는데, 사마가의 만족병이 원군으로 등장한다.[47] 아군무장은 관흥, 장포, 황충, 통솔력 높은 아군 장수[48]으로 편성되며 이벤트가 일어나기 전에 착실히 군사를 늘리고 훈련을 완료했다면 이릉전투에서 이길 수도 있다.[49] 초기 배치된 해상의 아군을 모두 육상으로 빼내고[50], 육손 하나를 일점사하여 이기면 황충과 유비의 사망 플래그가 분쇄되며 강릉과 형남 4군 전체가 촉의 영토로 바뀐다.[51] 플레이어가 유비를 선택하지 않은 경우, 이릉전투에서 패배 후 황충은 전사하고 유비는 백제성(영안)에 틀어박히고 곧 사망하는 등 역사대로 이벤트가 흘러간다.
  • 오의 입장에서
게임 개시 후 한 달쯤 되고 건업으로 가면 이벤트가 발생한다. 육손이 도독이 되어 강릉태수가 된다.[52] 강릉으로 입성하면 곧바로 이벤트가 진행되어 전투가 벌어진다. 어차피 유비군은 사기도 떨어지고 병력도 줄어든 탓에 전투를 자동으로 맡겨도 이긴다.[53] 승리 시 이벤트 무비가 발생하여 육손은 어복포에 갇혀 위기에 빠지지만 황승언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온다. 이후엔 역사대로 이벤트가 진행된다. 유비가 죽고 유선 즉위 후에 건업으로 가면 촉오동맹을 맺는다.
참고로 전투 결과에 상관없이 황권은 촉에 남게 된다.

5.5. 진삼국무쌍 시리즈


관우의 죽음을 보고 받고 분노한 유비가 다른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촉 세력 시나리오에서는 관우의 존재감이 크기 때문에 관우의 복수를 위한 중요 전투중 하나이고, 오 세력 시나리오에서는 육손을 띄워줄 수 있는 최고의 전투이기 때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전투가 끝나면 보통 촉은 관우의 복수는 했지만 관우의 빈자리는 채울 수 없다는 식으로 끝나고, 오는 촉을 털어버렸으니 이제 조조만 털어버리면 된다는 식으로 마무리된다.[54]
진삼국무쌍 2에서는 '''촉군 최고난도 전투.''' 후대 시나리오인 오장원, 가정보다 '''이 전투가 훨씬 어렵다.''' 실제와는 달리 전투를 시작한 시점부터 왕창 불리한 상태로 아군고전 메시지가 계속 뜨면서 아군 부대가 족족 패퇴해 나가며, 만약 주연의 화계를 저지하지 못했다면 본진을 제외한 맵 전체가 시뻘겋게 물들어있는 광경을 어렵잖게 보게 될 것이다.[55] 더구나 적 본진에는 궁병이 꾸준히 증원되어서 총대장 암살도 버겁다. 정말 플레이어가 발에 땀이 나게 뛰어다녀야 하는 시나리오. 오군 맵도 상황은 비슷한게 미칠 듯한 촉군의 맹공에 아군 부대가 털려나가는 건 비슷하지만 주연만 원호해서 화계 위치까지 데려다주면 화계로 아군 사기를 확보할 수 있으므로 촉군보단 상황이 좀 낫다.

이릉전 석병팔진 이벤트
진삼국무쌍 3에서의 촉군 맵은 반대로 매우 쉬운데, 육손의 화공이벤트가 일어나도 아군이 크게 열세가 되지 않으며 유비는 순식간에 본진으로 물러나 죽을 일도 없고 제갈량이 원군으로 등장하며 배로 적 본진 뒷쪽으로 다리를 놓아 기습할 수 있게 되므로 오히려 전황이 유리해진다(…). 그런데 만약 플레이어가 오군의 화계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면 말 그대로 화계'''만''' 방지되고 화계가 발생했을 때 튀어나오는 적의 원군이 사기 수치도 별8개의 최대치 상태로 나와버리는 바람에 화계 방지로 인해서 퇴각하지 않는, 초기 위치에 있는 총대장(유비)이 위험해진다. 무쌍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플레이어가 개입해서 막아내면 손해보는 싸움이다. 특이하게도 전투 순서 자체가 뒤섞이다보니까 관우와 장비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태에서 이릉전투를 하는지라 3편에서의 이릉전은 복수전이 아닌 1편처럼 그냥 한번 제대로 촉과 오가 전력전 해보자는 개요로 펼쳐진다.
