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코 토티

 

'''프란체스코 토티의 역임 직책'''
''' AS 로마 역대 주장 '''
아벨 발보
(1996~1997)

<color=#373a3c> '''프란체스코 토티
(1998~2017)
'''


다니엘레 데 로시
(2017~2019)

'''프란체스코 토티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1999-00 · 2002-03


'''베스트팀'''
2000-01 · 2003-04 · 2006-07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2006'''

'''프란체스코 토티의 기타 정보'''


''' AS 로마 임시결번[* 영구결번이 유력한 것은 사실이나 아직 공식적으로 확정난 것은 아니다.* 물론 클럽에서는 거의 비공식적인 영구결번 취급을 받는다. 이에 대해 토티는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은 10번 셔츠를 입기를 원한다면서 클럽이 동의한다면 자신은 언제나 10번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color=#373a3c> '''No. 10'''

''''''AS 로마 명예의 전당''''''
<color=#373a3c> '''Associazione Sportiva Roma S.p.A.'''
'''이름'''
'''프란체스코 토티 UOMRI
Francesco Totti UOMRI[1]'''
'''출생'''
1976년 9월 27일 (47세) /
이탈리아 로마
'''국적'''
이탈리아 [image]
'''신체'''
180cm|82kg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2], 공격수[3] / 은퇴)
디렉터
스포츠 에이전트
'''소속'''
'''선수'''
AS 로마 (1989~1992 / 유스)
'''AS 로마 (1992~2017)'''
'''경영'''
AS 로마 (2017~2019 / 디렉터)
'''국가대표'''
58경기 9골 (이탈리아 / 1998~2006)
'''링크 '''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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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
오른발[42]
'''번호'''
10번 (AS 로마 / 이탈리아 대표팀)
'''종교'''
카톨릭
'''별명'''
로마의 왕자, 로마의 황제
'''가족'''
배우자 일라리 블라시[43]
장남 크리스티앙 토티[44]
차녀 샤넬 토티
삼녀 이사벨 토티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3. 은퇴 후 행보
3.1. 스태프
3.2. AS 로마 디렉터 사임 후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수훈
5.4. 출전 기록
5.5. 개인 기록
7. 한국에서의 이미지
8. 여담
9. 로마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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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 등번호, 10번이 새겨진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과 페레스 회장의 친필 편지를 받았을 때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들은 매해 크리스마스마다 유니폼을 보내 왔고 나는 레알 마드리드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자니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로마를 위해 평생을 바쳤고 내가 없는 로마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로 갔더라면 나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걸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본 최고의 선수다. 정중하게 경의를 표한다.'''"

- 디에고 마라도나[4]

이탈리아의 전 축구선수. 공격형 미드필더부터 폴스 나인 유형의 스트라이커까지 소화 가능한 만능 공격수였다. 커리어 전부를 AS 로마에서만 보내고 은퇴한 구단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AS 로마


