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조약
'''Treaty of Madrid'''
1. 개요
문자 그대로 보자면 마드리드에서 체결한 모든 조약을 지칭한다. 개별 조약들의 내용은 하위 문단 참조.
2. 1526년의 조약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왕국의 프랑수아 1세가 체결한 조약. 본 항목에 열거된 조약들 중 가장 유명하여, 그냥 '마드리드 조약' 이라고만 하면 이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결혼을 통하여 독일 - 이탈리아 -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차지하자 프랑스는 사방으로 포위되어버린다.[1]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로 진격하면서 4차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한다. 하지만 1525년의 파비아 전투에서 테르시오를 주축으로 한 합스부르크 군은 프랑스군을 개발살내버리고, 프랑수아 본인 역시 포로로 잡히는 망신을 당한다.[2]
프랑수아는 마드리드로 이송되었고, 종전 문제를 놓고 협상을 진행한 끝에 이듬해인 1526년 1월 14일 정전 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에 의거하면 프랑스는 나폴리, 밀라노, 아르투아, 플랑드르, 부르고뉴 등의 지배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해 프랑스 왕의 장남과 차남이 인질로 송환되어야 하며[3] , 또 만일 프랑스 삼부회가 마드리드 조약을 승인하지 않을 경우 프랑수아는 다시 돌아와 포로 생활을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프랑수아 1세는 포로에서 풀려나자마자[4] , 이 약속을 헌신짝같이 내팽겨쳤고 복수하기 위해 급기야 당시 모든 기독교도들의 숙적이었던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합스부르크를 양공하려고 시도한다.
오늘날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시기만 하더라도 현대적인 국가나 민족 개념은 전무했다. 따라서 같은 가톨릭 국가가 '사탄' 이슬람과 손을 잡고 형제 가톨릭 국가의 등 뒤를 찌르려고 했던 것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전까지 '이교도' 인 오스만과 조약을 맺은 국가들로는 베네치아 공화국 등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있었지만 그것도 다 통상조약이 아니면 강화조약이었고(이마저도 오스만식 사고방식에 따르자면 '동등한 입장에서 화해' 가 아니라 '이교도가 우리 제국에게 굴복'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에서 현대의 외무장관에 해당하는 지위는 2차 빈 공방전 이후에나 생겨난다.), 이번처럼 군사 조약을 맺자고 나섰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의 조반니 보테로(Giovanni Botero, 1544?~1617)가 사악하고 악마적인 조약이라고 비난하면서 발루아 왕가의 대가 끊어진 것도 다 이 때문이라고 본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의 위그노인 프랑수아 드 라 누(François de La Noue, 1531~1591)도 한때 번영하던 프랑스 왕국이 위그노 전쟁으로 분열한 것도 이교도와 손을 잡은 결과 신의 징벌이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비난 일색인 것만은 아니라서 프랑스의 학자나 성직자들 중 프랑수아 1세를 옹호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에티엔 돌레(Étienne Dolet, 1509~1546)는 군주가 다른 군주와 손잡고 다른 군주를 공격하는 일이 뭐 그렇게 비난할 일이냐고 주장하는 한편 카를 5세 역시 이교도이기는 매한가지인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한편 François de Sagon은 기독교 경전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를 예시로 들면서, 프랑수아 1세를 부상당한 사람. 카를 5세를 강도. 오스만 제국을 사마리아인에 견주었다.
비슷하게 한 세기 뒤에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끄는 '''가톨릭 국가 프랑스가 30년 전쟁에서 신교도를 도우려 참전한 것''' 역시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국가의 이익이 다른 모든 이해관계에 우선한다는 개념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야 생겨난다.
3. 1750년 1월의 조약
토르데시야스 조약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 경계를 놓고 갈등이 생겼고, 이를 조정하기 위해 체결된 조약. 이 조약을 통하여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브라질의 국경이 확정된다.
4. 1750년 10월의 조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에서 영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카리브 해 일대의 노예 무역 독점권(아시엔토, Asiento)를 획득한다. 하지만 영국 상인들이 노예 무역을 행하면서 각종 상품들의 밀수도 곁들이는 바람에 스페인의 식민지 지역에서는 영국의 경제 침탈이 급속하되고, 이를 막으려는 스페인과 영국 사이의 분쟁이 발생한다. 여기에 유럽 내 정치 문제까지 발생하면서 갈등은 커져가고 결국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 자체는 엑스 라 샤펠 조약을 통해 1748년에 끝났지만, 영국과 스페인 사이의 중요한 문제였던 무역 분규 해결은 전혀 언급이 안됐고, 이 문제의 최종 해결을 위해 양국이 1750년 담판을 짓게 된다. 이 담판의 결과 영국은 기존처럼 노예 무역의 특권을 유지하는 것을 허용받았으나, 그 댓가로 스페인에서 매해 10만 파운드를 제공해야 했다.
5. 1795년의 조약
핑크니 조약(Pinckney's Treaty)라고도 불린다. 미국과 스페인의 국경을[5] 재조정했고, 스페인으로부터 미국은 미시시피 강의 통행권을 보장받게 된다.
6. 1891년의 조약 또는 1989년의 의정서
여러 국가에 상표 및 서비스표를 출원 및 등록 받고자 할 경우 각 국가마다 출원하는 불편함을 줄이고 하나의 절차를 통해 복수 국가에 상표등록을 받고자 하는 내용의 조약. 특허 협력 조약의 상표 및 상표법 버전이라 할 수있다. 다만 초기의 마드리드 조약은 그 절차가 복잡하였기 때문에 많은 국가(특히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가 참여하지 않았고, 후일 1989년에 마드리드 의정서가 준비되었고, 1995년 3월 1일에 발효된다. 한국은 마드리드 의정서에 2003년에 가입하였고 미국과 유럽연합도 같은 해에 가입하였으며, 이에 따라 마드리드 의정서의 회원국을 대상으로 한번에 상표 등록 출원이 가능해졌다.
[1] 북쪽의 잉글랜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가 아니지만 불과 수십년 전까지 백년전쟁으로 치고 박고 싸운 적이 있으며, 당시의 국왕인 헨리 8세도 백년전쟁 당시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간간이 전쟁을 벌였다.[2] 전투 당시 프랑스군은 1만 7천, 합스부르크군은 1만 9천이었는데, 프랑스 측 사상자는 1만 5천에 달했던 데 비해 합스부르크 쪽은 5천도 아니고 5백의 사상자밖에 내지 않았다. 또한 이전까지 이탈리아 전쟁에서 활약했던 프랑스군 지휘관이 거의 증발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줄줄이 목이 달아났으며, 전투 이후 사로잡힌 프랑수아는 자신을 대신하여 섭정을 맡고 있던 모후에게 보낸 편지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그 대가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라고 썼다.[3] 이 중에 장남인 프랑수아는 아버지보다 먼저 요절했고, 둘째인 앙리가 후에 앙리 2세로서 즉위한다.[4] 물론 카를 5세도 바보는 아니었던지라 프랑수아 1세가 약속을 제대로 지킬리가 없으며 이 조약이 조만간 휴지 조각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높으신 분의 체면이 있는지라 울며 겨자먹기로 프랑수아를 석방해야 했다.[5] 오늘날 조지아와 플로리다 사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