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글렌 굴드의 주요 수상 및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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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nn Gould'''
'''본명'''
'''Glenn Herbert Gould'''
(글렌 허버트 굴드)
'''출생'''
1932년 9월 25일[1]
캐나다 온타리오 주 토론토
'''사망'''
1982년 10월 4일 (향년 50세)
캐나다 온타리오 주 토론토
'''국적'''
[image] 캐나다
'''직업'''
피아니스트, 작곡가
'''장르'''
클래식(서양 고전 음악)
'''활동 시기'''
1945년 ~ 1982년
'''학력'''
토론토 왕립 음악원
'''서명'''
[image]
'''링크'''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데뷔
2.3. 말년
2.4. 사망
3. 그의 음악적인 면
3.1. 바로크
3.2. 고전파 및 낭만파
3.3. 20세기 음악
4. 일화
5. 어록
6. 평가
7. 관련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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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나다 토론토 출신의 피아니스트이다.[2] 바흐에 능통한 거장이며,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명이다. 해외와 국내를 막론하고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 10명을 선정하는 기사에서 항상 들어가는 피아니스트이다. 또, 에드바르 그리그의 후손이기도 하다 [3].
매우 특이한 연주스타일과 성격으로 평생 괴짜라는 칭호를 달고살았던 연주자이다. 파티장에서도 장갑을 끼는 등 결벽증이 매우 심했다. 실제로 결벽증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정신질환을 갖고있던 피아니스트였고, 신경과에서 처방받았던 약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수트케이스에 늘 담고 다닌다는 루머가 있었을 정도였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토론토의 사우스우드가 32번지에 자리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굴드는 어린시절부터 천부적인 피아니스트였다. 갓 태어난 굴드가 바로 손가락을 움직이는것을 보고, 의사가 '이 아이는 커서 피아니스트 아니면 의사가 되겠군'이라고 했다고 한다.
칠레 출신 피아니스트인 알베르토 게레로[4][5] 밑에서 배웠다. 글렌은 어린시절부터 은둔형 폐인끼가 충만했다. 그의 어린시절 친구인 로버트 풀포드는 '글렌은 어린시절부터 늘 혼자있기를 좋아했어요'라고 할 정도였다.
여담으로 테크닉도 귀신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다. 레전드 피아니스트들 대부분이 그렇다고는 해도 극한의 셈여림 컨트롤을 기반으로 한 믿을 수 없는 속주는 역사적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도 굴드만의 독특한 무기라고 할 수 있었다.

2.2. 데뷔


1955년도에 미국 음반회사인 CBS(콜롬비아)[6]에서 바흐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을 계기로 젊은 나이로 세계적인 거장반열에 올랐다. 당시 녹음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 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CBS의 녹음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7]

'''

이 음반은 1955년에 녹음하여 1956년 출시되자마자 곧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이후 한 번도 절판된 적 없이 오늘날까지 잘 팔리고 있다. 이는 엄청난 성공이였으며, 글렌의 주위사람들은 모두 기뻐했으나 조용하고 고독함을 즐기는 그에게는 힘든 점도 있었다. 그의 인터뷰에서 고백했듯이 갑자기 연주해 달라는 요청이 전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왔고, 글렌은 점점 더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젊은 피아니스트가 한 순간에 세계적 거장 반열에 드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늘 고독함 속에서 혼자 일하는 것을 즐기던 굴드에게 주위의 관심을 받고 세계의 무대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힘든 시련이였다. 그 시기에 굴드는 다양한 정신적-신체적 고통과 병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30대에 은퇴를 선언했고, 무대활동보다는 녹음활동에 더 열중했다.[8][9] 사실상 30대 이후로 굴드는 20세기판 히키코모리나 다름없었다, 그의 음악은 원래부터 개성적이였지만, 30대 이후의 녹음을 들어보면 음악 초보자도 굴드 연주라는걸 알 수 있을정도로 완벽한 굴드표 녹음이라는걸 알 수 있다.

