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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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 앞을 걸어가는 이라크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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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핵심부 (신전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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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라를 대표하는 조각상
1. 개요
이라크 북부의 대도시 모술에서 서남쪽으로 80여 km 떨어진 황야에 위치한 유적.
하트라는 아람어로 경계라는 뜻이며 파르티아 제국 시절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요새 도시로 지어져 2번이나 로마 황제의 원정군에 승리하였다. 이후로 자치를 누리며 번영하였는데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사산 제국과 대립하였다가 샤푸르 1세에게 파괴되어 현재에 이른다. 하트라는 크테시폰과 함께 이란의 원형도시 양식의 대표적인 예시인데, 이는 8세기 후반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 건설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하트라는 시리아의 팔미라와 쌍벽을 이루며 잘 보존된 고대 로마의 유적으로서 이라크의 대표적인 관광지였다. 유적 동남쪽의 마을 알 하드르 역시 관광업이 주요 업종이다. 하지만 ISIS(다에시)의 발흥과 함께 팔미라만큼은 아니지만 유적의 석상들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다만 이라크가 점차 안정되며 곧 정비 공사와 관광이 재개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담으로 하트라에서 동남쪽으로 40여 km 떨어진 티그리스 강 서안에는 아시리아의 첫 수도였던 앗슈르 유적이 있다. 그곳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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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페르시아 국경. 이란 입장에서 로마가 니시비스, 싱가라 일대를 장악하면 하트라가 최전선이 된다.
2.1. 파르티아의 요새
아시리아 ~ 셀레우코스 왕조 시절에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던 하트라는 1세기 경 서아시아를 장악한 파르티아에 의해 대규모 군사 및 무역 도시로 성장하였다. 유목민족이었던 파르티아는 제국을 연방 형태로 운영하였고[6] 지방 총독들에게 자치권을 주었다. 하트라 일대도 예외가 아니어서 1세기 무렵부터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북상해오던 아랍인들이 하트라에 정착하고 세습적으로 총독위를 유지하였다. (아라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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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 초엽의 동전. 태양신 샤마쉬가 표현되어 있다.
서기 100년 경 하트라의 총독이었던 엘쿤드에서 시작된 아라바 왕조는 본래 므리[7] (총독) 칭호를 사용하였고 116년에 로마 제국군의 포위를 격퇴하며 명성을 드높였다. 당시 오현제 중 지고의 황제로 불리는 트라야누스가 친히 이끈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에서 하트라의 분전은 파르티아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덕분인지 사나트루크 1세 대에 아라바 왕조는 말리크 (국왕) 칭호를 쓰게 되었다. 이때에 현존하는 거대한 신전 지구가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2.2. 번영과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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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라의 전성기를 이끈 사나트루크 2세
사나트루크 1세의 아들 아브드 샤미야의 치세에 하트라는 재차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 제국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역시 격퇴하였다. (198년) 그리고 아브드 샤미야의 아들인 사나트루크 2세 (재위 205 ~ 241년) 때에 하트라는 자지라 (메소포타미아 북부) 대부분을 장악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당시 파르티아는 니시비스 전투 이후 쇠퇴하고 있었고 파르스에서 일어난 사산 조의 반란에 신경쓰느라 하트라의 세력 확장을 용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24년, 마침내 크테시폰을 장악하고 파르티아를 멸망시킨 사산 제국의 창건자 아르다시르 1세는 사나트루크 2세에게 복종을 명하였다. 하지만 사산 조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발한 사나트루크 2세가 거부하며 전쟁이 발발하였다. 226년, 사산 제국군이 하트라를 포위하였지만 격퇴되었다. 이후 벌어진 로마와 사산 제국간의 전쟁이 무승부로 끝나자 사나트루크 2세는 기존의 적국이던 로마 제국과 동맹하여 자치를 유지하였다. 로마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언급한 비문이 이를 증명한다.
237년, 로마-이란 전쟁이 재발하자 이듬해에 하트라 군대는 동쪽으로 150 km 떨어진 탄자로 협곡까지 나아가 사산 제국군을 패배시키며 후방을 교란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내전 중이던 로마가 도와주지 못하며 하트라 시를 제외한 메소포타미아 북부는 사산 제국에게 정복되었고 마침내 240년, 사산 제국의 태자인 샤푸르가 대군을 이끌고 눈에 가시 같았던 하트라를 포위하였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도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락되었고 철저히 파괴되어 재기하지 못하였다.[8] 이때 나디라 설화가 탄생하였다.
