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평가
1. 개요
신라에 대한 평가를 서술하는 문서.
2. 기존의 평가
단재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니 외세를 끌어들여서 만들어낸 통일이고, 고구려 땅 대부분을 잃은 통일이라고 비판하며 우리 역사에 사대주의적인 요소를 심게 되는 계기라고 평가했다. 현대 대중의 평가도 이와 다르지 않으며, 신라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언급될 때마다 당에 숟가락만 얹은 그저그런 잡세력 취급받거나 '''외세에 의지한 매국노 어쩌구''' 운운하면서 엄청나게 욕먹는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신라의 성과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설령 누가 알려주더라도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극히 무식한 일반 대중의 인식은 암울하지만, 그렇다고 쿨해지고 싶어 안달난 몇몇 얼치기 역덕이 고구려와 백제는 삼국통일 이후 한국사와 완전히 인연이 끊어졌으며 현재의 대한민국은 신라와만 연관이 있고, 훗날의 고려와 후백제는 이름만 빌린 허울 뿐인 실체란 주장을 하는 현상 또한 극복되어야 하는 현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반 대중들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착각하지만 견해가 틀린 건 매한가지기 때문. 전자의 일반 대중과 후자의 얼치기 역덕 이 두 부류의 인식은 모두 잘못되었고 따라서 극복이 필요하다. 일반 대중은 신라의 성취에 대해 잘 모르는 반면, 얼치기 역덕은 신라의 실패와 한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1]
3. 성취와 업적
신라의 삼국통일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단일 운명 공동체가 탄생한 건 부정할 수 없다. 현재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민족의 원류에 해당하는 집단에게 하나로 통일된 국가라는 경험을 새겨넣고 전 지역이 동일한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경험을 하게 한 최초의 국가는 어디까지나 신라지, 고조선이 아니다. 즉 국가 공동체 통일의 시발점을 닦은 발판의 마련은 민족사적인 시각에서 신라한테만 해당하는 업적이다. 한국 역사의 최초라고 평가받는 고조선은 서북한 지역을 지배했던 부족 국가에 불과하여 한국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내진 못했고, 그저 한국이란 나라의 정체성이 출발했다고 볼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신라는 나름 정복민을 융통성 있게 골품제로 포용했었다. 가야를 멸망시킨 후 왕족들은 신라 왕족인 진골로 편입되었으며 금관가야 왕의 증손자였던 김유신도 신라 진골이었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해당 지역의 귀족들을 천민이나 평민으로 강등하지 않고 5두품, 6두품 귀족으로 편입했다. 신라의 신분제인 골품제도 지속적으로 비판받는 부분이지만, 실은 고구려와 백제의 신분제도 신라의 골품제 못지않게 폐쇄적이었다.[2]
단재 신채호가 외세를 끌여들어 같은 민족을 없앤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한 걸 아직까지 인용하는 입장도 있으나, 이는 현재 입장에서만 바라본 잘못된 생각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말이 각각 어느정도 통한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오늘날의 민족감정으로 서로를 바라본 건 아니었다. '''고대 삼국은 서로를 지금처럼 같은 민족이라 생각한 바는 없다.''' 물론 언어와 문화가 '''어느 정도 동질적인 건''' 인지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외국은 외국이었다.''' '''오히려 이런 예가 세계사적으론 흔하며''', 사실 유명한 고대 성서 무대에서 등장하는 이스라엘, 암몬, 모압, 에돔, 유다 모두 같은 언어를 썼고 문화도 같았으며 사실 종교면에서도 그렇게까지 큰 차이는 없었지만 서로를 견제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외세를 끌어들이며 죽자꾸나 싸워댔다. 역시 상대방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서라면 로마든 마케도니아든 페르시아든 뭣이든 열심히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상대방을 쳐대던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마찬가지. 이 삼국의 국가 정체성을 완전히 녹여내어 같은 민족으로 동질감이 생기게 한 건 고려시대 이후이다. 물론 통일신라는 민족적 통합을 완료하지 못해 후삼국으로 나눠져 오늘날 이 문서가 만들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신라는 국가 대 국가로서 생존하려면 당을 끌어들이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시원히 망해서 고구려나 백제의 일원이 되어 신라 인민들을 고구려나 백제의 2등 국민으로 만들었어야 한다는 생각은 잠깐의 지적유희나 우스개론 유용할지 몰라도 당대 신라 입장에선 말이 안 되는 얘기며,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비판을 굳이 더 하면 꾸준히 왜를 끌어들여 신라를 괴롭힌 가야와 백제도 벗어날 수가 없다.[3][4]
또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세 나라의 문화를 빠르게 융합, 발전시켜 당시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빛나는 문화를 꽃피웠다. 현대에도 재현하기 힘든 각종 공예술과 불교 미술이 남긴 정교한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낸다. 그래서 발해 등을 곁가지로 취급하는 외국 한국 사학계에서는 삼국 - 통일 신라 - 고려 - 조선을 중심으로 한국사로 설명하는 편이며, 최근에 등장하는 미국 중, 고등학생 교과서도 그런 식이다.