2.3. 말년


쉰에 요절한 말년의 굴드는 정신상태 뿐만이 아니라 육체적 상태도 엉망이었다. 당시 10년만에 굴드를 방문한 굴드의 친구와 그의 아내는 굴드를 보고 깜짝 놀랬다고 한다. 얼굴은 퉁퉁 붓고 피부는 죽은사람 같아서 젊었을 적의 미모는 찾아볼 수가 없었고 눈에서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굴드는 친구부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고 한다)
이미 그 당시 그는 음악작업 보다는 방송작업과 다른 분야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말그대로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수준이었다. 사실 굴드는 젊었을 적부터 자신이 피아노만 잘치는 사람보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모든 분야에 만능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었다. 당시 CBS스튜디오에서 가끔식 연주녹음 작업을 했는데, 죽기 몇 해전부터 굴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며 자신이 사교성이 없어서 친한 이가 거의 없기에 장례식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안 올 것이라며 말했다. 이렇게 매우 비관적으로 삶과 동시에 다시 한번 세계적인 업적을 이루고 싶었는지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의 세월동안 과다한 약물복용으로 인해 그의 몸은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고, 그의 말년 연주 동영상을 보면 손가락이 가끔식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게 약물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 굴드의 일기에는 말년에 손가락의 이상을 호소하는 글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굴드는 재녹음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다시 한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81년에 녹음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사실 1982년, 굴드 사후에 발매되었다. 비평가 팀 페이지에 의하면 첫번째 골드베르크 녹음중에서 몇몇 부분이 굴드 맘에 들지 않았던 것도 재녹음의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2.4. 사망


1982년 9월 27일 굴드는 발작을 호소했다. 그의 비서가 의사를 불렀으나, 굴드의 비상 전화에 질린 의사는 그냥 응급실에나 가라고 했고, 병원을 매우 싫어하는[10] 굴드는 계속 버티다가 뒤늦게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 어찌할 방법은 없었고 증상은 갈수록 악화되어 의식을 잃고 뇌사 상태에 이르자 아버지의 동의 하에 호흡기를 떼고 장례식을 치렀다.
[image]
굴드가 나고 자라고 생활하고 죽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골드베르크의 아리아의 처음 몇 마디가 각인되어 있다.

3. 그의 음악적인 면


당대 최고의 명성을 지닌 바흐 음악 스페셜리스트 답게 성부를 나눠 경중에 차등을 준 채로 선적인 흐름을 만드는 식의 바흐 음악에 필수불가결한 비상한 테크닉을 지녔다.[11] 낭만음악을 싫어해서[12][13] 낭만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기도 했다.

나는 19세기 전반부에 쓰여진 독주 기악곡들은 다소의 베토벤 작품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보잘것없는 실패작들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일반화는 쇼팽, 리스트, 슈만... 등에도 해당된다. 당신도 알다시피 초기 낭만파 작곡가들 중 어느 누구도 피아노곡 쓰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아 참, 그들은 페달 사용이나 극적 효과를 내는 것, 사방팔방으로 음들을 흩뿌려 놓는 것은 알았지만 진정한 곡다운 곡은 쓰여진 것이 별로 없다.

