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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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창했을 시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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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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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의 분포.
安養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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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창건과 번창
2.2. 수난과 폐사
2.3. 폐사 이후
3. 특징
4. (신) 안양사
5. 그 외
6. 관련 문서


1. 개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안양예술공원 안양박물관 일원에 위치한 터. 고려시대의 유적이다. 인근에 멀쩡한 안양사가 하나 더 있는데, 이곳은 후술한다.

2. 역사


이 절의 역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2.1. 창건과 번창


서기 900년경 고려를 건국한 왕건금주(지금의 영등포·금천·광명·박달동·석수동)[2]과주(지금의 서초·과천·안양 안양동 및 동안구 전역·군포)를 징벌하려고 삼성산으로 가던 중 산꼭대기 구름이 오색으로 찬란한 모습을 보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라고 했다. 이때 구름 밑에서 자신을 능정(能正)이라 칭하는 노승이 내려와 지금의 자리에 사찰을 세우고 안양(安養)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우리 태조가 건국한 초기에 ..... 탑묘를 많이 설치했는데 지금 금주 안양사탑 같은 것도 그 중에 하나이다.”

“오색 구름이 피어오르고 ..... 구름 아래에 늙은 승려를 발견했는데 이름을 능정이라 하였다. 같이 이야기 해보니 그 뜻이 맞았으며 이 절을 세우게 된 까닭이다.“

『도은집(陶隱集)』[3]

절을 다 지은 후에는 공동 책임자였던 능정에게 도승통의 칭호를 내렸고, 대각국사 의천이 이곳으로 와 능정의 진영을 참배하고 조사당에서 경전을 읽고 가기도 했다. 또한 김부식이 탑명을 짓고 가기도 했으며, 무신정권때는 주변의 절들의 승려와 같이 거병, 최충헌을 척살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우왕 7년(1381)에는 최영이 직접 안양사 7층 전탑을 중수했고, 우왕 9년(1383)에는 이 전탑의 사방과 절의 회랑에 그림을 그려넣었다. 고려 말기만 해도 집권층이 직접 나설 정도면 상당히 중요한 절이었던 모양이다.

최영 장군의 안양사 7층 전탑 중수와 낙성식

"왕이 내시 박원계를 보내어 향을 내리고 사리 열두개와 부처 치아 한개를 탑 가운데 모셨다. 이때 승려 천 명이 불사를 올리고 보시한 시종이 삼천이었다."

『도은집』 권4 (우왕 7년, 1381)

"우왕 8년 안양사 7층 전탑의 단청에 이어 이듬해 탑 안 사방 벽에 약사회와 석가열반회, 미타극락회와 금강신중경을 그렸다. 또한 회랑 열두칸에는 십이행년불을 그려넣었다."

『도은집』 권4 (우왕 9년, 1383)


2.2. 수난과 폐사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대접이 극도로 나빠졌다.''' 세종이 폐사 직전 상태인 이 절을 중수하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극구 반대했으며, 이는 문종 때에도 반복되었다. 결국 중수되지 못한 채로 점점 허물어지다가 얼마 안 가 폐사. 16세기 즈음에는 터만 남았다. 그 후엔 기와만이 땅 위에 흩어져 있어 이곳에 절이 있었단 것만 알려주고 있었다고 한다.

불당의 일을 논하다.

"삼성산 아래 안양사 터에 큰 절을 다시 창건한다는데, 이것이 모두 전하께서 알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불법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세종실록』 121권 (세종 30년, 1448)

조정에서 사찰의 폐단을 논하고 정인지가 불사를 금지하는 내용을 건의하다.

"안양사, 용문사(龍門寺) 두 절은 ..... 비록 옛 터에 따라 수창(修創)하였다 치더라도 새로 창건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만약 금지하지 않는다면 사사(寺社)를 창건하는 것을 금지한 법이 한갓 형식이 될 것입니다."