진삼국무쌍 4에서는 육손이 계곡 사이에 다리를 설치한 뒤 기습적으로 주연과 호위의 감녕, 능통을 보내서 화공을 시도한다. 그런데 주연이 전혀 주위 거들떠보지도 않고 화계 장소로 일직선으로 달려가는데다가 감녕, 능통은 안 그래도 날쌘 놈들이 강화된 채로 방해하므로 화계를 막기가 무척 힘들다. 화계 이벤트를 굳이 막지 않아도 크게 불리해지지는 않으므로 그냥 무시하고 감녕과 능통만 잡는 것도 한 방책. 주변에서 화살을 구해와 (100개 정도) 가교차 작동 전에 능통 부대와 친위대가 가교차 근처에 오는 순간 쏴서 잡는 방법도 있다. 능통만 잡고나면 감녕, 주연만 막으면 되니 쉬워진다. 화계 발동 후 3분 뒤에 촉에서는 제갈량과 마속이 원군으로 합류한다.
화계 이벤트가 일어났다면 아군 무장들의 사기가 꺾여 금방 전멸하고, 육손은 전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오고 본진에 있던 유비는 제갈량이 준비해놓은 석병팔진을 통해 뒷쪽에 있는 장소로 후퇴한다. 촉 세력 캐릭터라면 감녕과 능통만 주의한다면 큰 무리 없이 끝낼 수 있는 전투지만, 오 세력 캐릭터라면 꼬여있는 석병팔진에 들어간 순간 맵과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오랜 시간 헤매는 경우가 있어 좀 번거로울 수 있다. 다만 CPU들은 길을 헤매지 않기 때문에 CPU를 잘 따라가면 헤맬 일 없이 도착 할 수 있다. 이 화계 이벤트가 바로 진행되고 나면 촉/오 두 나라의 BGM이 바로 바뀐다.
진삼국무쌍 5에서도 초반 공방 이후 육손의 지시로 화계 이벤트가 발생한다. 이번 작은 전작보다 길이 더 심하게 꼬여있다. 입구가 4개에 지형의 고저차도 적용되어 있어서 처음 접하게 되면 헤맬 수 밖에 없다. 이번 작에서도 CPU들이 석병팔진에서 헤매는 일은 없지만, 부활해서 밖으로 나오는 무장과 가는 길에 만나 싸우는 일이 있기 때문에 CPU만 따라 가면 진행이 더디게 되니 길을 외우는 편이 좋다.
5편부터 촉군으로 플레이할 경우 화계가 벌어지면서 동쪽 아군의 사기가 대폭 하락하고 데미지를 입는데, 때마침 감녕을 위시한 오군 기습부대까지 출몰하여 이들을 공격하므로 기습부대를 격퇴시킨 후, 석병팔진을 노리는 남쪽의 육손[56] 부대 및 다른 부대들을 잡고, 서쪽에서 공격해오는 능통 일행을 격파하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은 남은 적 부대들을 소탕하면 되는 것.
오군으로 플레이할 경우 화계 이벤트가 벌어진 뒤, 유비 역시 후퇴하기 시작하고 제갈량은 석병팔진을 발동 시키는데 석병팔진 중앙에 체력 회복 장치가 있어서 무장을 잡았더라도 그 무장이 중앙에서 체력을 회복하고 다시 밖으로 뛰어나온다. 장치를 전부 파괴[57]하기 전까지 부활이 계속 되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고 있다가는 계속 부활하는 무장들 때문에 거점이 털리고 사기가 떨어진다. 석병팔진을 와해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
몇 몇 스토리 모드 존재 캐릭터의 이릉전투 전개 개요가 다른데, 주유에 경우 적벽에서 조조를 아예 불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위가 망하고 유비랑 손책만 남았으니 이참에 그냥 결판내자는 1편과 3편과 비슷한 개념이며, 손상향은 유비를 따라 종군하여 자기 손으로 고향 사람들을 작살내서 촉에 흡수시키는 모습이 나온다. 5편의 손상향은 인게임 성능이 논외급 사기 캐릭터인지라 혼자 오나라를 갈아버리는 모습이 가히 압권이다.
