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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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로 94-11 (구황동)에 있는 절.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불국사의 말사다. 신라시대 전성기보다 좀 많이 작아지긴 했어도 아직 '살아 있는' 절로, 황룡사지나 감은사지와 다르게 분황사'지'가 아니니까 주의. 다만 분황사 주변 일대는 2019년 2월 26일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548호로 지정되었다. 2020년 기준으로, 성인 기준 입장료 1300원을 받는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아도의 비문에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1] 중 용궁북(龍宮北)이었다고 하였다. 돌을 깎아 벽돌처럼 만들어 쌓은 탑인 모전석탑으로 유명하다. 전탑 모양을 흉내낸 석탑으로, 전탑이 아니다.
2. 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세워졌다.[2] 이름 자체가 '향기로운(芬) 임금님(皇)의 절(寺)'로 선덕여왕을 염두에 둔 이름이다. 분황사는 6세기 진흥왕 때 먼저 지어졌던 황룡사의 바로 북쪽에 건설되어 담이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사찰은 황룡사가 더 먼저 세워졌으나 황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9층 목탑은 선덕여왕이 분황사를 세운 이후에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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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넓은 터가 황룡사지고 위의 작은 숲이 분황사다. 가깝다.
황룡사와 마찬가지로 승려 원효와 자장이 이 분황사에서도 활동했다. 원효는 이 곳에서 많은 저작을 남겼고, 원효 사망 후에 아들인 설총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 곳에 봉안했다. (원효회고상) 원효의 뼈를 부수어 만들었다는데.. 또한 황룡사처럼 신라 화가 솔거가 그린 그림이 분황사에도 있었다. 특히 분황사의 역사에서 원효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 의상과 함께 당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도중에 깨달음 얻고 돌아온 뒤에 머무른 곳이 분황사였고, <금광명경소>나 <화엄경소> 등 현전하는 원효의 대부분의 저작도 분황사에서 집필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원효를 위해 '화쟁국사비' 비석이 세워진 곳도 분황사였다.[3][4] 덕분에 분황사에서는 해마다 원효를 기념하는 재가 열리고 있다. 원효 관련 논문 중에는 아예 원효를 '''분황원효(芬皇元曉)'''라고 부른 것도 있다.
이후 몽골의 침략 때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에 지어진 삼국유사에서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지허' 즉 일곱 곳의 빈 절터 중 하나로 꼽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가 발간된 이 후에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분황사가 다시 복구가 된 것 같은데, 조선 중기의 문신 홍성민(洪聖民)의 계림록에서 분황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절에 높이 10척(약 3 m)의 금 불상과 높이 100인(仞)의 전탑[5] 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 임진왜란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원래 9층탑이었던 이 탑의 반을 헐었으며, 후에 분황사의 승려들이 처음부터 다시 쌓다가 또 허물어졌다고 한다. 조선 중기 인물 김수흥(金壽興, 1626∼1690)이 남긴 남정록(南征錄)에서도 분황사는 이미 폐허가 된 지 오래고 탑은 허물어지고 1개 층만 남아있으며 커다란 동불(銅佛)만 우뚝 솟아 있다고 남겼다. 탑이 무너졌다는 건 동경잡기의 언급과 같고, 임진왜란 이전에 있었다는 금불에서 일본군이 금칠을 벗겨내 구리 불상만 남은 것으로 추정. 경덕왕 14년(775) 구리 30만 근 이상이 들어간 거대한 약사여래동상을 분황사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것도 임진왜란 중 분실되었다. 녹았거나, 뺏겼거나...
이후로는 아주 작은 사찰이 되어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그리 크지 않은 절로 보이나, 2000년대 이후의 발굴 작업들을 통해 현재 있는 규모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절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장 깃발을 걸던 당간지주도 분황사 경내가 아니라 황룡사와 분황사 중간쯤에 있다. 오랜 기간동안 가람의 배치는 계속 변해왔으며, 리즈 시절 면적은 황룡사의 2/3정도에 육박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광복 직후 이승만 전 대통령에 의한 불교정화운동의 일환이었던 대처승 추방 과정에서 분황사 주지가 1955년 9월 10일에 할복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6]
법륜의 은사인 도문이 이 분황사의 주지였다. 예전부터 청소년, 학생, 군인에 대한 포교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법륜 역시 고등학생이던 1969년 당시 도문과의 선문답에서 크게 충격을 받고 출가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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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은 1탑 3금당식으로 추정되는데 모전석탑을 가운데에 두고 주위를 금당이 둘러싼 고구려식에 더 가까운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서쪽의 금당이 탑이 아닌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고구려식 가람배치와의 가장 큰 차이다.
