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다시르 1세
사산 왕조의 초대 왕중왕. 재위 224 - 241. 페르시아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사산 왕조를 세웠다.
1. 이름과 가계
아르다시르라는 이름은 고대 페르시아어 Ṛtaxšθra(아르타흐쉬스라)가 변형된 것으로, 왕조 초기에는 Arđaxšēr(아르타흐쉬르)로 불리다가 점차 Ardašīr(아르다쉬르)라는 발음으로 바뀌었다. 아람 문자를 쓰는 파흘라비 표기로는 ʼrthštr라고 썼다. 그리스어로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라고 썼는데,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Ṛtaxšaca(아르타흐샤카)도 그리스 식으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라고 쓰지만 두 이름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바박의 아들"이라는 뜻의 아르다쉬리 바바간(Ardeshīr-i Pāpagān)이라는 표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스 출신 호족인 바박(Bābāg, Pāpāk이라고도 한다)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산 가문의 시조로 추측되는 사산(Sasan)과 바박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사산이 파르스 지방의 수도인 에스타흐르(Estaxr) 지역에 있던 아나히타 신전의 사제장이며, 바박과 아르다시르는 사산의 아들과 손자였다는 것이다. 타바리(al-Tabari)를 비롯한 많은 무슬림 역사가들이 바박을 사산의 아들이라고 썼다.
하지만 사산 왕조의 초기 비문들에는 사산과 바박의 관계가 명확히 쓰여 있지 않다. 예컨대 낙쉐 로스탐(Naqsh-e Rustam)에 있는 "조로아스터의 카바"(Ka'ba-ye Zardosht, 이하 SKZ)에 새겨진 샤푸르 1세의 비문을 보면, 아르다시르 1세는 바박의 아들이라고 쓰여 있는 반면 바박이 사산의 아들이라는 언급은 없다. 또한 타바리는 바박의 모친의 이름이 "럼베헤쉬트"라고 썼는데, SKZ에는 "디나키"로 쓰여 있다. 칭호의 경우에도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는 "왕 중의 왕", 바박은 "왕"으로 쓰여 있는 반면 사산은 "영주"라고 쓰여 있다.
한편 사산 왕조 후기에 쓰여진 신화적 영웅담인 "바박의 아들 아르다시르의 위업(Kârnâmag î Ardashîr î Babagân)"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바박은 파르티아 대왕에 복속된 부왕(副王)이었는데, 어느 날 꿈 속에서 그의 양치기 중 한 명이던 사산이 위대한 왕족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자 바박은 자기 딸을 사산과 결혼시켰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아르다시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피르다우시의 샤나메(왕의 책, Šāh-nāma)에도 등장하지만, 둘 다 역사 서술이라기보다는 신화적 내용을 담은 문학 작품에 가까운 기록들이기 때문에 상술한 설들보다는 덜 중요하게 취급된다.
상세한 가계도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아르다시르가 세운 왕조의 이름이 바박 왕조나 아르다시르 왕조가 아니라 사산 왕조라고 불렸다는 점을 볼 때 사산이 그의 가계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틀림없어 보인다. 마찬가지로 바박이 아르다시르의 친아버지이든 외할아버지이든 간에 아르다시르는 바박의 혈통이고, 그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다는 점 역시 확실하다.
2. 일대기
2.1. 초기 생애
아르다시르는 아르사케스 왕조 말기인 AD 2세기 말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출생 연도는 불분명하다. 당시 파르스 지방은 아르사케스 왕가의 친족인 바즈랑기(Bazrangi) 가문 출신 부왕 꾸체흐르(Gōčihr)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바박은 그 휘하의 호족 가운데 하나였다. 타바리 등의 설을 따르자면 아나히타의 불의 사원의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젊은 아르다시르는 파르스 동부에 있는 다랍게르드(Dārābgird)라는 성의 성주가 되었는데, 이곳에서 노골적으로 자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자기 세력을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에스타흐르에 있는 아버지로 하여금 꾸체흐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을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 그랬는지 아니면 후대에 아르다시르의 업적을 부풀리려고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찌됐든 바박은 실제로 반란을 일으켜 꾸체흐르를 죽였고, 수도에 있던 대왕 아르도번 4세(Ardawan/Artabanus IV)에게 자기 아들이자 아르다시르의 형인 샤푸르를 파르스의 새 부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아르도번은 이를 거부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박이 죽자 그 아들 샤푸르는 자신이 파르스의 왕임을 선포하며 아르사케스 왕조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아르다시르는 형의 지배를 거부했고, 이에 샤푸르는 아르다시르를 공격하려 출병하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아르다시르는 에스타흐르에 무혈입성하여 곧 파르스 전 지역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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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다시르 1세의 초기 주화. 앞면(좌)에 새겨진 두상이 아르다시르 1세이고, 뒷면(우)에 새겨진 두상은 그 아버지인 바박이다. 둘 다 파르티아식 왕관을 쓰고 있다.