진삼국무쌍 6에서도 화계 이벤트가 있다. 촉 스토리 모드로 진행하면 두 파트로 나눠지는데, 화계 전에는 조운으로 유비가 있는 곳까지 가서 유비를 무사히 후퇴시키는 것이고, 이후에는 제갈량으로 잔여 아군의 후퇴를 돕는 것이다. 조운으로 유비를 발견하고 전편을 클리어하면 유비는 도망가자는 조운의 진언을 쌩까고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는데, 조운이 어쩔 수 없이 '''유비의 명치를 쳐서'''(…) 기절시키고 병사들을 시켜서 강제로 퇴각하게 만드는 당황스러운 이벤트 무비를 감상할 수 있다.[58]
오 스토리 모드로 진행하면 전반 후반 모두 육손으로 플레이하게 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역사상으로 오군이 대승리하는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촉 스토리 모드에 비교해서 오 스토리 모드의 이릉전투가 훨씬 어렵다(…). 화계 성공이 목표인 전편은 그렇다 치더라도 후편에서는 육손으로 석병팔진을 뚫고 유비를 잡아야 하는데, 석병팔진에 노포 함정과 환영병이 세팅되어 있는 데다가 중간쯤 가면 본작에서 가장 짜증나는(…) 대규모의 연노를 동반한 월영이 진군을 가로막는다.
거기다가 월영을 상대하다 보면 석병팔진에 쓸데없이 진입한 손권이 석병팔진에 갇혀서 마량과 환영병들에게 개털려 SOS를 보내는데 한시라도 지체했다간 바로 게임오버. 문제는 2처럼 화살공격이 매우 치명적인 6에서 노포 함정 앞에 있는 마량을 그대로 상대했다가는 손권보다 플레이어가 먼저 눕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손권이 SOS 신호를 보내면 석병팔진의 동쪽에 있는 마속을 먼저 잡아서 석병팔진을 정지시킨 이후에 또 뛰어가서 마량을 잡고 손권을 구출해야 한다.[59]
석병팔진을 정지시키고 나면 백제성 쪽으로 전진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조운을 비롯한 대규모 촉군이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를 가로막는다. 역시 여기도 짜증나는 궁병이 쫙 깔려 있다. 천신만고 끝에 유비 앞에 가면 유비는 버프를 쓴다(…). 그리고 유비마저 잡으면 전투는 끝나고, 이후 이벤트에서 '''손상향을 생각하여 유비를 살려 주는''' 손권의 이벤트 무비를 감상할 수 있다. 여러모로 진삼 6의 손권은 대인배.
진삼국무쌍 7에서는 촉과 오 모두 사실모드일 경우 나온다. 오는 전작들과 실제 역사에서처럼 화공을 통해 촉을 격파. 촉은 장포가 플레이어 캐릭터로서 사실모드에 첫 등장하는 데뷔전.[60] 번성 전투에 첫 등장한 관흥도 같이 플레이어 캐릭터로 나온다. 전작에서 관색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안달났다면 이번에는 관흥이 그것을 이어간다. 장포는 실전경험이 부족한 관흥을 걱정하다가 발끈한 관흥과 한바탕 겨룬다. 그 모습을 본 조운이 대선배로서 둘에게 한마디 해준 뒤 본격적으로 이릉 전투 시작. 전투가 시작하면 유비는 이성을 잃고 닥돌하며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조운은 관흥과 장포는 남쪽으로 진군하라 해놓고 유비 수색에 돌입. 수색 중 한당이 갑툭튀해서 방화를 시도하고, 한편 동쪽 거점에서 유비가 육손과 맞붙고 있는 것이 나온다. 실력이 된다면 재빨리 한당을 잡고 유비에게 가서 화계를 막고 이길 수 있지만, 한당을 막으려다 총대장 패배가 뜰 수 있으니 웬만하면 그냥 유비를 구하자. 이후 한당이 불지르면 아군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짐과 동시에 오군이 돌격해오고, 아군 무장들이 속속히 패주해간다. 유비를 호위하며 맵 서쪽 끝까지 가면 전투 종료. 전투가 끝난 뒤 전작처럼 유비는 뒷일을 부탁하며 병들어 사망. 화계를 막아 손권을 패배시키거나 유비가 행방불명 된 상태에서 손권을 패배시켜도 결과는 같다.