4. 한계와 실패
신라 삼국통일의 진짜 한계는 고구려 만주 영토 상실 따위가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에게 '우리도 한 나라의 진정한 백성'이라는 인식을 심는데 실패한 물리적인 통합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물리적 통합이 있었기에 물론 고려의 의식적 통합이 가능했지만, 분명한 건 신라의 통합이란 게 물리적인 면에만 그쳤기에 실패했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말이 통하고 문화가 어느정도 비슷한 다른 나라'들을 물리적으로나마 처음 통합을 했고 신라말에 분열을 막기위해 대두시킨 삼한일통 의식을 탄생시켰으니 통일에 의의가 없다고는 할 수 없고 분명히 뒷날 고려의 통일에 한 전범이 되었지만 '진정한 한민족의 시작'이라고 할 순 없다.
삼국사기 40권의 문무왕 대 조치들만 보고 고구려인과 백제인 상류층에 관등(벼슬의 등급)을 내릴 때 본국과 견주어 주는 등 많은 우대를 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단정하는 견해가 있으나, 우선 본국과 견주어 그에 맞게 주지 않았다. 사실 정복 국가가 여간해선 정복 초기에 피정복국 지배층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하는건 역사에서 흔한 일이다. 중요한 건 이러한 파격이 지속되었느냐인데, 신라의 경우는 분명 아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해당 지역의 귀족들을 천민이나 평민으로 강등하지 않고 5두품, 6두품, 진골 귀족으로 편입했다고 하지만 진골은 예외 케이스라고 봐도 좋을 정도고, 멸망한 나라라 격하됨을 감안해도 백제 지배층을 5두품[5] 에 편입시킨 대우는 약간 심했다고 여겨질 소지는 있다. 멸망시킨 나라 귀족을 여간하면 지배층으로 진출할 수 있게 해주는 건 제대로 된 정복 계획을 세우는 나라라면 어디나 하는 것으로 이는 로마,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제국 등이 그랬고, 심지어 주변국 정복민 괴롭히는 방면에서 대단한 악질이었던 일제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 왕가와 귀족층에 상당한 지위를 보장하였다. 때문에 완전한 국가 통합에 성공해서 종족적, 언어적 계보 자체가 다른 족속까지 통합하는 데 성공했던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땐 여전히 빛이 바랜다.
게다가 6두품이라 한들 정치와 경제 면에서의 차별은 분명했고, 5두품은 작은 군현에서 우두머리를 하는 게 끝인, 좋게 봐줘야 중산층 정도에 불과한 지위였다. 또한 그런 대우를 받은 건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고구려, 백제 유민 대부분은 수도와 차별적 대우를 받는 지방 세력으로 흡수되었고, 지방민은 세금과 인력을 바칠 뿐 중앙에 진출할 기회는 상당 부분 차단되어 있었는데 이는 지방 세력의 실력이 성장하는 후기까지도 제대로 고쳐지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신라의 관등에서 경위와 외위의 분리. 즉, 수도 귀족과 지방 귀족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의 융화 정책이 완벽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 사료들을 보면 백제 유민들과 고구려 유민들이 차별을 받았다면 분명히 수도 많고 세력도 있었던 백제 유민들과 고구려 유민들의 반란이나 전쟁이 기록되어야 한다는 얘긴데, 그런 사례는 분명히 있다. 후삼국 시대의 항쟁으로 인한 신라 정부의 지배력 붕괴가 그것. 물론 이 대목에서는 나당 전쟁 종식 이후로 200여년간 내내 반란이나 전쟁은 없었다고 주장하겠지만, 이는 정체성이 살아있다면 피지배민은 늘상 항구적인 반란 상태에 있어야만 한다는 대단히 비역사적인 전제에 불과하다.