당초 13세 소년 토티에게 먼저 구애의 손길을 뻗친 건 다름 아닌 AC 밀란이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진성 '''로마빠'''였던 토티는 이 제안을 상큼하게 거절, 1988년 AS 로마 유스팀에 입단한다. 이듬해 1군 팀과 정식계약을 맺은데 이어 17세에 세리에 A 데뷔전을 가졌다. 1998년 AS 로마 역대 최연소 주장 기록인 '''21세'''에 클럽의 주장완장을 달고 2017년까지 오직 로마에서만 뛰었던 대표적인 원클럽맨.[5] 세리에A 역대 최장 주장 역임 기록은 덤.
[image]
'''2000-01 시즌 리그 최종전에서의 토티'''
이후 토티와 함께한 로마는 상승가도를 걸으며 본격적인 세리에A의 강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 당시까지 세리에A는 북부 3강[6]이 번갈아 가며 우승하던 3강 고정 시대였는데, 흔히 말하는 7공주 시대를 거치며 슬슬 입질을 넣기 시작하더니만 '''2000-01 시즌 드디어 스쿠데토를 차지'''하며, 북부 3강이 거의 독식하다시피하던 세리에의 헤게모니를 부수는 데 성공한다. 물론 이 때 로마의 스쿼드가 현재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짱짱했다고는 하지만 바티스투타, 몬텔라, 카푸, 알다이르, 나카타 등 그들을 한데 모으고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건 다름 아닌 주장 토티였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비록 이듬해 유벤투스에 승점 1점이 모자라 우승을 놓쳤으나 전년도에 이룬 18년만의 우승은 줄곧 중위권 정도로만 평가되었던 로마가 노는 물을 달리하게 된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안습하게도 로마=준우승이라는 저주가 걸린 것인지 2000년대 들어 세리에A 준우승만 '''9번'''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는데... 그런 팀에서 토티는 유스팀부터 시작해 41세에 은퇴할 때까지 뛰었다. 이쯤 되면 클럽에 대한 충성심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냥 언터처블.
노쇠화가 진행되었다는 지금도 경기를 뒤집기에 충분한 저력과 한방을 지니고 있다. 2010-11 시즌 리그만 15골. 리그 7위에 해당한다.
2010-11 시즌 종료된 시점 로마에서만 467경기 206골. AS 로마 역대 최다출장 및 최다골 기록이자, 세리에A 역대 최다골 5위 기록이다. 10골만 더 넣으면 3위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한국시간 2012년 1월 21일 체세나와의 홈경기에서 통산 211호 골을 기록, 세리에 A 단일클럽 최다골 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2012년 5월 5일 카타니아 전에서는 개인 통산 세리에 500번째 경기를 치렀고, 멀티골을 기록했다.
2013년 3월 5일엔 통산 225호 골을 기록하면서 군나르 노르달과 함께 세리에A 통산 득점 공동 2위에 올랐으며 3월 20일, '''226호 골을 기록하면서 단독 2위'''로 올라섰다. 이제 그의 앞에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수 중 하나로 추앙받는 실비오 피올라[7]가 보유한 274골만이 남아있게 되었다.[8]
2013년 9월 20일, 로마와 재계약을 체결하면서 2016년까지 남게 되었다.
2014년 4월 2일, 파르마 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개인 통산 파르마 상대 20번째 골을 기록했다.
2014 시즌 종료 후, 로마에서만 561경기를 뛰었으며 235골을 기록중이다. 심지어 그는 커리어의 대부분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보낸 선수이다.
2013-14 시즌 팀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며 팀의 4년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복귀에 기여하였으며, 2014년 9월 30일 맨체스터 시티 FC 원정에서 특유의 칩샷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고령 득점자'''[9]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 골로 개인 통산 '''300골'''을 달성하게 되었다. 이후 10월 25일에는 CSKA 모스크바 전에서 득점을 기록하며 챔스 역대 최고령 득점 기록을 만 38세 59일로 경신했다!
2015-16 시즌 들어서는 급격히 팀내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었는데 제코의 영입에 이어 겨울 이적시장에 제로톱으로 쓸 새로운 선수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페로티와 AS 모나코로부터 스테판 엘 샤라위도 영입되어 토티가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토티는 이렇게 벤치 생활을 보내는 것에 대해 거부하면서 올여름 계약 만료 후 이적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시즌 막바지에는 스팔레티와 토티가 서로 화해를 하며 곧 로마와 1년 재계약을 맺을거라는 현지보도가 떴다. 그에 맞게 출전시간도 늘어나 비록 교체 출전이지만 매경기 꾸준히 출전하며 최근 5경기에서 4골 1도움을 기록, 슈퍼조커로서 절정의 폼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골들도 질 경기를 비기게, 비길 경기를 이기게 만드는 결정적인 골들이라서 팬들은 역시 토티라며 감탄하는 중.
이탈리아 일간지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에서 토티가 1년간 선수, 6년간 디렉터로 총 7년 재계약을 맺을거라고 보도했다. 추가로 선수로서 남은 1년간 받을 연봉은 110만유로 (한화 약 14억 6000만원)라고 한다.
어쩌면 토티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챔피언스리그에서 로마는 포르투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다. 토티는 두 경기 모두 벤치를 지켰고, 로마는 2차전 홈경기에서 데 로시에메르손이 연달아 살인태클로 퇴장당하는 추태를 보인 끝에 0:3으로 완패하며 탈락한다. 벤치에서 넋이 나간 채 경기를 보고 있는 토티의 표정이 압권.
그리고 한국시간 2016년 9월 11일 삼프도리아와의 경기에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토티가 원터치 패스로 제코에게 어시스트를 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 그리고 페널티킥으로 시즌 첫골을 기록했다. 놀라운 점은 이것을 45분만 뛰고 했다는 것. 토티가 들어온 후반 45분간은 확실히 로마의 공격이 트인 게 보일 정도였다. 경기는 3-2로 로마가 이겼다.
그리고, 2016년 9월 25일 토리노조 하트를 상대로 세리에 A 통산 '''250호골'''을 기록하면서 세리에A 역사상 두 번째로 250호골 고지를 넘어선 선수가 되었다. 이로서 세리에 A 최다 득점의 실비오 피올라의 기록까지 24골이 남았다.#
2016년 10월 20일 유로파리그 조별리그 FK 아우스트리아 빈 전에서는 개인 통산 UEFA 주관 클럽 대항전 100번째 경기를 치렀다.
10월 말에 부상으로 인해 아웃되었고, 11월 말에 부상에서 복귀했다.
이후 현지시각으로 2017년 2월 1일에 열린 체세나와의 코파 이탈리아 8강전에 선발로 출전해 풀타임을 소화했고, 경기에선 경기종료직전 97분에 케빈 스트로트만이 얻어낸 페널티 킥을 성공시켜 팀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2017년 2월 1일까지 15경기에 출전해 3골 6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기가 교체출전인걸 감안하면 정말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다.
4월 15일 아탈란타 전에서는 개인 커리어 세리에 615번째 경기를 치르면서, 역대 출전 부문 3위인 하비에르 사네티와 동률을 이뤘다.
38라운드 제노아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서 후반 9분 교체 투입되어 팀의 3:2 승리에 일조하며 본인의 '''9번째''' 리그 준우승을 확정지었다. 경기가 끝난 후 치뤄진 은퇴식에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로마에서 은퇴 후 여러 이적설[10]들이 나오고 있었어서 AS 로마원클럽맨이라는 가치가 사라지게 될까 걱정인 팬들도 있는 한편, 선수로서의 토티를 더 보고 싶다는 팬들도 있어 의견이 갈리고 있었으나 2016-17 시즌을 끝으로 선수로서 완전히 은퇴했고 은퇴 후에는 로마에서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구단 내부 수뇌부와의 의견충돌로 인해 디렉터직에서 물러남으로써 결국 30년만에 AS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2.2. 국가대표