한편 오 쪽은 그냥 평범하게 버티다 불지르고 석병팔진 뚫고 유비를 잡으면 끝난다.
진삼국무쌍 7 맹장전에서도 이름은 달라도 이릉대전을 무대로 한 전투가 촉과 오 시나리오에 등장. 오는 주연이 클론무장에서 정식무장으로 승격되면서 주연이 활약하는 '이릉 추격전'이 생겼다. 본가의 이릉대전과 딱히 다를 건 없다. 단지 정식무장이 된 주연이 한당 대신 불지른다는 것 정도.
한편 촉은 법정이 이릉대전까지 살아서 오의 화공을 역으로 노린 복병 책략으로 오를 이기는 '이릉 복수전'. 심지어 전투 자체가 '''복수'''이기 때문에 자신의 지략이 더 빛날 것이라고 말하는 법정의 말이 일품.
시작하면 병력을 분산시켜놓은 것을 본 법정이 한탄하며 시작. 왠지는 모르지만(…) 오군이 점령하고 있는 석병팔진을 뚫으면 육손이 화계를 시도하려한다. 이때 오의 본진에서 Y자 모양에 길에서 공작병이 둘로 갈라지는데, 육손이 화계대사를 말하면 플레이어는 하던 짓을 그만두고 재빨리 말타고 달려 Y자 길에 가서 공작병이 둘로 갈라지기 전에 격파해야 한다. 1인 플레이라면 공작병이 갈라질 경우 화계를 막는게 거의 불가능해진다.
화계를 막으면 법정의 계략에 따라 맵의 북동쪽과 남서쪽에 장포, 관은병과 조운, 관흥을 매복시킨다. 문제는 여기인데, 장포와 관은병은 알아서 잘 가는데 조운과 관흥은 적병 하나하나 신경써가며(…) 가서 매복시키기 참 힘들다. 이 맵에서 법정,마대 등의 비장무기를 얻을 수 있는데, 조건이 제한시간 내에 법정의 계략 발동인지라 조운과 관흥이 안 가서 실패하면 속 터질 지경. 무쌍난무를 쓰던 각성난무를 쓰던 최대한 빨리 남서쪽을 쓸어버리자. 매복에 성공했으면 주연과 육손이 한번 더 화계를 시도하려하는데, 이때 둘 중 한 명을 촉 진영까지 유인시켜 불지르게 하면 된다.[61] 둘 중 한명이 불을 지르면 촉병이 국어책 읽기로(…) 유비님이 돌아가셨다며 헛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들은 오는 닥돌. 이후 매복시켰던 병력과 후퇴시켰던 병력이 힘을 합쳐 닥돌해오는 오군을 역으로 털어주면 마무리.

진삼국무쌍 8은 6편처럼 결과가 정해져있게 끝난다. 유비는 자기 스토리에서는 살아있는 상태로 엔딩이 나오나 이릉전 이후까지 스토리가 있는 다른 캐릭터들 루트에서는 공통으로 사망 이벤트가 뜬다.
촉군 시나리오는 이릉 진격과 백제성 도피행이라는 두 개의 편으로 구성되며, 전자의 총대장은 이릉에 위치한 손권, 후자의 총대장은 석병팔진 출구에 자리한 육손이다. 오군 시나리오는 이릉 요격과 백제성 도피행으로 구성되며, 두 편 모두 유비가 총대장이다. 양측 세력 공통 애니메이션으로 육손의 지시에 의한 주연의 화계가 그려지며, 촉군의 경우 시나리오 개시 직전 장비의 죽음을 그린 애니메이션이 시리즈 최초로 삽입되었다.
이릉대전은 6편을 제외하면 전통적으로 전용 BGM이 배정되며 이는 적벽대전, 관도대전, 호로관 전투, 오장원 전투 등과 함께 공통적이다. 특히 이릉대전 BGM들은 명곡들이 많고,[62] 시리즈마다 음악은 달라도 의형제들을 모두 잃고 혼자 남은 유비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이릉대전 전후 직전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촉의 비극에 대한 복선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5.6. 삼국(드라마)


전 95편 가운데 78~81편이 이릉대전에 할애되었다.
