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거 레이 로빈슨
1. 개요
'''복싱 P4P의 제왕이자 복싱 역사상 최고의 아웃복서'''[4] 로서 前 세계 웰터급, 미들급 챔피언. 키가 180cm이고 리치가 184cm이였던 미국의 오소독스 스타일의 아웃복서였다. 통산전적은 '''200전 173승 19패''' 6무승부 2무효 '''108KO'''. 본명은 워커 스미스 주니어(Walker Smith Jr.)이다.'''"내가 헤비급에서 역대 최강자라면, P4P[2]
역대 최강자에서는 나는 여전히 슈거 레이 로빈슨이라고 말할 것이다."[3] '''
'''무하마드 알리'''
세계 미들급 타이틀을 5번 석권하면서 복싱 역사상 '''동일 체급 세계 타이틀 5번 석권'''을 최초로 기록한 선수이기도 하다. 동일 체급에서 5번 세계 타이틀을 따낸 건 복싱 기구나 체급이 늘어난 21세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다.
2. 어린 시절
1921년 5월 3일 미국 조지아주의 에일리에서 태어났다. 1남 2녀 중 막내로, 아버지 워커 스미스 시니어는 농부였다. 집안이 가난했기에 일거리를 찾는 아버지를 따라 디트로이트로 이사했다가 12세가 되던 해에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어머니를 따라 뉴욕으로 이사했다. 학창 시절부터 농구와 권투 등의 운동을 즐기면서도 의사가 되길 꿈꿨으나, 가난한 집안 여건 탓에 15세 때 고교에서 자퇴하고 권투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3. 아마추어 복서
아마추어 복싱 경기에 나가기 위해서는 미국 체육협회 회원증이 필요했다. 만 18세부터 회원증을 취득할 수 있었기에 1936년 당시 15세였던 로빈슨은 원래 경기에 나갈 수 없었지만, 연상의 친구 레이 로빈슨의 회원증을 빌려 대신 경기에 나갔다. 경기 후 한 관중이 '설탕처럼 달콤했다(sweet as ''sugar'')'고 말하면서 이후 워커 스미스라는 본명 대신 '슈거 레이 로빈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됐다. 로빈슨은 아마추어 전적 '''85승 무패 69KO'''를 기록했다. 특히 1라운드 KO만 40회였다고 한다. 1939년 골든 글러브 페더급, 1940년 골든 글러브 라이트급 토너먼트에서 우승했다.
4. 프로 복서
4.1. 웰터급
1940년 10월 4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 에체베리아를 상대로 프로 데뷔전을 가졌는데, 2라운드 TKO로 승리했다. 그리고 1942년까지 '''40전 전승 29KO'''를 기록하면서 링(Ring)지는 로빈슨을 1942년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다. 프로 데뷔한지 불과 3년차인 선수인데다 챔피언이 된 적도 없었기에 상당히 이례적이었는데, 단순히 전적만으로 선정된 건 아니고 前 세계 웰터급 챔피언 프리치 지빅[5] , 당시 세계 라이트급 챔피언이던 새미 앵곳[6] , 이후 세계 웰터급 챔피언이 되는 마티 서보 등 당대 최고로 손꼽히던 선수들을 꺾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1943년 2월 5일 영화 레이징 불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제이크 라모타의 두 번째 경기에서 판정패하며 프로 첫 패배를 당했다. 다만 당시 라모타는 로빈슨보다 16파운드(7.3kg) 더 나갔다[7] . 그로부터 3주 후인 2월 26일에 라모타의 세 번째 경기에서는 판정승을 거뒀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1943년 2월 27일에 로빈슨은 본명인 워커 스미스로 돌아와 미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미군 기지를 돌면서 군인들에 대한 응원차로 경기를 가졌는데, 흑인 병사는 경기에 관전할 수 없어 이에 로빈슨이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다가 유럽 파병을 앞뒀던 1944년 3월 29일에 로빈슨은 기지에서 사라졌다가 4월 1일에 길가에서 발견됐다. 5일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겨우 의식을 찾았는데 로빈슨은 기지 막사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다는 것 이외에는 그동안의 기억을 잃었고, 이로 인해 정신질환을 진단받아 같은 해 6월 3일에 명예 제대했다. 그런데 로빈슨이 제대한지 불과 얼마되지 않아 연합군이 유럽 본토로 진출하는 등 추축국에 대해 본격적인 반격을 앞둔 상황에서의 갑작스런 제대로 당시 언론은 로빈슨을 탈영병으로 낙인 찍으며 비난했다.