2.2. 아르사케스 왕조의 멸망
파르스를 차지한 아르다시르는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하기 유리한 구르라는 동네에 아르다시르-콰라(Ardashir-Khwarra)라는 새 수도를 조영했다. 또한 독자적인 주화를 발행하고, 신도시를 건설하는 한편 서쪽의 후제스탄(Khuzestan)과 동쪽의 케르만(Kermān) 지역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등 노골적으로 새 왕조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르도번 4세는 우선 후제스탄의 영주에게 아르다시르를 공격하도록 했지만, 아르다시르는 이를 간단히 물리쳤다. 이에 아르도번 4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파르스를 침공했고, 아르다시르 역시 이에 맞서 3차례의 대전투가 벌어졌다. 파르티아군은 3차례의 전투 모두 패했고, 마지막 전투인 호르모즈데건(Hormozdeghan) 전투에서 아르도번 4세가 전사했다. 승리한 아르다시르는 자신이 이란의 왕중왕(Šāhānšāh Ērān)임을 선언하니 AD 224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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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란의 지도. 지도상에는 후제스탄이 에스파한 아래에 쓰여 있지만, 사실 그쪽보다는 Elymais라고 쓰여 있는 쪽에 가깝다. 따라서 후제스탄이 뚫리면 수도권인 아수리스탄(이라크)이 직접 파르스 지방과 연결된다. 당시 아르사케스 왕조는 지방 장악력이 현저히 떨어져 수도 근처만 직접 통치가 가능했으므로, 아르도번 4세는 더이상 아르다시르의 확장을 묵과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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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시에 로스탐의 유명한 부조. 패배한 아르도번 4세를 짓밟고 있는 아르다시르 1세(좌)가 아흐리만을 짓밟고 있는 오르마즈드(우)로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Diadem을 받고 있다. 이미지 출처인 위키피디아에서는 우측의 인물이 오르마즈드가 아니라 다리우스 1세이고, 밑에 깔린 것은 가우마타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낙시에 로스탐이 원래 아케메네스 왕조의 능묘 지역이었고, 아르다시르 1세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예를 자처한 점을 생각해 볼 때 일리있는 해석이다.
2.3. 세력 확장
파르티아 항목과 니시비스 전투 항목에서 다룬 바대로, 후기 아르사케스 왕조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 있었다. 처음부터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라 봉건국가로 발전했던 아르사케스 왕조는 막강한 로마 제국의 공세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고, 왕위를 둘러싼 내분까지 겹치면서 통치능력이 막장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아르도번 4세가 아르다시르 1세에게 패배하자 대세는 급격히 아르다시르 1세 쪽으로 기울었다. 226년 아르사케스 왕조의 수도 크테시폰이 함락되었고, 대다수의 부왕들, 귀족들, 지방 영주들은 아르다시르 1세에게 정복되거나 복속되었다.
아르사케스 왕조 후기부터 수많은 지방 세력으로 쪼개져 사산 왕조에 딱히 위협적인 세력이 없었던 동부와 달리, 서부의 확장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 아디아베네,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 페르시아 만 연안은 큰 무리 없이 사산 왕조의 지배하에 떨어졌으나, 227년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도시국가 하트라 (Hatra)가 이란 군대의 공격을 격퇴했다. 아르도번 4세와 대립하여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웅거하던 발라쉬 6세(Valash/Vologases VI)도 최소 228년까지 독자적인 주화를 발행한 것을 볼 때 더 저항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적지 않은 아르사케스 왕조의 잔당이 아르메니아로 도주했는데, AD 1세기 이래 아르메니아의 왕가는 아르사케스 가문의 분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아르다시르는 아르메니아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들 너머에는 거대한 적대국가 로마 제국이 버티고 있었다. 마침 아르메니아는 왕족은 파르티아계이면서도 형식적으로는 로마와 동맹을 맺고 로마로부터 왕위를 인정받는다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는데, 이란의 본가가 뿌리째 없어져 버리자 완전히 로마 편으로 돌아섰다. 아르메니아는 그 자체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가 로마 세력권으로 완전히 편입될 경우 이란 입장에서는 큰 위협이 되었다. 마침 아르다시르 1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부흥을 선언하고 나선 터라(이 부분은 아랫부분에 더 자세히 서술할 것이다.) 이란 군대는 230년 로마를 선제 공격했다.
