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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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왕족
조선 전기의 왕족.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적차남이다.[3] 예종이 17살에, 안순왕후가 22살에 본 아들로, 비록 금지옥엽이던 원자에서 대군으로 전락하여 사촌 형 성종에게 왕위계승에서 밀렸지만 중종 때까지 종실의 어른으로 대우를 받으면서 천수를 누렸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다.
1.1. 밀려난 왕위 계승
예종이 12살에 장순왕후에게서 본 이복형 인성대군은 3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다. 더군다나 예종은 후궁들에게서도 아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본래대로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할 귀한 왕자였다 .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다(4살)는 이유로 할머니 정희왕후가 덕종(의경세자)의 차남 잘산군을 지목하여 왕위에 올리며 제안대군은 완전히 물 먹었다.[4][5] 성종이 나름대로 괜찮은 임금이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지만. 성종 5년(1474년) 증조부 세종대왕의 적7남인 평원대군[6] 임(琳)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한때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왕위 계승서열1위의 원자였지만 대군의 봉사손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조처는 성종 초기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본인의 뜻과는 상관 없이 역모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쉬운 왕실 종친을 보호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설도 있다. 이로인해 제2의 단종이 되는 일은 면했다.
1.2. 성품
제안대군은 멍청하기로 유명해서 당대에 여러가지 일화를 남겼다. 심지어 '''남녀 간의 일을 알지 못해서''' 자손을 낳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남아있다.
명종 때의 <패관잡기>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이 일화를 두고 패관잡기의 저자인 어숙권은 제안대군을 "원래 남녀관계의 일이란 인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거늘[7] 이것을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제안은 정말 바보가 맞다"고 평하기도 했다. 여기서 어숙권의 말은 '성관계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조차'''도 몰랐다'는 의미다. 오줌 누는 하녀의 생식기를 두고 "메추리 둥지"(...)라 했다는 이야기도.성종께서 예종의 후사가 없음을 마음 아프게 여겨 일찍이 "제안에게 남녀관계를 알게 해주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하시니, 한 궁녀가 나섰다. 궁녀는 밤에 그 집에 가서 제안이 잠든 사이 '''그의 음경을 더듬어 보았더니 제대로 일어서고 빳빳했다.''' 곧 몸을 굴리어 서로 맞추어 보았더니, 잠에서 깬 제안은 깜짝 놀라 큰 소리를 지르면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자꾸 그것을 씻으면서 '''"더럽다, 더럽다"'''고 부르짖었다.
그런데 남녀 관계의 일을 모르는 사람치고는 남녀 관계 스캔들을 좀 거하게 터뜨린 사람이기도 하다. 흔하디 흔한 첩이나 기생도 아니고 '''정실 부인''' 문제로, 그것도 불과 10대의 나이에 큰 일 하나 터뜨렸다. 즉 14세 때 간질 있는 자기 아내가 싫다고 엄마(안순왕후)한테 졸라 이혼한 후, 멀쩡히 재혼까지 했는데 3년 후 재혼처와 또 이혼하고 전처와 재결합한 것.[8]
둘째 부인[9] 과 이혼하는 과정이 가관이었다. 아무런 명분 없이 다짜고짜 이혼할 수는 없는데, 이혼한 전처와 가까워지면서 이혼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제안대군은 여종 금음물, 내은금 등을 시켜서 독수공방하는 아내를 유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내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여종들을 꾸짖고 내치자, 아예 아내가 잠을 잘 때 몰래 여종들을 동침하게 해서 아내를 레즈비언이라고 모함했다. 하지만 아내가 완강히 자신이 모함을 당했음을 주장하자 여종들에 대한 조사가 실시되었고, 여종들이 제안대군의 명을 받아서 자작극을 벌였음이 드러났다. 여종들은 곤장을 맞고 유배되었고 아내와 이혼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제안대군은 어머니인 안순왕후를 찾아가서 징징대며 이혼을 시켜달라고 애걸복걸했고, 안순왕후는 성종을 찾아가서 "둘째 며느리가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이혼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죄도 없는데 어찌 이혼을 시키냐"고 난색을 표하던 성종도 마지못해서 이혼을 허락했고, 소박맞은 아내는 얼마 안 가서 죽고 말았다.[10]
