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1. 개요
러시아의 첼로 연주자.
파블로 카잘스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거장이다. 뛰어난 기술과 해석을 선보이며 첼로의 위상을 전에 없이 높였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 등 동시대의 유명 작곡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았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헌정 작품을 받아 첼로 레퍼토리를 크게 확장시켰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슬라바'''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그에게 따라오는 수식어는 '첼로의 천재'[1] 등이다.
내가 천국에 간다면 모차르트 시대에 첼로를 연주했던 사람들에게 화를 낼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악기의 진가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정말 이해 가지 않는다.'''
―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2]
2. 생애
2.1. 유년 시절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당시 소련의 공화국이었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그의 가족은 오렌부르크로 이주했고, 이어 1943년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4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고, 10살 때부터 파블로 카잘스의 제자이기도 했던 첼리스트 아버지에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1943년, 16세에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다. 그 곳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2.2. 청년 시절
1945년에 있었던 소련 연주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경연에서 우승하면서 첼리스트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50년에는 당시로서는 가장 권위있었던 스탈린상을 받기도 했다.
1955년에 그는 볼쇼이 극장 소속의 인기 소프라노였던 갈리나 비시넵스카야(Galina Vishnevskaya)와 결혼했다. 1956년에는 모스크바 음악원 첼로 교수가 되었다.
2.3. 음악 활동 전성기
로스트로포비치는 당시 소련 음악가들과 계속해서 음악적 관계를 맺어왔다.
1949년 프로코피예프는 그를 위해 첼로 소나타(Cello Sonata in C major, Op. 119)를 작곡했고,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협주곡 1,2번도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한 것이었다. 1950년에는 스비아토슬라프 리흐테르와 협연했다.
그의 국제적 경력은 1963년 리에주 음악원[3] 에서, 그리고 1964년 서독에서 시작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서유럽에서 수 차례의 콘서트 투어를 가졌고, 그 과정에서 여러 서유럽 작곡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그에게 첼로 소나타, 첼로 교향곡을 포함한 많은 첼로 곡을 헌정한 '''벤저민 브리튼'''도 있었다.
뛰어난 피아노 반주자이기도 했던 브리튼은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대표적인 명연으로 기억되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녹음하기도 했다. 로스트로포비치가 ''''브리튼과 연주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평했을 정도다.
1968년 8월 21일, 영국의 음악 축제인 '더 프롬스'에서 로스트로비치는 소련 국립 교향악단과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 B단조를 연주했다. '''공교롭게도 전날 밤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이 프라하의 봄을 저지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고, 드보르자크는 체코 작곡가였다.'''
비록 그의 공연은 야유와 시위 이후에 진행되었지만, 공연 후 그는 관객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작곡가의 고향이자 그가 사랑했던 도시, 프라하를 향한 연대의 표시로 지휘자 악보를 하늘 높이 들었다고 한다.
2.4. 망명
로스트로포비치는 러시아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위해 저항했던 인물이고, 그 결과 소비에트 체제로부터 많은 탄압을 받았다.
먼저 1948년 그의 스승이자 음악적 동료인 쇼스타코비치는 교수직을 박탈당했으며, 로스트로포비치 또한 학교에서 쫓겨났다.
1970년에는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을 자신의 집에서 보호하며 그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그를 큰 위기에 빠뜨렸다.
외국 공연이 제한되었고, 소련 주요 도시에서도 그의 연주 기회가 줄어들었다. 결국 로스트로포비치는 1974년 가족과 함께 소련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1978년에는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하기까지 했다. 그는 1990년에서야 소련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5. 망명 이후
1977년부터 1994년까지 로스트로포비치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 국립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를 맡았다. 그러면서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마르타 아르헤리치,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등의 피아니스트들과 계속해서 음악적 관계를 이어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동안, 로스트로포비치는 그 벽 아래서 즉흥 연주를 선보였다. 이 연주는 세계적으로 크게 유명해졌다.연주 영상 링크
1990년에 그는 소련 시민권을 회복했다.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때는 옐친을 옹호했고, 가장 단속이 심했던 시기였음에도 붉은 광장에서 국립 교향악단을 지휘했다. 여러모로 러시아의 근현대사에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1980년 4월 23~24일 국립 교향악단과 함께 내한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였고, 이후 같은 해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다시 내한해서 연주회를 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럽게 취소했다. 당시 언론에선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인해 공연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활기잃은 舞臺藝術界(무대예술계) 매일경제 6월 14일 기사
2.6. 만년
로스트로포비치의 건강은 2006년 악화되었다. 2007년에는 팔순을 기념하기 위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초청으로 크렘린 궁에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건강이 다시 급격히 악화되어, 그 해 4월 27일에 대장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묘지에 묻혔다.
