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거

 

1. 인물
2. 고려시대의 솔거노비


1. 인물


率居
생몰년대 미상
신라시대의 화가로, 삼국사기 열전에 적혀 있다.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는 나와있지 않고, 미천한 출신에 조상이 누군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현재 한국사 기록에 남아 있는 화가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람.
선천적으로 그림 실력이 뛰어나 황룡사 벽에 그린 나무 그림이 너무 진짜 같아 새들이 날아가다가 진짜인 것으로 착각해서 앉아서 쉬고 가려다가 부딪힌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 이후 벽의 소나무 그림의 색상이 바래졌는데도 새들은 계속 부딪혔다. 그러다 어떤 승려다시 색을 칠했는데, 그 이후로는 새들이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 나무 그림은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역사서 동국통감에는 진흥왕 27년에 황룡사가 완성되자 솔거라는 자가 벽에 그림을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진흥왕 시대의 사람으로 보인다.[1]
먼 훗날 조선신사임당의 이야기 중에서도 솔거 이야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신사임당이 유년 시절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은 꽈리나무에 앉은 메뚜기 그림이었다. 다 그리고 마루에 놨는데, 너무 잘 그린 나머지 그 집에서 기르던 이 그 메뚜기를 진짜 메뚜기로 착각하고 마구 쪼아서 망쳐버린 이야기이다.
소설가 조정래의 작품 중에서는 '어떤 솔거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는데, 일단 주인공은 화가가 맞긴 한데 이름은 딱히 설정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화가를 상징하는 대명사 격으로 '솔거'를 제목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90년대 한 평면TV 광고에서 이 일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 장면이 나온다. TV 화면 속 하도 영상이 생생하여 동물이 그것에 접근하다 부딪히고 마는 내용.
사실 새들이 그림을 실제로 착각해 날아오다 부딪히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라 충분히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당장 유튜브 등에서 동물들이 사진이나 TV의 영상을 보고서 진짜라고 착각하여 빠르게 움직이다 부딪히거나 하는 장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새들은 그림이나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받아 스턴 상태에 걸려 날지 못하고 멍하게 떨어져 있는 일도 도시에서 생각보다 흔하다.[2] 새들의 판단력은 종마다 다르긴 하지만 마냥 좋지는 않아서, 다른 예를 들면 농촌에서 허수아비를 괜히 세워놓는 게 아니다.
역사의 기록만으로 보면 솔거는 한참 뒤의 서양에서 유행할 극사실주의 화풍을 스스로의 재능으로 터득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록도 없는 미천한 출신이라 따로 전문적인 미술 교육은 받지 못했거나 그에 준하는 수준이었을 것이니까.
이후 승려가 함부로 색을 덧칠한 이후로 더이상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니 옛날에도 비전공자의 부적절한 방식의 복원으로 괜한 예술작품을 망친 사례는 꽤 있었던듯 하다(..) 역시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다 하겠다.
한편 한국의 민족종교 대종교에서 사용하는 단군의 진영(초상화)은 신라의 솔거가 그렸던 것을 입수해 모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고려시대의 솔거노비


고려시대의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성되었고 사노비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성되었다. 공노비와 사노비 중 외거노비는 가정과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공노비 중 입역노비는 관청에서 급료도 지급받았으며 외거노비들은 사실상 소작농이었다. 반면 솔거노비는 귀족이나 사원에서 직접 부리는 노비였으며 노동의 대가도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하는 정도였다.

[1] 라고는 하지만 엄밀하게는 그가 어느 시대 사람이었다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동국통감은 어떤 사건에 대해서 그 사건의 정확한 연대를 모를 경우에는 그냥 그 사건이 일어난 왕대 마지막 재위년에 써붙여놓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또 삼국사기 솔거열전에서는 황룡사의 노송도 말고도 분황사관음보살상진주 단속사유마거사상도 그의 작품이라고 했는데, 두 절은 모두 진흥왕 사후 백 년, 2백 년이 지난 후대에 세워진 절이기 때문. 물론 담징의 사례에서 보듯 분황사나 단속사 쪽이 후대에 와서 솔거의 이름을 가탁해서 지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2] 이를 방지하기 위해 벽이나 유리창에 독수리 등 맹금류 스티커를 붙여놓아 새들이 다가오지 않게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