성종은 제안대군에게 3번째 부인을 들여주려 했으나, 제안대군이 "전처 김씨와 재결합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살겠다"고 시위하자, 결국 혀를 차면서 3년만에 전처와 재결합을 허락했다. 이때 '나 허락 안 해주면 평생 혼자 산다'고 협박하자, 성종이 "네가 네 처를 미워해서 내치지 않았느냐? 왜 미친년 널 뛰듯 하냐?'라고 반문하는데, '난 그런 거 모르겠고. 허락 안 해주면 평생 혼자 살 테다'라고 막가파식으로 응수하여 결국 허락을 받아낸다.## 실록을 읽는 후대 사람도 웃기는데, 당대에는 어떠했겠나 싶은 대목이다. 이 모든 게 10대 중반에 일어난 일이니, 어찌 보면 숙종보다 더 대단한 남자다.[11] 여담으로 이때 사촌형 성종에게 상소할 때는 언문(한글)으로 올린 탓에 승정원에서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여야 했다. 일반 사대부 정도의 교양도 없었다는 얘기다.[12]
이 때문에 죽고 난 뒤 받은 시호가 영효(靈孝)인데, '영(靈)'은 시법해에 의하면 '어지럽지만 해를 끼치지 않은 것을 "영"이라 한다(靈亂而不損曰靈)'는 말이 있다. 삼국지에 나오는 한나라 영제를 생각하면 되는데 전임 군주 환제와 함께 '환령(桓靈)'이라는 영이란 단어 자체가 암군의 대명사로 쓰이는 단어다. 한마디로 멍청했다는 것. 그렇긴 해도 청상과부 엄마 안순왕후에게는 더없는 효자였어서 '효(孝)'자도 붙었다.
1.3. 연기?
이런 행동을 두고 멍청이인 것 처럼 연기를 하여 목숨을 보존하려 한 계책이었다는 설도 많이 있다. 제안대군은 혈통만 보자면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나, 효종 때 이석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종의 정통성에 큰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 까딱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이 모든 사건들은 적절한 바보짓으로 의심을 피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역모에 엮이는 일을 피하기 위한 연극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평소에는 멍청해 보였지만 유교 예법을 따라야 할 때는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고[13] 때문에 제안대군이 진짜 바보인지 연극이었는지는 수백 년간 논쟁거리로, 당장 중종실록의 〈제안대군 졸기〉에서 사관도 당시 이런 소문을 실어가며 연극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었고, 100여 년 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제안대군은 역모에 휘말리는 걸 두려워해 바보짓을 하고 자손도 두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그의 오촌당숙인 구성군 이준이 죽은 때가 그가 13살 되던 때로, 구성군은 "너무 완벽해서 모함 받은 왕족"의 대표인사였다. 비슷하게 구성군의 사촌동생이자 제안대군의 또다른 오촌당숙인 영순군 이부는 몇번이나 목이 달아날 뻔 했고 스트레스 때문에 요절했다. 그런데 상기했듯 제안대군은 '군'인 당숙들에 비해 월등히 정통성이 높았고, 심지어 이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보다도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안대군이 조금만 똘똘한 걸 티내도 위험했을 가능성은 어마어마하게 높다.
원인이야 어찌 됐든 제안대군은 전임자(?) 양녕대군과 달리 재혼 스캔들을 제외하면 딱히 망나니 짓은 하지 않았고, 조선 최악의 피바람이 불었던 시기인 연산군, 중종 때에도 '멍청해서(?) 왕위를 위협하지 않는 왕실 어른'으로 잘 대접받으며, 중종 때 60세까지 장수했다. 거기에 불화의 씨가 될 자손을 낳지 않았기에 후손이 없어 후대까지 역모에 휩싸이지도 않았다. 다만 친자손은 없었지만 봉사손을 둬서 전주 이씨에 제안대군파가 있다. 이 모든 게 연기였다면 월산대군보다도 무서운 자기 관리.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판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떤 의미든지 간에 (연기이든 아니든) 이 사람과도 굉장한 공통점이 있다
오촌 조카 연산군을 홀린 여자로 이름이 높은 장녹수는 본래 그의 노비였다. 그의 가노와 결혼해서 그 집 종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제안대군이 직접 넘겨주었다고'''. 연산군이 여자를 하사하기도 하였지만 대군저에 있는 미모의 노비들을 자꾸 데려가는 바람에 연산군에게 삐쳤다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는 연산 11년에는 집까지 연산군에게 징발 당했고, 연산군은 제안대군의 집에 뇌영원(蕾英院) 이라는 이름의 가흥청(假興淸)을 설치하였다. '''일국의 왕족의 집이 기생들의 거처가 되고 만 것이다'''. 그나마 값을 잘 쳐줘서 징발했다고는 하지만.