1998년 10월 스위스와의 유로2000 예선전에서 대표팀에 데뷔한 토티는 첫 메이저 대회였던 유로 2000에서 이탈리아의 에이스였던 델피에로에 밀려 20번을 입었지만, 그 대회에서 최고의 활약으로 이탈리아의 준우승을 이끌면서 이탈리아 에이스 교체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조별리그 벨기에전과 8강 루마니아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했고, 특히 결승전에서는 창의적인 힐패스로 선제골을 이끌어내는 등 여러 킬패스와 드리블로 프랑스 수비진을 괴롭히며 맹활약했다. 팀이 패했음에도 맨 오브 더 매치는 토티가 선정됐을 정도로 토티의 활약은 대단했고, 이러한 세계무대에서의 활약으로 토티는 세계 축구팬들에게 자신의 이름과 실력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다.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의 부임 이후 토티는 본격적으로 아주리의 10번으로 자리매김했고 대표팀에서 에이스로서 입지를 굳혀갔다.[11] 이때 즈음부터 토티의 기량은 절정에 달했기에 트라파토니는 그런 토티를 더욱 중용했다. 트라파토니 체제하에 2002 한일 월드컵유로 2004에서 토티 중심의 팀을 구성했고 공격에서 거의 전권을 부여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토티는 준수한 기량을 보여줬으나 팀 자체가 부진하면서 팀은 16강에서 탈락하게 된다. 이 경기에서 전반전에 반칙으로 경고를 받은 이후 토티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만한 할리우드 판정으로 경고 누적 퇴장당하기도 했다. 유로 2004 직전에 토티는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면서 기대를 한몸에 받았지만 대회 조별리그 덴마크전에서 크리스티안 폴센에게 침을 뱉고 출장정지징계를 받으면서 대회를 말아먹었다.[12] 팀 또한 조별예선 탈락이라는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
2002년에 이어 2004년에도 실패한 트라파토니는 경질되었고 새로 감독이 된 마르첼로 리피 체제 하에서도 여전히 토티는 에이스로 중용받았다. 허나 2006 독일 월드컵 직전에 큰 부상을 당하면서[13] 토티의 월드컵 출전여부는 불투명했었다. 우여곡절 끝에 부상에서 복귀한 토티는 월드컵에 출전할 수는 있었지만 몸상태가 좋지 못했다.[14] 이에 리피는 토티를 중심으로 팀을 만들기 보단 팀 전체를 하나로 묶어내기로 했고 그러한 리피의 생각은 맞아떨어져 토티와 이탈리아는 월드컵을 들어올리게 된다. 부상 여파로 경기력 자체는 기대만큼은 아니었으나 대회동안 1골 3어시스트로 안드레아 피를로와 함께 팀내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팀의 월드컵 우승에 일조했고 대회 올스타 팀에 선정된다.
월드컵 우승 직후 소속팀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게 된다. 토티의 은퇴 후 이탈리아 대표팀은 토티의 대체자를 찾지못하며 유로 2008에서 8강밖에 못갔고 2010년 월드컵에선 노쇠화된 스쿼드로 인해 조별리그에서 노답 경기력만 보여주다가 2무 1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광탈했다. 심지어 2014년 월드컵 직전엔 루머로 그쳤지만 당시 만 37세였던 토티의 대표팀 복귀설이 흘러나왔고 이탈리아 감독 또한 복귀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복귀설이 나올만큼 이탈리아 공격진의 세대교체가 원활하지 않았고 결국 이탈리아는 대회 조별리그에서 광탈했다

3. 은퇴 후 행보



3.1. 스태프


2017년 7월 18일 AS 로마의 디렉터로 선임되었다.출처 디렉터 선임 후 코치 자격을 얻기 위해 UEFA B 코칭 라이선스를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디렉터 일과 토티가 참여하고 있는 여러 행사 등의 스케줄 때문에 포기했다고 한다.
2019년을 끝으로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이로써 로마는 2019년에 두 명의 레전드인 토티와 다니엘레 데 로시를 동시에 떠나보내게 되었다.[15]
토티가 로마를 떠나게 되는 과정은 구단과의 마찰이 컸는데 데로시가 로마를 떠나고 새로운 시즌 꾸리기에 정신없는 상황에서 토티가 로마를 떠나려한다는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기사들에 의하면 토티가 라니에리가 떠나고 공석인 감독자리에 가투소를 추천했지만 구단에서는 파울루 폰세카를 선임했고 이 과정에서 구단과 마찰이 생겨 로마를 떠난다는 기사였다.
기자회견이 시작되고 토티가 말하는 내용은 기사와 달랐는데 요약해서 말하자면,
  • 토티는 자신이 은퇴가 2경기 전에 갑작스럽게 정해졌고 이를 받아들이고 은퇴 후 구단에서 일하기로함.
  • 18/19 시즌 에우세비오 디프란체스코 감독이 성적부진으로[16]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급하게 라니에리 감독에게 연락하여 데려온것이 토티.
  • 토티는 라니에리가 떠난 후 콘테와 연락을 취하면서 감독직을 제안했고 콘테를 적극적으로 설득. 하지만 구단과 콘테가 만나 이야기하면서 딜이 파토.
  • 결국 토티가 원했던 콘테가 로마를 거절하고 팔로타와 발디니는 토티와 의사소통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구단주와 감독이 오게 됨.
  • 토티는 자신이 로마에서 얼굴마담 역할만하고 팀을 위해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임을 발표.
  • 덧붙여 토티는 데 로시가 자신처럼 갑작스러운 은퇴하게 될것을 걱정하여 구단에게 데 로시에게 은퇴 제안을 할거면 그에게 미리 말하라고 부탁했다고 함.
여기까지가 기자회견에서 토티가 말한 이야기이고 아직 제임스 팔로타 구단주의 입장은 발표되지않았다. 그렇게 로마 측은 해가 바뀌어도 입을 닫고 있다.
스태프 직에서 물러난 토티에게 레알 마드리드가 앰버서더 직을 제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17]