제대 후 1년간의 휴식을 가졌던 로빈슨은 1945년 10월 링에 복귀해 다시 연승가도를 달렸고, 1946년 12월 20일 당시 공석이었던 세계 웰터급 타이틀[8] 을 두고 토미 벨과의 경기에서 판정승을 거두면서 마침내 챔피언이 됐다. 1943년 라모타에게서 첫 패배를 당한 후 토미 벨과의 경기 전까지 로빈슨은 33승 무패 1무를 기록했었다. 그토록 뛰어난 전적을 기록했음에도 타이틀 도전은 늦은 편이었는데, 로빈슨이 당시 복싱계를 암암리에 주무르고 있던 마피아에게 비협조적이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빈슨은 화려한 스타일로 체급내 경쟁자들을 대부분 정리했던 터라[9] 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기에 프로모터로서는 그런 로빈슨을 마냥 썩히고 있을 수가 없었다.
1947년 6월 24일 지미 도일을 상대로 첫 타이틀 방어전이 예정됐다. 그런데 경기 전날 로빈슨은 경기 중 도일을 죽이는 악몽을 꿨다. 불길한 예감에 로빈슨은 경기 취소를 요구했지만 프로모터측이 신부와 목사를 불러 악령을 쫓는 퍼포먼스를 하면서 경기는 강행됐고, 8라운드 TKO로 로빈슨이 승리를 거뒀다. 경기 후 의식을 잃은 도일은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다음날 새벽 결국 숨을 거뒀다. 원래 로스앤젤레스 출신인 도일은 이전부터 몇 차례 KO패를 당했고 이에 캘리포니아주 복싱위원회가 도일의 몸상태를 우려해 경기 출장을 제재하자 도일은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로 옮겨 선수 생활을 이어가면서 화를 자초했다. 세계 타이틀전에서 발생한 최초의 사망사고로, 로빈슨은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될 뻔하기도 했다. 기소되지 않으면서 법적인 책임으로부터는 피할 수 있었지만 로빈슨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2차 방어전을 가지기 전까지 4차례 논타이틀 경기를 하면서 이 경기들의 수입 모두를 도일의 모친에게 전했고 도일의 모친은 집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2015년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이 일화를 다뤘다.
1950년 3월 22일 조지 코스트너를 두 번째로 상대했다. 앞서 1945년 첫 번째 경기에서도 로빈슨이 KO로 이겼는데, 코스트너는 로빈슨과의 재대결을 앞두고 '슈거'를 자신의 별명으로 칭하면서 로빈슨을 도발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로빈슨은 '슈거'는 자신의 이름이라며 1라운드만에 끝날 거니 글러브 터치를 하는 게 좋다고 코스트너에게 경고했고, 자신이 말한대로 1라운드 2분 29초만에 코스트너를 KO시켰다.
웰터급 챔피언이 된 후 1950년까지 로빈슨은 총 5번의 타이틀 방어전과 38번의 논타이틀 경기를 치르면서 점점 체중 조절의 한계를 느끼게 됐고, 1951년부터는 미들급으로 월장하기로 했다.
4.2. 미들급
당시 세계 미들급 챔피언은 로빈슨에게 첫 패배를 안겼던 제이크 라모타였다. 1951년 2월 14일에 라모타에게 도전했는데, 영화 레이징 불에서 묘사됐듯이 로빈슨이 일방적으로 두들기면서 13라운드 TKO승을 거뒀다. 혹자는 이 경기를 두고 복싱판 피의 발렌타인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이로써 로빈슨은 라모타와의 6경기에서 5승 1패를 기록했다[10] .
1951년 6월 26일에 독일에서 유럽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게르하르트 헥트와의 경기에서 2라운드 때 키드니 블로[11] 로 KO시키면서 로빈슨의 반칙패가 선언됐다가 이후 무효로 정정됐다.