그렇게 따지면 일제도 철저한 탄압을 거처 적어도 1930년대에 한반도에서의 소요는 거진 죽이는 데 성공했고 세계사에서도 정복국이 강하며 통치가 참을만할 동안 피지배국은 잠자코 있는데, 이걸 가지고 명분이 있네 없네를 따진다? 가장 반그리스, 반로마적 의식이 특유의 종교적 영향으로 강했던 유대인들마저도 반란 없이 조용히 지냈던 기간이 압도적으로 길며, 결국 로마 제국에게서 떨어져나가 최대의 적으로 돌아온 불가리아도 무려 이백 년 넘게 상류층이든 하류층이든 잠자코 로마에 충성하고 살았다.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단순히 신라에 대항하고 반란하는 것에 명분을 주기 위해서란 말이 있으나, 그 전에 그렇게 융합이 잘되었으면 멸망한지 수백년이 흘러간 시점에서도 백제나 고구려의 재건이라는 모토의 분리독립이 먹혀들어갔을 정도로 정체성이 남아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요한 건 그게 어떻게 유독 그 시대에서만 명분으로서 작용했고 이후에는 갈수록 파급력이 적어지는가다.
긴 시간의 통일 신라 시대 때 차별과 같은 문제는 전혀 사서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저 지방 세력에 불과하다는 이유만으로 출세에 한도가 있고 지방 유력자가 중앙 정계에 진출할 경로가 완전 차단되어 있으며 정책 결정에서 완전 배제되어 있는 건 차별이 아닌가? 게다가 그 지방 유력자 대부분은 고구려계, 백제계일 수밖에 없는데? 오죽했으면 신라가 지방의 이탈을 막기 위해 이식했던 신라 진골이나 6두품마저 죄다 이반했겠는가? 이런게 성공한 융화의 결말인가?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백제 유민 의식과 신라 유민 의식이 분명 잔존했으니 고려도 마찬가지란 견해가 있으나[6] , 고려 시대의 부흥 운동은 후삼국 시대처럼 성공하지도 못했고 거꾸로 지방에서 근왕군이 일어나 부흥군과 직접 대결하는 상황을 보면 신라 후기 시절과는 단연코 양상이 달랐다.
신라 장군이였던 견훤과 신라 왕족일 개연성이 있는 궁예가 부패하고 약해진 신라를 대항한다는 뜻에서 명분상 백제 부흥, 고구려 부흥을 주장했는데, 이런 야심가들의 경우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중앙 정부에 적극 협조해서 공을 세우는 길을 택했지 위험한 복국 반란에 몸을 던지는 경우는 대단히 적었다. 원인이야 물론, 온전한 대우가 이뤄지지 않은 나머지 이런 야심가들이 이용할 유민의식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게 원인이다. 어느 사료에도 차별이 있어 후삼국 시대가 생겼다고 쓰여있지 않다고 하는데, 지배당했다가 부활하는 입장에선 당연히 그냥 복국을 외치지 차별 대우를 해소해서 완전히 대우받을 여지가 있으면 뭣하러 독립해 새 나라를 세우겠다고 나서는가? 중국에서 현 국가에 대항할때 예전 국가의 국명을 명분으로 삼아 대항했듯이 후삼국 시대에서도 그랬을 것으로 보는 억측도 있으나, 중국에서 그것은 중원 지역의 군주일 경우 마땅히 해당 지역이 속하는 지역을 봉국으로 삼아 한 글자 국호로 나라를 건국하는 관례에 의거한 것이다. 한반도에는 그러한 관행이 없었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1차 사료를 대강 검색해보고 훑어보면 적어도 신라 측 공식 입장에선 그런 게 보이지 않으니 신라의 융화 정책이 완벽했다고 착각할 수는 있겠지만, 유독 한국사에서는 신라 말에만 불거지는,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그것이 흔한 옛 국가 부활 운동의 수순이란 면을 본다면 그러한 억측은 전혀 불가능해진다.