3.2. AS 로마 디렉터 사임 후


2020년 축구선수 에이전트 회사를 차린다고 한다. #

4. 플레이 스타일




흔히들 토티의 최고 장점으로 꼽는 능력은 바로 패스다. 롱 패스, 숏 패스, 거기다 힐 패스까지 모두 잘했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토티의 최대 장점은 바로 원 터치 패스였다. 이 원 터치 패스를 활용해 수비 배후로 스루볼을 전해 주는 스킬은 그와 동시대를 뛰었던 어떤 선수보다도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짧고 간결한 원 터치 패스는 물론이고, 상대 진영으로 침투하는 선수를 향한 중장거리 원 터치 패스도 정확하게 날려줬다. 심지어 간혹 매우 깊이 침투한 선수를 향해 똥볼 독수리슛마냥 높고 느리게 원 터치 패스를 전해 주는 기이한 장면도 보여 줬는데 이마저도 정확하게 전달해줬다. 가히 원 터치 장인. 토티 스페셜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즉 차비, 피를로, 알론소같은 패스마스터들처럼 아주 정교한 패서는 아니었지만 패싱스킬에서의 화려함과 창의성 만큼은 따라올 선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킥력도 상당해서 중거리 슈팅 능력을 갖췄던 선수였고 아웃프런트, 칩샷 등등 거의 모든 킥을 찰줄 알았으며 또 잘 찼다. 이러한 당양한 슈팅을 양발 모두 수준급으로 구사하던 선수였고, 프리킥 역시도 동시대의 델피에로만큼은 아니라도 꽤 잘 차는 편이었다. 12-13 시즌 25라운드 유벤투스전에서 부폰도 어쩌지 못한 괴물같은 중거리골을 넣어 팀의 1대0 승리에 공헌하기도 했다. UEFA 유로 2000 4강 네덜란드전에서 반데사르를 상대로 파넨카 킥을 차기도 했다.[18] 05-06시즌 인테르전에서 나온 칩샷은 단연 토티의 인생골.
발이 빠르거나 특출나게 민첩한 편은 아니었으나 준수한 피지컬을 갖췄었으며 몸싸움 능력을 이용한 드리블 돌파도 꽤 훌륭했다. 그에 이어 개인능력도 좋아 탈압박도 상당한 수준. 워낙에 원터치 패스나 힐 패스 등의 수비하기 까다로운 패스에 능하기도 했고, 테크닉과 볼 컨트롤이 좋아 탈압박과 키핑력이 뛰어나다보니 상대가 압박해서 수비하기가 까다로운 선수이다. 특히 카테나치오 수비 후 역습[19]이라는 이탈리아 국대 전술에서 역습시에는 저 탈압박이나 키핑력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장 큰 특징은 어느 위치에서 플레이를 하여도 토티만의 개성 있는 플레이가 나온다는 것인데 경기장 어느 곳이든 공이 있는 곳에는 직접 다가가서 원터치로 볼을 연결해주어 팀의 전체적인 공격속도를 높이는 플레이를 즐겨 한다. 풀백이 있는 사이드나 포백 앞 공간도 예외가 아니며 심지어 이는 토티가 폴스 나인으로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최전방 공격수임에도 수비라인까지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일반적인 원톱의 빌드업 가담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상대 입장에서는 가만히 두자니 미드필더 싸움에서 밀리게 되고 수비수를 붙이자니 만시니 등 발빠른 윙어에게 찬스만 내주는 꼴이 되는 셈. 상대의 어설픈 수비를 틈탄 토티의 정확한 원터치 패스와 발빠른 선수들의 빠른 침투는 제로톱 로마의 주 공격루트 중 하나였다.
종합하자면 뛰어난 득점력과 패싱력, 드리블, 플레이 메이킹에 킥력도 뛰어나며 특유의 개성 있는 플레이로 무장한 프리롤 공격형 미드필더다.
데뷔 후 초창기에는 세컨드 스트라이커 위치에서 활동했으나, 당시 로마가 성적 관련해서 감독이 휙휙 바뀌다보니 토티의 포지션도 스트라이커로 갔다가 또 윙으로 빠지는 등 왔다리갔다리 하는 바람에 선수 본인조차 넋이 나가던 판국이었다. 그러다 로마 감독으로 부임해온 파비오 카펠로가 토티를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 고정시키며 프리롤 + 플레이메이킹 임무를 부여, 지금의 토티가 만들어지는 순간을 맞는다.
기본적으로 패싱센스가 있었던 데다 여기에 선수 자의는 아니었겠지만 다년간 행해졌던 전임 감독들의 삽질로 인해 골 결정력, 수비가담 능력 등을 더불어 갖추게 되었기에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 남을 만한 프리롤 플레이어가 만들어졌었다.
또한 위에서 잠시 언급했던, 스팔레티의 폴스 나인 전술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메시가 폴스 나인의 완전체라면 토티는 그 시초격.[20]
2006-07 시즌 들어서 클럽의 공격수들이 줄부상 및 닌자모드 ON으로 인해 공격수 자리에 들어갈 사람이 없어지자 루치아노 스팔레티 당시 로마 감독은 '''플레이메이커 토티를 제로톱에 두는''' 초강수를 두는데...[21]
웬걸. 이 모 아니면 도의 초강수가 제대로 먹혀들면서 팀이 막장가도를 달릴 것이란 여론을 보란듯이 뒤집으며 세리에A 준우승을 차지하고, 토티 본인은 '''리그 26골로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른 것은 물론 유러피언 골든슈까지 차지'''하게 된다. 이후 득점에 맛을 들였는지 원톱과 플레이메이커 자리를 수시로 왔다갔다하며 로마를 먹여살렸다.
토티의 전성기는 상당히 긴 편인데 유로 2000 이후부터 스팔레티에 의해 폴스 나인으로 쓰이면서 절정의 활약을 선보인 06-07 시즌까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토티의 전성기 당시 세리에는 7공주[22]로 대표되는 세계 최정상의 리그[23]였으며 토티는 여기서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여겨졌다. 특히 2001년에 영입된 안토니오 카사노와 보여줬던 콤비플레이는 일단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우므로 찾아서 즐길 만한 가치가 있다. 거기에 2013시즌까지 지난 20년간 가제타 평균 평점 6.45로 1위를 기록했다. #
공격쪽에서 멀티플레이어 이기도 하다. 초창기엔 여러 포지션을 오갔다가 트레콰르티스타로 완전히 정착한 이후 최전성기를 보냈고 이후 30세 즈음부터 최전방 원톱자리에서 폴스 나인으로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했는데도 득점왕을 하는 등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보여줬다. 선수 말년 제만 감독 시절엔 잠시 왼쪽 윙어로 뛰기도 했다.
그를 대표하는 수많은 키워드 중 두 개, 힐킥과 칩샷. 특히 저 칩샷은 거리, 선수의 속도, 만들어가는 과정 등으로 봐도 역대 최고의 칩샷이라 할 수 있다. 전에 카푸가 수비수를 유인하고 빈 공간으로 토티가 들어가 칩샷을 차서 넣는 장면이 많이 나왔다. 이 칩샷이 거의 대부분 성공일 만큼 칩샷 하나만큼은 가히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6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0
  • UEFA 유로 결승전 맨 오브 더 매치: 2000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AM 13위)
  •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1999-2000, 2002-03
  • 세리에 A 득점왕: 2006-07
  • 세리에 A 올해의 영플레이어: 1998-99
  • 이탈리아 올해의 축구 선수: 1999-2000, 2000-01, 2002-03, 2003-04, 2006-07
  • 세리에 A 도움왕: 1998-99, 2006-07, 2013-14
  • 세리에 A 올해의 골: 2005, 2006
  • 구에린도르[24]: 1997-98, 2003-04
  • 유러피언 골든슈: 2006-07
  • ESM 올해의 팀: 2000-01, 2003-04, 2006-07
  • FIFA 100: 2004
  • UEFA U-21 챔피언십 올타임 XI: 2015
  • 팔로네 디 아르젠토: 2007-08
  • USSI 실버볼: 2007-08
  • 프레미오 인테르나치오날레 지아친토 파케티: 2014
  • 골든풋: 2010
  • AS 로마 명예의 전당: 2017[25]
  • UEFA 회장상: 2017
  • 가제타 스포츠상 레전드: 2017
  • 글로브 사커 어워드 선수 경력 상: 2017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8