1951년 7월 10일 영국에서 유럽 미들급 챔피언 랜디 터핀을 상대로 판정패하면서 타이틀을 내주고 말았다. 로빈슨의 커리어 사상 두 번째 패배로, 1943년 라모타전에서의 첫 패배 이후 '''88연승''' 행진도 마감됐다[12] . 로빈슨이 1950년부터 유럽 각지를 원정다니며 도전자들을 쓰러뜨려 왔는데, 그런 로빈슨을 꺾은 터핀은 단숨에 영국의 스타로 떠올랐다. 하지만 1951년 9월 12일 뉴욕 폴로 그라운즈에 6만명의 관중이 몰린 가운데 열린 터핀과의 재경기에서 10라운드 TKO로 미들급 타이틀을 탈환했다. 1951년 링지는 로빈슨을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다.
1952년 3월 13일 보보 올슨을 상대로 1차 방어에 성공했고, 같은 해 4월 16일에는 영화 '상처뿐인 영광'의 주인공인 前 세계 미들급 록키 그라지아노를 상대로 3라운드 KO로 2차 방어에 성공했다.
4.3. 라이트 헤비급 도전 그리고 첫 번째 은퇴
2차 방어에 성공한 후 로빈슨은 3체급 석권을 목표로 당시 세계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인 조이 맥심에게 도전하기로 하며 미들급 타이틀을 반납했다.
1952년 6월 25일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맥심과의 경기에서 체격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이 경기를 주도해 갔지만, 점점 체력이 떨어지며 13라운드 TKO패했다. 당시 39도나 이르는 더위 때문에 10라운드 때는 심판이 교체되는 일도 있었고, 로빈슨은 열사병으로 13라운드 종료된 후 코너에 주저앉았다가 14라운드를 시작하는 공이 울리고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는 로빈슨의 커리어 첫 TKO패이자 유일한 TKO패였다. 경기 후 로빈슨은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로빈슨은 쇼 비즈니스를 시작해 노래와 탭댄스를 하지만 사업이 잘 되지 않으면서 1954년 다시 링에 복귀하기 위해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4.4. 미들급 복귀
1955년 1월 5일 조 린든을 상대로 6라운드 KO로, 2년 반만의 복귀전에서 승리를 거뒀다. 2주 후인 1월 19일 랄프 존스를 상대로 판정패하지만, 다시 4연승을 기록하며 당시 세계 미들급 챔피언인 보보 올슨을 상대하게 됐다. 로빈슨도 한물 갔다는 세간의 평가가 무색하게 2라운드 KO로 통산 세 번째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다. 1956년 5월 16일 시카고 리글리 필드에서 보보 올슨을 상대로 재대결하는데 이번에도 4라운드 KO로 1차 방어전에 성공했다.
1957년 1월 2일 진 풀머를 상대하는데 예상 밖으로 만장일치 판정패하며 미들급 타이틀을 내주지만, 같은 해 5월 1일 풀머와의 재대결에서 5라운드 KO로 다시 미들급 타이틀을 탈환한다. 특히 이 경기에서 풀머를 KO시킨 로빈슨의 레프트 훅은 복싱 역사상 가장 완벽한 KO펀치 중 하나로 회자된다.
1957년 9월 23일 前 세계 웰터급 챔피언인 카르멘 바실리오를 상대로 판정패하며 다시 미들급 타이틀을 내주고 만다. 이로써 로빈슨은 1년에 두 번이나 같은 타이틀을 뺏긴, 진기한 기록을 남겼다.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링지는 바실리오와의 경기를 올해의 경기로 선정했다.
1958년 3월 25일 바실리오와의 재대결에서 판정승으로 다시 미들급 타이틀을 탈환, 통산 5번째 미들급 챔피언이 됐다. 링지는 이 경기도 올해의 경기로 선정했다.
이후 1년 넘게 방어전을 치르지 않으면서 1959년 8월 NBA(이후 WBA)는 로빈슨의 세계 미들급 타이틀을 박탈했다. 뉴욕주 공인 세계 미들급 타이틀만 보유하게 됐는데, 이마저 1960년 1월 22일 폴 펜더와의 경기에서 판정패하며 잃었다. 같은 해 6월 10일 폴 펜더에게 재도전하지만 또 지고 만다. 그동안 수많은 강적을 상대로 승패를 주고 받은 로빈슨이었지만 설욕전에도 실패한 건 처음이었다.