신라가 초반 세력 확장 과정에서 새로 복속된 지역에 적극적인 유화 정책을 펼쳤던 적도 물론 있었다. 가야 제국(諸國)의 경우는 진골로 바로 편입된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유는 변한(가야), 진한(신라)의 상대적으로 강한 문화적 동질감에 있었던 걸로 추정되며, 월성 석씨 선원 세계도, 신라 김씨 선원 세계도 의하면 석탈해의 손녀 마정 부인이 그의 양자격이었던 김알지의 처가 되었다고 하는 게 그 근거.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장남의 이름은 강조(康造)라 하고, 월성 석씨 족보에서는 구광이라 하였으며 구광은 가야 국왕 김수로왕의 딸이다.즉 김알지의 계통 체계는 금관 가야 김수로와의 혈연적 연관이 보이며, 때문에 예전부터 신라와 가야 제국들과의 혼인 관계에 의해 진흥왕 시절 새로 편입된 가야 제국의 백성들은 위화감 없이 신라에 융화되었다고 추정한다.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야 멸망 후 신라 왕족과 명목상 동급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또한 고구려와 백제도 정복 초반엔 꽤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엔 왕족은 진골이지만 나머진 결국 6두품, 백제의 경우는 5두품이어서 가야에 비해선 쳐졌다. 즉 나쁘진 않지만 가야에 비해서도 그렇고 썩 좋은 우대라곤 보기 어렵다.
특히 백제의 경우 깡촌 우두머리급인 5두품에 속했다는 것이 이목을 끄는 데, 이는 백제와 통일 전쟁 전후로 상호 원한이 쌓였던게 일차적인 원인으로 백제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간 것은 원인이 아니다. 설령 그랬다한들 전부 건너 가는 건 불가능한 얘기며, 그렇게 따지면 마찬가지로 모두 보존되지 못한 고구려 고위층한테 백제 고위층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줄 다른 이유가 없었다. 신라 측도 바보가 아니라서 오히려 애초엔 백제 쪽을 더 우대해주려고 했으나, 구 백제지배층은 신라 정부 생각대로 그렇게 쉽사리 협조적으로 움직이진 않았다. 신라가 본국과의 관등에 맞춰 신라식 관등을 하사했을 때 고구려계는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백제계 중 상당수는 거부한 정황까지도 분명 나타날 정도였다! 똑같이 망했지만 신라의 포용 정책에 그럭저럭 순응했던 고구려계와는 분명 대비되는 행태였고, 이들의 이런 비협조에 대한 신라의 반응은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신라 지배층이 몹시 격분했을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7]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로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의 완전한 통합 시도는 고려시대로 미뤄질 수밖엔 없었다. 이들이 성공적으로 신라의 고위 계급으로서 정착하였고 동화하였다고 생각하는 건 문무왕 대의 극히 초반 파격적인 조치를 통일 이후 전 시기 동안 유지된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며 이는 후삼국시대의 시작으로 입증된다.[8] 후삼국시대가 이백 년 이상 뒷날의 이야기기 때문에 7세기의 통합 후유증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다시 갈라졌다고 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견해가 있으나, 국가라는 집단의 진화와 발전에는 여러 요인이 기여하기 때문에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라고 주장할 순 없겠지만 통합할 때 행한 부적절한 조치가 무려 이백 년 동안에도 고쳐지지 않아 다른 여러 요인과 합류하여 분열에 기여한 건 사실이기에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임에는 부정할 수 없다.