성종은 원자였던 제안대군을 밀어내고 국왕에 오른 처지라, 늘상 마음의 빚을 안고 있었다. 숙모 안순왕후, 사촌누이 현숙공주(대군의 누나), 사촌동생인 대군의 일이라고 하면 일단 한 수 접어주는 경향이 실록에 자주 비친다. 현숙공주의 남편 풍천위(豊川尉) 임광재(任光載)[14] 가 난봉꾼 짓을 하도 많이 해서 공주가 성종에게 일러바쳐 귀양을 가게 되고, 결국 유배지에서 병사하는 사건이 대표적이다.
1.4. 저택과 수진궁
제안대군이 살던 집은 이후 수진궁이라는 이름의 왕실 사당으로 바뀌었다. 작위를 받기 전에 죽은 왕자녀, 그리고 출가 전에 죽은 공주, 옹주들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 수진궁은 이후 구한말 때 흥사단 사무실, 수진측량학교 건물 등으로 사용하다가 1909년 공식 폐궁되었다. 현대의 서울 종로구 구청사 인근이다.
1.5. 제안대군 신도비명
공(公)의 휘(諱)는 현(琄), 자(字)는 국보(國寶)이다. 예종 양도 대왕(睿宗襄悼大王)의 아들로, 어머니 안순 왕후(安順王后)는 추충 정난 익대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 춘추관 관상감사(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春秋館觀象監事) 청천 부원군(淸川府院君) 증시(贈諡) 양혜공(襄惠公) 한백륜(韓伯倫)의 딸이다.
공은 성화(成化) 병술년(丙戌年, 1466년 세조 12년) 2월 13일에 창덕궁(昌德宮) 수강전(壽康殿)에서 출생하였다. 공의 나이 4세 때 예종이 승하(昇遐)하였다. 예종에게는 아들 하나만 있었는데 공이 어려서 총명(聰明)하지 못하자 정희 왕후(貞熹王后, 세조비)가 성종 대왕(成宗大王)을 받들어 예종의 후사(後嗣)로 삼았다. 공을 제안 대군(齊安大君)에 봉하고는 평원 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의 뒤를 잇는 후사로 삼으니, 평원 대군은 바로 세종 대왕(世宗大王)의 다섯째 아들이다.
공의 나이 12세 때 상주 김씨(尙州金氏)에게 장가들어 배필로 삼으니, 사도시 정(司寺正) 김수말(金守末)의 딸로 상산 부부인(商山府夫人)에 봉해졌는데, 얼마 후 안순 왕후의 뜻을 따라 버렸다. 다시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 박중선(朴仲善)의 딸에게 장가드니, 이때 공의 나이 14세였다. 공은 후에 상산 부인을 잊지 못하여 21세에 이르러 또 왕후의 명으로 다시 합하여 지금까지 무양(無恙)하다. 공은 안순 왕후의 상(喪)을 당하여 홀로 별채에서 거상(居喪)하여 상기(喪期)를 마치고도 오히려 애모(哀慕)함이 쇠퇴하지 않았으니, 그 성효(誠孝)는 하늘로부터 품부(稟賦)받은 것이다.
성종(成宗)이 내린 수찰(手札)은 아무리 짧은 것이라도 꾸며서 족자나 병풍을 만들어 놓고 항상 보배를 구경하듯 재삼 펴 보았으니, 그 공근(恭謹)함이 이와 같았다. 평생 동안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고 날마다 성악(聲樂)을 일삼아 몸소 악기를 연주하였는데, 모두 절주(節奏)가 맞아 비록 스스로 음률(音律)에 정통하다고 하는 자도 모두 굴복하였다. 집안의 여종들도 모두 감화되어 음악을 해득하게 되었는데 연산주(燕山主)가 전후하여 그 여종 넷을 궁중으로 들이고도 계속하여 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이 따르지 않자 연산주가 노하여 겁을 주어 위협하였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이때부터 악기를 물리치고 쓸쓸하게 거처하자 연산주 역시 죄를 주지 못하였는데, 성상(聖上)이 즉위하는 날 다시 전처럼 음악을 연주하니, 사람들이 공이 처변(處變)을 잘한다고 하였다.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년)에 공이 일찍이 병을 앓자 임금이 친히 그의 집에 거둥하여 갖추 위로하였으니, 아! 공의 성대한 영총(榮寵)과 성상의 지극한 돈목(敦睦)은 근고(近古)에 없던 바였다. 이때에 이르러 발에 종기가 나니, 임금이 의약(醫藥)을 내려 치료하게 하였으나 효과가 없이 위태롭게 되었다. 임금이 중사(中使)를 보내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임금의 은혜가 지극히 중한데 신(臣)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고는,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는데, 이때가 가정(嘉靖) 을유년(乙酉年, 1525년 중종 20년) 12월 14일로, 수(壽) 60세였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임금이 몹시 슬퍼하여 3일 동안 조회(朝會)를 보지 않았으며 부의(賻儀)를 특별히 더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도승지(都承旨) 유여림(兪汝霖)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공은 자식이 없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대군(大君)의 후사가 되었으니, 나도 반드시 대군으로 후사를 삼겠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이천정(伊川正) 이수례(李守禮)에게 상사(喪事)를 주관하라 명하고 또 중사(中使) 박승은(朴承恩)과 서원군(西原君) 한순(韓恂)에게 명하여 장사(葬事)를 감호(監護)하게 하였다. 계빈(啓殯)하자 제사(諸司)로 하여금 한 사람이 문밖에서 조전(祖奠)하게 하고, 또 3년상을 마칠 때까지 봉록(俸祿)을 지급하라 명하였으니, 모두 특이한 은수(恩數)였다. 병술년(丙戌年, 1526년 중종 21년) 3월 초2일, 광주(廣州) 중도음촌(中道陰村) 언덕에 장사지냈다.
