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령 사하라
1. 개요
1884년부터 1975년까지 오늘날 서사하라 일대에 존속했던 식민지이다. 1976년 스페인군이 이곳에서 철수한 이후 모리타니와 모로코 두 국가가 이곳을 군사점령하면서 국제 분쟁 지역이 되었다.
2. 역사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를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되었다. 스페인은 베를린 회의를 통해 서사하라 지대를 할양받았다. 스페인은 군인이자 탐험가인 에밀로 보넬리(Emilo Boneli)를 보내 신속히 보자도르 곶과 블랑코 곶(Cape Blanco) 사이의 서사하라의 해안지역을 점령했다. 보넬리는 초대 총독이 되었다.
1886년, 스페인 상업지리학회의 후원아래 탐험가 줄리오 세르베르와 생물학자,기상학자를 동반한 원정대가 900km를 가로질러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령 사하라 곳곳을 탐험,조사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그 지역 최초의 과학적 탐사로 간주된다.
사하라를 할양받은 스페인은 엘아이운을 건설하고 부크라 지방에 인산염 광산을 개발하여[1] 식민 통치를 펼쳤으나 현지 원주민들의 반감과 저항에 부딪혔다. 1906년 대규모 반 스페인 봉기가 일어났고 이후에도 산발적인 봉기가 발생하여 스페인의 골치를 썩혔다.[2] 게다가 1956년 독립한 모로코는 곧바로 서사하라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서사하라를 침범했다. 스페인은 카나리아 제도에 주둔해있던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물리쳤으나 이프니 전쟁(Ifni war) 이후에도 모로코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서사하라 반환을 요구했다.
1970년 6월 스페인에 대항하여 서사하라 원주민들은 젬라 봉기(Levantamiento de Zemla)를 일으켰다. 그러나 스페인의 진압으로 봉기가 좌절되자 원주민들 중 강경한 일부가 1973년 폴리사리오 전선(جبهة البوليساريو)을 창설하였다. 폴리사리오 전선은 서사하라 원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세력을 키웠고, 1975년까지 서사하라 내륙 대부분을 영향 하에 두며 세력을 과시했다. 프랑코 정권 말기 각종 대외적 압박과 부활한 반정권 민주화운동에 의해 안그래도 국내 여론이 흉흉했던 스페인군은 이 시점에선 이미 이름만 그랬던 스페인 외인부대를 주축으로 싸웠지만 낮은 사기와 지형의 문제로 인해 폴리사리오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후일 테크니컬이란 이름으로 불려진 중화기 탑제한 민수용 트럭 중심의 고속 사막기동전이 크게 재미를 보며 경험을 축적한것도 이 시절. 반면 스페인의 입장에선 누가봐도 딱 로컬 베트남 전쟁에 끌려왔던 장병들 중심으로 해시시를 비롯한 마약이 퍼지며 현재까지도 골치아픈 사회문제의 한 장을 열었다.
그러나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죽자 스페인의 권위주의 통치도 끝나게 되었고, 모로코는 녹색행군을 실시하여 스페인을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스페인은 서사하라의 영유권을 주장하던 모로코, 모리타니와 함께 1975년 11월 마드리드 조약을 체결하여 식민 지배를 종료하고 서사하라에서 철군하였다. 폴리사리오 전선은 이에 반발하여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고 알제리의 지원을 받아 무력 저항을 본격화하였다. 폴리사리오의 게릴라 활동과 남부 흑인계의 내부 반발로 모리타니는 1979년 5월 평화협정을 맺고 서사하라 남부에서 철수했다.[3] 그러나 모로코는 서사하라 곳곳에 모로코 장벽이라 불리는 거대한 모래 장벽을 쌓고 폴리사리오 전선과 장기분쟁에 돌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경과는 서사하라 문서 참조.
3. 참고 문헌
- 서부 사하라 분쟁의 역사적 고찰. 정용칠 (PDF)
- The Western Sahara and the Frontiers of Morocco- Robert Rézet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