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종훈

 


'''후주 3대 황제'''
'''恭帝 | 공제'''
'''묘호'''
없음
'''시호'''
공황제(恭皇帝)
'''연호'''
현덕(顯德, 959년 ~ 960년)[1]
''''''
시(柴) / 곽(郭)
''''''
종훈(宗訓)
'''부황'''
세종(世宗)
'''생몰 기간'''
953년 9월 14일 ~ 973년 4월 6일 (20세)
'''재위 기간'''
959년 6월 ~ 960년 정월 (7개월)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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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주(後周)의 제3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휘는 종훈(宗訓). 세종(世宗)의 넷째 아들.

2. 생애


959년, 중원 통일 준비를 위해 북방의 요나라를 공격하여 석경당이 내어준 연운 16주의 수복을 목표로 북벌을 감행한 세종 시영이 도중에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서 황제로 즉위하였다.[2] 공제가 황제로 즉위할 때, 나이가 7살로 매우 어렸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가진 장수가 많았다.
960년, 장수들이 군대를 이끌고서 진교의 변을 일으켜 조광윤을 황제로 추대했다.[3] 이를 막아낼 힘이 없었던 어린 황제 시종훈은 조광윤에게 선양하였고, 이로써 후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개국하였다.
이후 공제는 선양을 한 뒤 조용히 살다가 21세의 나이로 요절했고[4] 조광윤은 그의 장례를 황제의 예를 갖추어 후하게 치러주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명목상) 선양을 했던 대부분의 역대 황제들이 비참하게 죽은 것에 비해, 시종훈과 그 일가는 조광윤의 존중과 보호를 받았다는 점이다. 조광윤은 비록 시종훈으로부터 제위를 빼앗기는 했지만 개봉에 입성할 때부터 휘하 군대에게 철저히 민가 약탈과 살육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고, 전임황제인 시종훈을 정왕(鄭王)에 봉하고 일족과 함께 방주(房州)에서 살게 하면서 방주 태수이자 자기 스승이기도 한 신문열로 하여금 잘 보호하게 했다. 그리고 조광윤의 후손인 그 후의 황제들도 시씨 일족에게 단서철권을 주거나 전쟁이 터져 황실이 도망갈 때 함께 데려가주는 등 각별한 대우를 해줬다. 이후 시씨 일족은 북송이 쇠하고 뒤를 이은 남송이 망할 때까지 줄곧 보호를 받았고, 답례인지 그들은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까지 함께 할 정도로 충성을 바쳤다.
다만, 시종훈 자신은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독살설도 있었으나 이미 죽일 필요가 없는 그를 죽였겠냐 해서 사그라 들었고, 그의 동생들은 모두 다른 성씨로 바꾸어 자손을 남겼다. 시종훈의 후대는 그의 할아버지 시수례의 자손들이 남송이 망할 때까지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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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주의 역대 황제'''
2대 세종 시영

'''3대 공제 시종훈'''

주 멸망/송태조 조광윤



[1] 세종(世宗)의 연호를 이어서 사용하였다. 원래 유년개원이라 하여 선황에 대한 효도의 이유로 즉위한 해에는 선제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며, 해를 넘겨서 정식으로 새로운 연호로 개원하였다. 하지만 해를 넘긴 정월에 송왕조에 선양하게 되었으므로 개원하지 못한채로 이전 연호를 본인 재위기간 내내 사용한 것이 된 셈이다.[2] 시종훈이 황제로 즉위한 연유는 이러하다. 우선 첫번째 연유는 시종훈의 큰형인 시종의가 북한유숭에게 살해당한 점, 두번째 연유는 둘째 형인 시종양과 셋째 형인 시종함이 요절한 점이 있어, 사실상 시종훈이 장남이 된 상황이었다.[3] 이때 조광윤은 자다가 일어나 장수들의 이야기를 듣고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결국에는 승낙했다고 한다. 물론 액면 그대로 믿기는 힘든 이야기지만.[4] 다만, 조광윤의 스승인 신문열이 후환을 우려해서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종훈의 아내를 농락한 후 자살하게 만들고 시종훈도 화병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