5.3. 수훈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5등급: 2000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4등급: 2006

5.4.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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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득점
<color=#373a3c>도움
<color=#373a3c>경기
<color=#373a3c>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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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득점
<color=#373a3c>도움
1992/93
AS 로마
세리에 A
2
0
0
-
-
-
-
-
-
1993/94
8
0
0
2
0
0
-
-
-
1994/95
21
4
4
4
3
1
-
-
-
1995/96
28
2
4
1
0
0
7
2
2
1996/97
26
5
4
1
0
0
3
0
0
1997/98
30
13
7
6
1
1
-
-
-
1998/99
31
12
14
3
1
0
8
3
4
1999/00
27
7
10
2
0
0
5
1
0
2000/01
30
13
4
2
1
1
3
2
0
2001/02
24
8
4
0
0
0
11
3
1
2002/03
24
14
4
5
3
3
6
3
2
2003/04
31
20
7
-
-
-
1
0
2
2004/05
29
12
9
7
3
2
4
1
1
2005/06
24
15
9
2
0
1
3
2
0
2006/07
35
26
9
5
2
3
9
4
2
2007/08
25
14
5
3
3
0
6
1
1
2008/09
24
13
4
-
-
-
7
2
1
2009/10
23
14
6
2
0
0
6
11
2
2010/11
32
15
10
-
-
-
7
2
1
2011/12
27
8
7
2
0
2
2
0
1
2012/13
34
12
12
3
0
0
-
-
-
2013/14
26
8
10
3
0
1
-
-
-
2014/15
27
8
6
2
0
0
7
2
1
2015/16
13
5
3
-
-
-
2
0
0
2016/17
18
2
3
4
1
-
6
0
5
'''합계'''
619
250
154
59
18
15
103
38
26

5.5. 개인 기록


  • 세리에 A 통산 최다 득점 2위: 250골
  • 세리에 A 통산 최다 출전 3위: 619경기
  • 세리에 A 단일 클럽 최다 득점: 250골
  • 세리에 A 역대 최고령 멀티골: 39세 206일
  • 세리에 A 통산 최다 페널티킥 득점: 71골
  • 세리에 A 통산 최다 프리킥 득점 4위: 21골
  • 세리에 A 최다 시즌 연속 득점: 23시즌
  • 세리에 A 최다 시즌 연속 출전: 25시즌
  • 세리에 A 최다 구단 상대 득점: 38구단
  • 데르비 델라 카피탈레 역대 최다 득점: 11골
  • UEFA 챔피언스리그 역대 최고령 득점: 38세 59일
  • AS 로마 역대 최다 득점: 307골
  • AS 로마 역대 최다 리그 득점: 250골
  • AS 로마 역대 최다 UEFA 챔피언스리그 득점: 17골
  • AS 로마 역대 최다 UEFA 유로파리그 득점: 21골
  • AS 로마 역대 최다 출전: 786경기
  • AS 로마 역대 최다 리그 출전: 619경기
  • AS 로마 역대 최다 UEFA 클럽 대항전 출전: 103경기[26]

6. 다혈질


[image]
'''2004-05 챔스 조별리그 4차전에서 라멜로프의 어깨와 등을 밟는 토티'''[27]
2000년대만 해도 토티하면 떠오르던 단어는 '''지랄같은 성격'''. 실력 자체는 더할 나위가 없지만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플레이가 잘 안 풀린다거나 상대 수비가 맞불을 놓는다 하면 폭발하기 일쑤였다. 한때 별명이 '카드캡터 토티'였고, 어쩔 때는 토티가 퇴장당하거나 출장정지를 받음으로써 인해 게임 자체가 붕괴되는 일도 잦았다.[28] 단적인 예가 2002 한일 월드컵 16강전과 UEFA 유로 2004 덴마크전.
[image]
특히 이탈리아의 유로 2004 첫경기였던 덴마크전에서는 크리스티안 폴센에게 침을 뱉는 바람에 3게임 출장 정지. 유로 2000 준우승팀이었던 이탈리아는 결국 조별예선에서 광탈했고[29] "히드라"라는 욕까지 먹었다.
하지만 선수 본인도 자신의 거친 성품에 대한 문제를 깨닫기 시작했고, 결혼 및 2세 출산을 거치며 서서히 불같던 성격도 사그러들기 시작해, 나이 서른이 넘어서자 어지간한 상황에선 눈 하나 깜짝 않는 대인군자가 되었다. 과연 결혼의 힘은 위대하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세간의 드립 및 태클들을 "토티에 관한 모든 농담"[30]이라는 제목의 자서전[31]에 한데 모아 출간해 주기까지 했고, 자서전의 수익금은 유니세프 아동기금과 로마 내 구호소 설치에 기부하는 등, 이쯤 되면 이른바 멘탈갑으로 불러줘도 되지 않을까?[32]