2.3. 역대 통치자
- 아라바 왕조
- 총독 시절
- 엘 쿤드 (서기 100년 경)
- 나슈리합 (120 ~ 125년)
- 나스르 (125 ~ 140년)
- 말리크 (국왕)
- 사나트루크 1세[9] (140 ~ 180년)
- 아브드 샤미야 (180 ~ 205년)
- 사나트루크 2세 (205 ~ 241년)
- 총독 시절
3. 발굴과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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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라 유적 일대. 토성인 외성은 자세히 봐야 보인다.[10]
1951년 이라크 문화재청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1978년 영화 엑소크라이스트 (The Exochrist) 영화 촬영지로서 인지도가 높아졌으며 1985년 이라크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87년부터는 이탈리아 발굴단이 작업을 시작하였다.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고 조각상 등 중요 유물은 모술 고고학 박물관과 이라크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형 성벽의 지름은 2.7km 에 이른다. 성벽은 토성인 외성과 석성인 내성의 2중 구조이다. 내성에는 태양신 샤마쉬 (현재 아랍어로도 태양은 샴스 이다)를 모시는 신전 및 조로아스터교 사원 유적이 있다. 그외에 아폴로, 포세이돈, 에로스, 헤르메스, 포르투나 등의 그리스-로마 신들과 하트라의 수호신인 티케의 석상이 출토되었다. 크리스트교가 막 전파될 때인 3세기에 파괴되었으므로 기독교 관련 유적은 거의 없다.
4. 설화에서
하트라의 마지막 왕인 사나트루크 2세의 공주인 알 나디라와 관련된 설화가 유명하다. 241년, 사산 제국의 황태자 샤푸르 1세가 하트라를 포위하고 있을 때에 나디라 공주는 샤푸르를 보곤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녀는 도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부적을 샤푸르에게 주었고 혼란에 빠진 도시는 쉽게 함락되었다고 한다. (혹은 그녀가 부왕과 보초병들을 독살하였다고 한다) 이후 나디라의 소원대로 샤푸르는 그녀와 결혼하였다.
어느날 밤, 페르시아의 궁전에서 잠을 자던 나디라는 샤푸르에게 침대가 불편하다며 하소연하였다. 그 침대는 곱게 짜인 비단으로 만들어졌는데도 말이다. 확인해 본 결과 미르틀 (허브의 일종) 잎이 그녀의 배에 꽂혀 있던 것이다. 잎이 뚫고 들어갈만큼 보드라운 피부에 놀란 샤푸르는 나디라에게 부친이 무엇을 먹였는지 물어보았고, 이에 그녀는 '크림과 골수, 처녀 벌에게서 얻은 꿀, 그리고 선별된 포도주'를 먹었다고 답했다.
그 얘기를 들은 샤푸르는 '너의 아버지가! 나는 너를 네 아버지보다 더 최근에 알았는데, 내가 너에게 (너가 언급한) 그런 음식을 준 네 아버지 보다 더 소중하다니!'[11] 라고 소리치며 분노하였다. 그리고 야생마의 꼬리에 그녀의 머리를 묶은 후 말을 채찍질 하여 그녀는 끌려다니다가 죽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로물루스 시절 로마를 배신한 여자인 타르페이아나 낙랑공주 이야기와 비슷한 전개를 지닌다. 또 안데르센의 동화 '공주님과 (완두)콩'에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12]
5.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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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헬레니즘 양식으로 장식된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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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건물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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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라를 방문한 미군
6.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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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을 파괴하는 다에시 요원 하지만 2014년 여름 ISIS(다에시)가 이라크 북부를 장악하며 하트라 역시 그들 수중에 놓였다. 2015년에 그들은 하트라의 조각상과 장식들을 파괴하는 영상을 공개하였다. 다만 신전이나 성벽 등 건물 자체는 무사한 것으로 전해지며, 대부분의 귀중한 유물은 바그다드 박물관에 옮겨진 상태라 한다. 마침내 2017년 4월 26일 이라크 정부군이 하트라를 탈환하였다. 이후 다에시가 동문 쪽에 설치해 놓은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되었고 곧 발굴이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1]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6] 본거지인 이란 북부 제외[7] 아랍어로 총독인 아므르와 어원이 같은 것으로 생각됨[8] 다만 신전 일대는 파괴를 면하였고 이후 버려지며 역설적으로 파르티아 도시 중 가장 잘 보존된 경우가 되었다[9] 친형제인 볼로가지와 공동 통치[10] 안쪽 사각형은 신전 및 궁전 일대다[11] 요약 : 안지 얼마 안되는 나 때문에 지극 정성으로 키워준 아버지를 배신하다니![12] 살결이 부드러운 공주가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