때문에 신라의 지방 세력은 신라 왕조로 대표되는 체제가 건재한 이상 자신들에겐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때까지도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 의식, 백제 유민 의식에 불을 붙여 중앙 정부로부터의 공식적 이탈, 즉 독립이라는 실력 행사로 후삼국 시대로 나타나게 된다. 즉, 후삼국 시대의 도래는 신라의 융화 정책이 끝내 실패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뒷날 고려가 진정한 통일을 했다고 보는 건 발해가 멸망한 후 발해의 태자였던 대광현을 비롯해 많은 발해 유민이 고려에 편입된 것만이 이유가 아니다. 어차피 영토적인 관점에서만 보자면 고려도 조금 더 북상에 성공했을 뿐 고구려의 후계국인 발해의 영토를 온전히 차지하지는 못했다. 고려의 통일이 진정한 통일로서 평가받는 이유는 삼국 유민의 의식적, 내적 통합까지 달성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신라 계승적 의식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삼국사기에서도 진정한 통일 왕조는 고려라는 시각이 드러난다. 물론 삼국사기야 고려 왕조에서 펴낸 관찬사서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으나, 신라에 대해 어느 정도 애착이 컸을 개연성이 있었다고 보는 김부식마저도 기껏 서술한 건 고려의 삼한 계승 의식이었다.
이 의식적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현대 한국인에게 와닿는 사례를 하나 들자면 신라가 한반도를 통치하던 시절 단군은 어떤 지위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려인들이 자신들이 이어받았다고 여긴 고구려는 주몽을, 신라인들은 박혁거세 혹은 김알지(혹은 성한왕)를 시조로 섬겼지만, 고려 후기 '''몽골의 침입을 기점으로''' 그전엔 평양 산신 취급받던 단군이 한민족 전체의 시조급으로서 위상이 급부상한다. 말과 풍속, 역사를 전혀 공유하지 않는 이민족과의 오랜 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한반도의 독자성을 강조할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단군을 시조로 하는 한민족이라는 관념은 신라가 아닌 고려에 모태를 둔다. 바로 그렇기에 신라는 한민족의 시작을 일군 주요한 토대는 될지언정 시작 자체는 결코 될 수가 없는 것이다.[9] 한국인의 민족 관념에서 단군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생각하면 고려시대에 발생한 이 의식적 통합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신라의 통일이 내외적으로 완전했었다고 가정한다면 애초에 이런 통일의 완전성에 대한 의문이나 논쟁 자체 또한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박혁거세를 시조로 한 단일 민족 국가로서 신라 혹은 그 후속 국가들이 이어지는 모습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 고려, 조선 같은 국호를 가진 나라가 등장하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고려 다음에 조선이란 국호가 등장하는 걸 들어 이것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으나, 조선이라는 국호가 등장한 건 애초에 삼한일통을 목표로 한 고려 건국 이념의 연장선상에서 봐야하며, 고려 왕조를 압도하는 정통성을 가지고자 했던 이성계와 신진사대부측의 열망이 원인이기에 이는 과장이 아니다. 애초에 조선은 신라와 국체의 연속성이 없었던 고려와는 달리, 분명히 고려와 국체의 연속성이 있었다는 것 또한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
첨언하면, 여기서 국체의 연속성이란 것은 그야말로 국체의 직접적 계승을 말한다. 정부, 영토, 인민 등. 고려는 신라와 그러한 관계가 아니었다. 고려는 애초에 신라와는 별도로 고려부흥운동의 결과를 통해 새로 탄생한 국가였고, 한편 신라 정부는 고려를 별도의 국가로 인정하면서 사신을 교환했고 나중에는 아예 고려왕 왕건을 대왕 고려왕으로 칭하며 그 아래를 자처했다. 신라 왕실은 임금이 살해당하고 정상적인 국가 기능이 거의 끝장나버린 상황에서도 끝까지 후백제를 정식으로 인정한 바가 결코 없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차이다. 또한 주민도 고려는 발해인들을 흡수했고, 영토도 신라가 직접 지배하지 못한 패강진은 아예 직접 지배 영역으로 깔고 시작했으며 평양 일대도 완전히 손에 넣었다. 물론 관직 체계도 완전 별도로 새로 시작한 새 나라였으며, 지방 체제 또한 고려는 적어도 현종 이전까진 원 신라의 직접 지배 영역이었던 곳과 그렇지 않았던 지역은 별도의 지방 체제로 편성하여 다스렸다. 한편 조선은 왕조만 바뀌었지 그야말로 주민, 영토, 정부 모두 고스란히 계승했다. 애초에 조선왕이란 지위란게 고려 태후가 고려왕을 폐위한 다음 이성계를 고려왕으로 임명하고, 그 고려왕 이성계가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하면서 생긴 지위였다. 고려왕과 신라왕 사이에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 없었다. 또한 계승의식으로 따지면 조선은 신라와 고려가 시작한 삼한일통의 완성으로, 정체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게 모두 골고루 두었다.