그 시기에 쓰여진 음악은 공허한 극적 제스처와 전시효과로 가득 차 있고, 세속적이며 쾌락주의적인 성향이 나로 하여금 흥미를 잃게 했다. 위대한 음악을 접할 때 내가 바라는 모든 기준이 되는 화성과 리듬의 다양성, 대위법적 창안은 이런 곡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한 마디로 굴드는 바흐와 하이든, 그리고 베토벤의 걸작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명료한 형식미와 탄탄한 구성, 대위법으로 대표되는 다성음악의 미학을 선호한 반면, 쇼팽과 리스트로 대표되는 낭만파 피아니즘에 대해서는 극불호에 가까웠던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레퍼토리에서는 후기 고전주의, 초/중기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에 후기 낭만주의의 황혼과 현대음악의 태동을 각각 상징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의 피아노곡들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다. 굴드는 이 두 작곡가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오페라인 카프리치오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14] 이외의 낭만파 작곡가 중에는 브루크너를 높게 평가했는데, 보잘것없는 낭만파 음악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하는 것보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해 연주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굴드가 좋아했던 작곡가들은 대부분 피아노 작품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의 몇 안 되는 고전, 낭만주의 음반의 해석은 논란이 뜨겁다. 그가 연주한 고전 시대 작곡가 작품의 속도는 대부분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거나 전혀 말도 안 되는 듯한 해석을 집어넣기 일쑤여서 그 작곡가의 음악에 정통한 전문가들에게 욕을 밥 먹듯이 먹는 건 양반이고, 그를 매장시키려는 음악가 집단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굴드의 모차르트 소나타는 어처구니없이 빠른데다가 모차르트의 피아노 음악에서 중요시하는 음색과 이음줄(슬러)의 표현 대신 냉정하기 짝이 없는 퍼석퍼석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베토벤의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은 또 그 반대로 1, 2악장이 엄청나게 느려서, 1악장의 경우는 트레몰로를 16분음표처럼 연주한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그의 연주 가운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음악은 역시 바흐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바흐 음반에 대해 말하자면, 그 시대의 현재나 과거,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해석과도 일치하지 않는 독창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해석과, 미켈란젤리 같은 대가들과 비견되는, 굴드만이 낼 수 있는 특이한 피아노 음색으로 많은 평론가들이나 매니아, 전문가들에게 바흐의 음악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 극찬받는다.
헤럴드 쇤베르크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상당히 많이 참고했다.
일반적으로 추천되는 음반은 대부분 바흐의 곡으로, 골드베르크 변주곡[15], 프랑스 조곡, 영국 조곡, 파르티타,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토카타와 푸가, 이 외에도 리스트 편곡에 의한 베토벤 교향곡 5번(운명), 6번(전원) 등이 꼽힌다.
대부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대표곡으로 뽑지만, 그의 다른 음반들을 듣다보면,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의 음악으로의 진입을 위한 창문일 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푸가들, 토카타, 하프시코드 협주곡 1번, 그리고 베토벤 소나타 32번 등 조금씩 그가 녹음한 다른 연주들로 영역을 넓히다 보면,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연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모차르트의 경우 대체적인 평은 좋지 않지만 소나타 10번의 경우 실황 연주는 매우 아름답다. 굴드는 녹음된 음반보다는 실황 연주가 훨씬 더 아름다웠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구하기 어렵다. 실제로 레코딩들은 바흐 외에는 평가가 별로다.
게다가 굴드는 연주 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이 있어서 레코딩 도중에도 그 콧노래가 희미하게 녹음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이는 굴드의 습관이기도 했는데, 녹음반에 까지 그 소리가 들어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대체로는 이에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나 굴드의 흥얼거리는 소리가 곡의 감상을 방해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허밍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허밍에서 느껴지는 음악에 대한 자유로운 갈망과 영혼은 그의 음반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낭만파 작곡가의 몇 안되는 레코딩 곡은 말그대로 클래식하게 연주해서 색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대표적으로 쇼팽 소나타 3번[16], 스크리아빈 소나타 5번 등. [17]

3.1. 바로크


[youtube]

Bach, Goldberg Variations (rec. 1955)
Bach, Art of the Fugue, #1, 2, 4 (rec. 1957)


Gibbons, Fantasy in C major & Allemande (Italian Ground) (rec. 1968)
Bach, Partita No.4 (rec.1979)

[youtube]
Byrd, Sellinger's Round (rec. 1971)
Bach, Goldberg Variations (rec. 1981)

3.2. 고전파 및 낭만파




Mozart, Piano Sonata K.330 Mvt.2 (rec. 1958)
Haydn, Piano Sonata, Hob. XVI:52 Mvt.3 (rec. 1981)


Beethoven, Op.14 No.1 Mvt.2 (rec. 1966)
Mendelssohn, Op.30 No.3 (rec.1970)


Wagner,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 Act I: Prelude (rec. 1973)
Brahms, Op.118 No.6 (rec. 1960)

3.3. 20세기 음악




Webern, Variations (rec. 1974)
Berg, Piano Sonata, Op.1 (rec. 1958)


Schoenberg, Op.23 (rec. 1965)
Hindemith, Piano Sonata No.3 (rec. 1966-1967)