이후 종반인 93편에서 사마의를 끝장내기 위해 상방곡에 함정을 파고 불을 지르게 한 제갈공명이 사마의의 최후가 가까워지는 걸 바라보며 '잘 타는군. 이릉 숲의 불보다 잘타' 라는 독백을 하며 이릉대전을 언급한다.#

[1] 현 중국 후베이성 이창 시 이링 구(이릉), 샤오팅 구(효정) 충칭 시 우산 구, 펑제 구[2] 기록이 남아 있는 사망자 수에서 역추산[3] 오주전, 육손전[4] 삼국지 오서 오주전.[5] 화양국지 유선주지.[6] 이릉대전 때 제갈량의 부재를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1인자가 전투에 나가면 2인자가 본거지에서 내정 및 보급을 담당하는 것이 당연하므로 한중 공방전 때도 제갈량은 성도에 남아서 내정 및 보급을 담당했었다. 당장 한 고제 때 소하나 유비의 라이벌 조조의 출진 때 순욱의 포지션을 보자. 심지어 유비는 제갈량에게 승상과 녹상서사의 직책을 맡겼는데, 이것은 거의 사실상 '(나는 원정 갈 테니 다른 건) 너 알아서 해라'는 의미에 가깝다.[7] 제갈량을 얻기 전의 유비는 보통 관우, 장비에게 본진을 맡겼고, 관우도 유비처럼 미방에게 본진을 맡겼는데...[8] 9개의 주를 관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한마디로 천자의 직책이랑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9] 자세한 내용은 조자 참고.[10] 자세한 내용은 심형 참고.[11] 사실 아주 틀린 인선이라고 볼 수도 없는게, 언제 뒤통수를 칠 지 모르는 북쪽의 위나라를 견제할 사람이 필요했고, 황권은 유비가 믿고 맡길 수 있는 뛰어난 인물이었다.[12] 왜 이런 반응을 보였는지 설명하자면 유비는 장강 상류에서 수군을 통해 하류로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이릉전투 초기 육손이 제일 걱정하던 것이 바로 유비가 이런 식으로 초반의 날카로운 기세를 타고 들어와 빠르게 오군을 격파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비는 각지에 진지를 세우고 육지를 통해 안정적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는데 이는 육손이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지연전으로, 촉한군의 강성한 기세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둔화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3] 연의에서는 무더운 날씨 때문에 촉한의 군세가 지쳤다고는 하는데 일리가 없는 얘긴 아니지만 당시 중국의 기후는 대체적으로 한랭건조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육손은 기후를 살펴보아 마침 건조한 날씨를 기다려 화공을 했을 공산이 있다.[14] 유비는 이릉에 도착한 후 사천성 봉절현에서 동쪽으로 7km 지점에 있는 백제성까지 직통으로 연결하였는데 연도에 역마점을 두어 잘 연결되도록 하였다. 유비가 도망할 때 오의 군사가 뒤를 쫓아왔는데, 이때 다행히 이 많은 역점에서 일을 맡았던 관리인이 유비군이 버리고 간 갑옷 등을 모아서 좁은 길에 모아두고 불을 질러서 추격군의 추격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상 국역 자치통감에 달려 있는 주석.[15] 후퇴할 때 추격하는 군사를 막아 전 부대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후방에 있는 부대를 말한다.[16] 그의 아들 부첨도 촉한 멸망 때 항복을 거부하고 결사항전하다 전사 하였다.[17] 무릉만에게 죽었는지 오나라가 그 먼 곳까지 군대를 보내 죽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하지만 마량이 있던 곳과 가장 가까운 군대가 익양의 보즐이다. 무릉만의 내부 분쟁에 휘말려서 죽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를 무릉만 세력 자체가 촉에 등을 돌렸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익양대치 이전 유비는 직접 무릉군 잔릉현에 머물렀으며, 잔릉 주둔도 주둔이지만 이 시기 무릉을 직접 통치했다는 견해가 꽤 설득력이 있는데, 익양대치 이후 형주 분할의 결과 무릉은 유비에게 속하므로 종합하면 무릉에서의 유비의 영향력은 굉장히 강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또한 오에 귀속되고 난 뒤에 무릉만 세력의 반란은 끊이지 않으므로 마량의 죽음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촉에 분노한 무릉만의 공격을 받았다'고 진술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무릉만 내부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18]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지만 당시 위연은 한중태수 였다. 