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영

 



'''후주 제2대 황제'''
'''世宗 | 세종'''
'''묘호'''
'''세종(世宗)'''
'''시호'''
예무효문황제(睿武孝文皇帝)
'''연호'''
현덕(顯德, 954년 1월 ~ 959년 6월)
''''''
시(柴)/곽(郭)
''''''
영(榮)
'''생몰 기간'''
921년 10월 27일 ~ 959년 7월 27일 (38세)
'''재위 기간'''
954년 2월 26일 ~ 959년 7월 27일 (5년)
1. 소개
2. 생애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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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후주(後周)의 제2대 황제. 재위 5년의 짧은 기간 동안 다른 군주가 30년 동안 할만큼의 업적을 쌓았다고 하는 5대10국시대를 대표하는 명군.
오대십국시대 후주의 건국자 곽위양자였다. 원래 이름은 시영(柴榮)으로, 친부의 이름은 시수례(柴守禮)였다. 대개의 경우 후계자가 없어 양자를 들일 때는 성씨가 같은 방계를 들이는 게 보통이었지만 특이하게도 시영은 곽위의 아내의 조카, 다시 말해서 곽위의 처조카였으며 곽위는 시영의 고모부였다. 시영을 양자로 들인 이유는 그의 비범한 능력을 곽위가 미리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곽위가 그의 능력을 얼마나 믿었는가 하면, 죽을 때 '''"아무 걱정도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곽위는 후한 은제 유승우에 대항해서 거병했을 때 은제의 보복으로 친족들이 모두 살해당해서 후계자로 삼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처조카인 시영을 후계자로 삼은 것. 고모부의 성인 곽씨(郭氏)를 받고 양자가 되었으나, 고모부가 죽은 뒤에 성을 시씨(柴氏)로 복성(復姓)하였다.

2. 생애


태조 곽위가 죽자 32세의 나이로 제위를 계승했다. 곽위의 눈은 틀리지 않았는지 이 시대 최고의 명군으로 뽑히는 인물이 되었다. 즉위하자마자 거란과 결탁한 북한의 황제 유숭의 공격을 받았는데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맞서 싸웠고, 조광윤의 활약으로 이를 격퇴했다. 이 여세를 몰아 분열된 중국의 통일 사업을 계획하고 착수하여 서남의 후촉을 멸망시키고 남당을 제압하여 장강 이북의 패권을 쥐었다.
내정에서도 많은 개혁 정책을 실시해 농업 분야와 조세 제도및 법제 개편 등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이렇듯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간 명군으로 북방의 요나라를 공격하여 연운 16주를 수복하기 위해 북정 길에 올랐으나[1]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고[2], 돌아오는 길에 37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3] 이후 일곱 살 난 아들이 제위를 계승했으나, 곧 군부의 장수들이 장군 조광윤을 황제로 옹립한다. 이를 '''진교의 변''' 혹은 진교병변이라고 한다. 송 태조 조광윤도 세종의 휘하에서 장군으로서 많은 군공을 세웠다. 이 진교병변으로 북송이 들어서게 되었다.
현덕 2년(955년), 잔혹한 불교 탄압 정책으로 삼무일종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삼무일종에 대한 설명은 세조 항목의 북위 태무제 참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송나라 이후로는 불교적 색채가 당나라보다 상당히 약해졌고, 그 자리를 도교가 채웠다. 불상을 녹여 화폐인 주통전을 만들었는데 당시 세간 사람들은 “주통전이 유통되는 한 세종은 지옥에서 구제받지 못할 것” 이라고 했다고 한다.
흔히 '시세종(柴世宗)'이라고 불리며 수호지에 등장하는 소선풍 시진의 조상이 되는 인물로 송나라의 전신인 후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사실상 송나라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었다. 요절만 안하고 후계자만 적절했어도, 중원 통일은 시씨가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4] 조광윤 또한 그의 수하로 시작해 세종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군공을 세웠고 세종에게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시영은 죽기 전 조광윤에게 거의 모든 군권을 넘기고 황실을 보호해 달라고 유언하며 죽는다. 결과적으론 나라는 빼앗겼지만, 다른 황조들의 정권 교체 당시, 전 왕조의 마지막 황제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낸 것과 달리 조광윤은 시 세종의 후손들[5]을 우대하였다. 덕분에 시씨 가문의 수장은 송대에 걸쳐 대대로 단서철권을 받았으며, 황실이 도망갈 때 끼워주거나 하는 등 특권을 받으며 번성하게 된다. 이덕에 남송 최후의 항전인 애산 전투에서 수많은 시씨 문중 사람들이 송 황실과 그 운명을 함께할 정도로 충성을 바쳤다.

3. 기타


후주의 세종은 부언경의 딸 2명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세종이 맞이한 두 황후의 여동생은 조광윤의 아우였던 조광의에게 시집을 갔다. 부언경은 자신의 딸 3명이 모두 황후로 들어간 인물이 되었다.[6]
아들 일곱이 있었으나 셋은 거병할 떄 살해되었고 황제가 된 시종훈은 넷째 아들이다. 다른 세 아들은 성을 고쳐서 살아남았으나 정식으로 시영의 자손으로 인정되는 것은 북송 공신 반미가 친척의 아들로 입양시켜 반유길(潘惟吉)로 개명시킨 시희양(柴熙讓)의 자손들 뿐으로, 그래서 그의 자손들은 반씨가 되었다.

4. 둘러보기


'''후주의 역대 황제'''
초대 태조 곽위

'''2대 세종 시영'''

3대 공제 시종훈




[1] 이때 기동성 있는 행군으로 요나라의 허를 찌르고자 병마를 대운하를 이용해 북상시켰다고 한다.[2] 그의 업무 스타일은 모든 사안을 직접 챙기는 이른바 만기친람(萬機親覽) 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로 인한 과로가 갑작스런 병사의 한 원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3] 그의 죽음에 관련하여 중국 북송 때의 학자인 왕질(王銍)이 쓴 소설인 묵기(默記)에서는 기괴한 이야기 한 편을 전하고 있다. 하늘의 별자리를 살피던 신하 왕박이 어느 날 세종을 찾아와서 이상한 현상을 보았으니, 꼭 보러 가자고 간곡히 부탁하여 세종은 왕박과 함께 오장하(五丈河)로 갔는데, 허공에 불타는 수레바퀴(UFO?)가 날아다니고 그 위에 3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火輪小兒)가 앉아 있었는데, 왕박은 세종한테 그 어린아이한테 엎드려 절을 하라고 말했고 세종이 그렇게 했더니, 돌아오고 나서 얼마 후에 둘 다 갑자기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출처 다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괴담류에 속하는 것이니, 너무 진지하게 믿지는 말기 바란다(...)[4] 세종 자신부터가 천하통일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신하들에게 '''"첫 10년 동안 천하를 통일하고, 그 다음 10년 동안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태평성대를 이뤄보리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30년은커녕 첫 10년도 반밖에 못 채우고 죽었으니... 그나마 다행인 부분은 시영이 끝내지 못 한 일을 역시 명군이었던 부하 조광윤이 마저 끝냈다는 것이다. 주전충 같은 폭군이 이어받았으면 시영의 노력이 허사가 됐을지도 모른다.[5] 정확히는 방계. 세종의 아들인 공제 시종훈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요절해서 세종의 친부인 시수례의 다른 자손들이 시씨 가문을 이어갔다.[6] 물론 의덕황후 부씨는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 황후로 추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