7. 한국에서의 이미지


대표적으로 대전에서 열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6강 대한민국 vs 이탈리아전에서 보여준 다이빙으로 기억된다. 해당 경기로 인해 당시 국내 축구팬들에게 '할리우드 액션' 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경우가 많았다.[33]
[image]
한창 해외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하던 때 토티가 대한민국 팬들에게 비호감으로 찍히게 된 건 한국이 사상 첫 월드컵 16강에 진출하여 이탈리아와 첫 토너먼트전을 이틀 앞둔 2002년 6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한 훈련 캠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강하지만,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골을 넣을 수 있다'''는 발언이 나왔기 때문이다.동영상
사실 이건 기레기의 병크가 크다. 토티는 분명 한국은 빠르고 좋은 팀이며 팀의 1:0 신승을 예상해본다는 인터뷰를 했지만, 언론 보도에는 위와 같은 거만한 내용으로 나와버린 것. 당시 인터넷이 막 활성화되던 시절이라 해축 커뮤니티 및 정보를 찾기가 힘든지라 국내 언론에 의해 꽤 날조되거나 내용이 바뀐 인터뷰나 선수들이 꽤 많다. [34] 2002년 당시에 나이지리아 출신이며 귀화한 폴란드의 스트라이커 엠마누엘 올리사데베는 그냥저냥 밥값하는 선수였는데 국내언론에 의해 세계제일의 골게터가 되었다.
[image]
그리고 이틀 뒤 6월 18일 대전에서 치뤄진 본 경기에서는 한국 선수들을 팔꿈치치기로 마구 팸으로서 어그로를 왕창 끌다가 첫번째 경고를 받았고, 연장전에서는 한국 골대의 페널티 구역 내에서 할리우드 액션으로 페널티 킥을 유도하려다가 비론 모레노 주심에게 딱 걸리는 바람에 두 번째 경고를 받아서 경고 2회 누적으로 퇴장당했다. 토티의 퇴장 직후 이탈리아는 급격히 무너졌고, 결국 연장 후반 안정환한 방에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그 당시 시뮬레이션 판정에 대해서는 시뮬레이션이 판정이 정당했다는 의견, 수비수에 걸려 넘어진 것이 맞고 오히려 페널티 킥을 줬어야 했다는 의견, 시뮬레이션은 아니었지만 페널티 상황도 아니었다는 의견이 모두 나왔다.
물론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이 날 경기는 당연히 '''금지어'''라고 한다. 그리고 풋볼 매니저에 라이벌 국가로 대한민국이 등록되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토티는 비호감 선수로 낙인찍혔다. 그 후 UEFA 유로 2004에서 상대 선수에게 침을 내뱉는 모습은 국내에서 그의 이미지를 더욱 악화시키게 만든다. 당시 국내에는 유럽 축구를 보는 팬들이 적었고 세리에A보다는 라리가와 프리미어 리그의 중계가 많았기에 토티에 대한 이미지는 2002년 월드컵과 유로 2004에서의 부진함과 더티 플레이로만 남게 된다. 이는 이탈리아 축구가 끝없는 저평가를 받은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게다가 이 여파는 생각보다 엄청나 토티가 현역으로 뛴다는 것 자체를 리그 자체가 퇴물이 되었으니 퇴물이 날라댕긴다라는 인식이 생길 정도로 현재까지도 영향력이 크다.
여하튼 2000년대만 해도 토티의 이미지는 '''멘탈 쓰레기''' 혹은 좋게 보아도 왠지 미운 얌체 이미지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팬들의 세대가 많이 바뀌기도 한 탓인지 토티도 현역 축구 선수들 중 충성심하면 손에 꼽히는 존재라 팬들 사이에서 진정한 로맨티스트, 원클럽맨으로 뽑힌다. 돈이나 그외의 이유로 이적하는 경우가 많은 현대 축구에서 끝까지 로마에 남아서 활약해 주는 모습에 다른 클럽의 팬들도 존경심을 표하기도 한다.
2018년 토티의 평전 성격을 띠는 국내 도서 ‘프란체스코 토티 : 로마인 이야기(김정용 저)’가 출간되었다. 토티의 축구인생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축구 문화, 축구 전술사, 이탈리아 문화, 로마 여행 안내 등을 두루 다루는 책이다. 이스타방송에서 확인하자
여담으로 토티는 2002 월드컵 16강전 당시 앞서 서술한 모레노 주심의 판정에 대한 불만을 자서전을 통해 드러냈다. 특히 자신이 연장전에서 경고누적으로 퇴장 당한 장면에 대해 언급했다.[35] 최근 말디니와 더불어 토티 또한 2002 당시 판정에 불만을 내비친 것이 기사화되었고 이에 국내팬들은 당시 이탈리아가 더티플레이 과정에서 판정이득을 본 것을 지적하면서[36] 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37]
최근에 차비, 제라드, 카시야스, 슈바인슈타이거 등 원클럽맨들이 기량저하나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인해 죄다 팔려나가는 와중에 꿋꿋이 로마에 남아있는것으로도 유명하다. 애초에 이게 가능한게 모든 로마팬들이 토티를 좋아하는 데다 토티도 클럽에 애정이 깊고, 의외로 폼도 떨어지지 않고 한방씩 해주는것이 그의 생존비결일지도?

8. 여담


[image]
토티의 특징이 모여있는 사진.
•텅이 긴 축구화[38]
•신가드가 보일정도로 내려신은 스타킹
'토티에 관한 모든 농담'은 우리나라의 최불암 시리즈와 유사하게, 이탈리아에서 퍼진 토티를 주인공으로 한 농담들이다. 토티가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얌체같은 이미지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에 기술된 것처럼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한 성격이어서 농담의 소재로 이용된 듯. 당연히 이탈리아 국대나 로마, 세리에 A의 선수들과 주변인물들이 인용되므로 이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축구팬들이라면 웃음지을 수 있다. 이곳을 참고. 이 시리즈를 모은 책이 한국에서 출시되었는데, 제목은 토티는 못말려이다.
[image]
특히 유벤투스 FC알레산드로 델피에로와는 비슷한 축구 인생을 걷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포지션도 그렇고, 팀에 대한 충성심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밀란의 파올로 말디니도 있었지만 말디니 옹은 수비수이고 나이가 토티와 델피에로보다 많다. 토티와 델피에로 이 둘은 실제로도 상대방을 존경한다고 알려져 있다.
2012-13 시즌 세리에A 29라운드 파르마전에서 38살의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약을 선보이며 말그대로 로마와 파르마 선수들을 레슨시켜주는 맹활약을 하였다.[39]
이탈리아 로마 여행시 흰색 페라리가 보인다면 한번쯤 자세히 보도록 하자. 토티의 애마 중 가장 자주 애용하는 것이 흰색 페라리 차량.
[image]
사실은 로마 더비에서 2-1로 밀리는 도중에 동점골을 넣고는 세리머니를 한 뒤, 관계자에게 휴대폰을 빌려 셀카를 찍은 것.
[image]
셀카의 결과물인데 이로 인해 셀카고자 별명을 획득했다.
나이키에서 토티를 기념하기 위한 티엠포 축구화를 내놓았다. 텅이 긴 축구화를 선호하는 토티답게 텅이 길다.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에서 교체 투입되자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홈 팬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 이후 인터뷰에서 "선수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공식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했으며 9월 27일에는 자신의 페이스북 생방송을 진행할 예정이다.
나이키에서 토티의 AS로마 25주년을 기념하여 한정판 축구화를 출시하였다. 2500족 한정판매. 은퇴시즌이기도하니 상당히 신경써서 만든만큼 디자인이 참으로 고급지다.
[image]
[image]
티엠포 레전드6를 기반으로 한 축구화인데, 힐컵부분에 일반모델 같으면 TIEMPO라고 써져있어야할 부분에 TOTTI를 새겨놓았다.
토티는 이 신발을 4월 30일에 치러진 마지막 데르비델라 카피텔라(로마-라치오 더비)에 신고나왔다.
[image]
[image]
이 날은 토티의 마지막 더비였기에 구단차원에서 나서서 평소 유니폼과는 다른 더비킷을 따로 제작했다. 위 사진의 토티가 입고있는 옷이 바로 그 더비킷인데, 디자인이 역대급이라는 평가가 해외에서 자자하다.
http://www.footyheadlines.com/2017/05/here-are-our-seven-favorite-as-roma-totti-kits.html?m=1 이 사이트에서는 토티가 입었던 로마 유니폼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할 정도.
킷의 가슴팍에 써진 SPQR이란 문구는 "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라틴어로 "The Roman Senate and People" 즉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을 뜻한다. 이 말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부를 이르는 말이었으며, 로마 정부의 공식 표어로 쓰였다.
한편 토티의 은퇴를 기리며 커스텀된 유니폼과 티셔츠를 비롯한 컬렉션들을 AS로마 공홈에서 판매하고 있다. 토티 은퇴 유니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들은 AS 로마/유니폼문서 참고
[image]
허리부분에 '''ÆTERNO'''라고 써져있는데, 이는 라틴어로 '''영원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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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닝일레븐에서 토티가 레전드로 출시되었다. 모바일 버전에서도 같이 출시되었으며 나카타와 같이 등장하였다. 게이머들의 평가는 준수한 편이다. 다만 클래식 NO.10이라는 특성 때문에 크게 사랑받지는 못하고 있다.
2020년에 교통사고로 장기간 혼수상태(코마)에 빠진 19세 소녀를 깨어나게 한 미담을 전했다.#
그의 아버지 엔조 토티는 2020년 10월 코로나 19로 인해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그리고 자신도 코로나19에 걸렸다.#