한중은 촉한의 수도 성도 다음의 대도시이자 대위전선의 노른자위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조비의 팽창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런 위연을 뜬금없이 오나라 침공에 내세울 순 없다.[19] 입촉부터 공을 세우기 시작했고 주된 활약도 북벌 시기이므로 2세대에 가깝다.[20] 유비 생전에 유비군에서 제갈량은 조조군의 순욱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본진을 지키며 세력 전체의 전략을 짜는 책사'''였던 것. [21] 물론 마속에게 해줄 건 다 해주고 후에 장합을 격파하기도 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왕평까지 부장으로 보내주었지만…이에 대해 몇몇 촉빠들은 차라리 오의를 마속 대신 넣거나 왕평을 파격적으로 승진시켜서 싸웠으면 결과가 저리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한탄한다.[22] 손권이 파촉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장강삼협을 끼고 있는 백제성을 공격해야하는데, 수송을 위해서는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번거러움이 크며, 합비에서 조위가 버티고 있는 이상, 손권의 행동은 유비가 형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지, 파촉을 점령하기 위한 대책이 될 수는 없다[23] 학계에서는 이미 이 부분이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24] 초기 군벌의 전국시대가 끝나고, 삼국으로 어느 정도 정립이 된 이후, 세 나라 모두 냉병기 보급률이 어느 정도 갖춰지게 되면서, 과거와 같이 장수 몇명으로 전쟁을 치루는것이 아닌, 수송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는데,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25] 계륵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 역시 한중을 지키기에는 조조 입장에서는 진령산맥이 너무나 큰 방해요소였다.[26] 일부는 관도대전보다 더 심하다고 비교했는데 이릉에 비해 좀 덜하다뿐이지 관도 역시 조조 측 상장은 거의 피해가 없던 반면 원소의 주요 중책이 상당수 죽었던 상황이나 포로로 잡힌 게 꽤 있다. 단일전투로 한 세력이 단시간에 입은 피해 면으로 봤을 때도 이릉보다 관도가 더 클 가능성도 높고, 양측이 동원한 병력의 차이로 생각해 봤을 때도 파급력은 관도 쪽이 더 압도적이다. 또 촉한이 아무리 삼국 중 사료가 없다고 해도 원소 세력보다야 사료가 있는 편이니 하위급을 비롯한 중요 인적자원 피해량도 상세히 나오는 거지 이릉보다 더 말아먹고 그 부족한 기록에서도 주요 중책들의 피해상황이 언급되는 상황인데 하위급 인적자원 피해량이 적었을 리는 없다. 거기다 이릉과 달리 관도는 패배한 세력의 내부적인 분열로 인해 치명적인 배반 사례가 꽤 나왔다는 점에선 이릉보단 더 심각한 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릉은 인적자원을 술술 말아먹어서 그렇지 이릉 패배 후 유비가 얼마 안 있어 죽었다고 세력이 바로 망한 게 아니었고 오히려 이후 세력 자체는 굳건하게 결속되었지만 관도에서 보여준 세력 분열과 배반양상은 곧 원소가 죽자 원가 세력 붕괴로 이어졌다는 차이점이 있다.[27] 수군이 부족한 정황은 유비 입촉 이후부터 형주 공방전 결과를 상고해보면 대략적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유비가 익주를 정벌할 당시 유비는 수전을 하지도 않았고 수군을 이용했다는 구절도 없어 수군을 가지고 왔다고 보이진 않는다. 당시 촉한 진영 내에서 수군을 가장 잘 이용하던 장수는 형주에 진수하던 관우였는데 관우는 번성공략 당시 7군을 공격하고 면수라는 한 구역의 수로를 장악할 정도의 수군을 갖추고 있었다. 