3. 연주 스타일 및 음악 성향
살아생전 그의 연주스타일은 굉장히 화려하였고 거대한 톤으로 기억 된다. 당대로서는 한계가 있던 첼로주법을 뛰어넘어 무수히 많은 귀중한 첼로 주법을 만들어 내었고 이는 훌륭하고도 소중한 첼로계의 자산이 되었다. 살아생전 벤저민 브리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등과 친구사이 였으며 많은 음악적 교류와 작곡을 사사 받기도 하였다. 주로 로맨틱 시대의 곡을 연주 하길 좋아했고 특히 지금도 명음반으로 회자되고 있는 안토닌 드보르작 의 첼로 협주곡 b단조 를 대단히 아끼고 즐겨 연주 했다.
4. 악기
그가 평생동안 아끼고 그의 분신과도 다름없었던 악기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의 1711년작 duport(듀포르) 이다. 이 첼로는 1800년대 첼리스트 듀포르의 이름이 붙어있으며 당시 나폴레옹 앞에서 연주를하고 나폴레옹 의 치하를 받을때 잠시 그의 손에 잡혔다가 나폴레옹의 실수로 낸 큰 상처자국이 아직도 남아있다. 1711년 만들어 졌을당시 부호의 위촉으로 만들어진 이 첼로는 구매자인 부호가 스트라디바리에게 '''평소 첼로값의 두배를 줄테니 걸작 하나 만들어 주시게''' 라는 부탁을 받고 만들어 졌다고 하며 이에 자극받은 스트라디바리가 최고의 재료들을 사용해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그 의 걸작이라 평가 받는다. 로스트로포비치 사후 일본 음악재단(nippon music foundation) 에서 미화 '''2000만불!!!!'''에 매입 하였다. 관련 자료
5. 평가
'''20세기를 빛낸 불세출의 명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와 함께 현대 첼로계의 아버지라 불린다.
카잘스 가 현대 첼로계의 길을 제시하고 설계했다면 로스트로포비치는 그길을 세련되고 화려하게 디자인 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스타일은 카잘스의 그것을 넘어 당시로는 혁명적이게 화려하고 세련되었으며 많은 혁명적 주법을 고안해내었고 그만의 거대한 톤으로 기억된다. 무엇보다도 로스트로포비치의 안토닌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B 단조는 첼로계의 성서 이자 교과서로 불리우면서 카잘스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처럼 그의 트레이드 마크 이자 상징이 되었으며 지금도 무수히 많은 첼리스트들 에게 많은 영감과 배움을 주고 있다.
6. 기타
7. 수상 및 수훈
로스트로포비치는 평생 50여개의 상을 받았다.
'''음악 관련 수상'''
- 그래미상(1984년, 루돌프 제르킨과 협연한 브람스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앨범)
- 폴라음악상(1995년)
-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1976년)
- 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2012년)
- 울프상 예술 부문(2004년)
- 런던 왕립 음악원 명예 회원
- 왕립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1970년)
'''러시아와 소련으로부터'''
- 조국에 대한 공로 훈장(2007년, 1급 - 세계 음악에 대한 뛰어난 공헌 및 다년간의 창의적 활동)
- 자유 러시아의 옹호자 메달(1993년,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용기와 헌신)
- 레닌상(1964년)
'''외국으로부터'''
- 오스트리아 과학 예술 명예 훈장(2001년, 1급)
- 아제르바이잔 '독립' 훈장(2007년)
- 아르헨티나 자유의 훈장(1994년)
-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1989년)
- 영국 명예 KBE(1987년)
-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198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