신라와 고려가 반드시 국체가 이어져야만 한국사가 이어진다는 생각은 특정 개인이 만들어낸 이상한 당위성에 몰두된 생각으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한 민족의 국가가 특정 시기에 하나만 있을 수 있다는 관념은 역사학에서 통하지 않으며, 고려는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국가고 고구려를 이은 나라로서 신라라는 국가를 양도받고 백제를 무력으로 굴복시켜 신라가 실패한 삼한일통을 완성했기에, 고려가 신라를 그대로 이은 나라가 아니라고 민족사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신라와 고려의 연결성을 과도하게 부각하면서 고려는 그저 이름만 고구려를 이은 나라며 신라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사를 사실과 다르게 크게 축소하는 어리석은 행태다.
[1] 일반 대중의 고구려 애호에 관련된 만주 영토 운운만 행태를 극복하겠다고, 아예 고구려사를 부정하고 신라만 우리 조상론을 주장하는 일부 얼치기 역덕의 행태에 대한 원인 분석은 단순 스노비즘이 아니라 합당한 비판이다.[2] 그러나 이 여성의 속옷까지 제한하는 가혹한 신분제는 후기 멸망을 앞당긴다. 가장 중요한 성골의 핏줄이 끊길지언정 진골을 성골로 격상시키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백 번 양보하더라도 고구려나 백제도 비슷하게 폐쇄적이었다고 신라도 그래도 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무리한 옹호론은 골품제가 지역 유력층의 권력층 진입을 강력하게 틀어막아 결국 유력층의 반 신라 감정을 키워 신라를 멸망으로 몰고갔던 역사적 사실 앞에서 무력해진다.[3] 물론 고구려는 애초부터 강자였으니 구태여 외세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고, 굳이 말하면 말갈인데 이들은 고구려에 복속된 피지배민 내지는 용병 비슷한 처지였으니 외세로 볼 순 없다. 굳이 고구려가 주체적이어서가 아니라 외교적으로 굳이 손해보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없어서 그런거긴 하지만[4] 사실 고구려와 같은 부여계인 백제 또한 수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했고 부여는 중국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군량미를 지원해 줬다.[5] 다만 여기서 신라를 변호하자면, 백제는 고구려보다 신라와 싸운 역사가 길고 백제 유민들 자체도 나당 전쟁과 그 이후 과정에서 신라 정부의 기대를 저버리고 통합에 그렇게 협조적이지 않았던 사정도 있었다. 그러니 신라는 백제 상류층을 고구려 상류층과 동등하게 대우할 이유가 없었다.[6] 분명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유민 의식의 저항 강도나 양상이 달랐음을 간과하는 짧은 견해다.[7] 신형식 교수의 신라 통사 및 충남역사문화원의 백제사 중 백제 유민 편 참조.[8] 이런 논리로만 따지면 일제의 조선 왕족 및 양반에 대한 우대도 대단히 파격적이었고 일제 군인이나 공무원 중에 조선인도 많았으며, 조선인 판사를 모독하는 일본인 법정 공무원이 매우 엄히 일본법으로 처벌받은 사례도 있으니 조선인이 완전히 일제에 융화되어 차별없는 대우를 받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과연 받아 들일 수 있는가? 프로파간다적 시도를 현실과 혼동하는 게 이렇게 위험천만하다. 일제강점기와 신라 지배기는 경과한 시대와 세대교체의 차이가 있었으니 다르다는 견해가 있으나, 몇 가지 문서적인 근거와 극히 일부의 지배 계급 진출로 동화를 단정하는 견해로만 따지면 오히려 일제야말로 동화에 최선을 다했다는 견해와 일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궤변이 틀렸다는 지적은 경과한 시간과 세대교체를 간과하는 경우가 아니다.[9] 다만 단군에 대해 그 어떤 일언반구도 없는 고구려,백제에 비해 계승의식이라 보긴 뭐하지만 유일하게 신라만이 박혁거세가 나고 자란 마을이 옛 고조선의 유민이라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