9. 로마의 상징


이 모든 칭호는 SS 라치오의 팬들에겐 예외일지도. 라치오팬들이 토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다음과 같은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Q: 라치오팬을 사자, 뱀, 토티가 있는 방에 가두고, 총과 총알 두 발을 준다. 라치오 팬은 누구를 쏠까? A: 토티에게 두 발 갈긴다.[40]
[image]
[image]
로마의 상징인 교황과 만난 또 다른 로마의 상징 토티의 모습.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자신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것이라 약속했던 소년은 그 약속을 지켰다.'''
AS 로마 홈경기를 가면 선수가 입장할 때 홈팬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프란체스코~" 그다음 일제히 앉으면서 "토티!"를 외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로마 시의 여기저기에 기부를 많이 하는 선수로도 알려져있다.
2006 독일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토티가 부상을 당하자, 이탈리아 국무총리가 직접 병문안을 가서 월드컵을 참가할 수 있냐고 물었다.
2006-07 시즌 로마가 토티를 원톱으로 가동하는 전술을 사용해 봤는데 결과는 토티의 유럽 리그 전체 득점 1위.
레알 마드리드같은 초대형 클럽으로 이적해 엄청난 주급과 트로피들을 모을 수 있었지만, 점차 로망이 사라지는 축구판에서 돈과 명예보다 의리를 택한 로맨티스트.
지하묘지의 부족으로 총리가 사망해도 그 묘지를 사용할 수 없지만 토티의 자리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고 할 정도이다.[41]
2015년 이탈리아의 대통령인 조르조 나폴리타노가 건강악화로 사임하자 이탈리아 의회는 급히 차기 대선후보 지명을 위한 투표를 했는데, 정치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토티가 5표나 받았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대선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50세 이상이어야 해서 토티에게 던진 표는 무효가 됐다.# 이러한 해프닝은 토티가 로마뿐만 아니라 이탈리아까지 상징한다는 걸 보여준다.

