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행군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5. 영향
6. 관련 문서


1. 개요


綠色行軍. 영어로는 Green March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자료에 따라 '녹색행군'이라고도 하고 '녹색행진'이라고도 한다.

2. 배경


서사하라는 원래 모로코령이었으나 스페인이 강제로 모로코에서 분리하여 식민지로 삼은 것이었다.[1]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모로코는 스페인에게 줄기차게 스페인령 사하라를 자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스페인은 간단히 무시했다.
모로코의 지속적인 반환 요구와는 별도로 스페인령 사하라에서는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이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1973년 5월 10일에 정식으로 결성된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은 스페인에 대한 게릴라 활동을 강조하여 여러 군사적인 승리를 쟁취하고 있었다.
더욱이 모로코는 아랍인 정부였지만 서사하라 주민은 전부 베르베르인이었기 때문에 서사하라 주민들은 모로코에 합병되는 것을 반대하고 독립국가 수립을 원하고 있었다.

3. 전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10월부터 위독해져서 수술을 받으면서 스페인은 엄청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40년간 철권을 휘두른 프랑코가 곧 요단강을 건넌단 소식에 그간 총칼로 억누르던 스페인의 민주주의 지지자들은 총궐기하여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있었고 나바로 내각은 이에 부응하여 잠시 정치개혁을 시도하다가 체제 유지를 위해 닥치는대로 반정부주의자들을 처형하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발악했고 이 때문에 바티칸에서 격노하여 항의하는 등 스페인은 유럽 외교가에서 멸시를 받고 있었다.
나머지 유럽은 사형제 자체를 폐지하니 마니 갑론을박하고, 실제로 서독 (1949), 오스트리아 (1968), 핀란드 (1972), 스웨덴 (1973) 같은 나라들은 이미 폐지하기 시작했던 시점에서 저지른 짓이었다. 그것도 프랑코 정권과 나치의 역사를 여전히 생생히 기억했던 유럽인들의 정서에 엿먹으란듯이 당당하게 ETA아나키스트 정치범들이었다. 당장 유럽 내에선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를 중심으로 프랑코 체제 종결론을 주장하며 다시 한번 모처럼 전후 직후 수준으로 인식이 떨어졌고, 간신히 동구권에게 '파시스트와 타협하는 서방'이란 선전거리를 주면서까지 반공 체제에 들어가는 대가로 체제 보장을 인정한걸 통수 맞은 미국은 동서방 초월한 유럽국가들 주도로 정식 UN을 통한 제제 시도를 키신저가 간신히 막으면서도 자꾸 이런 식으로 굴면 재미없다고 대사 소환을 비롯한 강력한 괘씸함을 표현했다. 지극히 키신저 휘하 국무부스런 이중성이긴 해도 이미 30년전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앙드레 말로, 조지 오웰, 로버트 카파, 게르다 타로 같은 수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여론을 주도했던 사민주의 체제에서 자란 전후 유럽인들의 인식에서 프랑코 정권은 이미 청년기, 아버지 시절의 히틀러 서막쯤 되는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기 때문.
이 와중에 서사하라 문제는 더욱 고조되었다. 당시 스페인 입장은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에 반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매우 우호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어차피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에 반환한다고 해서 자신들과 모로코의 관계가 크게 개선될 리도 없다는 판단이었다. 왜냐하면 모로코는 스페인령 사하라와 더불어 모로코 북쪽 끝에 붙어있는 작은 도시 세우타멜리야의 반환도 꾸준하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우타와 멜리야는 스페인으로써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영토인데다 주민들도 모로코 반환을 적극 거부하고 있었다. 스페인은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이 집권하는 서사하라 독립정부를 승인하고 독립국가 서사하라를 스페인에 우호적인 국가로 만드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같은 해, 스페인, 모로코, 모리타니 3국이 마드리드에 모여 서사하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드리드 협정을 논의하던 중 스페인의 태도에 불만이 폭발한 모로코의 하산 2세가 결단을 내렸다.
1975년 11월 6일, 무려 35만명의 모로코인들이 배낭과 녹색 깃발을 들고 모로코 남부 도시인 타르파야(Tarfaya)에 몰려들었다. 이들이 배낭을 짊어지고 간 이유는 단순히 며칠 놀고 먹고 불도 피우자고 짊어진 것이 아니었다. 몰려든 이들은 국경을 넘어 서사하라로 진입했다. 35만명의 모로코인들은 서사하라에 눌러앉아 살기 위해 짊어맨 것이었다. 바로 이 사건을 녹색 행군이라 부른다.
이들은 전부 민간인이었다. 스페인군이나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 게릴라나 모두 벙찐 표정을 지으며 이 무지막지한 민간인 일꾼 러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게임에서 일꾼 러시가 들어오면 그냥 죽이면 되는 간단한 문제이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무장하지 않은 순수한 민간인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함부로 총을 쏘면 민간인 학살이 되고, 이들에게 함부로 손대면 인종차별이네 뭐네 하면서 큰 문제가 된다. 총을 쏘든 강제로 밀어내든 이 '민간인'들에게 무언가 하기만 하면 모로코 입장에서는 서사하라를 무력 점령할 구실이 생기는 것이었다.
게다가 유럽에선 프랑코 체제의 최후의 발악에 스페인을 그 누구도 지지하지 않았다. 이미 당사자가 바로 그 프랑코 정권인데, 75년이면 베트남 전쟁도 끝나가고,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전역에서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심지어 이웃 권위주의 반공 독재정권이었던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도 끝난 시점이었다. 경우가 유사했던 60년대 초반 인도고아 침공/해방은 그나마 여전히 알제리, 아덴, 콩고 등지에서 부분적으로 최후의 식민지 전쟁을 치루던 다른 몰락해가는 전후 유럽 제국주의 전직 열강들이 살라자르 정권을 지지라도 해줬지[2], 이런 소위 '제국주의자들의 연대'가 이루어질 건덕지도 안남았던 1975년은 이야기가 달랐다. 자칫 잘못 행동하기라도 하면 '민주정권을 총칼로 학살하며 정권을 잡아 냉전의 야합으로 목숨을 연명한 최후의 나치 놈들' + '제국주의의 최후의 발악' 아주 환상적인 일타쌍피 어그로를 끌며 국제사회가 강제로 개입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스페인령 사하라 주민은 25만명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민간인이든 뭐든 간에 35만명이 밀고 내려오면 이미 감당 불가. 스페인군과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 게릴라들은 이 35만명의 모로코 사람들이 서사하라에 눌러붙어버리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프랑코를 대신하여 국가원수 대행을 맡고 있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유럽 각국에게 스페인에 대한 지지를 촉구했지만 반정부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형집행으로 스페인의 입지는 완전히 박살나버린 터였고, 이미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고아인도가 무력으로 회수하는 과정에서도 드러났듯이 유럽 국가들은 유럽 바깥의 식민지들이 공격받는 일에 대해 전혀 도울 생각이 없었다.