서원군은 공의 외숙(外叔)이 되는데 부인(夫人)의 명으로 나 이행(李荇)에게 묘도 문자(墓道文字)를 청하기에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 서(序)하고 이어서 명(銘)을 쓰니, 그 사(詞)는 다음과 같다.
예종(睿宗)의 적자(嫡子)요 세조(世祖)의 손자이시네
왕위(王位)는 돌아가는 곳이 있어 평원 대군(平原大君)의 후사가 되었네
대군(大君)의 호 내리시니 지위가 아주 존귀했네
성종(成宗)께서 우애하사 총사(寵賜)가 빈번했네
성악(聲樂)을 잘하시어 금슬(琴瑟)과 훈지(壎篪)를 연주했네
세상 운수 항상 태평하지 않아서 어려운 때를 만났었네
죄 또한 미치지 않아서 스스로 악기를 끊어버렸고, 성인(聖人)이 즉위하자 전처럼 다시 연주하였네
공은 임금의 백숙(伯叔)이 되어 특별한 은혜로 대하였네
전에 병환이 나서 궁궐에 알려지자, 임금이 몸소 임어(臨御)하여 거가(車駕)가 문 앞에 머물렀네
의약을 내려 치료하라는 임금의 말씀 따뜻하여, 영총(榮寵)이 융숭함이 예전에 없던 바이네
부귀(富貴)는 항상 하기 어렵고 세월은 흐르기 마련이네
사지(四肢)의 질환으로 돌아가니 명(命)인데 무슨 말을 하랴? 화복(禍福)의 즈음에는 혼암(昏暗)함으로 보호하였으니, 60세 나이 장수하였고 원통할 것 없네
공이 후사(後嗣)를 두지 못했으니, 어찌 뜻한 바 없으랴? 감산(坎山)의 언덕에 이런 정혼(精魂)이 묻히었네
비석에 이 글을 새기니 후일 속이지 않으리라 '''ⓒ'''
1.6. 대중 매체
연산군과 장녹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인물이라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연기했는데, 작가의 시각에 따라서 다르게 묘사된다.
신영균이 연산군으로 나온 신상옥 감독의 영화 <연산군(1961년)>에서는 허장강이 역을 맡아서 억울하게 왕 자리를 뺏겨서 세월아 네월아 눈물 짓고 사는 허탈한 모습으로 잠깐 나온다.
드라마 장녹수에서는 MBC 주말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변태' 미술교사로 개그 캐릭터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백윤식이 열연하면서 장녹수의 캐릭터들이 역대 연산군의 극화 중 최고라는 평판에 일조했다. 극중 제안대군은 권력에 뜻을 버리고 풍류에 맞춰 사는 은일지사의 모습을 보여주며, 장녹수의 연모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연산군의 폭정을 간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어렸을 때부터 제안대군을 따랐으나 제안대군이 하도 잔소리를 하자 나중에는 장녹수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면 그 선물로 제안대군을 죽여주겠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다행히도(?) 장녹수는 딸을 낳아 제안대군은 목숨을 건졌다.(...) 나중에는 유자광이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하자 화를 내며 쫓아낸다. 참고로 둘째 부인의 레즈비언 사건은 제안대군의 자작극이 아니라 진짜로 둘째 부인이 여종과 관계를 가진 걸로 묘사되었다.