문젠 형주에서 관우의 군세가 와해될 때 이 수군부대가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유비 입장에선 나름대로 다시 수군을 편성한다고 했겠지만 1~2년 사이에 회복시킬 수준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육손은 손권에게 유비가 수륙병진으로 안 들어와서 다행이다라고 언급했지만 기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28] 당시의 중국은 전반적으로 한랭건조한 기후라 육손이 화공을 할만한 날씨를 노려서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당시가 여름과 가을 사이이니 연의의 추측 역시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29] 오주전에서도 유비의 진지가 요충지에 있음이 보인다. '촉나라 군대는 험준한 요새에 분산하여 점거하고 앞뒤로 50여 개의 진영을 두었는데, 육손은 상대방 병력의 경중에 따라 병사를 내어 대항하여 정월부터 윤 6월까지 대대적으로 격파시켰다.' - 오서 오주전.[30] 게다가 이후 조비의 전략적 식견이라는 것 자체도 이후 본인이 친정한 삼로남정이 (육손을 제외하고) 유비에게 휘둘리던 오나라 장수들에게 죄다 격파되면서 그 수준이 인증되었다.[31] 유비는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역참의 관리가 직접 남아있는 물건을 지고 군악기나 개(槪)를 길에 쌓아놓고 불을 질러 적병의 추격을 끊었다. 유비는 겨우 백제성(白帝城)으로 들어갔다. - 정사 삼국지 육손전.[32] 예를들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도 폼페이우스가 정말로 안정적인 정석적인 전개를 펼첬으나 카이사르의 예상치 못한 기지로 완벽하게 무너졌는데 이게 폼페이우스의 무조건적인 잘못은 아니다. 심지어 그 아틸라조차 카탈라우눔 전투에서 서로 지리적 우위를 점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진 전투였음에도 궤멸적인 패배를 당해 자살까지 생각했었는데 아틸라가 여기서 100% 잘못했다고 어느 역사가도 주장하지는 않는다.[33] 그런데 위에서 얘기한 대로 기지를 늘어뜨린 게 정말로 역참이나 병참로 보호를 위해서 일부 병력을 뿌린 정도라면 근대 이전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전무후무한 일이라며 과장할 정도로 실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몽골제국도 정복과정에서 이런식으로 역참로나 병참로를 만들었고.[34] 만약 병력이 7백 리에 걸쳐 고루 분산되었다면 유비는 후퇴할수록 후방의 병력들을 더 충원받을 수 있다. 언급했듯이 물리적으로 육손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장강을 거슬러올라가 7백 리 진영 전체를 동시에 타격하는 거 자체가 가능한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비는 도주 와중에 손환의 공격을 받는 등 고전하면서 도주했다. 각 퇴각로에 보급로를 안정시킬 만한 수준의 소수병력만 배치한 정도에 가까웠기에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35] 실제로는 당시 '''촉한 중앙정부가 장악한 인구'''가 94만으로 70만에서 75만은 소설적 허구다. 만약 정말 이대로 끌고 나갔으면 북벌이고 뭐고 촉은 망한다.[36] 연의에서는 적벽대전 전에 손권 수하에 들어 온 것으로 나와 있는 정봉은 실제로는 손권 사후에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인물이다.[37] 삼국지연의가 다루는 시대는 서기 184년부터 280년까지로, 역사의 흐름으로 보면 제갈량의 사망(234년)은 반환점에 해당되는데 120회본인 모종강본 기준으로 이 부분은 105회까지다. 나머지 절반의 세월을 15회 동안에 몰아넣은 것. 결국에는 한 번에 10년을 건너뛰기까지 할 정도다. 그런데 이문열은 자신의 평역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사망 시기를 232년에 서진의 통일을 282년이라고 하는 오류를 범했으며 이는 2020년에 판권이 민음사에서 알에이치코리아로 넘어간 뒤에도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38]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후반부 장수에게 능력치가 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은 능력을 가진 장수가 있었다 한들 활약할 기회가 드물었으니(…) 그로 인해 갈수록 후반기 비중을 줄이면서 10PK까지 간간이 등장했던 제갈량 사후 시나리오도 11부터는 아예 등장하지 않다가 13PK에서 겨우 부활했다.[39] 오군이 압승한 이릉대전은 연의에서 규모가 좀 더 뻥튀기된 규모가 있어 대전이라 부르기엔 조금 미묘하다. 정사상 전투 규모와 후반 이야기까지 생각한다면 사실 3대 대전엔 이릉대전이 아닌 낙곡대전이 들어가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40] 그나마 나관중이 연의에서 강유의 북벌 횟수를 아홉번으로 늘렸는데도 한 권 반 분량 정도다. 