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말라바르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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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로말라바르 가톨릭은 늦으면 고대 말부터 인도 남부 케랄라 지방에 거주하던 전통적인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른바 도마 기독교인) 공동체가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교황수위권을 인정하되 네스토리우스파 전례(동시리아 전례)를 유지하는 기독교 교파를 의미한다. 시로말라바르라는 말라바르(케랄라의 이명) 지역에서 시리아 전례를 따르는 동방 가톨릭 교회라는 뜻이다. 과거 이들은 예배를 드릴 때 아람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물론 오늘날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신도들의 일상 언어는 말라얄람어다.[1][2] 시로말라바르 가톨릭이라는 교회명은 19세기부터 교황청에서 정식으로 사용하던 명칭이다.
2. 기원
인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성 사도 토마스에서 기원했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고 서기 원년 즈음 인도에 유대인 상인들이 유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본격적으로 인도 해안 지역에 기독교인 인구가 증가한 것은 고대 말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기로 추정된다. 서기 4세기에 남인도의 교회에서 페르시아인 사신을 영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 당시 페르시아인들은 인도양 각지에서 활발한 해상 무역을 벌였는데,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페르시아인 해상 무역 상인들은 파르시의 기원이 되고, 기독교를 믿던 페르시아인 해상 무역 상인들은 도마 기독교인들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3]
도마 기독교인의 주류에 해당하는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신도들은 인도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기원으로 네스토리우스 파는 동로마 제국에서는 이단으로 몰려 힘이 없었지만,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서는 번성했던 종파이다. 하지만 홍해 일대에서 출항한 그리스인 상인들이 인도 남부 지방과 활발하게 무역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으므로, 이들 중 상당수는 기독교를 믿는 시리아계 로마인 혹은 그리스-로마인이었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4] 서기 8세기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에서 대주교 티모시 1세(서기 823년 선종)를 파견하여 교단이 정비되었으나, 페르시아와 이라크 일대의 네스토리우스파 공동체가 몽골 제국의 침략과 흑사병, 티무르 제국의 기독교 탄압으로 교세가 크게 축소되면서 상호 왕래와 어려워지고 이로서 말라바르 내 교회는 사실상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 당시 포르투갈 왕국이 인도 해안 지대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존재가 서구권에 본격적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포르투갈인들이 성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게 말라바르의 기독교인들은 가톨릭 성상에 혐오감을 보였고 이 때문에 서로 갈등과 충돌이 일어났다. 결국 1597년 말라바르의 기독교인들이 굴복하고 고아에 파견된 주교 밑으로 숙이고 들어간다. 17세기 무렵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교황수위권을 인정하자는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네스토리우스파 아람어 전례를 유지하되 가톨릭 교리를 따르는 오늘날과 같은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회가 만들어졌다.[5] 약 2세기 이후 1887년 교황 레오 13세가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회를 독립된 동방 가톨릭 교회 중 하나로 승인하였다.
3. 현황
이라크 일대의 칼데아 가톨릭 및 아시리아 동방교회와 전례 기원이 같고 교리도 칼데아 가톨릭과 같은 동방 가톨릭이기 때문에 교류가 있었으나, 과거에는 교통과 연락 문제로 오늘날에는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교회가 신자 수가 이라크 내 교회보다 훨씬 더 많다는 이유로 사실상 따로 놀고 있다. 반면 이라크의 칼데아 가톨릭 교회 등은 아시리아인 민족주의가 강한데다가 엄연히 인도 도마 기독교계의 사실상 원조에 해당하므로 서로 대등하기보다는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서로 다른 분야에서 확고한 우위를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다. 굳이 같이 합쳐봤자 동파키스탄 같은 꼴이 나는 수가 있다. 종교 단체에서 신도 수를 최대치로 계산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정확한 추산은 어렵지만 약 400만여 명 정도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 기준으로는 적은 수로 보일지는 몰라도 동방 가톨릭 교파중에서는 소속된 신도 수가 두 번째로 많은 편이다.[6]
근세 포르투갈인 가톨릭 선교사들과의 갈등 및 교황수위권 인정 과정에서 상당수 신자들이 아예 동시리아 전례를 포기하고 서시리아 전례와 교리를 받아들여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로 갈라져 나오기도 했다.
[1] 아람어는 아프리카아시아어족에 속하는 언어이고 말라얄람어는 드라비다어족에 속하는 언어다.[2] 다만, 포르투갈인의 도래 이후로 19세기 경까지는 포르투갈어의 현지 크리올어인 코친 인도-포르투갈어 크리올이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신자들의 공용어로 널리 쓰였다.[3] 비교하자면 파르시들은 주로 인도 서북부 해안지대 구자라트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반면 인도 내 전통적인 이른바 도마 기독교인들은 인도 서남부 말라바르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4] 인도에는 네스토리우스파 전례 외 시리아 정교회 등에 속한 교파도 남아있다.[5] 전성기에도 인구가 1백만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포르투갈 입장에서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신도들은 식민지 운여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식민지 운영 인력으로 인도계 기독교인 선원들과 군인들을 적극 활용하였으며 이런 인도계 기독교인 중 상당수는 포르투갈 식민지 각지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본국으로도 이주 정착하기 이른다.[6] 동방 가톨릭 교회 중 소속된 교인 수가 제일 많은 교파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