왕과 비에서는 박찬환이 제안대군으로 나와 연산군의 외로움을 달래면서 친하게 지내면서도, 자신의 일생을 망친 인수대비를 저주하면서 연산군을 복수의 도구로 이용하는 야누스 같은 인물로 나온다. 장녹수와 같은 작가임에도 이 점에서는 묘사가 서로 다르다. 주로 자신의 여종이었던 장녹수와 함께 인수대비에 대한 복수심를 부채질하는 편.[15] 183화에서 "어쩌자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드시는 것입니까? 대군께서는 왕손이 아니십니까? 종묘사직을 먼저 생각을 하셔야지요."라고 말하는 신수근에게, 냉혹한 말투로 "'''그러자면 먼저, 대궐 안팎에서 인수대비의 그림자를 말끔이 씻어내야 할 것이야!'''"라고 말한다. 그래도 정이 들기는 들었는지 인수대비의 환영때문에 미쳐버린 연산군에게 진심어린 충언을 한 몇안되는 인물. 뭐 그 전까지 실컷 부추겨놓고서 마지막에 와서 그런들 무슨 소용이겠냐만은...
욕망의 불꽃에서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딱 맞는 편. 왕과 나에서는 차분하고 단아한 순정파로서 누구와도 잘 지내는 호인으로 묘사되지만, 장녹수를 소개해주는 바람에 결과적으론 악역으로 꼽히기도 한다.
JTBC의 사극 인수대비에서도 어리숙하고 바보스러운 인물로 나온 것 같았으나, 마지막회에서 나와 연산군과 같이 술을 마시던 도중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가고, 연산군이 앉아 있던 자리를 보며 "'''대비마마, 그 자리는 본래 저의 자리였습니다.'''"라고 중얼거리는데, 그걸 봐서는 바보스런 모습은 연기였다는 설을 따른 모양이다. 처음 태어났을 때 울지를 않아 친할머니 정희왕후가 허겁지겁 달려와 얼러서 겨우 울음을 터뜨리게 할 정도로 힘들게 태어났으며, 훗날 성종의 아내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송이는 아기가 울자 절망한다.[16]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연산군에 빙의한 주인공이 제안대군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다. 여기에서 제안대군은 종친으로서의 위엄도 없고 야심도 없이 그저 유흥이나 즐기면서 사는 한량으로 등장한다. 연회 도중 가무가 뛰어난 여종이 있어서 보여준다며 소개해줬는데, 이를 본 연산군은 '앳된 외모에다 가무도 참 훌륭하다'라고 칭찬한다. 그러자 제안대군은 '벌써 서른이 넘은 아이입니다. 이름은 '''장녹수'''라고 하죠. 원하신다면 궁으로 보내드릴까요?'라고 말한다. 이에 퍼뜩 정신이 든 주인공은 정중하게 사양하고, 이후엔 궁중 연회 때 따로 제안대군에게 부탁해서 초대 가수 형태로 부르기만 한다.
2. 고려의 왕족
1238년 ~ 1312년
신양공(新陽公)의 아들로 이름은 숙(淑). 정간왕의 8대손이 된다. 제안공에 봉해졌는데, 충렬왕 때 삼사(三司)의 일을 한 공으로 진봉되어 '제안대군'이 되었다[17] .
원종의 2비 경창궁주의 장녀 경안궁주와 혼인했는데 사별한 후, 충렬왕의 2비 정화궁주의 장녀 정녕원비와 재혼했다. 경안궁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하나 있고, 정녕원비와의 사이에선 자식이 없다.
처남이 되는 충선왕이 원나라에서 '전지정치'라는 원격 통치(...)에 들어가자 그가 왕의 업무를 분담했다.
그의 아들 왕현(王眩)은 3남 4녀를 두었다. 덧붙이자면 충선왕의 후궁 순비 허씨(順妃 許氏)는 본래 왕현의 아내로, 왕현이 1300년에 사망한 후 충선왕과 재혼했다(!). 이 영향인지 2녀는 원나라의 중서좌승 길길반의(吉吉反懿)와, 3녀는 원인종 아유르바르와다와 혼인했다. 아유르바르와다의 제3황후인 백안홀독(伯顔忽篤) 황후가 제안대군의 손녀를 말하는 것. 4녀의 아들이 공양왕의 장인 노진으로, 공양왕의 왕비 순비 노씨는 제안대군의 후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