이건 낙곡대전 같은 사건을 안 넣은 나관중에게도 책임이 있다만(…)[41] 길게 보자면 서진이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을 겪고 전조(한나라)에게 멸망하는 316년까지지만 이때는 삼국지가 아니고 사실상 서진 시대다. 그리고 서진이 전조에게 멸망한 직후에 오호십육국시대가 개막했다.[42] 자는 백여. 공여라는 자를 쓰는, 고구려를 침략한 왕기와는 동명이인[43] 하지만 고수들은 오히려 좋다면서 이 상황마저 경험치와 레벨업으로 승화시킨다.(...)[44] 와구관 전투에서는 뇌동과 장합이 붙어서 뇌동이 패배, 한수 전투에서는 오란 vs. 조창 일기토에서 오란이 패배하지만 연의와는 달리 둘 다 퇴각만 하고 사망처리는 되지 않는다.[45] 참고로 이 일기토가 다른 일기토와는 다른점이 있는데, 일반적인 일기토의 경우에는 일기토를 하는 2명의 장수가 '''정면에서''' 접촉 혹은 공격한 경우에 시작하지만(즉, 대각선 방향에서의 공격으로는 일기토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일기토는 유일하게 사마가가 주태를 공격했을 시에 일기토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태가 적군의 턴에 사마가를 공격했을 시에 일기토가 시작된다.''' 즉, 아군의 턴에는 사마가가 주태를 정면에서 공격하더라도 일기토가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일기토를 보려는 유저들은 이것을 염두해 둘 것.[46] 대신 서성과 정봉은 더 높은 레벨인 50으로 합류한다.[스포일러] 죽은 척 했었던 조조가 촉과 오가 싸우다가 틈을 타 천하통일을 하려고 했던 계획이 있었다. 사실 3장의 맥 전투 이후의 조조의 유언 이벤트에서 이 내용의 복선이 있었다.[47] 만족병 2부대를 끌고오는데 부대가 꼴랑 2천 명 정도 밖에 안 돼서 별 도움은 안 된다.[48] 굳이 황권이 필수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마초나 장익처럼 통솔력 높은 장수가 대신 참전할 수 있다.[49] 플레이어가 유비라면 더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각 성의 병력을 빼내 성도의 부대를 10부대로 만들고, 이릉에 진이나 석진 건설 후 곧바로 이벤트를 진행하면 아군은 8만에 가깝고 오군은 3만도 안 되는 탓에 자동으로 전투를 맡겨도 그냥 이긴다.[50] 오군의 투함은 그냥 상대할 수 없다. 더군다나 오군의 장수들은 제독 특기를 갖고 있어 물위에서 상대하는 것은 힘들다. 안 그래도 아군은 사기가 낮아 순서가 늦는데 주가만으로 상대하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깝다.[51] 이때 유비의 소속도시가 강릉으로 변하고, 강주는 장포가 태수가 되고, 성도는 제갈량이 태수가 된다. 여담으로 마초를 자동에서 해임해서 성도로 부임시켰을 경우 마초가 성도 태수가 된다.(아무래도 공적이 우선 되는 듯하다.)[52] 영지는 강릉과 강하, 형주 4군이다.[53] 만약 전투에서 졌을시에는 강릉과 형주 4군을 빼앗기고 육손은 강하와 시상의 도시를 갖게 된다.[54] 크로스오버 외전인 무쌍 오로치는 마왕재림에서 동명의 전투가 나오지만 이름과 맵만 이릉전투지 오로치와 위의 전력전이라서 본가의 이릉전투와는 완전히 별개의 전투가 되었다.[55] 심지어 '''초급 난이도에서도 이런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56] 특히 육손은 내버려두면 석병팔진에 들어갈 때 석병팔진 조사를 개시하여 효과를 약화시키므로 우선적으로 잡아야 한다.[57] 중앙의 무장상 8개를 전부 파괴해야 한다.[58] 삼국지연의 본작을 비롯하여 연의에 기반을 둔 대부분의 이릉전투에서는 유비가 화공을 당한 직후부터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부하들의 말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된다.[59] 보통 이 부분에서 시간이 굉장히 모자란다. 마속을 열심히 잡고 있으면 손권이 마량에게 당하는 경우가 10에 3, 4 정도. 그렇다고 마량부터 잡으러 갔다간 지옥을 맛본다.[60] 가상모드로 가면 동영상에서 성채와 같이 처음 등장하고, 육구 전투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로 첫 등장.[61] 둘 다 격파하면 계책이 물거품이 되어서 텅 빈 플레이어의 머리를 쪼개고 싶다며 화내는 법정을 볼 수 있고 손권은 화계가 실패했지만 승기는 본인들에게 있다며 총공격을 개시한다.[62] 특히 진삼3의 BGM이 매우 좋은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