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오 피올라
1. 개요
이탈리아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이자 세리에 A 역대 최다(274골) 득점자.
2. 초기 선수생활
피올라는 로비오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상 이유로 인해 베르첼리로 이사했고 피올라의 재능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베르첼리 지역에서 살던 한 신부였다고 전해진다. 신부의 소개로 프로 베르첼리[1] 에 입단하였고 16세의 어린 나이에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르게 되었다.
첫 해에는 드문드문 경기에 출전하였지만 다음 해부터는 주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고 17세의 나이로 13골을 넣음으로서 성공적으로 세리에 A 무대에 적응을 마친다. 비록 스키아비오, 펠리체 보렐 등에 밀려서 월드컵 대표팀에는 선발되지 못했지만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더 큰 구단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 구단은 로마의 SS 라치오였다. 원래 피올라는 라치오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라치오를 선택하였고 피올라는 바이시클 킥 등을 사용한 멋진 플레이와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단숨에 라치오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입단 첫 시즌에 21골을 넣어 리그 득점 기록 2위를 차지하였고,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그의 대표팀 데뷔 무대는 중유럽 컵 대 오스트리아전이었고 그 경기에서 피올라는 2골을 넣어 2:0 승리를 이끌어냈다.
결국 1936-37 시즌에는 처음으로 세리에 A 득점왕 자리를 차지하였고 월드컵에 출전하기 3달 전에 가진 벨기에와의 친선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6:1 대승을 이끌어내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쳐 대표팀의 스트라이커 자리의 주인을 더 확실히 정해놓았다. 대표팀의 주전 멤버 중 하나였던 지노 콜라우씨도 소속팀에서는 스트라이커였지만 피올라에 밀려 아웃사이드-레프트 포지션을 맡게 되었을 정도였다.
3. 1938년 월드컵
피올라는 노르웨이를 상대로 한 월드컵 개막전에서 연장전에 결승골을 넣어 2:1로 짜릿한 승리를 이끌어냈다. 노르웨이의 요한센 골키퍼가 파시나티의 슈팅을 막아냈지만 피올라의 2차 슈팅까지는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뒤이어 열린 개최국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는 2골을 넣으며 3:1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프랑스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이 뒤에 있었지만 이탈리아는 디펜딩 챔피언답게 프랑스보다 한 수 위의 경기력을 선보였고 비아바티의 어시스트를 2번 다 깔끔한 골로 연결해냈다.
다음 4강전의 상대는 남미 축구의 자존심 브라질. 많은 축구팬들이 브라질의 레오니다스와 피올라의 창 대 창의 대결을 기대했지만 브라질의 감독은 체력 안배를 위해 레오니다스를 명단에서 제외하는 오판을 저질렀고 이 경기에서 피올라는 브라질 수비수 도밍구스 다 기아를 상대로 페널티 킥을 얻어내었고 주세페 메아차가 바지 고무줄이 끊어지는 악조건 속에서 왼쪽으로 깔끔하게 차넣어 승리를 거두었다.
결승전의 상대는 헝가리. 레오니다스와의 맞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전 3경기에서 10골을 합작해 낸 기오르기 사로시와 귤라 젱겔러 콤비와의 맞불 양상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다. 피올라는 여기에서도 추가골과 쐐기골. 2골을 넣어 대회에서 총 5골을 넣었고 브론즈슈와 실버볼을 차지하였다.
4. 월드컵 이후. 세리에 A 우승을 위한 노력
월드컵 이후에도 라치오에서 그는 계속 활약을 이어갔다. 득점왕 자리는 다시 차지하였지만 결국 그토록 바라던 세리에 A 우승에는 실패하였고 전년도 우승팀 토리노로 옮겨 발렌티노 마촐라와 호흡을 맞추면서 우승을 노렸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세리에 A가 1943년부터 중단되었고 토리노에서는 2년간 리그에서 제대로 활약도 못한 채 계약이 끝나버렸고 전쟁이 끝난 후 유벤투스 FC로 옮겼다.[2]
전쟁이 끝나고 유벤투스에서 다시 신예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등과 우승을 노렸지만 바로 전 소속팀이자 지역 라이벌인 토리노에 밀려서 2년 연속 준우승에 그쳤다. 유벤투스에서 나온 그는 당시 세리에 B 팀에 있던 노바라로 옮겨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세리에 B에 있던 노바라 칼초로 이적하자마자 16골을 넣으면서 세리에 A 무대로 옮겨놓고 7년간 2경기 1골에 가까운 득점력을 보여주며 노장의 투혼을 보여주었다. 41살까지 활약했던 그의 세리에 A 최고령 출장과 득점 기록은 오래도록 묵은 후 출장 기록은 30년 후 디노 조프에 의해, 득점 기록은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에 의해 깨졌다.
치매로 인해 말년에 고생하다 1996년,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5.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스피드와 파워, 판단력, 용기, 공중볼 경합 능력 등을 고루 갖춘 전천후 스트라이커. 그의 세리에 A 통산 득점 기록인 274골은 아직도 세리에 A 역대 최다 득점 기록[3] 이며 그의 활약을 기념하여 그가 데뷔한 클럽 프로 베르첼리와 은퇴한 클럽 노바라는 각자 자신들의 구장 이름을 실비오 피올라로 부르며 그를 기리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기록한 30골은 역대 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게다가 1위 루이지 리바는 42경기(경기당 0.83골), 2위 주세페 메아차는 53경기(경기당 0.62골)로 34경기를 뛴 피올라(0.88)보다 경기당 골 수에서 뒤진다. 전쟁 때문에 커리어에 손해를 꽤 본 선수이다.
6. 수상
6.1. 국가대표
월드컵 우승 1회: 1938
6.2. 개인
월드컵 실버볼: 1938
월드컵 브론즈슈: 1938
월드컵 베스트 11 1회: 1938
세리에 A 득점왕 2회: 1936-37, 1942-43(이상 SS 라치오)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1] 이탈리아의 레전드 수비수 비르지니오 로세타도 이 팀에서 데뷔하였다. 하지만 피올라와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같이 뛴 적은 없다[2] 더 억울한 건 토리노에서 뛰었던 한 시즌 동안 23경기에 출전하여 27골을 넣었다. 하지만 이것은 공식 세리에 A 기록이 아닌 반쪽짜리 기록 취급당하고 있다. 하지만 유벤투스로 팀을 옮긴 게 피올라의 목숨을 살린 선택이 되었는데 발렌티노 마촐라를 포함한 토리노의 선수, 감독 등 관계자 거의 전원이 1949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피올라 개인을 놓고 본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3] 여담으로 피올라가 라치오에서 전성기를 보낸 선수이기 때문에 지역 라이벌 AS 로마의 팬들은 라이벌리를 불태워 자신들의 영웅 프란체스코 토티가 피올라의 득점 기록을 깨고 은퇴하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토티는 250골, 통산 득점 2위의 기록을 남기고 은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