4. 일화


> 1955년 6월 미국 뉴욕의 오래된 교회에 23세의 청년 피아니스트가 찾아왔다 한여름이었지만 외투에 베레모까지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그의 장비에는 악보 뭉치 외에도 수건 묶음, 큰 생수 두 병, 서로 다른 색깔과 용도를 지닌 작은 알약 다섯 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음반 녹음을 앞두고 언제나 몸을 움직이는가 하면, 흥분에 들떠서 지휘를 하기도 하고 음악에 맞춰 발레를 하기도 했다 비스킷을 우걱우걱 씹어먹기도 했다.
글렌 굴드의 1955년 첫번째 레코딩 때의 일화.
  • 아버지가 모피상이었던 탓에 굴드는 어렸을 적부터 집 근처에서 가죽이 벗겨저 죽은 동물들을 많이 접했다고 한다. 그런 어린시절을 보낸 탓에 동물애호가가 되었다고 한다.
  • 사망하기 몇 년 전 부터는 집 근처 조그만 식당에서 하루에 1끼만 먹었는데 , 스크램블 에그, 한 조각, 샐러드가 전부였다고 한다.
  • 상술했듯 굴드는 의심도 많고 자신이 병에 걸리지 않을까 항상 걱정했다. 그래서 약물을 남용했는데, 항생제, 진통제, 안정제는 물론이고, 심지어 공연 전 긴장때문에 잠이 안온다고 펜토바르비탈도 복용했다. [18]
  • 뉴스를 보면 걱정과 근심이 많아진다면서 뉴스나 신문을 전혀 보지 않았다고 한다.

  • 민감한 성격이었다. 굴드랑 대화하며 친하게 지내던 피아노 기술자가 있었는데 어느날 굴드랑 대화를 마치고 피아노 기술자는 친근감의 의미로 어깨를 살짝 툭 쳤다. 그러자 굴드는 그로 인해 어깨가 탈골되고 부러졌다며 피아노 기술자에게 고소미를 시전하고 병원에 4주동안 입원하였다. 당연히 의사들은 정밀진단 끝에 아무런 문제를 찾을수 없었고, 굴드의 정신적인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그 이후 서로 절교했다고 전해진다.

5. 어록


'''나의 삶은 곧 내가 하는 일입니다. 내가 사는 방식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난 그것이 마음에 듭니다.'''

'''생활 방식 그리고 일, 이 두 가지가 서로 완전히 융합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기벽이라고 부른다면 그렇습니다. 나는 기인입니다.'''

'''청중을 위한 음악은 그들을 명상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녹음이 좋아요. 연주 중에 정말로 멋진 무언가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남길 수 있습니다.'''

'''나는 당연히 모든 사람이 나처럼 구름 낀 하늘을 사랑한다고 생각해왔다.'''

'''태양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6. 평가


'''그는 하나의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그는 우리 미래가 지향하는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굴드는 작곡가처럼 연주합니다. 그의 바흐를 들을 때, 저는 마치 바흐가 자신의 곡을 연주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에런 코플런드 (Aaron Copland)

'''굴드는 정말 특별해요. 그는 삶의 모든것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그는 셈하고, 필기하고, 결산표나 도표를 작성합니다.'''

'''그 노트들은 연도별로 나뉘어 있죠. 그것은 강박장애입니다.'''

― 캐나다의 한 저널리스트

'''굴드를 고독한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하는 것을 잘못됐습니다.'''

'''그의 내면세계는 풍요로우니까요. 단지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 조지프 로디 (Joseph Roddy)

'''굴드가 전화기, 전보, 텔레비전 등을 좋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될 수 있으면 최대한 사람들과의 대면을 피하기 때문이죠.'''

캐나다공영방송사 엔지니어

'''생동감 넘치는 타건과 파격적인 해석으로 고전에 새 생명을 부여한 피아니스트'''

Apple MUSIC


7. 관련서적


  • 피아니즘의 황홀경
  • 글렌굴드-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 (주로 인터뷰 모음집)
  • Wondrous Strange(번역판이 없다, 가장 상세한 굴드서적이기도 하다.)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글렌 굴드 : 그래픽 평전 [19]
  • 굴드의 피아노