2.4. 로마와의 전쟁
이란 기병들은 시리아와 킬리키아 일대까지 침투, 약탈을 했으나 정작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로마 거점인 니시비스 점령은 실패했다. 로마는 처음에는 외교적 접촉으로 이 문제를 정리하려 했으나, 아르다시르 1세가 이를 거부하자 황제였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몸소 시리아로 와서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개전 직전 마지막으로 시도된 휴전 협상도 결렬되고, 232년 3개의 분견대로 나누어진 로마 군대가 이란을 향해 진군하면서 양측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두 분견대는 각각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방면과 후제스탄 방면으로 진군하고, 세베루스가 지휘하는 본대는 이란의 핵심 지역으로 바로 진군하기로 했다.
우선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방면의 로마 군대는 아르메니아의 협조에 힘입어 성공적으로 이란을 향해 진군해 왔고, 아르다시르 역시 이들을 막기 위해 몸소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에서 메디아에 이르는 지역은 험준한 고지대라 페르시아 기병들에게 불리했고, 아르다시르가 직접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의 진군과 약탈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로마군이 3개의 분견대로 나뉘어 있다는 정보를 접한 아르다시르는 메디아에 최소한의 방어 병력만 남겨둔 다음, 방심하고 있던 다른 분견대를 기습 공격하여 격파했다. 세 분견대가 동시에 쳐들어와서 이란을 압박한 것이 아니라, 시차를 두고 따로따로 진군해 온 데다 황제가 이끄는 본대가 제일 늦게 진군한 바람에 이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패배 소식에 상심한 알렉산데르는 군대를 모두 철수시켰는데, 그나마 이기고 돌아오던 아르메니아 방면 분견대도 혹독한 겨울 날씨에 아르메니아 지방을 건너오다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다만 이란 지역 역시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명문화된 평화 협정은 없었지만 알렉산데르는 로마로 돌아가 승전보고와 개선식을 치렀고, 아르다시르는 동쪽 지방의 원정으로 눈을 돌려 몇 년 동안 로마 전선을 공격하지 않았다.
2.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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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다시르 1세 말년의 주화. 공동 왕으로 즉위한 맏아들 샤푸르 1세(우)가 아버지인 아르다시르 1세(좌)와 마주보고 있다. 뒷면에는 불의 제단이 새겨져 있다.
로마와 전쟁한 것 이외에 아르다시르 1세의 말년이 어땠는지는 확실치 않다. 로마와의 전쟁이 소강 상태에 접어든 232년 이후 몇 년 동안, 아르다시르는 제국의 동부를 공격하여 아파르샤흐르, 마르브, 사카스탄, 투란 등을 병합했다.(지명에 관한 것은 위의 지도 참조) 그러나 235년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되고 로마가 정치적 혼란으로 휘청대자 아르다시르는 공격을 재개했다. 237~239년 사이 로마의 메소포타미아 전선의 주요 거점이었던 니시비스(Nisibis), 카르하에(Carrhae), 두라-에우로포스(Dura-Europos)가 함락되었고, 240년에는 하트라 역시 함락되었다. 240년에는 맏아들 샤푸르 1세를 공동 통치자로 세웠으며, 샤푸르 1세는 그해 하트라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 아르다시르 1세는 대략 241~242년 사이에 죽었는데, 사인에 관한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볼 때 노환으로 자연사한 것 같다.
3. 사회적 변혁
타바리에 따르면, 아르다시르는 이란의 왕인 "다라의 아들 다라"를 죽인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보복할 것을 천명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란 출신 무슬림 역사가인 발라미(Bal'ami)의 기록에서도 아르다시르 1세는 아르사케스 왕조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한편, 아케메네스 왕조의 정통 후예임을 주장했다. 헤로디아누스, 디오 카시우스 등의 당대 로마 측 역사가들은 아르다시르가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영토를 모두 수복하려 했다고 썼다. 심지어 당대 아르메니아의 역사가 아가탄겔로스는 "아르다시르가 파르스에서 귀족들의 모임을 만들어 파르티아 제국을 이방인이라 불렀고, 페르시아에 대한 파르티아의 지배를 거대한 재앙으로 여겼다." 라고 쓸 정도였다.