4. 결과


녹색행군 후, 스페인은 마드리드 협정을 체결하고 스페인령 사하라를 해체했다. 스페인은 협정에 따라 곧바로 서사하라 주둔군을 철수시켰고 서사하라 문제에서 손을 떼었다. 모리타니는 모로코와의 약속에 따라 서사하라 일부 지역을 점령했으나 알제리의 지원을 받는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의 반격에 항복, 자신들이 점령한 서사하라 일부 지역을 도로 돌려주고 서사하라로부터 철수했다. 그러자 모로코는 원래 모리타니에게 할당된 서사하라 영토마저 무력으로 점령하고 공식적으로 서사하라 영토를 수복했다고 선포했다.

5. 영향


녹색행군 당시 모로코 정부는 35만 명에게 약간의 서사하라 정착 지원금을 주고 그 이후는 '알아서 생존하시오'라고 했다. 그런데 이름에 사하라가 들어간 것처럼 국토 대부분이 매우 척박한 사막이라 생존이 매우 어려워 서사하라로 이주했다가 다시 모로코로 넘어오는 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모로코는 서사하라로 넘어간 모로코 사람들이 모로코로 넘어오지 못하게 철저히 차단하며 꾸준히 가난한 모로코 사람들을 약간의 정착 지원금을 쥐어주며 서사하라로 이주시켰다.
그 결과 모로코 정부와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이 주민선거를 통해 서사하라의 운명을 결정하자는 큰 원칙에는 합의했으나 누구까지 선거인으로 포함할지에 대해 큰 이견이 발생해 문제 해결은 안드로메다행이 되어 현재까지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6. 관련 문서



[1] 사실 이 문장도 약간 어폐가 있는 게 모로코의 주장과 달리 서사하라의 원주민인 사하라위인(Sahwari)들은 역사시대 동안 어떤 단일한 공동체나 국가를 성립시킨 적도 없고, 단일한 정치결사체로 모로코의 술탄에 복종한 적이 없었다. 스페인이 이 지역을 식민지로 만들 때까지 사하라위인은 Regulibat, O.delim 등의 부족단위로 유목생활을 계속했으며, 부족장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명목상의 맹약이나 신종을 “일시적”으로 맺을 뿐이었다. 게다가 모로코의 역대 왕조들이 서사하라 전역을 중앙집권적으로 실효지배한 적도 한 번도 없었다. 모로코와 접한 북부 테크나(Tekna)지역 부족장들만 꾸준히 신종했을 뿐...[2] 그나마 이것도 그냥 립서비스 지지에 불과했다. 살라자르 정권 자체에 대한 인식도 유럽 내에서 나빴고, 기껏해야 서방 세계의 정계에서 '포르투갈의 영토적 주권을 짓뭉게다니 인도 나빠!' 수준의 면피용 발언 한마디로 끝났고 그 이후 인도가 딱히 실질적인 피해를 본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