[1] 현재 살아있었다면 90세이다.[2] 미국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는 엄연히 캐나다인이다.[3] 그리그가 굴드의 외할아버지의 삼촌이었다 [4] 굴드의 스승으로서, 피아노 교수법에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피아노에 관해서 둘은 항상 생각이 달랐으며, 실제로 굴드가 성공한 후에 인터뷰 등에서 게레로에 대해 한번도 언급해 주지 않자 게레로는 무척 상처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굴드와 게레로는 할아버지와 손자같이 친했다.).[5] 후에 굴드가 말하길, 본인의 스승인 알베르토 게레로는 아주 매력적이고 훌륭한 스승이였다고 회상했다. 그 이유는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나이 어린 굴드와의 대립을 항상 허용해 주었다는 이유. 다른 말로 하면 도제식 교육으로 스승의 말에 절대 복종하며 배우는 것이 아닌, 어렸지만 똘끼 많은 굴드의 음악적 견해를 항상 존중해주고 귀담아 들어주었다는 이야기.[6] 현 소니 클래식의 전신[7]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구간구간 굴드의 흥얼거림이 녹음되어있다[8] 이 분석에 대해 이의가 제기될 소지가 몇 가지 보인다. 위에 기술된 그의 성격은 일면 맞기도 하나, 다양한 시선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유로 활동 시 정신적 부담에 시달렸다는 것은 받아들여지기가 힘들다. 굴드는 활동 당시 무대에서 이상한 행동으로 상당히 나대는 성격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베토벤 4번 협주곡 협연 당시 물 한컵을 들고 나와 오케스트라가 튜티(오케스트라만 독주하는 부분)를 연주하고 있을 때 다리를 꼬고 청중을 바라보며 물을 마셨던 등의 여러 기행은 항상 매스컴에 의해 이슈화 됐었는데(그 기행에 대해 타임즈 지는 다음 번 그 협주곡을 연주할 땐 맥주 한 병과 햄 샌드위치를 들라고(...) 제안하기도 했다)그기 ADHD가 아닌 이상 은 의도적으로밖에 매스컴이나 청중들의 관심을 의식하고 이를 받기 위한 행동이라고밖에 설명되지 않는다.[9] 표면적으로 드러낸 그의 조기 은퇴 이유는 다소 황당하긴 하지만 전자 기술의 중요성이라고 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공학은 예술가가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고도 곡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최상으로 준비할 수 있는 시간과 자유로움을 줄 수 있다. 공학은 음악회가 줄 수 있는 끔찍하고 혐오스러우며 인간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치명적 불확실성을 제거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라고 장황히 설명했다고 한다.[10] 결벽증이 심했던 굴드는 병원을 병균 창고로 생각 했기 때문에 병원 가기를 평생 싫어했다. 실제로 그는 일생에 걸쳐 유일하게 마음 놓고 대할 수 있었던 존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까지 어머니가 계신 병원에 가지 못하고 전화로만 어머니와 대화했다.[11] 왼손-반주/오른손-선율의 구조를 띄는 피아노곡보다 양손이 고르게 역할을 분담하는 바흐의 곡에 더 유리했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한다.[12] 그는 '나에게는 1세기의 긴 공백이 있는데 그 경계의 한쪽 끝은 대략 푸가의 기법(바흐의 곡)이고, 다른 한끝은 트리스탄이다(바그너의 악극). 그 사이에 쓰인 모든 음악들은 사랑한다기 보다는 기껏해야 때때로 칭찬이나 할 수 있는 그런 것들 뿐이다.'라고 설명했다.[13] 다만 브람스 1번 협주곡은 종종 연주했다. 또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까기도 했으며 어떤 작품은 극찬한 반면 어떤 작품은 후려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낮게 평가했다. 그는 4번을 포함한 몇몇 피아노 협주곡과 말기 3개 소나타를 상당히 많이 연주했고, 대 푸가(Grosse Fuge)같은 경우는 "베토벤이 쓴 가장 위대한 작품일 뿐만 아니라 음악 역사상 가장 경탄할 만한 작품"이라고 호평할 정도였는데 비해 나머지 교향곡, 소나타, 상당수의 협주곡들은 유명해진 이유에 대해 "황당함을 금치 못할 정도"라고까지 혹평했다.[14]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무인도에 갇혀서 평생 한 곡만 듣고 살아야 한다면 선택할만한 곡이 있냐는 질문에 R.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카프리치오라고 답했다.[15] 유튜브에서는 1964,59,54년도 연주도 볼 수 있다. 55년도와 81년도 앨범도 존재.[16] 바그너나 베토벤이 생각나게 플레이한다. 직접 들어보는 것을 추천[17] 말이 좋아서 색다름이지 엄청난 혹평을 가한 사람들도 많다. 즉 엄청나게 호불호가 갈린다는 소리.[18] 그래서 한 의사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글렌 굴드의 천재성은 약빨 아니냐? 물론 상기했듯이 그는 고지능자였으므로 선천적인 천재이다.[19] 이 문서의 글렌 굴드의 어록이나 평가들은 해당 책을 많이 참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