물론 아케메네스 왕조 스스로 남긴 문헌 기록은 거의 없고, 남은 것이라곤 낙시에 로스탐의 다리우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등의 묘역과 페르세폴리스의 폐허, 베히스툰 비문 따위의 유적들 정도였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이야기들이 구전의 형태로 전승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다리우스 3세(다리야바우쉬)를 "다라" 혹은 "다랍", "다라이" 등으로 부른 점이나 알렉산드로스를 "로마인"이라고 부른 점 등을 보면 아르다시르 1세가 아케메네스 왕조에 대해 그리 자세히 알았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아케메네스 왕조가 과거에 거대한 영역을 차지했었고, "서방의 적"인 알렉산드로스가 이란을 무너뜨린 뒤 동방에서 온 파르티아인들이 이란을 차지했다는 대략적인 개요는 파악한 것 같다.
상술했듯이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를 "이방인"이라고 공격했으나, 이는 철저한 인종 구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적대하는 아르사케스 왕조를 공격하기 위한 명분으로 보인다. 이미 아르다시르 1세 시대에 수렌(Suren), 커렌(Kâren), 메흐런(Mihrân)등 파르티아 출신의 여러 대귀족(vāspuhragan)들이 사산 왕조를 지지했고, 이들은 아르다시르 1세 치하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권세를 누렸다. 사산 왕조 초기의 비문들에서도 파르티아는 항상 파르스, 혹은 페르시아 바로 뒤에 언급되며 중요한 취급을 받았다.
이와 별개로 아르다시르 1세는 400년의 아르사케스 왕조 지배 기간 동안 형성된 "아리아인"이라는 종족적 정체성을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방향으로 확립시켰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Ērānšahr, 즉 "아리아인의 국가"라는 개념이다. "Empire of Iran"으로도 번역되는 Ērānšahr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토 문제와는 상관이 없는 종족/문화의 개념이다. 모든 아리아인들이 사산 왕조의 영도 아래 통합된 국가를 상정하는 이 개념은 아래 서술할 정치적 중앙집권화의 과정과 결합되어, 페르시아인/파르티아인 따위의 독자적 정체성을 "아리아인"이라는 더 광범위한 민족적 정체성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향후 사산 왕조의 정치적 통합을 촉진한 것은 물론, 현대까지 이어지는 이란 국가/민족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점이야말로 "다종족 제국"이었던 이전 시대의 고대국가들과 사산 왕조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4. 참고 자료
- 단행본
유흥태, 『고대 페르시아의 역사』, 살림출판사, 2008.
- H. Zarrinkoub/R. Zarrinkoub, 태일 역, 『페르시아 사산제국 정치사』, 예영커뮤니케이션, 2011.
Richard N. Frye,『The Heritage of Persia』, Mazda,1993.
T. Daryaee, 『Sasanian Persia :the rise and fall of an empire』, I.B. Tauris & Co. Ltd. in association with the Iran Heritage Foundation, 2009.
- 인터넷 페이지
위키피디아 영문판 "Ardashir I" 항목
http://en.wikipedia.org/wiki/Ardashir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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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학 백과사전 영문판 "Ardašīr I" 항목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ardasir-i
http://www.iranicaonline.org/articles/ardasir-i
coinproject.com 아르다시르 1세의 주화들
http://coinproject.com/search_emperor.php?emp=Ardashir-I®ion=SASANIAN-EMPIRE&type=12
http://coinproject.com/search_emperor.php?emp=Ardashir-I®ion=SASANIAN-EMPIRE&type=12
1차 사료의 영문 번역본들 (낙시에 로스탐의 샤푸르 1세 명문, 낙시에 라잡의 카르티르 명문, paikuli의 나르세 1세 명문, Kârnâmag î Ardashîr î Babagân, 헤로디아누스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아르다시르의 전쟁에 대한 기록. 원출처는 각 pdf 참고)
http://www.humanities.uci.edu/sasanika/pdf/NAQSH.pdf
http://www.humanities.uci.edu/sasanika/pdf/Kerdir.pdf
http://www.humanities.uci.edu/sasanika/pdf/Paikuli.pdf
http://www.avesta.org/mp/karname.htm
http://www.humanities.uci.edu/sasanika/pdf/Herodi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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