[1] 2006년 FIFA 월드컵 수훈,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장 4등급 장교장 Ufficiale 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2] 공격형 미드필더.[3] 폴스 나인. AS 로마 제로톱 시절 폴스 나인 유형의 중앙 공격수 포지션에서 골든슈를 수상하는 등 중앙 공격수로도 활약하였다.[4] 토티의 고별 경기가 끝나고 자신의 SNS에 올린 글이다.[5] 14-15시즌이 끝나고 역시 원클럽맨이었던 스티븐 제라드, 이케르 카시야스, 차비 에르난데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이 팀을 떠나 다른 리그로 이적했다.[6] 유벤투스와 양밀란[7] 흥미롭게도 실비오 피올라는 라치오에서 전성기를 보낸 선수다![8] 15/16 시즌이 끝난 16년 5월 기준으로 248골로 26골이 남은 상황이다. 3경기당 한골을 넣는 감각을 유지한다면 72경기를 더 뛰어야 하는데, 이젠 2시즌이 더 필요하다.[9] 만 38세 3일, 종전기록은 라이언 긱스의 만 37세 289일[10] 특히 J2리그도쿄 베르디에서는 '''연봉 100만유로가 넘는 조건으로 오퍼를 넣었다!''' 그러나 이 이적은 토티의 가족들을 설득하지 못해서 무산되었다.[11] 델 피에로는 7번으로 변경했다. 단, 유벤투스에서는 그대로 10번을 유지했다.[12] 바로 잡힌것은 아니고 영상을 통해 공개되었다.[13] 장기부상으로 시달릴때 2006년 월드컵에서 토티의 출전여부가 이탈리아 국민의 최대관심사였을 정도로 토티는 여전한 입지를 자랑했다.[14] 발목에 철심을 박은 채 월드컵에 출전했다.[15] 여기에 플로렌치까지 이적설이 돌고 있어 자칫하다가는 로마의 프랜차이즈 스타 3인이 동시에 떠날 가능성이 높다.[16] 토티는 몬치단장이 18/19시즌 시작전 이적시장에서 디프란체스코가 원했던 선수를 영입해주지 않았고 일방적인 영입을 했다고 한다. 토티는 몬치에게 디프란체스코 감독의 전술과 맞지 않는 선수들이라고 의견을 전했지만 결굴 몬치가 주도하는 이적시장이 됐다.[17] 원클럽맨 토티에게 무슨 소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토티도 공공연하게 자신의 마음을 흔든 유일한 클럽이 레알 마드리드라고 했고, 페레즈 회장 역시도 토티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서로가 우호적이다. 레알 마드리드 팬들 사이에서도 토티만큼은 인정하고 좋아하는 선수이다. [18] 다른 경기에서 파넨카 킥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기도 하다. 실패한 후 창피했는지 애꿎은 골키퍼한테 화내는게 볼거리[19] 빠른 역습까진 아니다. 기본적으로 수비에 충실한 것이 이탈리아 전술[20] 물론 폴스 나인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토티 이전에도 이에 해당하는 개념 자체는 존재했다.[21] 거의 최초의 현대적인 의미의 제로톱이라고 보면 된다. 이전 각주에는 스팔레티가 전 소속팀에서도 제로톱을 사용했다고 서술되어 있었는데, 사실 스팔레티는 전술적으로 제로톱을 선호하는 감독은 아니었다. 이전 우디네세 감독직을 수행할 당시의 스팔레티는 다비드 디 미켈레와 빈첸조 이아퀸타를 정통파 공격수로 사용하는 4-2-3-1 전술로 04-05시즌 우디네세를 챔피언스리그에 진출시키고, 스팔레티 본인은 그 해 판키나 도르(Panchina D'oro, 이탈리아 올해의 감독상)를 수상하고 로마의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스팔레티가 로마에서 제로톱을 사용한 이유는 당시 로마의 주전 공격수들이 기량 저하와 줄부상으로 기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택한 전술적 선택이었고, 이게 성공을 거두면서 스팔레티가 제로톱을 상징하는 감독으로 각인된 것이다.[22] 유벤투스, AC 밀란, 인테르, 로마, 라치오, 피오렌티나, 파르마[23] 다만 UEFA 리그 랭킹은 2000년부터 라리가에 역전당해 2위였다.[24] '구에린 스포르티보(Guerin Sportivo)' 선정 세리에 A 올해의 선수. 이탈리아 선수 협회에서 선정하는 세리에 A 올해의 선수상과 함께 리그 올해의 선수상으로 대표된다. #[25] 영상[26] 챔피언스리그 57경기, 유로파리그 46경기[27] 후술할 유로 2004에서 크리스티안 폴센에게 가한 비매너 행위 이후 저런 파울을 저질렀기에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28] 커리어 통산 레드카드를 클럽에서 15회, 국가대표에서 1회 받았고 그 중 다이렉트 퇴장이 11회에 달했다. 애초에 커리어 대부분을 공격 포지션에서 뛰었던 선수가 저렇게 많은 퇴장을 당했다는 것은 25시즌이나 뛰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결코 정상적인 수치는 아니다.[29] 이 때 이탈리아는 스웨덴, 덴마크, 불가리아와 한 조였는데 불가리아가 3패로 승점자판기 역할을 했고 나머지 3팀이 서로 비기면서 1승 2무를 기록했다. 결국 세 팀의 상대 골득실, 다득점을 따져서 3득 3실의 스웨덴과 2득 2실의 덴마크가 각각 1, 2위로 진출했고 졸전 끝에 1득 1실에 그친 이탈리아는 3위로 밀려 탈락했다.[30] Tutte le barzellette su Totti[31] 우리나라에서는 "토티는 못말려"라는 제목으로 수입되었다.[32] 의외로 경기장 안에서 사고를 치는 선수가 경기장 밖에서는 사고를 치지 않거나 오히려 선행을 하는 경우가 많다. [33] 그렇지만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의 오노의 임팩트가 워낙 세고 이 경기를 이겨서 그나마 덜까이는 측면이 강했다. 만약 우리가 졌다면 토티는 오노와 함께 투톱으로 까였을지도 모른다.[34] 9년 후 비슷한 말은 꺼낸 카가와 역시 한국 누리꾼들에게 뭇매를 맞았지만 삿포로에서 정말로 약속을 지켜서 이후 한국 누리꾼조차 카가와를 약속왕이라고 불렀다.[35] 토티는 그 장면에 대해 "나를 막던 한국 수비수(송종국) 가 내 몸을 건드렸고 나는 PK를 확신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면서 ‘골든 골’(연장전에서 한 팀의 골이 나오는 즉시 경기가 끝남) 룰에 의해 8강행을 확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레노 주심은 페널티스폿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와 옐로우 카드를 주더니 잠시 후에 레드 카드까지 꺼내들었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나는 이 경기는 싸울 이유가 없는 경기라고 생각했다. 나는 라커룸 문을 부순 후 안에 앉아있다가 15분 후에 관중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월드컵은 단 한 번만 더 뛰고 더 이상 출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기회를 부정당했다. 주심이 우리로부터 그 경기를 훔쳐간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는 대한민국을 도울 수 있을 때마다 그렇게 했다."고 판정에 대해 비판했다.[36] 특히 토티 역시 이탈리아의 더티플레이에 기여한 주요선수 중 하나여서 당시에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37] 참고로 당시 토티의 시뮬레이션 판정은 여전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판정들 중 하나이다. 적절한 판정이란 의견과 오히려 PK를 줬어야 한다는 의견과 시뮬레이션도 아니고 PK도 아니란 의견이 모두 나온다. 보통 토티가 송종국과 부딪혀 넘어진 것을 중심으로 보느냐와 부딪히기 전후에 있었던 과장된 액션을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갈리는 듯 하다.[38] 사진속의 축구화는 디아도라 사의 제품이다. 토티는 은퇴 직전 시점에선 텅이 길게 나오도록 커스텀된 티엠포 레전드를 신는다.[39] 아나운서는 계속 '''No Totti No Party'''를 계속 언급한다. 이 표현은 사실 외국 중계진들이 토티가 환상적인 활약을 할때마다 자주쓰는 표현.[40] 이 농담의 원본은 원래 뉴욕 브루클린에 연고를 두던 브루클린 다저스로스앤젤레스로 연고를 옮기자 브루클린 주민들 사이에서 돌던 유머이다.[41]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며 일종의 팬 투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