가운데 중금당터는 절에 들어가서 탑 뒤로 현재 대웅전으로 쓰이는 보광전(普光殿) 앞마당에 돌을 낮게 둘러쌓고 지면에 살짝 솟아난 듯한 평평한 부지로, 언뜻 봐서는 티가 안 난다. 분황사에서는 2005년부터 장기적으로 이 금당을 복원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 금당 복원을 위한 기와 불사(佛事)[7] 를 벌이고는 있지만 언제 복원될지도 모르고 고증상 문제도 많다. 복원이 된다 해도 옛날 문화재를 그대로 복원한다는 의미보다는 아직 현역 사찰로 작동하고 있는 분황사에서 실제로 사용될 종교적 기념물을 재건하는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참고로 중금당터는 지금의 보광전 부지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규모다. 중금당터 한 모퉁이에 보광전이 올려져 있는 모양새. 다시 말해 중금당을 완전복원하기 위해서는 보광전을 이건해야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섵불리 시도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2.1.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신라시대 모전석탑 중 대중들에게 가장 유명한 탑으로, 현재 대한민국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항목을 참조.
2.2. 팔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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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 있는 우물로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漁井)이라고도 불린다. 화강암을 통째로 움푹하게 파낸 다음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만든 것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만들어져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부는 높이 70cm로 윗부분은 8각형이며, 내부는 원형으로 되어있다.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우물 안의 4각형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사성제를 뜻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경주에 들렀다 떠나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대왕님, 저희들은 서라벌 동북(東北)쪽 금학산(琴鶴山) 기슭에 있는 동천사(東泉寺)의 동지(東池)와 청지(靑池)에 사는 두 호국용의 아내입니다. 어제 당나라 사신과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이 주문을 외워 우리 남편들과 분황사 팔각정에 사는 호국용을 작은 물고기로 변화시켜 대통 속에 넣어 가지고 갔습니다. 우리 남편들과 분황사의 호국용을 구해주십시오." 라고 호소하였다.
이 말을 들은 원성왕이 "세 호국용이 있는 한 신라가 고분고분하지 않을 것을 알고 사신을 보내 훔쳐간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면서 날랜 기마병 50명을 몸소 거느리고 사신을 뒤쫓아 그들이 묵고 있는 하양관에 이르게 되었다. 왕은 친히 잔치를 베풀고 당나라 사신과 주술사를 꾸짖어 "너희들은 어이하여 나의 용 3마리를 잡아가지고 이 곳까지 왔는가? 만약에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다." 했더니, 그제서야 물고기로 변한 호국용 3마리를 내어 바쳤다. 그 호국용 3마리를 들고 와서 각각 제자리에 놓아주었더니 놓은 곳마다 물이 한길이나 솟아오르고, 호국용들도 원래 모습으로 변했으며, 기뻐 뛰놀면서 물 속으로 들어갔다. 당나라 사신은 신라 왕의 명철함에 감탄하여 돌아가서 "다시는 용을 훔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당의 황제에게 아뢰었다 한다. 이때부터 팔각정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漁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2.3. 보광전
금당 세 개가 모두 소실되고 없는 현재 분황사의 대웅전 구실을 하고 있는 전각. 외관으로만 따져도 상당히 낡았다. 1998년 해체 수리 당시 분황사의 창건과 소실 경위 등이 담긴 상량문이 나왔는데, 보광전이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보광전 안에 모셔져 있는 3.45 m짜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구리 5360근이 들었는데 18세기 후반의 작품이라고. 불상을 받치는 대좌는 석제인데 원래 부지에 있던 것을 재활용한 듯하다. 한쪽에 원효 대사의 초상화도 같이 모셔두었다. 안에 불상이나 대좌, 갖가지 불화에 작은 보살과 위패가 벽에 가득하고 천장에는 연등까지 달려서 안에 들어가면 좁게 느껴진다.
3. 기타
3.1. 향가
도천수대비가는 신라 경덕왕시절 눈이 먼 아이가 분황사에 걸려 있던 천수대비의 그림 앞에서 기도하며 불렀던 노래다. 결국 눈을 떴다는 전설이 있다.
