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궁
1. 개요
壽進宮
조선의 별궁이다. 한성부 중부 수진방,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종로구청 일대에 설립되었다. 이 자리는 건국 초 정도전이 살던 집터의 일부이다.
유래 자체는 조선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이 사망하자 영장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수진궁(壽進宮)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으나[1] 나중에 원래 예종의 둘째아들이자 평원대군의 봉사손 제안대군의 집을 사당으로 사용하면서 봉작(封爵)을 받기 전에[2] 사망한 왕자녀들과 출가하기 전에 사망한 12세 이하의 어린 공주ㆍ옹주들의 제사를 합동으로 모시는 곳으로 바뀌었다.
1544년(중종 39년)에 고쳐 지었고 인조 이후로는 후사가 없는 왕자의 집안 재산과 대비전의 사적인 돈을 조달하고 관리하는 곳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숙종 연간에는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의 명으로 공식적으로 완전한 제사궁이 되었다.
훗날 정조는 비빈과 대군들의 묘와 사당에서 제사를 자주 지내는 것은 예법에 맞지 않다면서 묘에서는 봄과 가을에 제향을 거행하도록 하고, 수진궁에서는 한식에 행하도록 하면서 이 외에 것은 모두 없애도록 명하였다.
묘소는 총 20위이다. 평원대군, 강령부부인, 제안대군, 상산부부인, 영창대군, 명선공주, 명혜공주 등 이상 7위의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에 있었고, 용성대군, 의창군, 양천군부인 등 이상 3위의 묘소는 풍양(豐壤)에 있었다. 낙선군과 동원군부인의 묘소는 청송군에, 숙신공주의 묘소는 서산시에, 귀인김씨의 묘소는 망우리에 그리고 소의유씨의 묘소는 은평 진관에 있었다. 정보가 전혀 없는 한 '대군 아기씨'의 묘소는 광주에, 숙의 나씨의 묘소는 서산에, 숙원 장씨의 묘소는 연서에, 명빈 김씨의 묘소는 아차산에, 그리고 경빈 이씨의 묘소는 풍양에 있었다. 이상은 매년 한식에 제사를 지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고종이 유길준에게 찬조금과 함께 흥사단 사무실로 쓰게 했으며 순종 때는 이 곳에서 측량술을 가르치던 사립교육기관인 수진측량학교를 개교하였다. 1909년(융희 3년)에 폐궁되었다. 폐궁 후 1년은 궁으로서의 모습이 엄연히 존재하였지만 1년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며 망국이 되자 훼철되어 일본인들에게 팔려나갔다.
2. 기타
- 1618년(광해군 10년) 4월에 수진궁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수진궁에 도적이 들어 물건이 없어지자, 광해군이 도적으로 유력한 자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다. 유력한 용의자인 김언추라는 사람이 잡혔는데 그는 끝까지 무죄라고 주장한다. 이 일로 포도대장과 종사관 등은 심한 문책을 당했고 역시 분노한 포도청에서는 도성 전 지역을 샅샅히 뒤져 죄를 입증할 증거나 다른 공범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김언추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어쨌든 왕실의 궁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죄목이 있으니(또는 억울하게 뒤집어 썼으니) 사형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 이 궁에서 수진동이란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수동 혹은 수진방굴 · 수진방골 · 수진박골이라고도 불렸다. 수진동은 이후 수송동과 청진동 일부로 나뉘는데 수송동의 수가 수진동의 수에서 이어져 오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흐릿하게나마 수진궁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