1960년 12월 3일 세계 미들급 챔피언이 된 진 풀머를 상대로 도전했으나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1961년 3월 4일 다시 진 풀머에게 도전하지만 이번에는 만장일치 판정패하면서 또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이 경기가 로빈슨의 커리어 마지막 타이틀전이었는데, 이후 만 40세가 되고도 로빈슨은 계속 링에 올랐다. 전성기 시절 사치와 사업 실패로 인해 돈 벌 수단이 링에 오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1963년에는 유럽으로 원정을 떠나는 등, 타이틀과 거리만 멀어졌을 뿐 여전히 인기는 있었다.
4.5. 두 번째 은퇴
1965년 11월 10일 만 44세였던 로빈슨은 당시 미들급 랭킹 1위이며 자신보다 17살 어린 조이 아처를 상대했다. 당시 아처는 44승 1패로 전적은 좋았지만 물주먹에 가까울 정도로 펀치력은 가벼운 선수였다. 하지만 로빈슨은 7라운드 때 아처의 펀치에 다운되는 등 고전하며 판정패하고 만다. 경기 후 로빈슨은 은퇴를 선언했다.
1965년 12월 1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은퇴식이 열렸다. 보보 올슨, 진 풀머, 카르멘 바실리오, 랜디 터핀 등이 은퇴식에 참석해 대선수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5. 은퇴 후
로빈슨이 자서전에 밝힌 바로는, 그동안 번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1965년에 파산했다고 한다. 은퇴 직후 시점에는 맨하탄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는데, 은퇴식 때 받은 트로피를 올릴만한 가구조차 없어서[13] 트로피를 바닥에 뒀을 정도로 생활이 궁핍했다고 한다. 3번째 결혼을 하면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다시 쇼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에는 TV 드라마나 영화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후 생활이 어느 정도 나아졌는지 1969년에는 '슈거 레이 로빈슨 유소년 재단(Sugar Ray Robinson Youth Foundation)'을 설립했다.
말년에는 당뇨병과 알츠하이머병으로 투병하다 1989년 4월 12일 67세로 사망했다.
1981년 세계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1990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6. 평가
그동안 그가 쌓은 괴물 같은 전적도 있지만, 그의 영향으로 인하여 복싱의 기본적인 틀이 바뀌면서 모든 전문가들로부터 '''현대 복싱의 틀을 최초로 완성한 사람'''으로 불리고 있다. 로빈슨 이전까지는 인파이트 복싱이 주류였지만, 로빈슨은 풋워크를 바탕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오른손과 왼손을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펀치를 날리는 아웃 복싱을 선보였다. 당시로써는 전에 없던 화려한 스타일로 당대 강자들[14] 을 압도적인 실력차로 꺾으며 명승부도 다수 만들어냈다. 체급과 무관하게 선수를 평가하는 '파운드 포 파운드(P4P)'도 로빈슨의 기량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역사상 최고의 복서가 누구냐는 질문에 항상 첫 손에 꼽히는 레전드 중의 레전드다. 무하마드 알리, 조 루이스, 로베르토 두란, 로이 존스 주니어, 슈거 레이 레너드 같은 올타임급 복서들도 이 사람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한다 말할 정도라고. 이미 위에도 언급했지만 그 자존심 강한 알리도 로빈슨이 올타임 P4P 1위라고 인정했다.
전성기에 비서, 이발사, 안마사, 코치, 미녀를 대동하고 다니며 현대 스포츠에서의 사단(私團)을 처음 만든 사람으로도 통한다. 또한 멋지게 꾸미고 핑크색 캐딜락을 타고 다니며 사치를 부리는, 링 밖에서의 화려했던 모습도 당대 미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때 그가 소유했던 레스토랑은 1940년대와 1950년대 뉴욕을 대표하는 명소 중 하나로 프랭크 시나트라, 배우 재크 글리슨, 가수 냇 킹 콜 등 당대 명사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비록 초라한 말년을 보내긴 했지만 전성기 시절의 화려한 모습으로 로빈슨은 1950년대 미국 흑인 청소년들의 우상이었고, 이후 등장하는 슈거 레이 레너드, "슈거" 셰인 모슬리, "슈가(Suga)" 라샤드 에반스 등 "슈거"라는 별명을 쓰는 흑인 복싱선수나 종합격투가들은 모두 로빈슨을 오마주한 것이다.