3.2. 사자상 보수
분황사 석탑 주위에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있는데, 2006년 발이 없는 불쌍한 놈에게 다리를 다시 달아주었다.
3.3. 수정화주
임진왜란 이후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나왔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것을 백률사에 보관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이 진짜였는지는 알기 힘들다.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 1915년에 분황사 탑을 수리하면서 발견된 사리함 안에 진짜 수정화주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대략 7 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돋보기 혹은 불씨를 얻는데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안경의 역사와 관련된 유물 중 하나.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출토 수정화주 항목을 참조.
3.4. 홍수
홍수피해를 유난히 많이 받은 절이기도 하다는 듯. 사진에서 보듯 물길이 여기서 커브를 트는데, 상류에서 물이 넘치면 이것이 곧장 절로 직행한다. 애초에 법력으로 홍수를 막기 위해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경렬 선생이 쓴 신라 이야기 1권에 보면 물줄기가 흐르는 방향을 두고 분황사 부처님과 헌덕왕릉이 서로 자기 쪽으로 안오게 하려고 기싸움을 벌였는데(...) 그 싸움의 흔적으로 헌덕왕릉에 현재 석물이 별로 남아난 것이 없게 되었다고. 헌덕왕릉은 실제로 북천 강변에 바짝 닿아 있다.
하지만 결국 보문호와 덕동댐 건설 이후에야 홍수는 잦아들었다.
3.5. 반달리즘
근처 우물[8] 안에서 목이 잘린 불상 수십 좌가 나왔다. 불상은 비록 넘어지면 목이 쉽게 부러지는 구조이지만, 목 잘린 불상이 우물에 가득 쳐박혔으니, 과거 조선 시대에 반불교적 사상을 가진 선비들이 작정하고 벌인 반달리즘일 가능성이 높다. 이 목 잘린 불상들을 건져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관에 줄 세워 놓았다. 경주 남산에도 의도적으로 파불(破佛)됐던 불상과 조각의 안면과 목을 다시 붙여놓은 것을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4. 관련 항목
[1] 삼국유사 제3 흥법편 아도기라 항목에서 칠처가람을 말하며 전불시가람지허(前佛時伽藍之墟)라고 설명한다. 경주에 빈 절터 7곳(칠처가람지허)가 있는데, 과거불 시대의 절터(전불시 가람지허)라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기원전 5백 년대, 혹은 4백 년대 사람인 석가모니 이전에도 부처 6명이 더 있었다고 하여 과거불(過去佛) 또는 전불(前佛)이라고 부르고, 그 6명에 석가모니까지 더해서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고 칭한다. 과거 항목에서는 '칠처가람지허'라는 말에서 한때 잠깐 명맥이 끊겼던 모양이라고 했으나 이는 오류. 여기서 말하는 칠처가람지허는 전불시대의 절터라고 하므로, 석가모니와 과거불까지 7부처가 오래 전에 그 일곱 곳에서 설법을 했다는 뜻이다. 당연히 석가모니 이전의 시대에는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오기는커녕 '''신라라는 나라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절의 명맥이 끊어지고 자시고도 할 것도 없다. 신라가 오래 전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었다고 주장하려는 역사왜곡인 것이다. 흥륜사 터가 원래 천경림(天敬林)이라는 숲이었는데 신라 토속신앙의 성지였으므로, 분황사 터도 원래는 천경림처럼 토속신앙의 제사터였을 가능성이 크다.[2] 재미있는 것은 분황사가 세워진 해에 선덕여왕은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새로 바꿨다.[3] 세워지기는 고선사의 서당화상비가 가장 오래되었지만 고선사는 현재 덕동댐 밑으로 수몰되었다.[4] 이 화쟁국사비는 조선 후기 이전 어느 시점에 사라져서 추사 김정희가 '화쟁국사비가 있던 곳'이라고 남겨둔 글이 있다.[5] 모전석탑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걸 전탑이라고 하면 틀린 거라 시험에서 함정문제로도 많이 나왔지만, 아무튼 전탑 모양을 흉내낸 거라 홍성민도 전탑으로 헷갈린 듯.[6] 출처: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7] 기왓장에 시주한 사람의 이름하고 그 사람의 소원 적고 얼마씩 내는 식으로.[8] 경내에 있는 돌우물이 아니라, 분황사 북쪽 담에서 약 33 m 떨어진 또 다른 신라 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