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파키스탄

 



1. 개요
2. 역사
2.1. 동파키스탄의 성립
2.2. 독재와 동벵골 탄압


1. 개요


East Pakistan/পূর্ব পাকিস্তান/مشرقی پاکستان.
1947년 인도 제국에서 독립해 세워진 파키스탄 자치령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월경지. 오늘날의 방글라데시 지역과 일치한다.

2. 역사



2.1. 동파키스탄의 성립


영국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은 인도 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인도 제국 안에서 가라앉아 있었던 힌두교인들과 무슬림들의 갈등이 표면화되어 서로의 충돌로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사태까지 흘러가고 말았다.
결국 영국은 의회에서 1947년 인도 독립법(1947 Indian Independence Act)을 제정할 때 무슬림이 많은 인도 제국 서북부와 동벵골 지역을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그 외 지역을 인도 자치령으로 독립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동벵골과 인도 제국 서북부는 서로 수 천km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 이를 파키스탄의 적대국인 인도가 가로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의 주민들은 종교만 같지 그 외에는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없었다.[1] 그런데 파키스탄의 성립에는 인도 제국 서북부 출신의 무슬림들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옛 인도 제국 서북부 출신들이 쥐게 되었고, 당연히 동벵골 사람들의 불만이 커졌다.
파키스탄 독립 운동에 기원이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우르두어 교육 및 진흥 운동에 연관된 사람들이었다.[2] 또한 1930년 인도 이슬람계에 대표적인 법 철학자이자 문학가였던 무함마드 이크발은 무슬림 엘리트들의 이권을 수호하기 위해 서북부 무슬림 밀집 지역(펀자브, 신드, 발루치스탄, 카이베르파크툰크와)이 따로 독립하여 안정적인 무슬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 벵골 지역은 빠져 있었다. 무함마드 이크발의 동료이자 파키스탄의 국부였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세속주의 성향이 강해서인지 “파키스탄은 아리아인의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천명했는데, 이는 서파키스탄 관료들에 의해 피부색이 더 짙은 동파키스탄 주민[3]을 2등 시민 취급하는 발언으로 해석되었다.
파키스탄 정부에서는 방글라데시에서 많이 쓰는 벵골어 대신 우르두어를 쓰라고 했고, 이에 다카 대학교 학생들이 반발 시위를 벌였다.[4] 결국 파키스탄 정부가 항복하여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지만, 시위에서 군인들이 폭력으로 누른 것이 방글라데시인들에게 자극이 되었고, 벵골인들은 아와미 연맹을 결성했다.
물론 파키스탄 정부도 동벵골인들의 불만을 모르지는 않았다. 동벵골인들이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했던 만큼 국가 통합을 위해서는 동벵골인들을 달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1955년에 당시 파키스탄 자치령 총리 모하마드 알리 보그라(Mohammad Ali Bogra)는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당시 인도 제국 서북부의 4개 행정구역(카이베르파크툰크와, 발루치스탄, 펀자브, 신드)을 하나로 통합해 서파키스탄이라 명명하고 동벵골을 동파키스탄이라고 명명하며, 연방제를 채택해 연방 차원에서 두 지역의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고, 또한 두 지역에 별개의 자치의회를 설립하고 서로에게 최대한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동벵골인들은 이 타협안을 수용하였고, 이는 1956년에 제정된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 헌법에도 명시된다.

2.2. 독재와 동벵골 탄압


그러나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의 동등한 권리 보장 약속은 처음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1958년 아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헌정을 뒤엎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해나가는 바람에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고,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격차도 더더욱 커지게 되었다. 본래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는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이었지만, 독재와 차별이 심화되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기 아유브 칸 군사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때 1970년 11월 12일에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태풍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파키스탄 정부가 구호에 굉장히 무성의하게 대응한 것이다. 태풍 상륙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야 경계를 내려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만 동원할 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핑계가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인도 정부는 아니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었다. 더군다나 파키스탄은 국제사회에서 받은 원조물자를 불공평하게 배분해 동벵골인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서파키스탄의 빈민층에게 많이 주고 지원이 필요한 동파키스탄의 방글라데시인들에게는 적게 주었다.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물러난 아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아히야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고 이듬해인 1970년 치뤄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해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0석, 과반의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서파키스탄 출신의 아히야 칸 대통령은 아와미 연맹의 총선 압승 결과를 무효 처리했고[5] 이에 반발한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아히야 칸 정부의 총선 무효화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동파키스탄 내에서의 소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 아히야 칸 대통령은 1971년 초 동파키스탄으로 가 무지부르 라흐만 아와미 연맹 당수와 회담을 벌였지만 선거 결과에 문제가 있어 무효화할수 밖에 없다는 아히야 칸 대통령과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고 새 정부를 당장 출범시키라는 라흐만 당수의 의견 불일치로 회담은 실패로 끝났다.
이제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 관계는 갈수록 험악해져 회복되기 힘든 것처럼 보였고, 긴장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2.3.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협상이 실패하자 결국 아와미 연맹의 당대표였던 무지부르 라흐만은 1971년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했다. 파키스탄군이 라흐만을 체포하자 분노한 방글라데시인들은 독립군을 결성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일으켜 동파키스탄 내의 서파키스탄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추방시켰고 동벵골 일대를 장악했으나 결국 파키스탄군에게 진압당하고 인도 국경 지대로 밀려났다. 그리고 이들은 인도-동파키스탄 국경지대에서 게릴라 작전으로 파키스탄군에 대항했다.
이 때 파키스탄군은 게릴라 토벌을 위해 인도 국경을 공격했지만 이게 오히려 인도를 자극하는 바람에 인도군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고, 얼마 가지 못해 파키스탄군은 항복했다. 이에 따라 동벵골지역은 1971년에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었다.

[1] 서쪽 파키스탄의 주도세력인 펀자브인은 민족적으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적인 (북부)인도인과 더 가깝다. 벵골인과 펀자브인을 외모로 구별하는게 인도인과 펀자브인 구별하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도 완전 다르다. 우르두어힌디어와 흡사한데, 벵골어와는 매우 다르다. 파키스탄 최대 언어인 펀자브어도 벵골어와 크게 다르기는 마찬가지. 사실상 서파키스탄과 인도 내 힌디어 지역은 종교 빼면 서로 구분될 만한 점이 많지 않다.[2] 사이드 아흐마드 칸무함마드 이크발 등등[3] 물론 벵골인들도 인도아리아어군 민족이지만...[4] 이 시위는 1952년 2월 21일에 일어났는데, 이날은 현재 방글라데시의 주요 국가 기념일 중 하나이자 유네스코에서 '''세계 모어의 날'''로 기념하는 날이다.[5] 이렇게 한 이유는 인도와 가깝고 교류도 있던 동파키스탄이 자치권을 얻을 경우 친인도 지역이 될것을 우려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