『문종실록』 4권 (문종 즉위년, 1450)

금천 안양면 염불암(念佛庵) 아래에는 깨어진 안양사비(安養寺碑)가 있는데 이것은 고려초의 것이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덕무(1741~1793)

금폐(今廢, 현재는 사라짐)

『범우고(梵宇攷)』[4]

(정조 23년, 1799)


2.3. 폐사 이후


이후 폐허가 된 이곳에 1959년에 유유제약의 공장이 들어섰고, 이 공장이 충청북도 제천시로 이전한 뒤 2006년에 이곳을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하고자 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당시 근처에 중초사의 당간지주와 탑이 있는 것에 주목하여 발굴조사를 실시, 건물 터가 발견되었고, 강당 터에서 '안양사'라 적힌 기와가 발견되어 고려시대의 절 안양사의 터인 것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2013년에 조성 계획이 전면적으로 수정되고, 안양사지를 보존하면서 건물들을 리모델링 한 뒤 2014년에 개관, 출토된 유물은 뒤편의 안양사지관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가 2017년에 안양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터가 보존되어서 다행이지만 이 공장 건물들 때문에 '''유구가 훼손되어 상당 부분은 발굴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공장 건물들도 헐 수는 없는 것이, 이 공장 건물들은 현재 박물관 건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장 건물들 또한 한국 건축계의 초기 거장 김중업의 작품이다. 모든 건물들이 헐리지 않고 일부가 남아 김중업박물관(현재는 안양박물관으로 통합되었다)으로 다시 태어난 것에서 보듯이 한국사 전체로 볼 때는 안양사 절터 못지않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건물이며, 한국 현대 건축의 마일스톤 중 하나다.

3.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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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금당·강당·전탑·절을 감싸는 회랑·승방, 그 외 부속건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구성은 1탑 1금당 1강당식이다. 위 사진과 같이 중문에 회랑이 연결되었고, 중문 뒤에 전탑, 그 뒤에 금당, 그 뒤에 강당, 맨 뒤에 승방이 있는 구조다. 회랑은 금당 자리에서 끊기고, 둘 사이에 양옆에 하나씩 부속채가 있었다고 파악되었다.
건물 중에서는 전탑과 강당을 눈여겨볼 만하다. 일단 전탑부터 알아보자면, 전탑이란 이름답게 벽돌로 쌓은 탑으로 층수는 7층이다. 벽돌만 쌓고 끝냈냐면 그것도 아니다. 일단 지붕에 기와를 올리고, 풍경을 달았다. 또한 상륜부에는 도기로 만든 연꽃 모양 장식을 달아 화려하게 꾸몄다. 모형을 보면 끝부분에 녹색 돌을 얹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강당. 상당히 터가 큰데, '''경주 황룡사의 금당의 크기와 맞먹는다고 한다.'''

4. (신) 안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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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예술공원의 중간 즈음 가면 표지판이 있다. 그 표지판을 따라가면 이름이 같은 절이 있는데, 설립 유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태고종 소속 사찰로, 대인(大仁)이란 비구니 스님이 6.25 전쟁 이후에 대웅전·명부전·미륵상·삼성각·심검당 등을 건립하였다. 절 뒤편에는 1976년에 세운 20 m짜리 미륵불 입상이 있다. 근처 안양예술공원의 전망대에서 안양사는 안 보여도 이 불상은 보일 정도.
대웅전 앞에는 비석이 없는 고려시대 귀부와 부도가 있다. 아마도 기존의 절이 모종의 이유로 제 기능을 못 하게 되자 이쪽으로 옮긴 듯하다.
여담으로, 절 안에 약수터가 있긴 한데 그곳에선 물이 안 나오고, 대신 절 아래쪽에 있는 안양사 종무소 근처에 감로수 터가 있다. 삼성산 등산로와 절이 이어지지만 어째서인지 등산객들의 발걸음은 상당히 뜸한 편. 그 때문에 부처님오신날 빼고는 항상 적막하다.

5. 그 외


일각에서는 절 이름이 안양이라는 것 때문에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사찰이 맞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정말로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절이 맞다.''' 정확하게는 전후가 반대라서, 안양에 있어서 안양사가 아니라 안양사가 있는 곳이라 안양(安養)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유구의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지만 시민들이 무의식적으로 밟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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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 돌에 종을 새긴 마애종이 있는데, 바로 이 절의 종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6. 관련 문서



[1] 자세한 것은 그 외 문단을 참조하면 알 수 있다.[2] 참고로 지금의 시흥시 일대는 당시 소성현(현 인천광역시)과 장구군(현 안산시) 소속.[3] 고려 후기의 유학자 도은 이숭인이 쓴 산문집. 조선 태종의 왕명 아래 권근이 책으로 엮어냈다.[4] 고금의 문집과 읍지 등을 고증하여 각도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소재·연혁 등을 기록한 책이다.