7. 여담
미국복싱기자협회(BWAA)에서 1938년부터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은 로빈슨의 이름을 따 '슈거 레이 로빈슨 상'으로 불린다. 원래는 이 상을 선정하기 시작했던 1938년에 복싱기자 겸 종군기자였던 에드워드 J. 닐이 스페인 내전 취재 중 사망하자 닐을 기리기 위해 '에드워드 J 닐 상'으로 불리다 2009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정작 로빈슨이 현역 시절 선정된 건 1950년[15] 1번 뿐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슈거 레이 로빈슨의 본명은 따로 있다. 하지만 로빈슨 때문에 이름을 바꾼 사람이 있는데 바로 레이 찰스다. 레이 찰스는 본명이 '''레이 찰스 로빈슨'''으로, 슈거 레이 로빈슨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성인 로빈슨을 빼고 미들 네임인 찰스를 대신 넣었다.
3번 결혼을 했다.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얻은 장남 로니는 복싱선수가 되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롤러 스케이트 선수로 활동했다. 1968년 국제 롤러 더비 리그 MVP로 선정됐고 2004년 롤러 더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1] 오른팔잡이 격투 스타일을 부르는 것이다. 이와 반대인 왼손잡이 격투 스타일은 사우스포로 불린다.[2] pound for pound의 약자로 동 체급 내에서가 아닌 '''전 체급을 통틀어''' 최고의 선수를 매긴 순위를 말한다.[3] 실제로 ESPN이나 블리처 리포트같은 유명 스포츠 사이트에서도 복싱 역대 P4P 순위를 매기면 항상 1위를 차지한다. 단, 복싱 통계 사이트인 복스렉에서는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가 1위.[4] 알리나 타이슨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고 자부심이 매우 커 남을 잘 인정을 안하는 전설적인 복서들도 자신이 직접 인정하는 복서일 정도로 매우 유명한데, 활동기가 1940~60년대이다 보니 정작 한국 내 인지도는 비교적 매우 낮다. 이 때문에 유명 복싱선수 중 최후반부에 작성된 케이스로 속한 인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5] 150경기를 넘게 치렀던 지빅에게 커리어 두 번째 KO패를 선사했다.[6] 논타이틀전이었는데, 앵곳이 타이틀을 잃을 것을 우려해 라이트급 체중을 초과해 경기를 치렀다.[7] 라모타와의 첫 번째 경기에서도 라모타가 12.5파운드(5.6kg) 더 나갔는데, 오히려 로빈슨이 KO시킬 것처럼 강펀치를 날리며 이겼다.[8] 이전 챔피언은 마티 서보로, 이미 로빈슨은 서보를 상대로 두 번 모두 이겼었다. 1946년 2월 챔피언이 된 서보는 돈벌이를 위해 3월 미들급 선수였던 록키 그라지아노와 논타이틀 경기를 가졌는데, 한 체급 위였던 그라지아노에게 밀리다가 KO당했다. 이 경기에서 코를 다친 서보는 타이틀을 반납해야 했고 복싱 커리어도 실질적으로 끝났다.[9] 이 당시 로빈슨과 맞붙지 않은 당대 강자로는 프랑스의 인기 복서이자 이후 세계 미들급 챔피언이 되는 마르셀 세르당, 前 세계 유색인 웰터급 챔피언이었던 찰리 벌리, '강철의 사나이'란 별명을 갖고 있던 당시 세계 미들급 챔피언 토니 제일 등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10] 라모타는 로빈슨을 가장 많이 상대한 선수였는데, 이후 로빈슨과의 경기를 회고하면서 로빈슨의 링네임인 '슈거(설탕)'에서 따온 언어유희로 '로빈슨과의 경기들 때문에 당뇨병에 걸린 것 같다'고 비유했다.[11] 상대편 뒤쪽 신장 부위를 가격하는 반칙 기술.[12] 무승부와 무효 경기까지 포함하면 '''91경기 연속 무패'''로, 이는 프로 복싱 역사상 3번째로 가장 긴 기록이다.[13] 가구가 아예 없던 건 아니고 식탁이 하나 있었는데, 두께도 얇고 다리도 가늘어 트로피를 올려둘 수 없었다고.[14] 로빈슨이 이긴 선수 중 16명이 전직, 현직 챔피언이거나 로빈슨과의 경기 후 챔피언이 됐다.[15] 당시 로빈슨은 한 해 동안 '''19경기'''를 치르며 모두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